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6화 폭풍전야
약 1초, 강태준의 표정에 당혹감이 스쳐 지나갔다가 원래대로 복귀했다.
곧바로 정신을 차린 강태준이 침착하게 물었다.
“좌초 지점은?”
“여수시 사도 근처로 보입니다. 정확한 위치는 아직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광양만으로 진입하기 위해 우회하던 중에 갑자기 1킬로 전방에서 어선 하나가 흘러들어왔답니다. 조류가 너무 빨라서 회피하려다 그만 사고를…….”
해상에서 1~2km는 매우 가까운 거리다. 지체 없이 작업복을 걸쳐 입은 강태준이 말했다.
“난 현장에 내려가 보지. 일단 오 사장은 유조선부터 빌릴 수 있는지 물색해 보게.”
“유조선 말씀입니까?”
“일단 사고가 났으니 싣고 있던 원유부터 회수해야 하지 않겠나? 추가 보고는 필요 없으니 준비되는 대로 바로 출동시키게.”
본사 옥상 위에서 뜬 헬기는 곧장 사고 장소로 직행했다.
사고 현장 상공에 도착한 강태준은 매캐한 기름 냄새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오, 맙소사. 이 무슨.”
코를 찌르는 역한 휘발성 냄새에 다들 코를 움켜쥐었다. 검은 띠처럼 생긴 액체들이 검게 바다를 물들이는 가운데, 원유가 주변 바다를 뒤덮고 있었던 것이다.
인상을 쓰던 복만이가 마스크를 쓴 채 중얼거렸다.
“이거 아무래도 원유 탱크에 구멍이 뚫린 것 같네요.”
“예상은 했지만, 재수 옴 붙었군.”
수 킬로 범위로 퍼져 나간 기름을 보니 암담하기까지 하다. 점도가 높은 벙커씨유는 치우기도 쉽지 않았다.
주위를 활강하던 헬기 주변에 배가 눈에 띄었다. 그때, 신호를 보내는 경비정 하나가 눈에 띄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익숙한 얼굴이 눈에 띄었다. 강태준이 서둘러 경비정으로 옮겨탔다.
“서남현 세관장님 여기는 어떻게?”
“순시 중에 우연히 발견했지요. 운이 좋았습니다.”
“그럼 선원들은?”
“다행히 전원 구출해서 무사합니다.”
강태준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잠시 후, 구조된 선장이 호출되었다. 강태준을 본 그는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송구함에 고개를 들지 못하는 선장이 흐느꼈다.
“면목 없습니다. 회장님. 다 제 잘못입니다.”
“갑자기 코앞에 배 한 척이 흘러왔다는군요. 아무래도 예인 중 와이어가 끊기는 바람에 문제가 생긴 모양입니다.”
선장을 대신한 서남현의 변명에 강태준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예인줄이 끊기다니. 대체 그게 무슨 말입니까?”
“사정을 정확히 살펴봐야겠지만 도선사랑 선장이 입을 꾹 다물고 있어서, 일단 이쪽 일이 급한 것 같아 해경을 불렀습니다. 일단 급한 일부터 끄는 게 우선일 것 같아서요.”
“감사합니다. 저지선 확보가 우선이니, 서둘러야 할 것 같네요. 채 선장님?”
“예. 회장님.”
“일단 벌어진 일은 어쩔 수 없으니, 울 시간에 손이라도 보탭시다.”
가장 우선되어야 할 부분은 기름이 더 번지기 전에 오일펜스를 설치하는 일이었다. 보고를 받은 항만국에서 부랴부랴 펜스를 설치하는 사이, 굴프사에서 빌린 유조선이 도착해 좌초선에 담긴 원유를 옮겨 담기 시작했다.
유출된 기름 제거에 동원된 배는 무려 200척.
해경은 물론, 군인과 민간방제업체까지 등 가용 인력이 총동원되었다. 사고 선박 주변 오일펜스를 길게 설치하고, 유흡착포 등 방제 기자재를 사용해 방제 총력에 나섰다. 해안가의 주민들에게도 부랴부랴 방제 작업과 관련한 사안을 숙지시켰지만 첫 반응은 충격과 공포였다.
