357화 보물선 펀드
삼청동 국무총리 공관.
강태준은 이원석과 함께 응접실로 향했다.
꽤나 넓은 응접실은 별다른 장식 없이 소박한 분위기를 풍겼다.
“어, 왔나? 이 의원도 왔구먼.”
“아니, 각하. 청와대로 부르시지 않고…….”
“아직 정식 대통령이 아니라 눈치가 보인단 말이지. 게다가 거기는 영 불편해서 말이야.”
최한규가 눈짓하자, 비서가 따뜻한 커피를 내왔다.
“강 회장인가? 언젠가 한 번 개인적으로 보고 싶긴 했다네. 뭐, 리비아 일은 꽤 유감이었지만 말이야.”
“기억하고 계셨습니까?”
“내 자네 덕에 꽤나 망신살이 뻗쳤지 그래.”
“그 부분은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어, 오해하지 말게나. 그렇다고 그 부분에 유감이 있는 건 아니니까. 이번 유조선 사태는 명백히 궤가 다르니 말일세.”
최한규의 말에는 뼈가 있었다.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켠 최한규가 손목시계를 슬쩍 보더니 다리를 꼬았다.
“공무에 바빠 시간은 내줄 수 없네. 딱 15분만 할애하지. 그래, 그 유훈이란 게 뭔가?”
“말씀드리기 전에 잠시 주변을 물려 주셨으면 합니다.”
“나도 말인가?”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원석이 당황한 듯, 고개를 돌리자 강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한규의 눈짓에 비서가 슬쩍 목례를 하고 물러났다. 강태준이 넥타이를 고쳐 매는 척하며 머뭇거리자, 최한규가 다시 말했다.
“도청장치 같은 건 없다네. 안심해도 좋아.”
그 말에 강태준은 품에서 작은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봉투 안에는 사진이 몇 장 찍혀 있었다. 그의 눈에 주름이 졌다.
“이건 뭐지. 미사일인가?”
“어뢰입니다. 다만, 일반적인 어뢰는 아니지요.”
“일반 어뢰가 아니라면 뭔데?”
“핵무기입니다. 각하.”
잠시 큰 방에 정적이 스쳤다. 온화했던 최한규의 얼굴 근육이 눈에 띄게 경직되었다.
“핵이라니, 자네 지금 농담하는 겐가?”
“전 대통령께서 직접 부탁하신 일입니다. 사안의 비중이 워낙 커서 부득이하게 제가 운송을 맡았습니다. 극비 작전 중 불미스러운 사태가 발생하는 바람에, 운송에 차질이 생겼지만 말입니다.”
“말도 안 되는, 그게 상식적으로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각하. 제가 여기까지 와서 그런 헛소리를 할 인간으로 보이십니까? 조만간 외교공관을 통해 물밑에서 접촉이 올 겁니다.”
최한규는 턱을 괸 채 잠시 고민에 빠졌다. 박 대통령은 예전부터 화폐개혁이나 증권 개입 등 독단적으로 추진한 일이 적지 않았다. 정권 말기 자주국방에 매우 집착했던 만큼, 핵 개발은 공공연한 비밀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극비리에 이런 작전을 추진한다고 해도 하등 이상할 것 없는 일 아닌가.
“그래서 그 물건은 지금 어디 있는가?”
“일단 저희가 안전한 곳에 보관하고 있습니다.”
“안전한 곳? 그게 무슨 뜻인가?”
“어뢰를 넘기는 대신, 저희 백경에 대한 압박을 중단하고 여신 규제를 풀어주십시오.”
잠시 후, 상황을 파악한 최한규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이가 없군. 지금 핵을 가지고 교섭을 하자는 건가?”
“기업가에게 회사는 자식과 같은 존재입니다. 더욱이 친자가 없는 저에겐 제 분신이나 마찬가지지요. 각하께서는 자식이 위험에 처하면 어떻게 행동하시겠습니까? 수단과 방법을 가리시겠습니까?”
강태준을 노려보던 최한규의 눈에 한기가 스쳤다.
“지금 자네가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지 아는가? 이건 엄연히 매국 행위일세!”
“기업가에게는 돈을 버는 게 애국이지요. 지금까지 바친 세금만 해도 밥값은 충분히 한 듯싶습니다. 나라가 절 버린다면, 저도 스스로 살 방도를 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괘씸한…… 그런 말을 하고도 여기서 살아나갈 듯싶은가?”
당장이라도 죽이고 싶은 듯 고민하는 시선이었지만, 강태준은 덤덤하게 답했다.
“각하. 부디 신중하게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한국의 있는 섬만 해도 3,400개가 넘고 저희 백경그룹은 전 세계에 지부를 두고 있습니다. 제가 잘못된다면, 백경이란 회사는 더 이상 한국 기업이 아니게 될 겁니다.”
대놓고 막 나가는 발언에 최한규의 주름이 깊어졌다. 당장에라도 경호원들을 호출해 체포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는 가까스로 이성의 끈을 붙잡았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나오는 데는 분명 믿는 구석이 있단 생각이 든 것이다
잠시 후, 격정을 가라앉힌 최 대행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그래. 한번 들어나 보지. 구체적으로 뭘 원하나?”
