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4화 빙하를 가르다
쇄빙선을 본 선원들의 표정에 생기가 돌았다.
다시 무전을 통해 목소리가 들어왔다.
“환자의 상태는?”
“좋지는 않습니다. 지혈 후, 긴급 이송해야 할 것 같습니다. 롸저.”
“알겠습니다. 경비정 쪽으로 이야기를 해 두겠습니다.”
초사는 경비정에서 응급치료를 받은 다음 헬기로 후송될 예정이었다. 환자에게는 천만다행으로, 5mm에 달하는 두꺼운 잠수복 덕에 상어 이빨이 아주 깊게 들어가지는 않았다.
이송이 끝나고 이윽고 조업선으로 옮겨탄 강태준에게 선장이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다.
“저거 괜찮겠지요?”
“다행히 출혈량은 많지 않아요. 큰 혈관을 빗겨 갔으니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거고. 그런데 갑자기 잠수는 왜 한 겁니까?”
멀리서 봤기에 망정이지, 정말로 큰일 날 뻔했던 만큼 의문은 정당한 일이었다. 김 선장이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가만히 듣고 있던 강태준의 표정이 변해다.
“스크루에 로프가 끼었다고요?”
“예. 그걸 제거하지 않으면 일단 여길 빠져나갈 방법이 없습니다.”
“그거 아주, 고약하게 되었군요.”
설명을 들으니 물리적인 제거 외에는 답이 없다. 잠시 고민하던 강태준이 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하는 수 없지요. 다시 제거 작업부터 하는 수밖에 그럼 로프 제거 전에 피 냄새가 나는 고기로 상어 유인용 먹이를 만들어야겠습니다.”
“아니, 그렇다고 상어가 다시 달려들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지 않습니까?”
눈앞에서 상어가 덮치는 광경을 봐서인지, 선원들은 하나같이 겁을 먹은 표정들이었다. 그러자 강태준이 대책이 있는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거야 뭐 걱정할 게 있습니까? 샤크 케이지를 조립하면 되지 않습니까?”
전혀 생각지도 못한 아이디어에 선원들이 서로 마주 보았다.
“샤크 케이지요? 그게 뭡니까.”
“예. 간단히 말하면 일종의 철로 만든 창살이랄까요. 일종의 감옥이죠.”
“감옥이요?”
“네. 촬영 중에도 써 봤으니 상어를 막는 데는 그게 최고입니다. 예전에 유용하게 써먹은 적이 있거든요.”
”여기서 그런 걸 만들 수 있겠습니까?“
“뭐 수리용 파이프를 싣고 왔으니, 불가능한 건 아니죠. 다행히 코스트 가드들까지 있으니 재료 수급은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영화를 찍을 때 응용한 방식을 다시 한번 써 보자는 것이었다. 다행히 재료는 충분했기에 수중등과 용접사가 쇠로 된 파이프로 잠수부를 보호할 샤크 케이지를 즉석에서 용접했다.
그렇게 케이지를 만드는 동안. 방첩대원 중에서 잠수부들을 선발했다.
“잘못하면 뒤지는데, 잘할 수 있겠나?”
“걱정 마십시오. 엄호만 잘해 주시면 됩니다.”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살 거니 걱정 마십시오. 솔직히 네발 달린 짐승도 아니고, 고작해야 샥스핀 상대로 겁먹으면 쪽팔리지 않습니까?”
“그러게요. 일 끝나고 나면 샥스핀 수프나 원 없이 먹게 해 주십쇼. 그거 진짜 맛있던데요?”
“그건 장담하지. 안 선생한테 말해서 한솥씩 제대로 끓여 주지 그래.”
“그거 약속한 겁니다.”
방첩대원들은 서로 농을 하며 시시덕거렸다. 상어가 우글거리는 바다에서 수중 작업을 한다는 건 보통 담력으로 불가능했지만 다들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겨서인지 담력 하나는 차고도 넘쳤다. 선발에 포함되지 않은 인원들은 혹시나 상어가 나타나기라도 하면 당장에 총으로 쏴 버릴 각오로 견시를 서기로 했다.
“여차하면 그냥 쏴 버려. 인정사정 보지 말고, 그리고 전기 충격기도 준비하게.”
“에. 설마 그건 좀 오버 아닙니까?”
“상어한테 물려서 다리 한 짝 뜯기는 것보단 약간 따끔한 게 낫지 않나.”
