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3화 베링해
잠이 확 달아난 선장이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습니다. 빙산일 가능성이 있어 보입니다.”
선장은 인상을 썼다. 해면 위로 5미터 이상 돌출된 빙산이 배와 스치기라도 하면 그야말로 타이타닉 꼴이 날 수도 있는 것이다.
“선원들, 각자 위치로! 초사 텔레그래프 잡아라. 지금 컴퍼스 몇 도인가?”
“지금 180도입니다.”
“코스 그대로 고정하고, 속력은 최저 미속으로 후진하라.”
텔레그래프가 격하게 울리자 메인 엔진이 요동치기 시작한다. 시꺼먼 연기를 뿜기 무섭게 선체가 요동치며 후진을 시작했고, 그 즉시 기관실에 인터폰을 쳤다.
“기관사, 지금 상태는 어떤가? 주위 얼음 상태는?”
“아직 무리 없습니다.”
“배가 급속 후진하면 한쪽으로 무게가 쏠릴 가능성이 있으니, 선미의 기름탱크를 선수로 이송해 선수를 높이게.”
“옛썰!”
명령을 접한 기관사가 높이 조절을 위해서 서둘러 밸브를 풀었다.
그렇다. 침착하자.
아직 시간이 있으니 돌아서 가면 된다. 충돌을 피하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마쳤을 무렵. 칠흑 같은 밤바다에서 그림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꽤나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물체에 다들 침을 꿀꺽 삼킬 무렵이었다. 레이더가 먹통인 데다가 시야가 좁아져, 멀리서 보이는 것이 무엇인지 아직 식별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그때, 갑자기 무전기로부터 소식이 들리더니 헬기가 떠올랐다. 타타타 소리가 날아온 헬기가 조업선 위를 맴돌았다.
“여기는 코스타호. 감도 어떻습니까?”
“롸저댓. 감도 좋습니다.”
“여기는 알래스카 코스트 가드다. 귀선의 상태는 어떤가 확인 가능한가? 상태가 어떤지 응답하라, 오버.”
“현재는 얼음 더미에 갇힌 상태임. 수중에 부유하는 장애물이 많아 움직임이 제한되고 있음. 오버.”
“엔진을 전혀 사용할 수 없나? 오버.”
“그건 아님. 프로펠러에 충격이 오고 있어 빠르게 움직일 수 없다. 오버.”
“롸저. 지금 본선도 얼음이 두꺼워 그쪽으로 갈 수는 없다. 쇄빙선에 구조 요청을 했지만 언제 도착할지 모르고, 쇄빙선도 두께 1미터 이상의 얼음을 계속 깨면서 진입하기는 힘들다. 해수 온도가 낮아지고 있으니 빙맥이 형성되기 전에 남서쪽 방향으로 이동하라. 오버.”
“롸저, 바로 탈출하겠음. 오버.”
“얼음 상태가 불규칙하니 조심하기 바람. 오버.”
헬기는 위를 두 번 선회하고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코스타호는 4,000톤급짜리 순시선으로, 항해 일지와 그물망의 치어 포획 여부를 확인하는 함정이다. 평소에는 조업을 방해하는 달갑잖은 손님이었겠지만 이만큼 든든하고 기쁠 데가 있을까. 브리지로 선원들을 불러모은 선장이 사안을 전달하고 안심시켰다.
“이 해역을 서둘러 빠져나가라고요?”
“그래. 남서쪽으로 방향을 틀라는군. 그쪽이 빙하가 옅나 봐.”
“하지만 선장님, 이 일대는 마찰이 심합니다. 속력을 내서 탈출하다가 잘못하면 엔진이 완전히 나갈 수도 있습니다. 스크루에 부딪히는 충격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이대로 그냥 여기서만 죽치고 머무를 수도 없는 일일세. 아까 못 들었나? 얼음이 얼어서 두꺼워지면 탈출은 더 힘들어져.”
망설이는 기관장과 마주 앉은 채 설득에 나섰다. 선장의 진솔한 설득에 손을 든 것은 기관장이었다.
“알겠습니다. 해 보지요. 대신 이상한 조짐이 있을 경우에는 바로 멈춰야 합니다.”
“당연하지. 내 자네만 믿겠네.”
선장은 걱정 말라든 듯 기관장의 어깨를 툭 쳤다. 하지만 기관장이 브리지로 내려가는 모습을 본 선장이 심호흡을 했다. 사실 그도 마음이 무거운 것이 무리한 요구를 하는 데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메인 엔진 스텐바이!”
“스텐바이!”