“많은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단지, 회사를 정리할 시간을 주십시오.”
“정리할 시간이라…… 애매한 소리군.”
“회사를 매각해 돈을 마련하려고 해도 시간이 필요하니, 그만큼의 시간을 주셨으면 한다는 겁니다. 저희 백경이 유동성 위기를 겪고 있긴 하지만 총부채 비중으로 치면 양호한 수준이라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배상금을 탕감해 달라는 소리라면 곤란해도 그 정도라면 아예 못 들어줄 정도는 아니다.
‘그 정도면 총선에 미칠 영향도 미미하다.’
최한규는 머리를 굴렸다. 백경그룹의 자산 대비 부채 비율은 고작 280% 정도. 다른 대기업 평균인 부채율 500%에 비하면 그다지 높지 않다. 잠시 머뭇거리던 최한규가 답했다.
“시간이 얼마나 필요한가?”
“적어도 1년은 필요합니다.”
“그건 너무 길지 않나? 6개월로 하지. 내 인내심을 시험하지 말게.”
최한규의 통보에 강태준이 묵묵히 마주 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잠시 후 강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핵은 그 뒤에 넘기도록 하지요.”
“할 말 다 했으면 썩 꺼지게. 그 얼굴을 계속 보고 싶진 않으니.”
강태준을 쫓아낸 최 대행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설마 전 대통령이 비명횡사한 것도 그 문제와 관련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자 머리가 복잡해졌다.
‘이 일은 계엄사령관에게 일임을…… 아니다. 그자는 강 회장과 악연이었지.’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 이유는 없다는 생각이었지만 술 한잔 없이는 견딜 수가 없었다.
독한 위스키를 한 모금 털어 넣은 최한규는 결심을 굳히고 전화기를 들었다.
“지금 당장 국방장관을 내 방으로 데려오게.”
* * *
비슷한 시각, 국군보안사령부.
강철완과 마주 앉은 이억수는 승리의 축배를 들고 있었다.
“하하. 세상에. 8,000억이라니. 강태준 그놈 똥줄이 타겠군요.”
“제깟놈이 아무리 날고 기어 봤자, 이 상황에 어쩌겠나. 이제 도살당할 일만 남았지 그래.”
“암요. 각하, 이번 일은 전적으로 제 공이 크다는 걸 잊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물론이지. 내가 어찌 자네의 공을 잊겠나? 그 건방진 자식을 그렇게 쉽게 보내 버리다니. 십 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 기분이네, 하하.”
유조선이 오는 타이밍에 예인줄을 풀어놓는다는 발상은 이억수가 생각해 냈다. 위험천만한 방법이긴 했지만, 이참에 강태준은 물론 김필중의 자금줄까지 일거에 끊어 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강철완 입장에선 그야말로 일석이조.
그러나 강철완의 오른팔인 노우태는 여전히 표정이 풀어지지 않았다.
“또, 또. 왜 자넨 그리 뚱한 표정인가? 일이 잘 풀리지 않았나?”
“상대를 경시해서는 안 됩니다. 강태준이 용의주도한 놈이라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걱정도 팔자군. 여론이 이렇게 돌아선 마당에 제깟놈이 뭘 어떻게 하겠나. 이 회장, 실탄은 충분히 마련해 놓았지?”
“예. 물론입니다요. 아주 빵빵하게 준비했습니다.”
“그래. 이번 총선만 잘 마무리된다면 자넨 일등 공신이 되는 걸세. 앞으로 발해가 국내 1등이 되는 것도 꿈이 아니야.”
귀가 솔깃해진 이억수가 슬그머니 욕심을 내비쳤다.
“각하께서 밀어주시기만 한다면 설마 오성 따위가 대수겠습니까?”
“하하. 간만에 기분 좋은 소리를 다 하는구먼. 먼저 백경을 해체하면 전리품을 어떻게 할지 생각해 보자고. 아 참, 동생이 하나 있다고 했지?”
“예. 사령관님.”
“이번 공천 건은 기대해도 좋네. 하하.”
“정말입니까? 감사합니다. 사령관님!”
“감사는 무슨 우리 사이에. 하하!”
껄껄 웃는 강철완과 잔을 나누며, 이억수는 꿈에 부풀었다. 강철완이 한직으로 좌천되었을 때는 썩은 동아줄을 잡았다는 생각에 눈앞이 깜깜했지만, 세상에 이런 기회가 올 줄이야.
거기다 이번 총선에서 강철완 파벌이 대거 정계에 진출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던 만큼, 그만큼 강철완의 입지도 눈에 띄게 커질 것이 분명했던 것이다.
‘약속대로 원양어업과 반도체 부문만 얻어도 지금까지 잃은 손해는 전부 복구하고도 남는다.’
