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양재벌 강태준-352화 (352/361)

352화 거꾸로 세계지도

테스크 홀딩스에서 은밀하게 파견된 남자는 건설업체 이사로, 로비스트답게 올백으로 넘긴 머리가 인상적인 양복쟁이었다. 앙투안이라는 이름의 남자가 본사로 찾아온 건 늦은 밤, 강태준으로서는 검은 눈의 이방인을 그리 호의적으로 대하지는 않았다.

“이거, 물밑 거래는 법적으로 금지된 것으로 아는데요.”

“하하. 그거야 끼워 맞추기 나름 아니겠습니까? 수의계약은 몰라도, 저희 역시 이런 형식의 경쟁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말이지요.”

“뭔가 의미심장한 말이군요. 그래서 그쪽이 제시하는 딜은 무엇입니까?”

“여기 있습니다.”

앙투안이 자신 있게 서류를 내밀었다. 프랑스 업체 측에서 제시한 조건을 살핀 강태준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 안건의 취지를 보자면 그쪽이 원청으로 사업권을 딴 다음 하도급을 주겠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어차피 우리도 실적을 따기 위한 목적이라서 수익성은 비용 처리만 할 정도면 됩니다. 저희로서는 백경 쪽과 별로 싸우고 싶지 않거든요.”

지분 30프로를 줄 테니 공사는 네가 알아서 추진하라는 이야기에, 강태준은 내심 혹했다.

하지만 상대가 내민 계약서를 살펴보던 강태준의 눈에 몇 가지 문구가 계속 거슬렸다.

“이 조항은 뭔가요? 하청사 공기가 지연될 경우 원청사가 공사를 수행하고 하청 금액에서 공제할 수 있다라?”

“아이구. 그건 어디에나 있는 조항이죠. 그냥 일반적인 공정 조항입니다. 하하.”

“아, 그렇습니까. 그럼 검토 후 말씀드리지요.”

부자연스러운 낌새를 눈치챈 강태준은 확답을 미루고 답을 보류했다. 단서 조항이 적힌 두툼한 서류 뭉치를 가져간 강태준은 설 씨 남매와 함께 머리를 맞대고 상세히 조항의 당위성을 살펴보았다.

“이거,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건 독소조항이에요. 공종에 대해 하청 금액만큼 공제하는 게 아니고, 추후에 실비를 청구한답시고 태클을 걸 게 분명해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나중에 공정 지연을 이유로 대리공사를 하면, 우리로서는 답도 없는 일 아닌가? 프랑스어로 된 계약서를 따로 제시할지도 모르고 말이야.”

“아니, 그건 너무 치졸한데요. 설마 그렇게까지 하겠습니까?”

춘삼이는 긴가민가했지만 설인모는 고개를 저었다.

“그쪽은 기질 자체가 그래. 자국에서는 노동법을 철저히 지켜도 외국에선 국제 규약조차 무시하거든. 지네들끼리만 적용되는 룰이라고 할까? 원래 속은 놈이 바보라고 생각하는 놈들이니 상대하기 까다롭지.”

그러자 옆에 있던 광필이가 물었다.

“그럼 어떡합니까?”

“뭐, 단순하게 생각하면 되지. 역제안을 걸어 보면 되지 않겠나? 우리가 원청사로 참여하는 걸로.”

“그쪽이 순순히 받아들이겠습니까?”

“협력을 요구한다면 그 정도야 감수해야 하지 않겠나?”

하지만 한국 기업이 원청이 되겠다는 주장에, 프랑스 업체에서는 펄쩍 뛰며 난감하다는 식으로 나왔다.

“아니, 그건 좀 말이 안 되지 않소? 그쪽이 우리보다 기술이 더 뛰어난 것도 아닌데 그쪽 지휘를 받으란 건가?”

“그럼 각자 파트를 나눠서 책임소재를 확실히 하던가. 설계야 다른 곳에서 전문가를 불러오면 되지 않습니까.”

두 회사가 양보 없이 서로 신경전을 벌이자, 리비아 측에서도 계속 상황을 지켜보기만 할 뿐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입찰 연기만 3번째, 양측은 점점 지쳐 가고 있었다.

“이러다 해를 넘기겠군그래.”

“징하네요. 리비아 놈들도. 적당히 결론을 내릴 때가 되지 않았나? 다들 느긋하기 짝이 없구만.”

현장 일을 박형관에게 맡기고 있자니, 강태준으로서는 답답해서 좀이 쑤셨다. 지금이라도 담판을 지으려 직접 가야 하나 갈등하던 찰나 백경 본사에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도착했다.

“회장님, 대통령 각하께서 뵙자고 하십니다.”

“아니, 무슨 일로?”

갑작스러운 호출에 청와대로 불려간 강태준은 박 대통령을 찾았다.

응접실 앞에 선 대통령은 거대한 세계지도를 앞에 두고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지도가 거꾸로 걸려 있었다.

“아. 왔나?”

늘상 군복만 입고 있던 박정명 대통령은 보기 드물게 양복 차림을 하고 있었다.