“코스 220도! 미속으로.”
선장의 오더가 떨어지자 쿵 소리와 함께 연돌에서 연기가 솟아오르며 엔진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동이 걸리면서 올라오는 연기를 유심히 보던 선장이 계속 연기를 살폈다.
기관에 문제가 생기면 연기 색깔이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최저 미속으로 후진한다. RPM 상태 확인해.”
“알겠습니다.”
텔레그래프 소리가 징 하고 울렸고, 바늘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잠시 후, 기관을 확인한 기관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엔진 상태는 이상 없습니다.”
“속도 올려. 슬로 어헤드로!”
백제호는 그렇게 조심스럽게 교신을 계속하며 코스타호가 인도하는 방향대로 나아갔다.
남서쪽으로 길을 틀었으나, 바다는 여전히 위험했다.
여전히 조각난 얼음들이 해류에 떠돌며 배를 위협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 성가신 것은 해면 위에는 부유하는 쓰레기 더미였다. 단단해 보이는 얼음덩이 중에는 로프나 판자 같은 육지의 쓰레기가 뭉친 덩어리들이 간간이 보였던 것이다.
하는 수 없이 배 위에 선 선원들은 깃대로 큰 덩어리들을 밀어내며 조심스럽게 전진했다. 날은 춥고, 집중력은 떨어진다. 졸음을 쫓기 위해 커피를 연신 들이켜던 선장의 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다. 벌겋게 충혈된 눈동자가 뻑뻑했지만 거의 눈조차 깜빡이지 않은 탓에 눈이 아팠다. 그러면서도 선장은 화장실에 갈 생각도 나지 않았다.
부르릉.
선원들은 선미 슬립웨이부터 계속 견시를 반복했다. 속도를 조금씩 내고 있긴 했지만 여전히 느렸다. 그렇게 배가 조심스럽게 나아가고 있던 찰나 결국 사달이 났다. 엔진의 소리가 이상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상을 제일 먼저 파악한 것은 선장이었다.
“엔진 스탑! 스탑!! 기관장, 역전기 시동 걸어!”
다급한 목소리에 기관장이 서둘러 엔진을 껐다. 천만다행으로 프로펠러가 정지되었지만, 선체는 오던 속력에 의해 계속 밀려갔다. 그리고 잠시 뒤, 배 밑바닥에서 끼기긱 하고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칠판 위를 손톱으로 긁듯 소름 끼치는 소리에 선원들은 숨을 죽였다.
속도계는 곧 제로를 기록했고, 곧 너울거리는 파도 위에서 배가 진동을 멈추었다.
먹구름처럼 밭은기침을 토해 내는 연돌이 마침내 운행을 멈추자 선장이 옅은 한숨을 쉬었다.
“어떻게 된 건가?”
“스크루 쪽에 뭔가 걸렸습니다. 배수 쪽도 문제가 있는 것 같고 누군가 잠수를 해서 확인하고 조처를 해야 할 거 같은데…….”
사태가 심상치 않아 보이자, 선장은 곧바로 간부 회의를 소집했다.
“뭔가 스크루에 끼인 거 같은데, 아무래도 누군가 내려가서 확인해 봐야 할 것 같군.”
“무슨 말씀을…… 이 날씨에 잠수는 자살행위입니다. 여기는 일반 해역이 아니에요.”
“그렇습니다. 포식자들이 우글거리는 곳에 내려가다니 그건 좀. 차라리 쇄빙선이 올 때까지 얌전히 기다립시다.”
“말은 쉽지만 가만히 있으면 안 됩니다. 어차피 현재 수온을 고려해야 합니다. 엔진이 과냉돼서 문제가 생길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자칫 잘못하면 예인해야 될 수도 있어요.”
의견은 양쪽으로 갈렸다. 수온도 매우 낮은 데다 시야 확보도 제대로 안 되는 상황이라 위험하다는 의견도 상당했지만 어떻게든 물속 상태 확인이 필요하다는 쪽이 더 많았다.
하지만 누가 그런 위험천만한 행동을 한다는 말인가.
아무도 쉬이 나서는 사람이 없자, 침묵을 지키던 초사가 용기 있게 나섰다.
“제가 처리해 보겠습니다.”
“인마. 니가 뭔 재주로. 쓸데없는 소리 말고 기다려.”
“기관사 말씀이 맞습니다. 얼음이 들러붙어 기관이 완전히 얼어 버리면 그땐 더 골치 아픕니다.”
“이런 겁대가리 없는 놈을 봤나. 여기가 니 집 안방인 줄 알아. 인마?”
