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양재벌 강태준-342화 (342/361)

342화 쇄빙선

“밴 캠프 소속?”

“예. 아무래도 이번에 척지해 쪽 조업 문제로 넘겨받은 모양입니다. 우즈홀 연구소랑 협업 중이라네요.”

“차라리 잘되었군.”

강태준은 곧바로 벤 캠프 사 쪽으로 임대 문의를 넣어 보기로 했다. 마침 예전에 강태준이 현역일 때 부사장에 있었던 엘링턴 씨가 어장 순시 겸 항구에 와 있었다.

“강 회장님께서 직접 행차하시다니. 이건 무슨 일입니까?”

“그러게요. 이렇게 보니 정말 오랜만이군요. 이게 대체 몇 년 만입니까?”

“십 년도 더 되지 않았습니까. 간간이 연락은 드렸지만, 그간 격조했군요.”

“그렇지 않아도 조업 일로 논의하고 싶은 게 많습니다. 백경에서 참치 조업을 재개했다는 말씀을 들어서 말이지요.”

회장 직함에 오른 엘링턴은 그야말로 백전노장의 분위기를 풍겼다. 짧은 이야기로 해후를 나눈 둘은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아니, 쇄빙선을 빌리고 싶다는 말씀입니까? 설마 이 날씨에?”

“예. 우리 조업선이 지금 유빙대에 갇혀 있다고 합니다. 배는 몰라도 생존자가 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인명이라도 건지고 싶습니다.”

“허 거참, 사정이 딱한 것은 알겠지만. 그건 곤란하군요. 쇄빙선은 귀중한 자원이라 저희도 함부로 막 빌려드릴 수 없습니다.”

엘링턴 회장은 별로 내키지 않는지 몸을 사리는 분위기였다. 쇄빙선 한 척을 건조하려면 어마어마한 비용이 든다. 아무리 튼튼한 배라고 하지만 혹시 조난을 당하기라도 하면 큰일 아닌가. 쉽게 허락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정, 믿지 못하시겠다면 제가 직접 운행을 하도록 하지요.”

“회장님께서요?”

“예. 이런 말 하기 뭣하지만 전 지금까지 사고로 배를 잃어 본 적도 없고, 조업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적도 없습니다.”

“굳이 그렇게까지? 이런 말씀 드리기는 그렇지만, 선원들이 생존했다고 확신할 수 없지 않습니까?”

“제 감이 살아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절 믿고 맡겨 주십시오.”

확신 가득한 발언에 말문이 막힌 엘링턴이 강태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시간이 한참 지났지만 강태준은 여전히 원양어업계에서 그야말로 살아 있는 전설이다. 그런 만큼 그의 말은 설득력이 있었다.

‘그래. 강 회장이라면 가망도 없는 일에 무모하게 도전하진 않겠지. 이참에 빚을 지워 두는 것도 나쁘지 않아.’

엘링턴은 마음을 움직였다. 백경그룹의 성장세로 보아 어차피 나중에는 자기도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할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좋습니다. 제가 이야기해 두지요.”

“회장님 그건, 대주주분들께서 총회에서 문제 삼을 소지가…….”

“내가 책임지지. 회장은 나야.”

옆에 있던 비서들이 연이어 난색을 표했지만 엘링턴은 손을 들어 입을 막았다.

“단 저도 확답은 못 드립니다. 날씨가 너무 험악해지면 적당한 선에서 포기하고 돌아오십시오.”

“감사합니다. 이 빚은 꼭 갚겠습니다.”

“그런 말씀은 무사히 돌아오신 다음에 하시지요.”

강태준은 지체 없이 움직였다. 사실 메릴렌드 정도의 배를 임차하려면 하루 임차료로 3만 불 이상의 비용이 소요된다. 배를 빌리려고 하는 대기자들이 한 다스는 밀려 있는 만큼 그것만으로도 편의를 봐준 셈.

서둘러 하버 항구에 도착하자, 놈에서 출발한 배가 이미 도착해 정박해 있었다.

“크군요. 이거.”

“건조비만 1억 불이 훌쩍 넘는 배니까요. 비싼 값을 하는 놈이죠.”

5,200톤급. 길이는 90미터, 폭은 18미터의 거대한 배다 기준으로 9미터가 넘는 큰 대로 유류 1회 보급으로 3만 킬로 이상 항해할 수 있다는 물건이었다.

항구 앞에서는 수염이 무성한 벽안의 항해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1등 항해사를 맡은 데이몬드입니다. 조난 구조 활동을 하신다고 하시기에 도움이 될까 해서 왔습니다.”

“자원자가 있다니 고마운 일이군요.”

“바다에서는 모두가 형제 아니겠습니까? 할 수 있다면 당연히 도와야지요.”

강태준은 마음이 든든했다. 다들 뱃사람들인 만큼 바다 위에서 큰일을 한 번씩은 겪어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다. 하버에서 출항한 배는 항구를 빠져나가는 즉시 시속 12노트로 해면 위를 달려 나갔다.

