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6화 증권거래소
증권거래법 업무 규정 14조 2항.
여기서 말하는 기세는 증권 시장에서 거래가 성립되지 않았을 때의 호가로, 주식 매도인과 매수인이 부르는 가격이 일치하지 않아 발생하는 현상이다. 호가가 여러 개일 경우 가장 낮은 매도호가 또는 가장 높은 매수호가를 기세로 인정, 그날의 종가로 처리된다.
사실 당시까지는 격탁 매매라는 것을 했는데, 이 방식은 특정 종목에 대한 매수를 희망하는 증권회사의 시장대리인이 육성과 손짓으로 희망 가격을 제시해 매수 희망자와의 매입 수량이 합치하면 마치 판결을 내리듯 격탁을 두드려 그 가격에 매매를 성립시키는 방식에서 유래된 명칭이었다.
이런 격탁 매매 제도하에서는 동시호가처럼 단일 가격이 형성되는 것이 필연이었는데 이 규정에 손을 봐 복수 가격을 인정한 것이 바로 증권거래법상 업무 규정 14조 2항이다.
이런 제도를 인정하는 것은 주가 흐름의 연속성을 보장하기 위함으로 기세가 매매가 형성되지 않았을 뿐, 호가가 시세의 흐름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 결과다.
“과연 증권거래소에서 말을 듣겠습니까?”
“사실 이 규정에 불만이 가진 사람들이 꽤 많아. 이걸 원상태로 복귀시키면 전날 종가에 비추어 가장 낮은 매도 호가 또는 매수 호가로 가치가 결정되니, 잘만 하면 당분간은 시세를 조종할 수도 있겠지 그래.”
“기세를 이용한다라, 이렇게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솔직히 그건 주가 조작 아닙니까?”
꺼림칙해 하는 강태준의 말에 백 할머니는 태연한 기색으로 대꾸했다.
“그걸 누가 정하나. 정부가 정치자금 마련한답시고 증권가를 들쑤셔 마비시키는 건 합법이고, 개인은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되는 건가? 내 생각에는 사채 동결 같은 조치야말로 개인의 재산권을 침해하는 폭거라고 생각하는데 말이야.”
“흠…….”
“합법과 불법의 경계란 참으로 애매한 거야. 선택은 자네 몫일세.”
사채 동결 때의 빚을 갚는 것이라는 말에 강태준은 내심 고민에 빠졌다. 이대로 통운을 포기할 것인가. 아니면 그렇게라도 자금을 확보할 것인가.
‘그래. 딱 한 번만. 딱 한 번만 손대는 거다. 그다음에 깨끗하게 정리하자.’
일단 눈앞에 보이는 먹잇감부터 쥐고 나서 원상복구시키자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어차피 정부도 바보가 아닌 이상 계속 그 상황을 내버려 두진 않을 것 아닌가.
큰 결심을 한 강태준은, 증권협회 상임이사인 이원석과 장원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업무 규정을 바꾸자고? 그게 무슨 뜻인지 아는가?”
“그래도 한번 도와주십시오. 만약 도와만 주신다면 제가 증권 시장을 한번 일으켜 보겠습니다.”
강태준은 정·재계를 다니며 한 번씩 빚을 지운 사람들에게 도움을 호소했다. 증권가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이 대거 규정의 모순을 지적하며 시세가 제대로 반영되지 않고 있다고 주장하자, 증권 당국으로서도 마냥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증권가를 좌우하는 상임 이사진의 입김을 절대로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내부적으로 회의가 열렸고, 엄청난 격론 끝에 강태준의 주장이 어떻게든 받아들여졌다. 규정 통과 소식을 들은 증권팀은 환호의 도가니가 되었다.
“회장님, 성공입니다. 업무 규정이 개정되었답니다!”
“그래. 바로 작전 개시해!”
흥분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상황을 파악한 강태준은 수십 군데의 증권회사에 무제한으로 매수 주문을 냈다. 파는 물량이 없으니 가격이 제대로 형성될 리가 없었고, 거래는 당연히 체결되지 않았다. 그렇게 되니 기세가 형성되어 통운의 주가가 폭등했다.
상황 변화를 면밀히 살피던 강태준은 호가와 물량을 내고 빼면서 완급조절에 나섰다. 시세에 의해 기세가 결정되는 미래와 달리, 현재로서는 전날 종가에 비추어 가장 낮은 매도 호가나 매수 호가로 가격이 잡혀 버렸기 때문에 이런 변칙이 통했다.
