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양재벌 강태준-337화 (337/361)

337화 경영 정상화

이재무로서는 다 된 밥에 재가 뿌려진 상황이었으니 강태준이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초조한 표정의 이재무에 강태준도 직설적으로 나갔다.

“그래서 지금 파투를 놓으시려고 하는 겁니까?”

“그 말은 불쾌한 소리군. 난 사업에 감정을 넣는 사람이 아니오. 우리 오성도 통운 인수에 관심이 있어서 들어간 것이지. 여명통운은 국내 육상화물의 상당 부분을 장악하고 있지 않소. 충분히 내부적으로 투자가치가 있다는 판단을 내린 결과요.”

“이해는 합니다만, 인수가 쉽지 않을 텐데요. 큰 출혈을 보기 전에 저희 쪽에 양보하실 의향은 없습니까?”

“별로. 그쪽이 양보한다면 모를까. 굳이 그럴 이유야 없지 그래.”

이재무는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그는 어떻게든 발목을 붙들려는 의지가 역력했다. 사실 오성에서 발해원양 지분까지 포함해 봐야 15프로가 한계 정부의 공매 주식을 전부 인수받는다 하더라도 경영권을 확보하기란 요원한 일이었지만 하지만 매수 단가를 올려 출혈을 강요하는 일 정도야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다.

뜻을 짐작한 강태준이 중얼거렸다.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오앤비 인터네셔널 쪽은 이제 정리를 해야 할 것 같군요. 통운 쪽을 굳이 인수하시겠다면 저희도 굳이 그쪽과 사업을 같이 할 이유가 없지요.”

“허허, 어이없구만. 지금 협박하는 건가?”

“협박이 아니라 팩트로 말씀드리는 겁니다.”

이재무는 괘씸한 듯 눈썹을 추켜세웠다. 전자 쪽은 손을 뗐지만 오앤비 인터네셔널 쪽은 아직 합작회사 형태로 운영되고 있었기에 이재무의 관할에 속했다.

그러나 이재무도 이제는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맘대로 해 보게. 내가 그 정도로 눈 하나 깜빡할 것 같나?”

“그럴 리가. 하지만 타격이 없지는 않겠지요.”

“그거야 오히려 나도 바라는 바야. 누가 이길지 한번 해 보세나.”

이재무는 으르렁거리며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협상이 결렬되자 1차, 2차 공매 절차에 오성이 참여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렇게 되자 증권팀 내부에서도 불안한 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오성 놈들 끝까지 물고 늘어질 거 같은데요?”

“이거 어떻게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안 그러면 비용이.”

“쉬. 조용히 해. 회장님 들으실라. 심기 불편하신 거 안 보여?”

여기저기서 수군거리건 말건 3차 공매를 앞두고 강태준은 태연함을 유지했다.

사실 그는 전혀 흔들리고 있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후 비서가 들어와 소식을 알렸다.

“오성에서 손님이 오셨습니다.”

“왔군. 여기로 모시게.”

놀랍게도 새로 등장한 인물은 이재무가 아니라 동생 이재희였다. 약간 긴장한 듯 굳어진 얼굴의 이재희와 달리 강태준이 여유로웠다. 비서가 서둘러 차를 내오자 강태준이 분위기를 풀고자 입을 열었다.

“우리가 초면이던가요?”

“예전에 한 번 뵌 적이 있지요.”

“그랬던가요. 아참 오성에서 손목시계용 반도체를 개발하는 데 성공하셨다면서요. 축하드립니다. 반도체 사업을 제대로 이해하는 동지가 생겨서 기쁩니다.”

“감사합니다.”

“다만, 마냥 웃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이에요. 저희 회사 개발팀에서도 손목시계용 칩 부문에 관심이 많아서 말입니다.”

그 말을 들은 이재희는 속으로 침을 삼켰다. 오성에서 C-MOS칩 개발에 성공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후발주자의 입장이니만큼 기술력이나 코스트 측면에서 백경보다 뒤처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부르신 겁니까?”

“네. 서로 불필요한 경쟁을 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반도체 개발에도 자금적으로 부담이 되실 텐데, 이번 인수전에서 빠져 주시면 어떨까 해서요.”

“죄송하지만 저는 전자 담당이지, 그룹을 이끄는 위치가 아니라서요. 확답을 드릴 수 있는 입장이 아닙니다.”