하지만 거칠 것 없던 항해는 곧 장애물과 조우했다. 알래스카와 멀지 않은 지역이라 유빙이 형성되어 항로를 방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4도였던 바깥 기온이 어느 순간 급강하하더니 갑판에 서 있을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차가운 한겨울에 파도가 치자 서리를 먹은 겉옷이 석고처럼 딱딱하게 굳어 났다.

“벌써 날씨가 변하고 있습니다. 선장님.”

“이놈의 날씨는 또 변덕인가?”

얼음 파편이 튀면서 피부가 따끔거리더니 팽 하는 소리와 함께 울었다. 몰아치는 눈보라가 사정없이 선수를 후려치고 있었다. 하늘은 거무튀튀해졌고, 백파가 휘날렸다.

“저저!!”

전면에서 엄청나게 큰 해일이 앞에서 다가오는 것을 본 강태준이 무전기를 들었다

“선내, 알린다. 선내 본선 급선회하니 로링에 주의하라!”

“라저 댓!”

쿵 소리와 함께 파도와 부딪친 선망선이 본의 아니게 물을 뒤집어썼다. 선체의 경사가 높다 보니 충격에도 다행히 큰 피해는 없었지만 방위각을 확인하자 얼어붙은 얼음덩어리가 사방에 치솟아 있다.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우측, 우측! 큰 거 옵니다!”

“우측 30도!!”

정신없이 그렇게 계속 크고 작은 난빙대를 뚫고 나가야 했다. 우측에 큰 리드가 검게 형성되어 있는데, 사방이 온통 프레스리지로 뒤섞인 난빙뿐이다. 지척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파도가 뱃전을 이리저리 뒤흔들었다.

“젠장, 사방이 온통 지뢰밭입니다.”

“해난 구조 센터에서 소식은 없나?”

“예. 아직은.”

파도가 칠 때마다 흥건한 물이 순식간에 얼어붙는 것을 보니 선고가 높지 않았다면 진즉 침수되어 버렸을 것이다. 파도가 조금 잠잠해질 즈음, 숨 돌릴 틈도 없이 새로운 위험이 모습을 보였다.

“회장님…… 저, 저거!”

해빙 안에서 염수가 터져 나오더니 주변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작은 얼음 결정들이 모이며 바다 표면에 슬러시 형태의 얼음이 점점 범위를 넓히고 있는 것이 괴기스럽다.

극저온 상태의 염수가 순간적으로 어는 광경은 그야말로 살 떨리는 풍경이 아닐 수 없었다.

“이건 처음 보는데, 많이 위험해 보입니다만.”

“저게 대체 뭔가?”

“아마 브리나클인 거 같습니다.”

“브리나클?”

“바다 고드름이죠. 아마 바다 밑에서 지금 염수가 얼어붙고 있을 겁니다.”

해양연구원인 데이몬드는 진귀한 것을 보았다는 듯 사진을 찍었다. 실제로 보는 경우가 매우 드물기 때문에 신기해하는 사람들이었지만 선원들의 온도는 전혀 달랐다.

“그럼 닿으면 완전 끝장 아닙니까?”

“피해 가면 됩니다. 확장 속도가 별로 빠르지 않으니까요.”

지뢰를 피해 가면서 운행을 하다 보니 사람들의 눈이 퀭하다. 혹한의 환경에 노출되어서인지 초반의 호승심은 어디 가고 눈에 띄게 지쳐 보였다.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사기가 많이 떨어진 것이 눈에 보일 정도.

불안해진 오재갑이 고개를 흔들었다.

“이렇게 일이 계속 터져서야, 제때 도착은 할 수 있을까요?”

“너무 걱정하지 말자고. 아직 큰일은 없었잖나.”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지금 타고 있는 배가 쇄빙선이라는 점. 어지간한 배라면 몰라도 쇄빙선에 가해지는 부하나 엔진의 힘을 비교해 보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배의 성능을 믿고 부딪치는 수밖에, 자 기관 하프 어해드.”

“하프 어해드!”

그래 한번 정면 대결을 해 보자. 배는 검은 연기를 뿜으며 정면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하늘과 바다가 뒤집히며 거대한 파도가 덮쳤다.

* * *

같은 시각 베링해.

흰 빙산들이 곳곳에 포진된 가운데 백제호의 선원들은 하얀 입김을 뿜고 있다.

“초사, 톱 브리지로 가서 서치라이트 연결시켜.”

“예.”

“거, 아주 미쳐 버리겠구만. 방위며 뭐며 이놈의 해역엔 죄다 얼음밖에 없어.”

백제호의 머리를 맡은 김재섭 선장은 팔짱을 낀 채 망연자실한 신음을 내었다.

조난당한 지 벌써 며칠째, 눈 앞에 펼쳐진 것은 안개 또 안개 그리고 얼음뿐. 망막이 시릴 정도의 한기가 엄습하는 분위기에 입김마저 얼 것 같다. 브리지에 나온 선장이 들어가지 않자 1항사가 조심스럽게 권했다.

“추울 텐데 안으로 들어가시지 않고.”

“지금 상황에 들어가게 생겼나? 기관장이 뭐라고 하던가? 움직일 수 있다는가?”

