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9화 한국의 맛
한 끼 뚝딱 끝낸 사람들이 다시 입맛을 다셨다.
“아, 배불러. 진짜 맛있네. 근데 아까 그게 무슨 뜻입니까?”
“정확하게는 알 거 없고, 풍미 버전 2.0이라는 것만 알면 돼. 쉽게 말하면 발효 엑기스로 만든 복합 조미료라는 거지.”
“아. 맛의 세계란 오묘하네요. 감칠맛에도 단계가 있다니.”
“간단하게는 다시마 조각에 멸치랑 표고버섯 말린 걸 넣으면 되지. 그 정도만 해도 누구나 맛있는 국을 끓일 수 있어. 다들 귀찮아서 안 할 뿐이지.”
“삼시 세끼 맛있는 걸 먹고 싶은 게 사람 본능이지만, 매 끼니를 그렇게 준비하는 건 쉽지 않으니까요.”
그 귀차니즘 덕에 돈을 버는 게 식품 사업 아닌가. 오재갑이 중얼거렸다.
“맛은 참 좋네요. 하지만 사업이란 게 상품의 품질만 좋다고 팔리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이런 식의 종합 조미료가 나오면 기존 시장이 무너질까 좀 걱정입니다.”
“그건 저도 동감입니다. 솔직히 네추럴 붐이 언제까지 갈지도 모르잖아요.”
“그러니까 당연히 이원 체제로 가야지. 보급형 대 고급형으로 말이야.”
“엣? 그러다 잘못하면 수익성이 악화될 겁니다.”
“반대로 네추럴 붐이 아시아권까지 불면? 정 맞기 전에 변명할 거리 정도는 미리 마련해 둬야지.”
기존 MSG와 달리 세 종류의 아미노산을 조합하는 만큼, 공정이 복잡해지는 것은 필연이었다.
마케팅부터 설비 투자비까지. 제대로 팔리지 않을 경우엔 역풍이 만만찮겠지만, 업계를 선도하려면 그 정도 위험 부담 없이 시작할 수는 없었다.
사실 강태준도 그 때문에 후속 제품을 일찌감치 개발해 놓고도 한동안 출시를 보류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정이 변했으니 이제는 더 늦출 수 없다는 판단이 선 것이다.
“하긴. 한 제품으로 십 년 넘게 우려먹었으니 이참에 바뀔 때도 된 듯합니다.”
“그래. 이왕이면 선수를 치는 게 낫지. 한번 제대로 팔아 보자고.”
강태준은 당대의 하이틴 스타들을 섭외해 대대적인 광고를 띄웠다.
-풍미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나트륨을 줄이고 건강하게.
-천연 발효 조미료로 맛을 풍요롭게. 식사 시간이 더 즐거워집니다.
기존의 풍미라는 제품명을 발효풍미로 바꾸고, 패키지 디자인도 확 바꿔서 사탕수수 커버를 씌웠다. 리뉴얼을 기념해 종로에서는 발효풍미를 넣어 만든 물량을 10원에 판매했다.
한국에서의 판매는 출시 즉시부터 초도 물량이 매진되는 등 꽤나 잘 되었다. 애초에 풍미의 점유율이 절반을 넘을 만큼 높았던 데다 충성도도 높아 자연스럽게 좋은 반응을 얻었던 것이다.
요식업 비중이 높은 한국 음식점들 사이에서 경쟁이 심해진 것도 이유였다. 아무래도 기존 제품보다 맛이 뛰어나다 보니, 가격이 다소 비싸더라도 과감하게 채택하는 경우도 많았던 것이다.
하지만 야심 차게 도전한 미국 시장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이상하구먼. 분명히 효과가 있는 것 같은데, 왜 안 팔리는 거지?”
“아무래도 아지노모토랑 비교해서 인지도가 많이 딸리는 게 문제입니다.”
실제 구매로 이어지지 않은 데는 식품에 대한 사람들의 보수성이 한몫했다. 거기다 미국의 경우, 1960년도에 제기된 ‘중화요리 증후군’을 계기로 일찌감치 MSG의 안전성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이미 몇 차례 홍역을 치르며 FDA 및 이미 JECFA(유엔합동식품첨가물전문가위원회) 등에 의해 안전한 식품으로 공인을 받은 터라 추가적인 반향이 크지 않았던 것이다.