최악의 경우, 전기를 흘려보낼 생각으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잠수를 시작했다. 그렇게 수십 분이 지나자, 얼음 위로 머리를 내민 잠수부가 브리지를 향해 외쳤다.
“작업 끝났습니다!”
“수고했습니다. 빨리 올라오십시오. 기관실 시동 걸 준비 하세요.”
아무 일도 없었다는 사실에 강태준은 안도했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온 잠수부들은 어느 한 곳 상한 데 없었다. 다행히도, 저번의 포식으로 배가 불렀는지 상어 떼는 어디서도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시 체스트를 에어로 청소하고, 약 10분 정도 지나자 기관실에서 연락이 왔다.
“스탠바이! 준비되었습니다.”
“잘 따라오시기 바랍니다.”
강태준이 무전을 친 다음, 선미를 유심히 살폈다.
선미가 꿈틀거리는 소리와 함께 육중한 쇄빙선이 용트림을 하고 있었다.
“아아, 상태 이상 없나?”
“예. 이상 없습니다. 롸저.”
“오케이, 지금부터 더치 하버까지 직행한다.”
우직 소리와 함께 배가 얼음을 가르고 앞을 나아간다. 뒤편에서 마치 기차놀이를 하듯 후미에서 따라왔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배가 양옆으로 흔들렸다.
얼음이 깨지면서 진동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장애물이 하도 많다 보니 전진 속도가 느렸다. 하늘을 보던 오재갑이 신음했다.
“바람 방향이 바뀌고 있습니다.”
“좋지 않은 일이군. 조만간 태풍이 밀려올 것 같은데?”
벌써 바람이 바뀌어 얼음이 운행 방향으로 떠밀려 오는 것이 보인다.
폭풍전야처럼 고요했던 하늘 위로 먹빛의 구름이 천천히 소용돌이치더니 눈이 내리는 것이 아닌가. 갑자기 바뀐 날씨에 심란해지려는 찰나, 무전이 들렸다.
“치칙, 여기는 코스트 가드. 전면에 거대한 빙암이 있습니다.”
“크기가 어느 정도 됩니까?”
“그게, 최소 2킬로는 넘습니다.”
코스트 가드의 경고에 강태준의 눈이 가늘어졌다. 선미에서 하얀 물살과 함께 빙편이 흩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잠시 후, 쇄빙선 앞으로 거대한 빙판이 모습을 드러냈다.
“젠장…… 정말이네.”
“엄청, 두께가 두껍군요.”
선원들도 자신이 없는지 질린 표정을 지었다. 지금까지 얼음이 보기는 했어도 이건 차원이 다르다. 빵으로 치면 부스러기가 아니라 한 덩이가 뚝 떼인 것 같은 형상이었다.
북극의 한 조각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모습에 선원들이 신음했다.
“여기서 직진으로 뚫기는 힘들 것 같은데…….”
“조금 돌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선원들 사이에는 의견이 분분했다. 아무리 쇄빙선이라 해도 얼음 두께가 3미터가 넘는 빙판을 부수고 지나가기엔 엄두가 나지 않은 것이다. 그때, 하늘에서 우르릉 하는 소리가 났다.
뒤를 돌아보니 소용돌이 근처에서 바람이 불고 있다. 앞에는 얼음 때문에 지나가지 못하는데, 뒤에선 태풍이 오고 있었던 것이다. 강태준이 결단을 내렸다.
“여기서는 방법이 없어. 우회하면 우리는 버틸지 몰라도. 백제호 상태는 장담 못 한다.”
“그러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아주 한 덩어리는 아니니 승산은 있어. 빙편들이 엉겨 붙은 거라면 충분히 약한 부위부터 파악해서 공략해야지.”
강태준이 서둘러 다시 무전을 들었다.
“코스트 가드, 혹시 지금 헬기가 뜰 수 있나.”
“아직은 가능하다.”
”그렇다면 빙편이 약한 곳을 알려 주기 바란다. 한시가 급하다.”
“라저. 살펴보겠다.”
강태준은 초조한 눈으로 기온을 살폈다. 수온계의 기온이 수직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밖에서 눈발이 점점 굵어지는 것이, 자칫 잘못하다간 헬기도 뜰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리고 말 것이다.
잠시 후, 헬기에서 반응이 왔다.
“라저, 약간 얼음이 얇은 부분이 있는 것 같다. 방향을 인도하겠다.”
“감사하다.”
헬기가 한쪽에서 선회하는 것을 본 강태준이 선원들에게 명을 내렸다.