“그래도 건의는 해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사실 저희 그룹에서도 꽤나 곤란한 입장이라서요. 이런 식이라면 저희도 LED칩 양산을 진지하게 검토해 볼 수밖에 없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이재희의 눈이 가늘어졌다. 선발업체가 압도적인 우위를 선점하는 반도체 사업의 특성상, 이미 생산 체제를 완전히 확립해 놓은 백경에서 대놓고 저가 공세로 밀어붙인다면 코스트 경쟁에서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는 것이 불문가지. 이재희로서는 절대로 달갑잖은 상황이었다.

“그럼 원하시는 게 뭡니까?”

“뭐, 거두절미하고. 저희랑 신사협정을 하는 게 어떨까 해서 말입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저는 오성과 딱히 경쟁하고 싶지 않다는 말입니다. 이번 통운 인수전에서 손을 뗀다면, 저희도 손목시계용 LED 칩에 대한 관심을 끊지요. 대신 LCD 쪽만 집중하도록 하겠습니다.”

“서로 투자 영역을 나누자, 이 말씀이신가요?”

“굳이 국내를 대표하는 기업 두 곳이 출혈 경쟁할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사실 저희 경쟁자는 미국이나 일본 기업들이지, 이 조그만 나라에서 박 터지게 싸워 봐야 서로 남는 게 뭐겠습니까. 동족상잔을 할 여력이 있으면 그 힘으로 세계시장 제패를 꿈꾸는 게 건설적이지 않겠습니까?”

“지극히 공감하는 부분입니다만 아시다시피 저는 총괄할 입장이 아니라 확답을 드릴 수 없습니다.”

“그거야 그쪽의 의지에 달렸지요. 긍정적인 답변을 기대하겠습니다.”

짧은 대화는 그것으로 종결되었다. 대담이 끝난 직후, 이재희가 돌아가자 춘삼이가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오성에서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까?”

“이 회장의 의중이 어떤지에 따라 결정되겠지. 마냥 무시할 수는 없을걸.”

와병 중이라는 이유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있다곤 하지만, 이병구의 영향력은 건재하다.

그리고 강태준이 아는 이병구는 손해 보는 장사는 절대로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예상대로, 제안을 접한 오성은 신속하게 딜에 합의했다. 통운주에 돈을 쏟아붓기보다 앞으로 성장 동력인 반도체에 투자하는 게 옳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손목시계용 반도체 칩 가운데 LED 부문은 오성 쪽이, LCD 부문은 강태준이 가져가는 것으로 타협한 것.

현실적으로 강태준이 공매 입찰 전 발행 주식의 30프로 이상을 확보한 상황에서 후발주자가 들어온다고 해서 강태준을 꺾고 여명통운을 인수할 확률이 희박하다는 것도 판단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오성에서 제3차 공매에 나서지 않는 방침을 정하자, 입찰은 강태준의 단독 입찰이나 마찬가지로 진행되었다.

형식상으로는 명동증권과 대진증권 쪽에서 200여 명의 투자자가 나섰지만, 다들 이름만 걸고 분산 응찰시킨 사람들.

그렇게 증권거래소를 통해 나머지 700만 주의 통운주식이 한 주당 2,000원의 가격으로 강태준에게 전량 낙찰되었다.

52.5프로의 지분을 확보한 강태준이 경영권을 확보한 것이다.

그달 말 열린 여명통운 임시주총에서 강태준 회장이 대표이사에 선임됨으로서 통운주를 둘러싼 경쟁은 일단락되었다.

강태준은 국내 운수 물량의 과반수를 확보한 기업의 사주로 등극한 것이다. 그리고 이재무의 운명은 반대가 되었다.

-본 사장은 당분간 건강상의 이유로 통운 인수 건과 더불어 물산 쪽 사장직에서도 잠정 물러나기로……

이재무가 석연찮은 이유로 일선에서 물러난 직후. 산업은행 등 매각 주체 및 주관사 관계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입찰 제안서에 기재된 인수 가격이 정당한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매각 주관사 측은 백경 측에 전화를 걸어 자금 조달 여부와 강 회장의 의지 등을 수차례에 걸쳐 확인했다. 매각 주관사 측은 발표 시간을 계속 미루다가 저녁이 다 되어서야 발표해 참가했다.

“뭐라고? 3차 공매에 참여하지 않아?”

“천진그룹은?”

“그쪽도 전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뭐야. 이놈들. 지금까지 간만 본 거야?”

