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양재벌 강태준-355화 (355/361)

355화 월성 재단 출범식

현실감 없는 말에 강태준의 사고가 정지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핵무기 말씀입니까?”

“예. 어느 정도로 정제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구체적인 조사를 해 봐야겠지만 정제 플루토늄이나 고농축우라늄(HEU)이 들어 있을 확률이 매우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말도 안 됩니다. 애초에 건설 공사 하나 제대로 못 하는 리비아에서 핵을 만들 기술력이 있을 리가…….”

그 말을 하려던 순간, 강태준은 망치로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중동에서 핵 기술을 가진 국가라면 단 한 군데밖에 없지 않은가.

강태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설마 중동전쟁 때 유출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겁니까?”

“회장님도 대충 눈치채셨군요.”

“리비아에서 의도적으로 핵 시설을 털었다는 말씀인 건…….”

“글쎄요. 사정이야 모르지만 아마도 소 뒷걸음질 치는 식으로 우연히 발견한 게 아닐까 싶군요. 처음엔 자기들이 뭘 털었는지도 몰랐을 테지요.”

“그렇다면 미국도 유출 사실을 파악하고 있지 않겠습니까?”

“이스라엘이 미치지 않고서야, 핵물질이 외부로 유출되었다는 사실을 말해 줄 리는 없지 않겠습니까. 아마도 저 혼자 해결하려고 끙끙 앓고 있을 확률이 높지요.”

시나이반도를 우회해 합동으로 진공 작전을 펼치는 도중, 고농축우라늄(HEU)이 보관된 원자력 연구센터를 발견했을 여지도 없지 않았다는 말이었다.

“이스라엘로서도 미처 대응할 시간이 없었을지 모르겠군요.”

“제 예상대로 연구센터를 털었다면 적어도 핵무기 20~30개를 만들 수 있는 분량의 HEU를 확보했을 겁니다. 하지만 모사드와 눈을 피해서 핵무기를 연구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겠지요. 이스라엘의 전적으로 봐서는 어차피 잃어버린 거, 발견 즉시 폭격을 날려 버릴 확률도 낮지 않으니까요.”

“가정은 무의미하고. 어찌 되었든 이게 핵이라는 게 정말 확실합니까?”

“확실한 건 아니니 일단 시간을 좀 주시죠. 일단 살펴봐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조사 결과 어뢰의 정체는 유감스럽게도 강동기의 예측을 벗어나지 않았다. 심지어 이 어뢰는 진보된 방식이었다. 리틀 보이 같은 간바렐형이 아니라 폭축 렌즈를 이용해 폭발력을 증대시킨 인 프로 존 방식임이 밝혀진 것이다.

‘핵 어뢰. 핵 어뢰라고?’

최악의 가정이 들어맞자 강태준은 헛웃음이 나왔다. 내부에 든 물질은 고도로 정제된 우라늄 235로, 원래는 무인 잠수정에 실을 생각이었던 것 같다는 말에 강태준은 어이가 없었다.

이거 한 대로 항구 하나 정도는 충분히 날리고도 남을 만한 위력이라고 할까.

설마하니 박통이 이런 빅똥을 던지고 뒈져 버리다니.

강태준은 눈앞이 깜깜했다.

‘빌어먹을. 세상에, 이걸 짬처리를 하라는 거야?’

카다피와 박통 간 분명 모종의 뒷거래가 있을 것이 분명하지만 그 뒤처리를 자기가 해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는 것이다.

원전에 테러가 일어났고 관계자들까지 줄줄이 사탕처럼 엮여 나간 것을 보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이 사실이 밖으로 새어 나가기라도 한다면 책임을 뒤집어쓸 것은 자기였다.

결국 고심하던 강태준의 선택은 일단 어뢰를 안전한 장소로 옮겨 놓는 것이었다.

“어뢰를 옮기라고요?”

“어차피 계속 이렇게 방치할 수는 없지 않나. 정부에서 사정을 파악하고 오더가 떨어지기 전까지는 무조건 안전하게 보관해야지. 그동안 어디 한적한 곳에 숨겨 두는 게 좋겠어.”