노기철이 보고서를 올렸다.
“통계 결과를 보니 실제 MSG 사용량이 줄어든 건 사실이나 기존의 다른 조미료를 대체할 정도의 임팩트를 발휘하진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도 한번 사 갔던 사람들 가운데선 재구매율이 높더라고요. 일단 한 번 먹어 보기라도 하면 좋을 텐데 말이지요.”
안타깝지만 천연 대 합성의 대결 구도는 이미 물 건너갔으니 다른 방식을 취해야 했다.
강태준은 다른 전략을 내놨다.
“일단 인지도를 높이는 게 우선이니, 관심을 끌도록 유도하는 게 좋을 것 같군.”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이참에 일반 고객들을 대상으로 시식회를 열어서 한식을 대접하는 건 어떻겠나? 아무래도 그냥 조미료만 홍보하는 건 별로 차별성을 두기 어려울 거 같아.”
실제 음식에서 어떻게 구현되는지 보여 주면서 자연스럽게 조미료를 소개한다는 전략이다. 그러자 안연복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한식을 소개한다라……. 뭔가 생소할 것 같은데요? 솔직히 미국인들 입장에서는 존재감이 희미해서 한국이 어디 붙어 있는지도 모르지 않겠습니까?”
“그건 미국놈들이 기본적으로 무식해서 그런 거 아닌가?”
광필이의 대꾸에 듣고 있던 오재갑이 핀잔을 주었다.
“참나, 그러면 형님은 아프간이 어디 붙어 있는지 압니까?”
“그건…… 중동 어딘가에 있지 않나? 이집트 근처.”
“땡! 그럴 리가요. 한참 동쪽에 있습니다.”
오재갑의 대꾸에 짜증이 난 광필이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니, 그걸 내가 인간적으로 어떻게 알아. 인마.”
“인지도로 치면 우리나 그쪽이나 비슷하지요.”
“야, 그거 묘하게 기분 나쁜데. 내가 알라의 요술봉이나 가지고 노는 놈들이랑 비슷하다고?”
“아니, 뭘 그렇게 고깝게 들으십니까? 비유가 그렇다는 거지.”
“쓸데없는 소리 그만해라. 재갑이 말이 맞으니. 현실적으로 미국에서 한국은 그야말로 미지의 세계이긴 하겠지.”
강태준은 팔짱을 낀 채 고민에 빠졌다. 요리에 대해서는 어디 내놓아도 자신 있었지만, 한식에 대한 인지도가 걸림돌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강태준이 생각해 낸 것은 영화 [짜빈동]의 히트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이만신 감독의 차기작이 곧 개봉일이라는 사실이다.
흥남 철수를 다룬 ‘크리스마스의 기적’으로 할리우드 데뷔를 약속한 사실을 떠올린 것이다.
“맞다. 이번에 영화 시사회를 앞당기면 어떨까? 참전용사들을 초대해서 한 상 거하게 대접하는 거야.”
“아, 참전용사들 말입니까?
“마침 한미 동맹 25주년이니 시기도 딱 좋지. 한일 합작 영화이기도 하니, 대외적으로 시사성도 있고 말이야.”
실제로 베트남전 철군 이후 미국인들의 상실감은 엄청났다. 세계 최강을 자처하는 미국이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동방의 약소국을 상대로 졸전 끝에 패배해 철수까지 하게 되었으니, 개망신도 그런 개망신이 없었던 것이다.
“확실히 그렇겠네요. 정신승리가 절실한 상황이니. 자유를 위해 싸운 영웅들의 헌신을 기억하자는데 싫어할 인간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왕 할 거 전쟁 기념 다큐까지 찍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요. 아, 이참에 그때 피난선에서 태어난 김치 베이비들도 섭외하는 건 어떻습니까? 거제도에서 살고 있는 거로 아는데요. 지금쯤 성인이 되지 않았을까요?”
“역시 척이면 척이군. 좋은 생각이야. 선장이랑 항해사랑 상봉식까지 하면 모양새가 끝내주겠군. 이참에 선물 증정식도 준비하도록 하지. 기념으로 말이야.”
“알겠습니다. 이왕 빨아 주는 거, 아주 헐어 버릴 때까지 제대로 준비하겠습니다.”
“그래. 인터뷰할 때 영어 잘하는 사람은 섭외하지 마라. 진정성이 떨어지니까.”