선장은 호통을 쳤지만 속내는 반대였다. 사실 초사 본인은 제 실수를 만회할 생각에 나선 건 알겠지만, 선장으로서는 선원의 안전을 생각하면 쉽게 명령을 내릴 수 없었던 것이다.
잠수의 위험성을 아는 선장이 머뭇거리자 몸이 달아오른 갑판장이 재촉했다.
“선장님, 한번 기회를 주시죠. 시간이 없어요. 지금 전방에 얼음이 깔리고 있습니다.”
“하모, 초사가 직접 한다는데 한번 믿어 봅시다. 이렇게 무의미하게 시간만 때울 겁니까. 얼음들이 배에 달라붙어 버릴 텐데 그러면 우리 다 얼어 죽어요.”
“……할 수 있겠나 정말? 자칫 잘못하면 목숨이 위험해.”
“각오하고 있습니다.”
간절한 눈빛에 선장은 고뇌에 휩싸였다. 지금이야 잠잠하지만 바람에 세지면 얼음이 떼거리로 밀려들 것이 분명한 만큼 지금 최대한 멀리 나가야 한다.
결국 선장이 결단을 내렸다.
“에이, 알긋다. 해 보자. 갑판장, 사다리 고정시키게. 혹시 형석이가 오르내릴 때 이상 없도록 라이프라인도 챙기고.”
“감사합니다. 캡틴.”
“딱 십 분 만이다. 너무 오래 잠수하지 말고.”
갑판장이 잠수하는 데 필요한 안전 장구들을 꼼꼼하게 점검하는 동안, 코스트 가드도 도움을 주었다. 헬리콥터가 낮게 주행하며 얼음덩어리를 바람으로 밀어낸 것이다. 해수 위를 어지럽히던 장애물이 사라지자 선장이 손짓으로 감사를 표했다.
그러고 잠시 후, 공기통을 맨 초사가 잠수를 시작했다.
뼈가 시릴 정도의 한기에 몸이 차갑다. 잠수등에 의지하긴 했지만 어둠 속 수심 60미터가 넘는 밑은 무저갱이나 다름없었다. 반쯤 얼어붙은 얼음들 때문에 빛이 들어오지 않았던 것.
칠흑 같은 어둠 속, 밀려오는 공포를 강제로 내리누르며 초사는 의도적으로 아래를 보지 않고 헤엄을 쳤다. 그렇게 선박 아래를 더듬으며 내려가던 중 한쪽 다리가 따끔했다.
‘앗…… 젠장.‘
고통에 따끔한 것을 보니 뭔가 날카로운 무언가에 스친 것 같았다. 수경을 통해 잘 확인해 보니 뾰족한 얼음 파편이 선박 밑에 자라나 창처럼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 얼얼하고 쓰렸지만, 다행히 상처는 크지 않은 듯 피가 많이 나오지는 않았다.
차가운 물 때문에 마비된 다리의 상처가 가시자 심호흡을 한 항해사는 다시 물갈퀴를 움직여 배수구 쪽부터 움직였다. 선저 해수 흡입구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내 이럴 줄 알았지.’
흡입구 안을 유심히 보니 쓰레기 덩이가 하나 박혀 있다. 판자와 끈, 비닐 같은 게 뭉쳐 굳어진 얼음 덩어리였다. 단단히 박힌 쓰레기를 빼낸 다음 곧장 유영하듯 움직였다.
역시 중요한 건 스크루 쪽이었다. 굵은 로프가 스크루 전체를 단단히 감고 있었던 것이다.
꼬리표처럼 달린 로프를 보니 선장의 판단이 옳았다. 이 상태에서 엔진이 무리하게 돌렸다면 로프가 녹아서 키웨이 쪽에 달라붙어 자칫하면 큰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이건 단기간에 안 되겠군.’
어떻게든 로프를 풀기 위해 용을 썼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단단하게 감긴 상태를 보니, 칼로 일일이 잘라가며 제거하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수중에서 사투를 벌이기를 얼마간, 추위 때문인가 두통과 압박이 몰려왔다. 때마침 신호줄이 흔들렸다.
핑그르르 회전하는 물방울이 올라가자 그도 더는 버티기 어렵다는 판단이 들었다.
“올라왔다!”
초사는 바로 올라가지 않고 손으로 조금 더 해 보겠다는 뜻을 수신호를 전했다. 헌데 잠시 신호를 나누던 선원들이 갑자기 발을 동동 구르더니 미친 듯이 손짓을 하는 것이 아닌가. 궁금증도 잠시, 급기야 갑판 위에 있던 선원 하나가 애타게 소리쳤다.
