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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재벌 강태준-335화 (335/361)

335화 기세를 타다

물론 명동에 위치한 증권회사들의 수는 무려 50개가 넘는 만큼, 선발 요원들로서는 한시도 쉴 틈이 없었다. 그래서 각자 임무를 받은 요원들은 마치 단타에 미친 업자들로 가장해 증권회사 문턱을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그렇게 새벽 한두 시끼지 증권사 일대를 휘젓고 다니다 날이 저문 후 자택으로 돌아와 강태준과 함께 그날의 주문량과 차금을 점검하고, 다음날의 목표 가격을 설정하곤 했던 것이다.

“아직 들키지 않았지요?”

“아무래도 계속 돌아다니다 보니 알아보는 사람들이 생긴 것 같아요.”

“그거야 어쩔 수 없습니다. 차라리 등잔 밑이 어둡다고 그게 자연스럽지. 차라리 당당하게 행동하십시오.”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신 주요 매매 창구는 명동증권 쪽으로 정하는 게 좋겠네요. 일단 통운주 매입만 하다가는 들키니, 위장용으로 다른 주식도 사고팔도록 합시다.”

강태준은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일부러 증금주와 보험주 등을 매입해 혼선을 주고자 한 것이다. 위장용 증권을 매입하다가 재수 없게 물리는 경우도 간과할 수 없었기에, 자금 운영에 차질을 빚지 않으려면 정확한 계산과 충분한 여유 자금이 필요했다.

물론 시중에서도 여명 통운이 매물로 나오자 인수자가 누가 될지를 두고 세간의 관심이 쏠렸다. 다른 회사들의 경우에는 덩치가 상대적으로 작아 인수희망자들이 금방 나타났지만, 통운의 경우 워낙 덩치가 큰 회사다 보니 쉬이 인수에 선뜻 나서는 기업들이 없었던 것이다.

특종을 바라는 기자들은 통운의 새 주인이 누가 될지 각 회사를 돌아다니며 정보를 캐내기에 열심이었다. 일선 임원진들에게도 여러 번 질문이 돌아갔지만 그때마다 언질을 받은 임원들은 모두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글쎄요. 개인적 사견으로는 우리 백경이 그걸 인수한다고 해서 특별한 시너지가 있다고 보지는 않네요. 굳이 적자 덩어리 회사를 인수한다? 리스크가 좀 클 것 같습니다.”

“그런 부분은 회장님이 판단하실 문제 아닐까요? 저는 그룹 전체의 입장을 대변할 위치가 아닙니다. 저희들로서는 아직 그런 부분에 대해 이야기는 못 들었습니다.”

임원들은 철저하게 입단속을 하기로 내부 정리가 되었던 만큼 철저하게 모르쇠로 일관했다. 오성 역시 반도체에 거액을 투자한 관계로 추가 지출은 지양한다는 입장이었지만, 미래건설의 경우에는 절대 안 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영화라는 카드는 대국적인 관심을 끌기 충분했다. 아무래도 오일 쇼크로 경기가 침체되었던 만큼, 반등의 여지가 필요했던 것이다.

정부의 노력과 인수에 참가하는 기업 간 신경전으로 인해 증권 시장이 일대 활황에 접어들었지만 여전히 통운의 주인은 오리무중이었다.

그러나 강태준의 증권팀이 주식 확보에 힘쓰는 사이 한쪽에서 예기치 못한 복병이 등장했다.

“안 좋은 소식입니다. 발해원양이 증권을 사들이고 있습니다.”

발해원양 쪽에서 통운주를 사들이는 것이 작전팀에 포착된 것이다.

“응? 발해 놈들이 무슨 돈이 있다고?”

“듣기론, 연탄 파동 때 한번 데이고 나서 오일을 엄청나게 쟁여 뒀는데 오일 쇼크 덕분에 돈을 벌었다고 합니다.”

신경증에 가까운 이억수의 집착이 오히려 득이 된 것이다. 연탄 파동 이전까지는 꽤나 원시적인 설비를 썼는데 출판사에 쓰던 잉크가 얼어 버리는 사태가 발생하자 오일 보일러로 회사 설비를 전부 바꾸면서 등유나 휘발유 같은 석유류 제품을 무진장 사 두었던 것.

거기에 선박용 벙커 C유를 비롯해 미리 쟁여 두고 있던 오일값이 대거 폭등하면서 어마어마한 돈을 벌어들였던 것이다.

“이거 이거, 소 뒷걸음치다 얻어걸린 셈이군.”

“그렇다면 지분 인수는 인수를 겨냥한 건가?”