“엔진 전속력으로, 충격이 올지 모르니 선상의 인원들은 모두 핸드레일을 붙잡아라. RPM 최대로.”
“RPM 최대!”
항해사가 소리치자, 연돌이 연기를 뿜었다. 잠시 후, 선수가 얼음과 충돌하자 드르륵 소리와 함께 얼음이 갈려 나갔다.
쿠쿠쿠쿠쿠~~~~~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굉음과 함께 얼음이 썰려지고 있었지만 배는 용케 전진하는 힘을 잃지 않고 있다. 그렇게 배는 얼음 지대를 기어가듯 조심조심 나아갔다.
그렇게 3시간, 어느새 날은 어두워졌고 강태준은 전방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서치라이트가 바다를 비추는 가운데, 눈이 뻑뻑하다. 기온은 벌써 영하 40도를 가리키고 있다. 빗발치는 눈보라 속에서 얼음 가는 소리만 간간이 들려올 따름이었다.
그러던 중, 쇄빙선이 뭔가에 가로막힌 듯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엔진음만 요란한 가운데, 배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자 인상을 쓴 강태준이 무전기를 들었다.
“갑판장, 보고하라. 뭔가 문제가 있나?”
“빙암이 너무 두껍습니다. 이대로는 뚫고 지나가기 힘들 것 같습니다.”
그러자 강태준이 잠시 생각하곤 바로 명을 내렸다.
“그렇다면 윈드라스 잠금장치를 풀게. 앵커 체인이 떨어지지 않도록 스톱 바를 걸어 두고.”
“설마 앵커로?”
”그래. 앵커로 때리면 어지간한 얼음은 다 부술 수 있겠지. 안 그런가, 갑판장?”
“아. 예. 바로 시행하겠습니다.”
갑판장이 서둘러 나가서 작업을 시작했다. 모둔 준비가 끝나자 강태준이 다시 무전을 들었다.
“갑판장, 앵커 올려!”
“옙. 앵커 업!”
준비가 끝나자, 강태준은 주먹을 위로 올리며 앵커로 찍으라고 명을 내렸다.
“지금 떨어뜨려라!!”
쿵!
“한 번 더!!”
크레인이 작동하자 육중한 쇳덩이가 얼음 위로 있는 힘껏 떨어졌다. 얼음의 두께는 엄청나게 두꺼웠는지 쿵 하는 굉음이 마치 콘크리트 위를 때리는 것 같았다.
엄청난 충격에 배로 진동이 느껴졌다.
양쪽에서 앵커로 내리찍기를 수차례. 드디어 얼음에 미세한 균열이 보였다. 그 사이에 밖에서는 고드름이 달렸다. 튀어 오른 해수와 눈보라가 쌓이는 사이, 부릉거리던 엔진이 악을 썼다.
콰직!!!
견고했던 빙판 위에 균열이 가는 순간, 콰직 하고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강태준이 서둘러 무전기를 들었다.
“후진하라! 미속 후진!”
“데드 슬로우 아스턴(Dead slow astern)!”
강태준의 고함에, 엔진의 칙칙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배가 서서히 뒤로 물러서자, 대기하고 있던 선원들이 불안한 눈으로 주위를 보았다.
“보조 엔진 전부 가동해. 풀 어해드로. 때려 부수면서 전진!”
“풀 어해드!”
항해사의 복창과 함께 엔진이 최고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균열이 난 얼음 사이로 날카로운 선수가 머리를 들이밀었다.
우우웅 소리에 선원들은 자기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하늘에서 빗발치는 눈보라에 다시 후진한 쇄빙선이 전속력으로 격돌했다. 엄청난 충격에 선원들은 난간을 붙잡았다.
배의 선수가 빙판 위의 상처를 헤집었다.
쩌저저저저적!!
그 순간, 빙판이 그대로 갈라지며 모세의 기적처럼 균열이 벌어졌다. 그 긴 빙판이 세로로 갈라지면서 벌어진 것이다.
그리고 다음 순간, 충격을 이기지 못한 빙판이 조각조각 무너져 내렸다.
쿠쿠우우우우우우~~
엄청난 소음에도 쇄빙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균열 속으로 뛰어들어 길을 열었다.
그렇게 길고 긴 얼음 지대를 벗어난 순간, 기진맥진한 선원들이 소리를 질렀다.
“해냈어!! 해냈다고!!”
“만세! 선장님 만세!!!”
“만세!”
허옇게 눈을 뒤집어쓴 선원들이 서로를 얼싸안고 기쁨을 만끽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