그렇게 주미 한국대사관과 농수산물유통공사가 협조하에 미국 워싱턴 D.C. 국무부 청사에서 기념행사가 열렸다. 호국의 달 기념행사에는 한미 참전단체 대표 및 참전용사, 6․25 참전 대표, 재향군인 업무를 전담하는 보훈부(VA) 국장 등 미 정부 주요 인사만 약 150여 명이 참석했다.
영화 상영되고 난 후, 참전 용사들을 상대로 구절판, 갈비, 신선로, 불고기, 파전, 잡채, 닭강정, 비빔밥, 송편, 김치와 식혜 등 20가지가 넘는 전통 메뉴가 선보였다. 서양인의 식습관에 맞춰 전채와 후식으로 각각 생선전과 아이스크림 호떡을 배치했다.
전부 백경그룹에서 안연복의 주도하에 야심 차게 내놓은 식단이었다.
“꼬들꼬들한 게 중독성 있네요. 이게 한국의 맛입니까? 신기하군요.”
“하하. 모두 미국 현지에서 공수한 로컬 재료로 만든 음식입니다. 고기는 네브래스카주에서, 쌀은 캘리포니아에서 공수한 재료지요.”
“아주, 딜리셔스하군요. 이게 불고기라고 했던가요? 양념이 매콤새콤한 게 딱 제 취향입니다. 제 아들도 여기 왔으면 좋았을 텐데.”
“하하. 집에 가져가실 수 있도록 도시락을 싸 두었습니다. 갈비도 가져가십시오.”
“오, 정말입니까? 근데 제가 집이 좀 멀어서, 오래 두면 좀…….”
“고압력 살균 방식으로 제조한 거니, 열기 전까지는 안전해요. 얼음팩에 포장해 드렸으니 가져가서 냉장실에 보관하시다가 전자레인지에 살짝 데워서 드시기만 하면 됩니다. 가족들이랑도 드셔 보세요. 밥에 얹어서 요 김치랑 같이 먹으면 꿀맛일 겁니다.”
“그렇다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한식은 생각 이상으로 호응도가 높았다. 처음 열린 한식의 맛 알리기 행사에 추가 관람객들까지 몰려 북새통을 이루는 대성황을 이룬 것이다. 영화에 대한 반응도 꽤나 괜찮았다.
[크리스마스의 기적, 재미와 의미, 감동까지 전부 잡은 수작.]
[참전 군인회 일동, 한국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 싸운 것이 자랑스럽다. 한미 동맹의 의미를 되새기는 계기가 되길.]
한국은 물론 미 언론들에서도 시사회를 호의적으로 다루면서, 전례 없이 꽤나 괜찮은 반응을 얻었다. 영화를 위해 시사회를 여는 건 별로 특별할 것 없는 일이었지만, 베트남전의 패배 후 동맹의 의미를 되새기자는 메시지는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장성한 김치 베이비들과 선원들의 감동적인 재회 역시 꽤나 이슈가 된 것이다.
진정성 있는 공감을 이끌어낸 덕분인지, 영화를 향한 관심 역시 크게 높아졌다.
“홍보가 잘 되었는지 예매율이 늘었다는군요. 영화사 쪽에서도 덕분에 개봉관이 200개 정도 더 늘어날 듯싶습니다.”
“잘되었군요. 음식에 대한 반응이 어떻습니까?”
“대체로 호의적입니다만, 맛에 있어서는 미국인의 입맛을 고려해야 할 것 같습니다. 스테이크 정도는 아니지만 식감이 어느 정도 있도록 준비해 보겠습니다.”
시사회를 통해 얻은 소득이 또 있었다. 미국에서는 고기가 너무 얇으면 싸구려 취급을 당하는데, 야들야들한 식감을 선호하는 사람도 있지만 두꺼운 스테이크를 일상으로 취식하는 미국인들 입장에서는 사뭇 다르게 느낄 수도 있다는 사실이었다.
몰랐던 사실에 강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베이컨 같은 부위보다는 지방이 거의 없는 부위를 골라야겠군요. 그럼 타코처럼 만들어 보는 건 어떻습니까? 얇은 빵에 싸 먹거나 불고기를 라이스에 얹는 방식으로요. 아무래도 멕시칸 푸드는 한식보다 대중적이지 않습니까?”