“인마, 당장 올라와! 빨리! 거기 있지 말고! 어서!”
“네?”
“뒤! 뒤에!!!”
그제서야 뒤에서 느껴지는 존재감에 등골이 쭈뼛했다. 다급히 올라가려는 순간, 다리에서 엄청난 통증이 느껴졌다. 순간적으로 힘이 쭉 빠지며, 초사가 쑥 하고 바다 아래로 빨려 들어갔다.
“초사!!”
“이런 젠장!!!”
다리를 물은 것은 상어였다. 설마 피 냄새를 맡은 건가. 아찔한 순간 생존본능이 작동했다. 정신을 가다듬은 초사가 반사적으로 손 칼을 뽑아 상어의 눈을 내리찍은 것이다.
희미해지는 정신을 부여잡으며 초사는 오로지 살기 위해 있는 힘을 다했다.
불의의 일격을 맞은 상어는 괴로운 듯 몸을 뒤틀었지만, 한 번 문 먹잇감을 쉬이 놓치지 않았다.
숨이 막히면서 힘이 점점 빠지고 호흡이 가빠진다.
절체절명의 순간, 지원군이 나타났다.
탕! 탕!!
경비정에서 날아온 헬기 요원들이 냅다 총알을 후려갈긴 것이다. 몸통에 구멍이 난 상어가 견디다 못해 물 위로 떠오르자. 붉은 피보라가 거품처럼 솟구쳤다.
사방으로 퍼지는 피 냄새에 다급해진 선원들이 외쳤다.
“갑판장, 빨리 잡아올려!!! 붙잡아!! 빨리 끌어올리라고! 어서!!”
하지만 형석은 허우적거리면서 제대로 잡지를 못했다. 애타게 소리치는 사이, 가까운 곳에서 지느러미가 보였다. 상어 떼들이 몰려든 것이다.
먹잇감을 발견하고 엄청난 속도로 거리를 좁히는 포식자들.
다급해진 선장은 곧바로 조명탄을 집어 들었다. 하지만, 붉은 연기를 피운 조명탄은 기세 좋게 앞으로 날아갔지만 곧 목표물에서 빗나갔다.
“이런 제길, 왜 안 맞나, 왜!!”
초사는 거의 죽기 일보 직전이었다.
애타게 기적을 바라는 사이, 좌현 쪽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리더니 보트 하나가 튀어나왔다. 부우웅 소리와 함께 달려온 모터보트는 크게 한 바퀴 상어떼를 선회하더니, 총탄을 시원하게 쏴 갈겼다.
투타타타타타타타!~~~~~~
사방으로 총탄을 난사하자, 벌집이 된 상어의 피에 바다 위가 붉게 물들었다. 마치 페인트를 섞은 것처럼 번져 나오는 피에 아직 성한 상어의 날카로운 이빨은 이제 목표를 바꾸어 상처 입은 동족을 향했다.
인정사정없는 살육전이었다.
상어들이 포식자의 본능에 이끌려 동족상잔을 벌이고 있는 사이, 서둘러 사다리 아래로 내려간 선원들은 덜덜 떠는 초사를 위로 올릴 수 있었다.
“초사! 정신 차려! 초사!”
“으윽…… 어.”
초사는 여전히 상어에 물린 채로 의식이 없었다. 초사가 갑판에 올라오자마자 선원들을 숨통이 끊긴 상어의 아가리를 찢고, 물린 다리를 끄집어냈다. 날카로운 이빨을 벌리는 순간 울컥거리면서 피가 솟구쳤다.
찢어지는 고통에 초사가 작살 맞은 고기마냥 부들부들 떨었다.
“끅…… 끄으윽!!”
“이봐, 끝났어. 괜찮아, 괜찮아! 안 죽어!!”
“정신줄 놓으면 안 돼! 이봐, 눈 똑바로 떠. 눈!!”
진통제를 꽂자, 입술이 파리해진 초사가 물과 위액을 연거푸 토해 내더니 이윽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때, 치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무전이 울리더니 강태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롸저. 그쪽 듣고 있습니까? 여기는 메릴랜드호, 선원은 무사합니까?”
“천만다행으로, 아직 살아 있습니다.”
익숙한 한국어가 들리자, 저도 모르게 울컥한 김 선장의 콧날이 이윽고 시큰거렸다. 쌍안경을 들어 보자 쇄빙선이 두꺼운 얼음을 가르며 모습을 드러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