응접실 앞에 선 대통령은 거대한 세계지도를 앞에 두고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지도가 거꾸로 걸려 있었다.

술병을 든 대통령이 잔을 권했다.

“자네도 한잔하겠나?”

“예.”

강태준은 그가 손수 따라 준 술을 받아 마셨다.

씁쓸하고 강렬한 향취에 코끝이 찡했다.

그걸 본 박정명은 거꾸로 된 지도를 보며 잔을 들었다.

“이렇게 지도를 보고 있으면 참 묘하다는 생각이 들어. 육로로 보면 사방이 막혀 있지만, 이렇게 보면 탁 트인 느낌 아닌가.”

“맞는 말씀입니다.”

“강 회장, 요즘 수주전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지?”

“어렵기보다는 통과의례라고 생각합니다.”

“그래, 그래. 그렇게 생각해 주니 고맙군. 내가 자네라면 나라가 나서서 도와주기는커녕 태클만 걸고 있으니 서운하다는 감정이 들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야.”

“설마요. 그런 생각은 해 본 적 없습니다.”

“허허. 또 말을 아끼는군. 하긴, 우리 강 회장은 길이 없으면 만들어 내는 사람이었지 그래.”

“과찬이십니다.”

“아니, 진심이라네. 우리 강 회장에겐 예지 능력 같은 게 있다는 말이지. 그래서 문득 의문이 들더군. 예전에 있던 설탕 밀수 사건도 자네가 설계한 건 아닌가 하고 말이야.”

“하하.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강태준은 태연한 척 웃어넘겼지만, 박정명은 기묘한 미소를 띨 뿐 한동안 말이 없었다. 한참 물끄러미 강태준을 보던 박정명이 이내 피식 웃더니 술잔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다 지난 이야기를 꺼내고 싶진 않네. 애초에 지나간 일이니. 사실 강 회장 같은 사람은 아쉬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거든. 이 가난한 나라에 태어나기보다 선진국에서 태어났다면 더 대단한 일을 했을 수도 있을 텐데 말이야.”

“하하. 그런 그림은 그려지지 않는군요.”

강태준으로서는 진심이었다. 미국인으로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같은 가정은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떠나 애초에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허허. 내가 감성적으로 말했군 그래. 바쁜 사람이니, 본론으로 들어가지. 실례가 아니라면 국가를 위해서 자네에게 한 가지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서 말이야.”

“부탁이라니, 무슨 말씀을. 하명하십시오.”

“사실 한 가지 물건을 운반해 줬으면 하네.”

“그게 뭡니까?”

“구체적으로는 알 거 없고. 뭐 일종의 어뢰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좋겠군.”

강태준의 눈에 의아함이 어렸다.

“어뢰 말씀입니까?”

“그래. 안보 강화를 위해 꼭 필요한 기술이 있어서 말이야. 알다시피 북한에서 로미오급 잠수함까지 몇 척이나 들여왔다고 하니, 한국도 맞대응할 전력을 갖춰야 하지 않겠나?”

한국이 디젤 잠수함은 꿈도 못 꾸던 시절, 이미 평양에서는 대형 잠수함을 건조해 바다 밑을 종횡무진으로 누비고 다녔다. 이런 잠수함들이 외양까지 진출해 미국이나 여타 해외에서 오는 수송 선단이나 유조선을 타격하면, 최악의 경우 한반도에 보급이 끊기는 수가 있었다.

“로미오급 잠수함 한 척에 28발의 기뢰를 실을 수 있다고 한다네. 고작 한 척도 아니고 십수 척이나 되는데 이런 위험한 것들이 수백 개나 해저 밑에 깔린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 아닌가? 해상 안보에 적신호야.”

“그래서 전력 강화차 들여온다는 말씀입니까?”

“그렇네. 다만 이 건은 은밀해야 하네. 최악의 경우에는 자네 선에서 커트칠 수 있게 말이야. 어때. 할 수 있겠나?”

비대칭 전력을 강화하겠다는 목적이라 했지만 그렇게 단순하게 받아들일 문제는 아니었다.

애초에 어뢰와 관련된 추진체 기술은 미사일 계획과도 직결되는 부분인 만큼 미국에서 그냥 용납할 리 없었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정치권과 엮이는 일은 강태준으로서도 별로 내키는 일이 아니었다.

잠시 침묵하던 강태준이 물었다.

“제게 선택지란 게 있습니까?”

“물론 있지. 여기서 아무것도 보고 듣지 않은 것으로 한다면 말이야.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중동 건은 없던 일이 되겠지.”

“그렇군요…… 만약 반대의 경우엔 어떻게 됩니까?”

박정명이 아무 말 없이 위스키를 원샷으로 들이켰다.

독한 술을 한 번에 비운 박정명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덤덤하게 중얼거렸다.

“그 애국심에 대한 보답을 받을 수 있겠지. 월남에서 그랬던 것처럼.”

* * *

그로부터 1년 후,

트리폴리 동쪽 100km 떨어진 벵가지.