상황이 그렇게까지 되자, 이제 누가 갑인지는 명확해졌다. 신문상에서도 명동을 좌우하는 이 움직임에 대해 연일 갖가지 추측성 기사를 내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증권가 큰 손으로 부상한 강태준의 자택 앞으로 꼭두새벽부터 수십 대의 자가용을 탄 증권업자들이 몰려와 눈치를 봤다.
물론 그렇게 노골적으로 행동을 하니, 사정을 익히 아는 업계인들의 눈초리가 고울 리 없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증권업자들 일부는 증권거래소로 따지러 갔고, 그 선두에는 이억수가 있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개인이 호가를 제멋대로 내다니요.”
“능력이 되면 그쪽도 하면 되잖소?”
“아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이런 말도 안 되는 주식 운용은 용인되어선 안 된다는 말 아니겠습니까.”
“왜 안 되는데? 그래서 손해 본 사람이라도 있나?”
“소장님! 장난하십니까? 이걸 보고 그냥 내버려 둔다고요?”
“증권이 활성화되어야 나라도 사는 법이요. 당분간만 기다려 봅시다.”
정부에서는 일단은 암묵적으로 사태를 묵인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고 할까. 파국에만 이르지 않으면 어떤 방식으로든 증권이 활성화되면 그만이라는 것이 정부의 본심.
일단 증권가가 살아날 때까지 기다려 보자는 마인드로 팔짱을 끼고 지켜보기로 한 것이다.
강태준의 책동전이 효과가 있었는지 통운주는 일반 투자자의 매수 심리까지 가세되어 8천 원을 넘어섰다. 보다 못한 중정에서도 사태를 좌시하지 않고 수사망을 뻗쳐 왔지만, 이미 몇 번이나 증권가에 분탕을 친 주범으로서 윗선의 허가 없이 자본 흐름에 개입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되자 거래소의 분위기는 회의장 바깥까지 고함이 오갈 만큼 살벌하게 변했다.
업무 규정 변경으로 손해를 본다고 생각한 매도 측에서 강력히 반발했던 것이다.
“그래서, 업무 규정을 바꾸지 않겠다는 거요?”
“일단 위에서 오더가 떨어지기 전에는 힘듭니다.”
증권거래소 측은 원론적인 입장만 번복하자 제풀에 화가 난 이억수가 밖으로 나와 씩씩거렸다. 홧김에 돌을 걷어찬 녀석이 소리를 질렀다.
“이런 빌어먹을! 주식 시장을 활성화하기 위해 불성 거래를 줄여야 한다고? 그게 말이 되는 소린가?”
“핑계 대는 거 아니겠습니까. 거래소 입장에서는 침체된 경기를 회복한다는 명분도 있고 수수료도 챙길 수 있으니 나쁠 것 없지요.”
증권거래소 이사장인 박치근은 이억수의 거듭된 요청에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주식 거래량이 늘어야 재정상으로도 득이 되니, 그 입장에서는 손해 볼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정부 역시 여전히 상황을 지켜보자는 입장을 고수했다. 경기가 과열돼서 파동이 발생할 정도가 되지 않고서야 굳이 나설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강태준은 이미 정·재계에 심어 놓은 인맥들을 통해 어느 선까지 정부가 용인 가능한지 정확하게 예측하고 있었다. 그렇게 교묘하게 선을 넘나들던 강태준은 돈을 들이지 않고도 주가를 상종가까지 끌어올리면서 통운주를 쥐락펴락할 수 있었던 것이다.
증권가의 큰 손들의 지원까지 더해지자 이제 모든 것은 식은 죽 먹기처럼 보였다.
하지만 모든 것이 원하는 대로 풀리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오성 쪽에서 움직인 것 같습니다.”
“이재무가 갑자기 왜?”
운송업에 들어가기 위해 매수한 것인지 아닌지는 분명치 않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경쟁자가 등장한 것이다. 오성이 갑자기 움직이자 전략기획실은 속내를 파악하기 위해 분주해졌다.
“왜 뜬금없이 들어왔는지 아직 미지수입니다만 어떻게 할까요?”