“해상에서 원유가 사방에서 흘러들어오고 있다고?”
“세상에, 양식은 어떻게 되는 거야?”
대량의 유출 원유가 밀려오고 있다는 소식에 주민들은 크게 동요했다.
그 사이, 최욱렬 국방 차관을 총지휘관으로 하여 해군과 공군, 경찰, 그리고 지방군까지 나서 공동 방제 작전에 나섰다.
“개똥도 쓸 데가 있다더니, 유수분리선 같은 게 도움이 되네요.”
“세제랑 기름처리제는?”
“이중혁 사장님께 이야기해서 바로 가져왔습니다.”
“고마운 일이네. 아끼지 말고 최대한으로 쏟아붓도록. 맞다. 수출용 해면도 있지 않나?”
“네. 하지만 그 부분은 이미 약정된 분량이라서요. 잘못하면 위약금이…….”
“그건 나중에 생각하고, 있는 대로 다 가져와. 전부!”
구축함까지 동원하여 세제와 대량의 해면을 뿌렸다. 이미 유출된 기름을 흡수시키려는 작전이 진행되는 동안 순식간에 시간이 흘러갔다.
사고 발생 5일 차.
철야 작업을 진행하던 해양경찰서장이 지친 얼굴로 본선 위로 올라왔다.
“강 회장님, 아무래도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듯싶습니다. 목포와 부산 일대 해경과 군 함정까지 동원해서 1차 방제를 실시했습니다만…… 이대로는 역부족입니다.”
“배를 예인할 방법은 없습니까?”
“선체가 이미 암초에 단단히 박혀 있는 터라. 유조선이 이중 선체 구조라 이렇게 버틴 것이지, 언제까지 떠 있을지도 알 수 없다고 하네요.”
해난구조회사까지 불러 의견을 타진했지만, 이 상태로는 불가능하다고 했다. 회의를 진행하던 중 돌발 사태가 터졌다. 갑자기 밖에서 그그극 소리와 함께 선체가 갸우뚱 기울어지는 소리가 났던 것이다.
“어떻게 된 거야?”
강태준이 곧바로 무전을 들었다.
“작업 중단하고, 지금 당장 선체에서 떨어지도록!”
알고 보니 기름을 빼던 중 무게 중심이 흐트러지면서 선체가 기울어져 버렸던 것이다. 사태를 확인한 해경들이 다시 보고를 했다.
“어떻게 된 겁니까?”
“다행히 폭발은 면했지만 안 좋은 소식입니다. 기름을 빼내던 중, 좌현 선수 갑판에 있는 에어 벤트에서 균열이 발생했다고 합니다.”
배수기로 침수된 물을 퍼내 균형을 맞추는 동안에도 시간은 정처 없이 흘러갔다. 잔잔했던 파도가 사나워지며 바람이 빗발치고 있었다. 조만간 폭풍이 불어닥칠 것이라는 소식까지 들리자 초조해진 복만이가 육두문자를 내뱉었다.
“이젠 날씨까지 난리군요. 젠장.”
“기름은 지금까지 얼마나 빼냈나?”
“원유 17만 9,000톤 정도입니다. 지금 상황으로 봐서는…… 아무래도 추가 작업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오재갑의 보고를 들은 강태준은 고심이 깊어졌다. 작업을 진행하는 사이, 구멍이 뚫린 기름 운반선이 반쯤 가라앉아 버렸다. 선체가 지금껏 버틴 것도 용할 지경이었지만 기름 유출 속도도 시간이 갈수록 빨라지는 것은 명백했다.
지금까지 유출된 양은 최소로 쳐도 3천 톤. 배 안에는 최소 1만 톤가량의 원유가 남아 있었다. 파도가 더 심하게 치면 작업은 멈출 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강태준이 명을 내렸다.
“어쩔 수 없어. 유조선을 폭파시키고 불로 태우게.”
“네?”
“못 들었나? 이대로 원유가 밖으로 흘러가게 둘 수는 없어. 그냥 날려 버리는 수밖에.”