사막 한가운데, 3만 5천 평의 대지 위에선 가니우스 의과대학 신축 건물 준공식이 열리고 있었다.

준공식에는 부족장들은 물론 대수로 공사청 직원, 건설자들과 학생 및 교원들도 참가한 가운데, 테이프를 커팅하는 광경을 본 사람들이 엄지를 위로 치켜들었다.

“세리카 백경! 세리카!”

“뭐라는 거야?”

“그게, 저도 잘…… 백경 최고라는 뜻 아닐까요?”

“이제 와서? 허. 그렇게 달달 볶으면서 괴롭히더니 말이야.”

박정명과의 대담이 있고 일주일 후, 리비아는 대뜸 가니우스 대학의 국제 입찰을 무효로 한다며 입찰 중단을 선언했다.

입찰 참가자들은 영문을 몰라 의아해했지만, 곧 얼마 지나지 않아 사정이 밝혀졌다. 공개경쟁 입찰에서 수의계약 입찰로 전환해, 한국 해외 건설공사에 사업권을 넘기기로 한 것이다.

“고생은 했지만 그래도 다들 만족해서 다행입니다.”

“그러게. 감리업체가 설마 설계를 초창기부터 잘못했을 줄 누가 알았겠나.”

“우리한테 고마워해야지요. 형이 문제점을 안 잡았으면 어쩔 뻔했습니까?”

프랑스를 달래기 위해 기본 설계는 프랑스 감리회사가 엔지니어링을 맡았는데, 처음 평면 계획을 짤 때 메카 방향에 화장실이 배치되면 안 되는 걸 깜빡해 버린 것이다.

그렇게 설계 변경을 해야 할 건물은 21개 동 가운데 반수 이상.

시공 전 수차례에 걸쳐 검수를 거쳤음에도 간과한 부분이었지만 중동 경험이 풍부한 강태준은 매의 눈으로 그 문제점을 바로 잡아냈다. 그 뒤는 그야말로 죽음과 같은 속도전이었다. 뒤늦게 부랴부랴 설계를 바꾸면서 PC 공법으로 건물의 외부 마감재를 가져오고, 파넬식 터널 폼을 도입해 공기를 겨우 맞출 수 있었던 것이다.

“일단 1차 공사는 일정을 맞췄으니 한시름 놓았군요. 그보다 이번에 설치할 담수 플랜트 증발기는 어쩌실 참입니까?”

“아무래도 아랍 애들 꼴로 봐선 현지 조달은 어렵지 않겠나? 그냥 한국에서 다 만든 뒤에 통째로 현장에 실어 올 생각이야.”

“또 한국에서 말입니까? 덩치가 좀 크지 않을지?”

“일단 파트별로 나눠서 제작하고 현지에서 재조립하는 거지. 기온이 50도가 넘는 사막에서 조립하는 건 비효율적이니까 말이야. 배로 통째로 싣고 오면 되겠지.”

강태준은 PC 공법으로 재미를 봤으니, 증발기 제작도 그 방식을 택할 생각이었다.

“하긴. 사실 무게도 수천 톤에 달하는 증발기를 먼지가 풀풀 날리는 사막에서 처음부터 제작하는 건 미친 짓이긴 하죠.”

“아마 원 모듈 공법으로 지으면 공기가 6개월 이상 단축시킬 수 있을 거니 걱정 말게.”

강태준의 생각으로는 적어도 1천만 달러 이상은 세이브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하지만 복만이의 불만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

“참,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입금은 왜 이렇게 느린지. 얼른 1차 기성금부터 지급해 줬으면 좋겠네요. 돈도 많은 놈들이 왜 이렇게 정산이 느린지 원.”

“아무래도 석유 수입으로 확보한 외화를 무기를 사는 데 써서 그렇겠지.”

“그게 마음에 안 든다는 겁니다요. 다들 전쟁광들도 아니고. 대체 그게 뭔 쓸모가 있다고. 허.”

“어쩌겠나. 원래 무기라는 건 억지력을 위해서도 필요한 거니 말이야.”

우선순위를 사업 쪽에 두지 않은 건 유감이지만. 그렇게 중얼거리며 강태준은 옆쪽을 힐끔 곁눈질했다. 300미터쯤 뒤편에 땡볕에서도 더워 보이는 검은 양복을 입은 경호원들이 무표정한 얼굴로 번을 서고 있었다.

아마도 중정에서 파견된 요원들일 터.

이상하게도 박정명으로부터 언질을 받고 난 이후에 무려 1년이 넘도록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내심 아무 말도 나오지 않는 것이 의아한 참이었다.

그때, 갑자기 드르릉 소리와 함께 군용 차량 수십 대가 나타났다.

차 앞에 내리는 순간 검은 선글라스를 입은 누군가가 차 밖으로 내리는 것이 아닌가.

기겁한 리비아인들이 일제히 경례를 붙이는 모습에 강태준이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알라가 우리 편인 모양이야.”

-다음 화에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