이억수는 애초에 최 대행에 대해서는 별로 높게 평가하고 있지 않았다. 권모술수에 약한 샌님 따위가 정치군인에 휘둘리지 않으면 그게 이상한 일 아닌가. 만약 강철완이 예정대로 정권을 잡는 날엔 재계 서열이 얼마나 오를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장밋빛 기대는 얼마 가지 않아 와장창 깨졌다.
갑작스럽게 청와대에서 비보가 전해진 것이다.
“뭐라고? 백경그룹의 해체를 미루겠다고?”
“옙. 국무회의 결정이라고 합니다. 그 큰 그룹을 무작정 해체하는 것은 규정에도 맞지 않고, 경제를 위축시킬 여지가 높다고. 각부 장관들 역시 굳이 무리할 필요 없다는 데 중지를 모았다고 합니다.”
“아니, 그게 말이 되는 소리야? 내 직접 최 대행을 만나야겠군.”
다급해진 강철완이 곧바로 총리 공관으로 쳐들어갔다. 갑작스런 계엄사령관의 방문에 최한규가 비꼬듯이 중얼거렸다.
“아니, 자넨 발에 모터라도 달렸나. 빨리도 오는군.”
“각하!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까. 백경그룹을 살려 주시겠다니요.”
“살려 주는 게 아니라, 시간을 두고 지켜보겠다는 걸세. 이미 국무 회의로 결정된 사안이니, 더 왈가왈부하지 말도록.”
“각하! 이건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당장 그룹을 해체해 본을 보여야…….”
그러자 이제껏 가만히 있던 최한규가 벌컥 성을 냈다.
“쓸데없는 데 신경 쓰지 말고 제 본분에나 충실하게. 보안사령관이나 되는 인간이 정보력 하고는. 대체 어떻게 처신했으면 일개 민간인보다 윗선의 신뢰를 못 얻었다는 말인가?”
“아니, 그게 무슨 황망한 말씀이십니다?”
“군인이면 군인답게 본인의 직분에만 충실하라는 말이야. 쓸데없이 정치에 넘실대지 말고.”
“각하!”
“할 말 없으니 가 보게.”
더 이야기할 필요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최한규의 축객령에 하릴없이 물러난 강철완은 이를 빠득 갈았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건가? 어제까지만 해도 분명 해체가 가시권이라지 않았나?”
“저도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국방장관부터 호출했다고…….”
“또 한 방 먹었군. 강태준 그놈이 무슨 수작을 부린 게 틀림없다.”
“설마, 이 상황에서 뭘 어떻게 한다는 말입니까.”
“뭔가 협상 카드가 있었겠지.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알아 오게!”
하지만, 겨우 위기를 넘긴 백경그룹의 분위기도 또한 썩 밝지는 않았다.
사정을 전해 들은 복만이의 표정이 몹시 볼만한 수준이었다.
“형, 미치셨습니까? 핵을 볼모로 대통령을 협박했다고요?”
“대통령이 아니라 대통령 권한 대행이지.”
“참나, 그게 그거 아닙니다? 어차피 지들끼리 체육관에서 뽑을 건데. 이거 핵을 넘기고 나면 뒷감당이 되겠습니까?”
급한 불을 끄긴 했지만 이 정도 어그로라면 사형을 유예받은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강태준은 여전히 태평했다.
“그렇다고 단두대에 목 걸어 놓고 ‘나 죽여 주십쇼’ 할 수는 없잖나. 이러나저러나 죽기는 매한가지라면 발악이라도 해 봐야지.”
“하지만 고작 6개월뿐이라면서요. 이것저것 빼면 실제로 남은 시간은 4개월 정도인데, 그 안에 8천억이란 거액을 어떻게 마련합니까?”
오재갑의 지적은 일견 타당했다. 이미 방제 비용에만 총 80억 원이 넘게 소요되었고, 앞으로 투입될 금액도 어마어마했다. 거기다 VLCC까지 잃었으니,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해외에서도 이번 일을 대서특필하고 있는 만큼, 반향이 거셌던 것이다.
그러자 강태준이 이미 처음부터 생각해 둔 바가 있었다.
“방법은 있으니 걱정 마. 펀드 하나를 만들 거야.”
“펀드요? 무슨 펀드 말입니까.”
“보물선 펀드. 이제 슬슬 시기도 무르익었으니 캐낼 준비를 해야지.”
보물선 펀드라니, 갑자기 뜬금없는 말에 다들 멍 때리는 분위기가 되었다.
그제야 잊고 있던 무언가를 떠올린 듯 복만이가 손뼉을 쳤다.
“설마, 그거? 무안 쪽 해저 유물 말씀입니까?”
“그래. 언론에 되는 대로 정보를 뿌리게. 준비 끝나는 즉시 발굴 작업부터 들어갈 테니 말이야.”
보험차 묵혀 놓은 것이긴 하지만, 더 이상은 지체할 수는 없다. 그날 이후, 갑작스레 해저 유물과 광물 개발에 투자한다는 찌라시 하나가 증권 시장을 흔들었다. 백경그룹에서 보물선 인양에 필요한 투자자를 대거 모집한다는 소식이 들려온 것이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