핵이라는 것을 알고도 보세창고 같은 데 둘 만큼 담이 큰 인간은 없다.

구멍섬과 그 일대를 돌며 눈여겨본 무인도들이 몇 있으니, 일단 그쪽 일대에 숨겨 둘 작정이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증권가에 묘한 짜라시가 돌기 시작했다. 최한규의 과도정부 측에서 중화학공업 투자 조정 및 산업합리화 정책의 미명하에 산업정책심의회를 설치하려 한다는 소리였다.

해운업을 필두로 조선, 섬유, 제지, 종합상사 등 광범위한 업종에 걸쳐 대대적인 조사가 있을 것이라는 소리에 재계 전체가 촉각을 곤두세웠다.

“산업합리화? 하필 이 시점에 말인가?”

“계엄사령관 건의로 발의된 의제랍니다. 조만간 청와대 오찬에 경제인들을 모두 호출할 예정이라는군요.”

“그 자식들이 아무 이유 없이 부를 이유는 없는데?”

과당 경쟁을 방지하고 문어발 확장에 제동을 걸겠다는 취지는 일견 설득력이 있었지만, 문제는 시기였다. 이 공교로운 시기에 산업합리화 정책을 단행하겠다는 것은 절대 부드럽게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얼마 후, 대통령 권한 대행 주최로 청와대에서 오찬 행사가 마련되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초대장을 받은 경제인들이 속속 참석한 가운데, 만찬식장에는 중앙정보부 차장과 검찰총장, 치안본부장 등 기라성 같은 실세들이 다수 포진해 있었다. 중년의 나이에 훈장을 주렁주렁 매단 장군들을 보며 복만이가 속삭였다.

“별들의 고향도 아니고. 무슨 직급들이, 별 세 개 이하가 거의 없네요.”

“그만큼 사람들이 많다는 거겠지. 그보다 다들 파트너랑 같이 왔군.”

다들 제 짝을 데리고 온 것을 보니 설유하와 함께 왔어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쟁쟁한 사람들이 참석한 가운데, 도발적으로 윙크를 보내는 여인네를 보며 광필이가 넥타이를 고쳐 매었다.

“형님, 저는 이만 좀 실례하겠습니다.”

와인잔을 든 채 자리를 비우는 녀석을 보며 강태준이 혀를 찼다.

“야, 저거 뒈지려고. 진짜 혼빙간으로 들어가 봐야 정신 차리나.”

“거, 꽃뱀한테 물릴 상은 아니니 걱정 말게. 김 사장이 은근 촉이 좋더군. 총각 때라도 원 없이 놀아 봐야지.”

등장한 사람은 다름 아닌 천경물산 이원준이었다.

“이 사장님, 강녕하셨습니까?”

“강녕은 무슨. 죽지 못해 살았지 그래.”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가공용 펠릿이 잘못 도착하는 바람에 며칠간 밤을 새웠지 뭔가. 일정 맞추느라 죽는 줄 알았어.”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이원준이 와인잔을 받았다. 휠체어를 탄 이병구와 함께 이재희가 나타났다. 뼈만 남아 앙상해진 이병구는 무슨 일에서인지 눈에 띄게 수척해져 있었다.

“허이구야, 명줄도 얼마 안 남아 뵈는 양반이, 무리하는군.”

“이 회장까지 올 줄은 몰랐군요. 요즘 암 때문에 방사선 치료를 받고 있는 걸로 아는데.”

“안 올 수 있나. 부실기업 정리를 빌미로 군기를 잡겠다는데. 그보다 자네 소식 들었나?”

“무슨 소식 말씀입니까?”

그러자 잠시 눈치를 보던 이원준이 귀엣말을 속삭였다.

“어젯밤에 제주도에서 대규모 소요 사태가 있었다고 하네. 군중이 천여 명에 이르고, 파출소 4개, 차량 3대가 불타기까지 했다는군.”

“그게 정말입니까?”