“프로펠러에 충격이 오고 있어서, 안개가 걷힐 때까지는 함부로 움직이면 안 될 것 같답니다.”

선장은 이빨을 딱딱거렸다. 추위의 고통보다도 걱정이 앞선다.

레이더며 안테나며 모두가 먹통이었다. 배 주위는 온통 칙칙한 안개 더미로 덮여 있고, 등골이 오싹할 정도의 한기가 배를 포위하고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얼음 바다. 온통 하얀 것이 빙편인지, 얼음인지 판단이 안 되었다.

선장으로서는 안개 밭인 지금 혹시 빙산이라도 있다면 그야말로 모골이 송연할 일이 아닌가. 연신 투덜거리던 선장이 본심을 내뱉었다.

“하여튼 간에 이놈의 새끼들은 잘해 주면 정신줄 놓는 게 일이구먼. 아주 선장 지시를 똥으로 알고. 세상에 당직 중에 잠을 자?”

“죄송합니다.”

“아니다. 너희들을 믿은 내가 바보지 그래.”

옆에서 견시를 보던 초사가 죄스러운 듯 고개를 푹 숙인다. 눈두덩이 한쪽이 퍼런 상태로 눈을 피하는 초사를 보며 선장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성질 같아서는 한 대 콱 쥐어박고 싶지만 애써 참으며 주먹을 부들거리는 선장이었다.

“전부 내 잘못이지. 내 잘못.”

조업에 지친 선원들이 당직자들을 믿고 쉬고 있는 사이 배는 저도 모르게 엉뚱한 곳으로 향했다. 선장이 잠결에 무거운 엔진 소리가 연속되는 것을 듣고 브리지로 서둘러 올라갔을 때는 이미 늦었다. 그리고 그가 발견한 것은 항사 4명이 약속이나 한 듯이 사이좋게 졸고 있는 장면이었다.

3항사는 타륜을 놓은 상태로 약 먹은 닭처럼 꾸벅거리고 있었고, 실습을 맡은 항해사는 꿈나라로 빠져 정신이 해롱해롱했다. 초사는 어장도에 머리를 박은 채로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바깥은 영하의 온도에 오줌발이 바로 얼어 버릴 정도였지만 브리지 내부는 전자기기가 뿜어내는 열기와 히터 덕에 후끈거리다 보니 새벽잠을 견디지 못한 것이다.

“이 새끼들아, 여기 쳐 자려고 왔어? 당장 안 일어나?”

경악한 선장이 당직자를 발로 차 깨우고 엔진을 스톱시켰지만,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늦었다. 배는 코스를 벗어나 해류의 흐름에 몸을 맡긴 상태로 정처 없이 표류 중이었던 것이다. 선장으로서는 아주 미치고 환장할 일이었다.

‘아무리 피곤해도 그렇지, 어떻게 한 놈도 빠짐없이 졸 수가 있나?’

선장은 한탄했지만 엎질러진 물. 어찌 되었든 조난의 최종 책임은 선장에게 있는 만큼 아랫사람을 신뢰한 불찰이 컸다.

바둑판처럼 쫙 깔린 얼음 더미를 보니 재차 열불이 치솟는다.

속으로 참을 인 자를 그린 선장이 조용히 물었다.

“조난 신호는 보냈나?”

“예. 그런데 수신기가 얼어붙어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아주 가지가지 하는구먼.”

혀를 끌끌 차는 선장의 대꾸에 항해사가 불안한 듯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뭘 어떻게 해 이놈아. 일단 1기사가 가버너 잡고, 항해사들은 사고 지점 위치와 지금부터 중요한 시점과 상황이 발생할 때마다 항해 일지에 빠짐없이 기재하게. 다들 엔진은 꺼지지 않게 예열해 두고.”

“알겠습니다.”

“해 뜨기 전까지 모두 대기 탄다. 혹시 당직이 또 졸면 그 자리에서 모가지를 비틀어서 해수에 던져 버릴 테니, 각오하도록! 여기서 삐끗하면 우리 다 죽는 거다. 다들 정신 차려라 알았나?”

“네!!”

내키지 않지만 선장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일단 안개가 걷히기 전까지는 속수무책이다. 함부로 움직이다가 스크류가 망가지기라도 하면 끝장이야.’

마음 같아서는 밤새 기관을 돌려서라도 이 험지를 빠져나가고 싶지만, 여기서 무리를 할 수는 없다. 레이더가 먹통이라 제대로 위치를 잡기 힘들었던 것이다.

넘실거리는 파도가 없이 둥둥 떠다니는 얼음들이 가끔씩 배 한 켠을 긁고 지나가는 소리가 섬뜩하게 느껴졌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장님이 된 듯, 무력감이 엄습했지만 그저 할 수 있는 것은 빙산에 치이지 않기를 기도하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새벽녘, 뜬눈으로 지새우던 선장은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꾸벅거렸다. 삼 일간의 강행군에 지칠 대로 지쳐 버린 것이다. 1항사에게 견시를 맡기고 잠시 눈을 붙이려던 찰나, 귀를 파고드는 무전 소리가 들렸다.

“6시 방향, 괴물체 접근 중. 지금 이쪽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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