제안을 보고받은 국방 장관이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원유를 태우다니, 정녕 그 방법밖에 없는가?”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흘러나온 기름이 해안에 도달하면 지역 생태계는 수년 내 복구가 어려울 정도로 훼손될 겁니다.”
이미 해안으로 유출된 기름 때문에 고기잡이를 포기한 어선이 속출하는 상황이었다. 이미 피해를 본 양식장, 어장만 최소 6천 헥타르, 170km에 달하는 해안선이 추가로 오염될 것이라는 말에 장관 역시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군.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겠나?”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폭파 작전은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합계 약 2만kg의 폭탄을 터트리는 것도 모자라 바다 위의 기름을 태우기 위해 5,400kg의 등유가 뿌려지는 작업이 이어졌다.
쿠쿵!!!
사방이 불바다가 되고, 시커먼 연기가 엄청난 높이로 치솟았다.
불탄 유조선이 가라앉은 것으로 기름 문제는 겨우 해결되었지만, 후유증은 엄청났다. 유출된 기름이 조류를 타고 확산되면서 피해가 속출한 것이다.
어장이 황폐해지면서 해당 지역의 생업은 물론, 지역 경제에까지 악영향을 미쳤다.
그와 동시에 국회 청문회에 불려간 강태준은 여론의 집중포화를 맞았다. 가장 문제가 된 것은 유조선을 폭파를 주도한 책임 여부였다.
“증인께 묻겠습니다. 이번 유조선 사고로 삼천포 연안과 광양만 일대에 원유 유출로 인해 인근 양식장의 어패류가 대량으로 폐사해 바지락 서식 출고 루트도 끊겼다고 합니다. 게다가 이번에 유조선을 태워서 발생한 발암물질이 온 해역을 오염시켰는데, 정녕 그 방법밖에 없었습니까?”
“예, 유감스럽지만 추가적인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었습니다. 가능한 한 신속하게 복구 작업을 진행할 것이며 책임질 부분은 책임지도록…….”
“아니, 이게 돈으로 해결될 일입니까. 당장 생계를 걱정하게 될 어민들은 어쩌라는 겁니까. 당장 사과하세요!”
[백경그룹 강태준 회장, 유조선 폭파는 불가피한 선택]
[강태준, 유조선 사태와 관련한 책임자 처벌은 없다고 전해]
기름이 유출된 현장에 파견을 나간 기자들은 자극적인 장면을 내보내며 설레발을 떨었다. 검게 변한 타르 덩어리들이 해변을 검게 메운 가운데, 기름에 둥둥 떠오른 물고기 떼와 기름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가마우지가 카메라에 잡혔다.
“여기는 사고 오염 현장입니다. 기름띠가 해변을 오염시켜서 장난이 아닌데요. 냄새가 몹시 지독합니다.”
“갯벌이 썩어서 나는 냄새지요. 아마 속은 썩어 문드러졌을 겁니다.”
“그렇군요. 현지 주민을 만나 인터뷰를 해 보겠습니다. 지역 주민이라고 하셨죠. 지금 사태가 어떻습니까?”
그러자 모자를 쓴 어민이 시무룩하게 한숨을 토했다.
“해변이 다 기름투성이지요. 괴기 잡기는 글렀는데 양식장까지 죄다 파탄이 났으니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합니다요.”
“백경에서 보상이 있지 않습니까?”
“쥐꼬리만 한 돈으로 뭘 어쩌겠습니까. 방제 작업용 인건비 외에 어패류와 시설물 피해 보상과 관련해서는 아직 한 푼도 지급되지 않고 있습니다요. 오늘도 방제 작업을 하다 실려간 어민들이 한둘이 아닙니다요.”
앞뒤 잘라먹은 언론의 보도가 계속되자 백경그룹은 사면초가에 몰렸다.
강태준은 후안무치의 절정이자 국민 쌍놈으로 등극했다.
“백경은 각성하라! 각성하라!!”
“매국노를 처단하라!”