“괜찮아. 이미 유통 가능 주식의 6할은 우리가 확보했으니. 정부에서 공매 입찰할 때 추가 매입을 하면 돼.”
어차피 지금 단계에 일반 매집으로 확보할 수 있는 분량은 충분히 얻었다. 무리하게 매집에 힘쓰기보다는 사고팔기를 되풀이하면서 새로운 작전에 들어가는 편이 옳다는 생각이었다.
그건 다름 아닌 정치권에 대한 로비였다. 이미 강태준은 통운 인수에 최대 난관은 정치권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최대길 공민당 재경위원장과 윤중로 중앙정보부장, 박제후 대통령 비서실장과 김필중 공민당 총재 등 권력의 실세를 차례로 만나서 통운 인수 건에 대한 당위성을 설파했다.
“강 회장의 뜻은 이해하지만, 현 정부로서는 독과점 형성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어요.”
“애초에 그렇다면 민영화 자체를 재검토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실 이만한 매물을 인수할 자금력을 지닌 회사가 국내에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건 정부가 판단할 문제예요.”
“대국적으로 생각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지금 상태로 인수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워크아웃을 하는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때까지 회사가 표류하면 국가적인 차원에도 손해입니다.”
“허어 거참. 굳이 그렇게 해야겠어요. 욕심 많은 사람 같으니.”
“그렇게 색안경을 끼고 보시지 마시고. 한번 기회를 주십시오. 저희 백경 그룹이 운송 부문을 인수한다면 더 건실한 기업으로 만들어 놓겠습니다.”
물론 그런 로비에 대해 탐탁잖게 생각하는 사람도 많았고, 접촉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은 사람도 간혹 있었다. 일부는 면담 자리에서 대놓고 의혹을 제기하기도 해 강태준을 난처하게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로비가 효과가 없는 것이 아닌지, 수뇌부의 의지도 점점 강태준 쪽으로 기울었다.
“이거, 아무래도 통운 쪽 인수는 강 회장에게 맡기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각하! 한 회사에만 너무 특혜를 주는 건 좋지 않습니다.”
“나도 알아. 하지만 다른 건 몰라도 강 회장이 실력 하나는 그만 아닌가? 아니면 150억짜리 빚더미 회사를 살릴 수 있는 묘안이라도 있는 건가?”
“그건…….”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그만 아닌가? 대안 없이 떠들어 봐야 소용없어.”
청와대의 입장은 어찌 되었든 강태준이란 인물은 유능한 기업가라는 생각이었다. 영도조선공사를 포함한 적자 기업들을 효과적으로 정상화한 공을 기억했기에 신임과 기대가 두터웠던 것이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정부에서는 예정대로 증자 기업 5곳의 보유 주식을 공매 입찰로 매각하기로 했다.
물론 덩치도 그렇고 인지도 면에서 여명통운보다 시선을 끄는 매물은 없었고 여명통운은 1차 공매를 앞두고 자산재평가를 거쳐 무상증자를 실시해 발행 주식을 2,000만 주까지 불렸다.
그런 다음 공매를 거쳐 발행 주식의 27%인 540만 주를 민간에 추가로 매각하기로 한 것이다.
경매가를 납입가 이상으로 제한하면 소액 투자자들은 들어올 수 없게 되니, 이제 진검승부다. 공매가 진행되기에 앞서 오재갑이 새로운 소식을 전했다.
“발해원양 쪽에서는 손을 털 예정인 것 같습니다. 오성 쪽과 접촉 중이라고 합니다.”
“결국 그렇게 나오는군. 생각보다는 오래 버텼네.”
“다만 오성이 추가 입찰에 참가하면 인수액이 올라가 부담스러워질 확률이 높습니다. 협상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마 그래야겠지. 당장 이재무와 약속을 잡아 보게.”
강태준은 오성과 직접 담판을 짓기로 했다.
무슨 수를 쓰든 오성으로부터 입찰 전 양보를 받아 낼 생각을 한 것이다. 이재무와 만난 자리 서로를 마주 본 둘이었다.
“어이구, 강 회장.”
“이 사장님.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안녕 못하오. 그쪽 때문에 매우 곤란해졌지요. 그래.”
타의로 반도체 쪽에서 완전히 손을 뗀 이재무는 온몸으로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마침 C-MOS칩 개발이 뒤늦게 성공하면서, 공고할 줄만 알았던 후계 구도에 미묘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