“그래. 대통령 권한 대행이 계엄 확대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더군.”

강태준은 묵묵히 잔을 들이켰다. 사실 강태준도 모르는 일은 아니었지만 천경물산에까지 이렇게 빨리 정보가 퍼질 정도면 현 정권의 통제력이 별로 좋지 않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원준이 좀 더 말을 이어 가려는 순간,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각하께서 들어오십니다. 모두 자리에 좌정하여 주십시오.”

사람들은 서둘러 미리 정해진 순서대로 자리에 앉았다. 경제인으로서는 그룹 서열에 맞게 자리가 배분되었는데 미래그룹 회장과 이병구 회장, 이원석 경제부총리 등이 동렬이었다.

‘음?’

자리 배정을 지켜보던 강태준은 의아해했다. 10대 재벌에 속하지 않는 이억수가 부인을 대동하고 맨 앞자리에 버젓이 좌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순간, 사방이 조용해졌다. 최한규 권한 대행이 모습을 드러낸 것. 특기할 것은 옆자리에는 정환승이 아니라 계엄사령관 강철완이 버젓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마이크를 잡은 강철완이 단상에 올라 주위를 돌아보았다.

“오늘 자리를 빛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통령께서 서거하신 지 두 달 차, 국정이 혼란에 빠진 가운데 황망하게도 과분한 소임을 맡아서 그간 숨 가쁘게 달려왔습니다.”

전임 대통령의 영결식 사진과 함께 생전 사진들이 영사기를 통해 전시되자, 분위기는 침통해졌다. 영상이 막바지에 이를 무렵, 곳곳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흑흑…… 각하!”

“각하!”

악어의 눈물인지 아니면 진심인지 알 길이 없지만,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애절한 분위기에 매몰된 연회장에서 강철완이 고조된 목소리로 연설을 시작했다.

“각하를 포함해 이번에 안타깝게 잃은 분들은 한 나라와 국가를 책임질 기둥들이었습니다. 이외에도 국가를 위해 스러져간 사람들이 한두 분이 아니지요. 월남전에서도 수많은 장병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국가를 위해 초개처럼 목숨을 바친 분들을 위해 잠시 묵념합시다.”

강철완이 묵념하듯 고개를 숙이자 다른 자들도 따라했다. 잠시 후 고개를 든 강철완이 결언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고인을 애도하는 것을 넘어, 그 뜻이 바래지 않도록 하고자. 폭탄 테러 순직자 유가족을 위무를 위해 장학 재단을 설립하려 이 자리에 여러분을 모셨습니다.”

그 순간, 거짓말처럼 아까까지 들리던 울음소리가 뚝 그쳤다.

“재단이라니. 그게 뭔 소리야?”

“그게 무슨 소리인가?”

“누구 아는 사람 있나?”

경호원들이 주의를 주었지만 수군거림은 계속되었다. 처음 듣는 소리에 기업가들 역시 몹시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강철완은 말을 이었다.

“이번 재단 설립에는 월남전에 참전한 전사자 유가족을 위한 후원의 취지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자, 이억수 회장님, 앞으로 나와 주십시오.”

참석자들이 수군거리는 사이, 강철완은 이억수를 단상 위로 나오게 했다. 강철완은 발해원양 이억수 회장을 앞에 세워 두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여기 이 회장께서는 회사도 어려운데 자비로 성금을 무려 100억 원이나 쾌척하셨습니다. 참 대단한 결단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국민의 일원으로서 소정이나마 국익에 보탬이 되었다면 영광입니다.”

사방에서 호응을 유도하는 박수가 흘러나오자, 눈치를 보던 기업가들도 마지못해 박수를 쳤다.

강태준은 그냥 박수치는 시늉만 할 뿐 슬쩍 손을 내렸다.

싸늘한 반응에 눈썹을 꿈틀거리던 강철완이 슬쩍 종용하듯 마이크를 건넸다.

“이 회장님, 혹시 추가로 하시고 싶은 말씀은 있지 않으십니까?”