사방에서 몰아치는 시위에 강태준은 밖으로 출입할 수도 없을 정도였다. 주가가 폭락하고 본사 업무가 마비될 정도가 되었어도 경찰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너무들 하네요. 아무리 총선이 얼마 안 남았어도 그렇지. 이건 너무 노골적이지 않습니까. 어떻게 태도를 손바닥 뒤집듯이 바꿀 수 있습니까?”
“아무래도 경제가 안 좋으니, 욕받이가 필요하겠지. 그리고 어쩔 수 없지 않나. 이미 벌어진 일인데.”
“허 참. 그래도 기분 더럽네요.”
“일단 자금부터 마련할 방법을 찾게.”
외부의 적을 만들어 내부를 결속시키는 것은 정치의 상투적인 수법 아니겠는가. 일단 대참사가 발생한 것은 사실인 만큼 감내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했지만,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정부에서 벌금 5,000억에 배상금 3,000억이라는 천문학적인 금액을 때린 것이다.
상상을 초월하는 금액에 강태준도 표정이 구겨졌다.
“8,000억? 8,000억이라고?”
“큰일입니다. 형님. 정부가 벌금을 당장 갚지 않으면 그룹에 대한 자금을 회수하고 여신 지원을 철회하겠다고 했습니다.”
“우리를 아주 말려 죽이려고 작정을 했군요.”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얼마 후, 청와대 쪽에서 그룹의 전면 해체를 주도하려고 한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그 주장의 선두에 선 사람은 계엄사령관 강철완이었다.
“각하, 이번 유조선 사태를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백경그룹을 해체해 일벌백계의 법도를 세워야 합니다!”
“아니, 유조선 사고를 누가 예측했겠나. 경영상 미스도 아니고. 지금껏 멀쩡히 경영해온 기업을 없애라니, 거기에 백경이 경제에 미치는 파장이 적지 않아.”
“그거야. 계열사들을 모두 청산하고 다른 업체에 합병시켜 버리면 되지 않습니까? 각하,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국민의 뜻을 무시하지 마십시오. 그래야 선거에 이길 수 있습니다.”
강철완은 순조로운 정권 장악을 위해서라도 시범 케이스가 필요하다 역설했다. 청와대에서 채권단을 보낼 준비를 하고 있다는 찌라시까지 돌자, 백경그룹의 주가는 다시 한번 폭락했다.
‘강철완 이놈, 정말 끝까지 가 보자는 거군.’
아무리 앙심이 크다 해도 이렇게 막 나갈 줄이야. 자칫 잘못하다가는 그룹 전체가 넘어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강태준은 새벽까지 잠을 설쳤다. 실제 강철완은 멀쩡한 기업을 제 마음에 안 든다며 마구잡이로 해체한 인간 아닌가.
살아남으려면, 손에 쥔 카드는 모두 이용할 수밖에.
결심을 굳힌 강태준은 다음날 곧장 이원석을 찾았다. 국회에 입성한 이원석은 벌써 5선을 바라보는 만큼 정치권에 잔뼈가 굵은 사람이었다. 그는 집권당의 중진답게 국회 기획재정 위원회 위원장직을 맡고 있었다.
“이 위원장님께서 어떻게든 손을 써 주십시오. 각하와 독대를 하고 싶습니다.”
“자네를? 지금 이 상황에 최 대행이 만나 줄 것 같지는 않은데?”
“박 대통령의 유훈이라고 전해 주십시오. 반드시 전할 것이 있다고 말입니다.”
“유훈이라니, 무얼 말인가?”
“그건 지금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다만 국익을 위해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물끄러미 강태준을 주시하던 이원석이 금세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네. 최대한 빨리 자리를 마련해 보도록 하지.”
이원석이 너무 쉽게 수긍하자 도리어 얼떨떨해진 강태준이 되물었다.
“더 묻지 않으십니까?”
“자네는 빈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지 않은가. 게다가 세상엔 차라리 모르는 게 나은 것도 있는 법이지.”
“정말 감사합니다. 이 빚은 나중에 꼭 갚겠습니다.”
이원석이 발로 뛰며 수소문한 결과, 겨우 청와대와 연이 닿을 수 있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