“오. 괜찮을 것 같습니다.”
“한식과 중국 음식을 헷갈리는 사람도 많으니, 이참에 확실하게 포지셔닝을 하는 게 중요합니다.”
“포지셔닝이라…… 다른 좋은 방법은 없을까요?”
잠시 고민하는 모습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고뇌하는 안연복을 본 강태준은 뭔가 새로운 점을 깨달았다. 처음 깨닫는 거지만 이렇게 보니, 동양인치곤 얼굴도 입체적인 데다가 마스크도 훈남인 것이 꽤 괜찮다.
“안 선생, 이참에 TV 푸드쇼를 나가 보는 건 어떨까요?”
“푸드쇼요? 아니, 제가 말입니까?”
“안 선생 실력이면 어디 내놔도 손색없지요. 일식, 한식, 중식, 양식. 못하는 게 없잖습니까?”
“그게, 제가 많은 사람을 상대로는 말을 잘 못해서……. 거기다 영어는 아직 서투릅니다.”
“요리사가 요리만 잘하면 되지, 뭐가 문제입니까. 어차피 비주얼이 전부일 테니, 전 통하리라고 믿어요.”
강태준은 조금 오기가 생겼다. 이쯤 되니 신제품을 성공시키고 싶다는 생각을 넘어서 한국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한식의 맛을 주제로 워싱턴 D.C 코리아 타운에서 추가적인 시식회를 열었고, 요리 월간잡지 푸드 코디네이터(food cordinator)와 손잡고 활용한 레시피북 역시 출간하기로 했다. 마침 이쪽 전문가로 유명한 레니 비틀에게 프로그램 진행 또한 문의했다.
“요리 프로그램을 하나 시작해 보고 싶다고요?”
“네. 아무래도 한식에 대한 저변도 넓힐 겸, 홍보를 하고 싶어서 말입니다.”
“호오. 그거 좋은 아이디어인데요? 그전에 한번 먹어 봐도 되겠습니까?”
곧바로 한식을 시식해 본 레니는 감탄사를 터트렸다. 꽤나 입맛이 까다로운 그로서도 만점을 줄 만한 맛이었던 것이다.
“맛있군요. 확실히. 일식이나 중식이랑은 차별점이 있네요.”
“그럼 가능성 있는 겁니까?”
“그건……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어째서입니까?”
“확실히 요리는 손색이 없지만, 이런 건 솔직히 리액션이 중요하거든요. 시청자들이 직접 맛을 볼 수는 없으니 맛있게 느껴지게 하려면 연기를 해야 합니다. 자연스럽게 우러나면 더 좋고요.”
“흠.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무래도 극을 살릴 서포터가 필요하겠죠. 이왕이면 잘 먹어 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말입니다.”
“잘 먹어 주는 게스트요?”
문제는 네추럴 푸드 열풍이 불면서, 뚱뚱한 사람에 대한 수요가 많이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비만한 체형을 데리고 프로그램을 진행하면 한식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심어 줄 가능성도 있었기에, 선정하는 데 더욱 까다롭게 봐야만 했다.
산더미처럼 쌓인 지원서를 살펴보던 복만이가 홧김에 서류를 집어 던졌다.
“아이구, 쓸 만한 사람이 없네요. 좀 괜찮으면 몸값이 너무 비싸고, 비주얼이 되는 애들은 싫다고 고사하고.”
“그럴 수밖에요. 이런 프로그램에 나오면 먹는 게 일 아니겠습니까? 식이조절을 하는 게 쉽지 않아요.”
“어디 신인 중에 건강하고 잘 먹는 사람은 없나?”
그러자, 레니가 서류 하나를 내밀었다.
“이 사람 어떻습니까? 오스트리아 배우인데, 원래는 보디빌딩 챔피언 출신입니다. 영어 발음과 딱딱한 연기력 때문에 그리 주목받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연기 리액션이 꽤 좋은 것 같아요. 초기작인 <시카고 허큘리스>는 개판이었지만 <펌핑 머슬>은 호평이었거든요.”
“누구 말입니까?”
리스트에서 눈에 들어온 것은 다른 사람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거대한 근육에 익숙한 얼굴이었다. 강태준은 보는 순간 숨이 멎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아널드?”
아니, 형이 거기서 왜 나와?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