“예. 제가 작은 손을 보태기는 했지만, 이런 큰 재단을 지속적으로 운영하려면 턱없이 부족할 것입니다. 재계 여러분들께서도 다들 모금에 참여하여 주신다면 실로 감사하겠습니다.”

그 말에 함께 참석한 재벌총수들은 소태 씹은 얼굴로 변했다. 미운 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괘씸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상황이 상황인 만큼 경솔하게 입을 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잠시 후, 최한규 권한 대행이 뚜벅뚜벅 걸어 나오더니 좌우를 둘러보며 온화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절대 강요는 아니니, 마음 편하게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각자 부담이 가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자발적으로 참여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럼 만찬을 즐겨 주시기 바랍니다.”

재단 설립의 동기는 월성 원전 폭발 사고에 의한 순국자의 유가족 및 부상자들을 돕자는 취지라 했지만, 그 말을 믿는 사람은 개중 아무도 없었다. 광필이가 투덜거렸다.

“허, 이제는 하다 하다 시체팔이까지 하네. 어떤 개자식이 바람을 불어넣은 건지.”

“그러게요. 이거 실망이네요. 최 총리는 나름 깨끗한 사람인 줄 알았더니.”

재단 출범식이라는 이름으로 상납금을 뜯는다는 발상이라, 신박한 수가 아닐 수 없다.

상법상 비영리 공익재단을 설립하면 세금 감면 혜택이 있으니 합법적으로 비자금을 조성하기 유리한 것이다. 노골적인 행보에 강태준도 헛웃음이 나왔다.

‘정치를 하려면 자금이 필요하니, 합법적으로 삥을 뜯을 기회라는 건가?’

성금 납부 일지를 고지받은 백경그룹에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골치가 아팠다. 일단 기준이 되는 발해원양이 100억을 부담하기로 한 마당에, 재계 서열로는 순위가 더 높은 강태준이 얼마를 적어야 할지 가늠할 수 없었던 것이다.

“대체 얼마를 원하는 건데?”

“소문으로는 천진그룹 김 회장이 150억의 어음으로 퉁치려고 했는데, 재단 이사장이 면박을 주었다고 합니다.”

“150억을 거절했다고? 이 미친 인간들을 봤나?”

발해원양에서 지불한 금액이 실제 100억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중요한 건 강철완의 의중이었다. 이번 일로 최한규의 신뢰를 얻은 그는 이미 정환승을 제치고 신정권의 실세로 급부상해 있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정권에서는 액수가 적더라도 현찰을 원하는 거 같습니다. 달러로 말입니다.”

“현찰은 절대로 안 돼. 액수가 조금 커도 무조건 어음으로 퉁치는 걸로 협상하게.”

중동이 불온한 지금, 피 같은 달러를 지불하는 것은 미친 짓이다.

그렇다고 이런 말도 안 되는 지출이라니.

강태준은 끓어오르는 짜증을 가라앉히고 냉철하게 상황을 정리하려 애썼다.

‘일단 추가 지출은 어쩔 수 없지만, 중동에서 VLCC만 들어오면 자금적으로 일단 큰 불은 끌 수 있다.’

우려스러운 점은 월남 전 문제로 강태준이 강철완과는 악연이라는 것이다. 비록 아직 대놓고 압박을 가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 사태를 해결하려면 해외에 순방 중인 김필중 총재부터 소환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판단이었다.

사실 이 시국에서 박정명의 후계자를 자칭할 만한 사람은 그가 유일한 만큼 김필중이 돌아오면 권력 구도가 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최 총리도 아주 바보는 아니었다. 이미 정권 차원에서 경쟁자를 쳐 내기 위해 김필중에게 입국 금지 조치를 내려 버린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대로 강철완을 견제하려면 어떻게든 김필중 총재부터 링 위로 복귀시켜야 한다.

강태준이 조용히 머리를 굴리는 그때, 사무실로 들어온 춘삼이의 얼굴이 창백히 질렸다.

“회장님, 원유를 싣고 오던 저희 유조선이…… 지금 해상 충돌로 좌초했다고 합니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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