뒤늦게 들려온 이야기는 백경이 천진그룹과 보름여 만에 컨소시엄 구성에 합의했다는 소식이었다. 사실 이때까지 발해그룹에서는 강태준과 오성은 물론이거니와 천진까지 포섭한 줄은 꿈에도 예상하고 있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건 진짜였다. 오성이 입찰을 포기한 데 이어 천진그룹과 백경그룹이 컨소시엄을 구성한다는 계획을 발표하자, 발해 내부에선 난리가 났다.

“육해공 컨소시엄? 그럼 우리는 어쩌라고!”

“천진, 이놈들이 뒤통수를 때린 겁니다. 저희와 거래를 일방적으로 파기하겠답니다.”

“뭐라고 이 상도덕도 없는 놈들을 봤나?”

강태준이 은밀하게 제시한 조건은 오성에 내민 조건과 거의 비슷했다.

강태준이 항공 분야에 진출하지 않는 대신, 천진그룹도 육상 쪽을 탐내지 않는다.

당분간 서로 영역을 침범하지 않기로 신사협정을 맺는 대신 해상 물류 쪽에 계열사로 새로 약진하는 발해교역의 물류사업부를 주저앉히자는 조건이었다.

어차피 천진그룹으로서는 육상 파트를 가져가는 게 그림의 떡이니만큼 나쁜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그간 꽤나 발해를 경계하고 있었던 것인지, 천진에서는 강태준과의 합의가 끝나기 무섭게 180도 태도를 바꿔 발해 쪽에서 임차 중이던 인천 물류 창고 계약을 종료하고 나가라는 통보를 해 왔다. 이미 사용 기간을 10년간 자동 연장하기로 합의까지 해 놓고 오히려 거래를 끊어 버린 것이다. 그렇게 되자 황당해진 것은 발해 측이었다.

“이보시오. 당신들 어떻게 이럴 수 있소? 창고를 빼라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그럼 우리 합의는 어떻게 된 거요?”

“응, 우리가 그런 이야기를 했었나?”

항만의 물류 적체를 고려하면 대체재가 많지 않은 상황에 이억수 쪽에서 항변했지만 어차피 구두 계약이었다. 상대가 부들거리거나 말거나 천진그룹이 그딴 약속은 애초에 한 적도 없다 오리발을 내밀며 방 빼라를 시전했다.

한바탕의 생쇼를 지켜본 강태준은 천진그룹의 안면몰수에 감탄했다.

“역시 혐성의 원조가 오성인 줄 알았더니. 역시 네가지 없는 놈들은 뭐가 달라도 확실히 달라.”

“그러게요. 참 학습 능력이 없네요. 발해 놈들도. 지들이 당할 거란 생각을 못 하는 건지, 안 하는 건지.”

“솔직히 이렇게 나와 줘서 반갑지. 샌드백이 될 이유를 만들어 줘서 말이야. 아무튼, 실태 조사는 끝났나?”

“예. 일단 예상대로 통운사 내부의 조직적인 부실이 꽤 심각합니다. 직원들 사이에 고령화도 심각하고요.”

서류를 읽어 본 강태준의 얼굴이 이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어느 정도 차이가 있을 거라는 예상은 했지만 좀 심하군.”

“창고 명부에 들어있는 차랑 종류가 많이 다릅니다. 심한 곳은 차 대신 아직 소달구지를 아직 쓰는 곳도 있답니다.”

“아니 이건, 이건 완전 구시대 유물 아닌가. 세상에 목탄차라니 참…….”

여명통운은 전국에 870개의 창고와 점포, 차량 1,820여 대, 선박 170척, 그리고 중장비 180여 대나 되는 엄청난 덩치였지만 크기와 달리 실제 속내는 꽤나 곪아 있었던 것이다.

총 200억에 달하는 누적 적자와 정부의 물가 안정 정책에 따른 저렴한 조작비 등 구조적 부실을 제외하고도 오랜 기간 공기업으로 별 위기감 없이 지내 온 탓에 내부적인 부패가 심각했던 것이다.

“손님들 클레임이 많은 걸로 봐서는 직원들의 태도도 많이 태만합니다. 관료주의적인 폐습도 많고, 임시직이 많아 근로 의욕이 너무 낮은 것도 문제고요.”

“예. 그렇습니다. 제가 알아본 바로는 회사 전체에 도덕적 해이가 만연해 있습니다.”

통운사 직원들의 횡포는 이미 도를 넘는 수준이었다. 운송이 아쉬운 중소 회사들에 상납금을 받는가 하면, 운송이 힘든 지역에는 하청에 하청을 줘서 관리인을 두기까지 하는 등 갑질을 일삼았던 것이다.

-다음 화에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