“모르겠습니다. 작전용인지 아니면 차금을 얻으려는 건지, 아직은 미지수입니다.”

“설마 들킨 걸까요?”

강태준으로서는 별로 예상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다. 실제로 인수에 참가하지 않는다 해도 정상화 이후의 주가 반등을 노린다면 충분히 가능할 법한 시나리오. 백제교역에 투자하기 전까지 여명통운은 애초에 한국중석이나 대우화재와 함께 대표적인 자산주로 꼽히는 회사였다.

단기적인 주가 등락도 심하지 않고 비교적 높은 배당 수익을 얻을 수 있던 회사로 나름 우량주로 꼽혔던 것이다. 하지만 예단은 금물인 만큼 강태준도 조심스럽게 접근해 보기로 했다.

“지금 저점을 찍었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지. 아무튼 아직 들켰다 확신할 수는 없으니 경거망동하지 말고 단도리 잘하게.”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일단 증권사 몇 개는 정리하고, 활동 반경을 줄이게. 우리가 눈치챌 정도면 저쪽도 이미 낌새를 깠을 수도 있어.”

“혹시 미행이라도 붙을 수도 있을 거 같은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때는 무조건 남산 쪽으로 가. 아무리 급해도 회사 차를 이용해서는 안 되네.”

일부러 선글라스랑 검은 양복을 입은 어깨들까지 동원해 총력전에 나섰다. 첩보영화나 다름없는 인수 작전이 이어지면서 뒤늦게 세력이 개입한 것을 파악한 이억수도 촉각을 곤두세웠다.

“뭐라구? 중정이 개입해?”

“네. 뒤를 밟아 봤는데, 아무래도 이거 싸하지요? 이미 내정자가 있는 거 아입니까.”

“멍청한 놈 같으니라고. 중정이 아무 때나 개입하는 줄 아나.”

“그러믄요?”

“분명히 작전을 들어간 놈이 있어. 우리에게 혼선을 주려는 거겠지.”

이억수도 증권 쪽에 발을 담가 본 경험이 있었던 만큼 쉽게 속진 않았다.

하지만 몇 번이고 정부에 털려 본 경험이 생생해서일까. 다른 녀석들은 꺼림칙한 분위기가 역력했다.

“그래도 잘못 개입했다간 개처럼 털리는 거 아닙니까?”

“인마. 뭔 겁이 그렇게 많아. 안 걸리면 그만 아니냐. 안 걸리면. 우리도 적당히 치고 빠진다. 매수는 계속해.”

실탄이 많아져서인가, 이억수는 평소보다 간덩이가 부어 있었는지 제법 과감하게 행동했다. 그렇게 양쪽이 힘겨루기를 하니 시장에서 심상찮은 조짐이 나타났다.

당시 액면가 1,700원에 불과했던 주식이 3,000, 4,000원대까지 치솟아 버린 것이다. 자본금이 50억 정도에 발행 주식 총수가 750만 주 정도였는데 양쪽에서 대량 매수에 나서니 주가가 크게 출렁이게 된 것이다.

한쪽이 매수하면 반대쪽에서는 매도하는 세력이 된 상황에서 줄다리기가 이어졌다. 무작정 사재끼기에는 부담스러운 가격이 된 것이다. 그러던 중에 강태준 쪽의 자금 사정에 문제가 생기는 일이 발생했다.

“큰일 났습니다. 회장님. 지금 건설 중인 펫푸드 통조림 공장에 화재가 났다고 합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석유 저장 시설에 낙뢰가 꽂히는 바람에 화재가 난 것 같아요.”

텍사스 쪽에서 공장 건설을 하던 중 하필 공장 근처 석유 저장 시설에 화재가 발생하며 불이 옮겨붙어 버렸다는 것이다. 피뢰 설비 일제 점검에 소홀한 탓이었는데, 건조해진 날씨에 산불로 번지며 공장지대가 전소되어 버린 것이었다.

완공만을 기다리던 공장이 홀랑 타 버렸다니, 백경그룹에서는 뜻밖의 악재에 망연자실했다.

“아 젠장.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공사가 문제가 아니군요. 혹 직원 중에 다친 사람은 없습니까?”

“예. 다행히 모두 제대로 대피했습니다.”

“화재 보험에 가입해 두었으니 그나마 다행이군요.”

“네. 다만, 보험 계약상 범위에 따라서 전부 커버할 수는 없을 것 같고. 아무래도 실화 가능성도 있다는 소리가 있어서 보험금을 타는 데까진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이미 계약된 물량도 있고, 설비가 완전히 타 버리는 바람에 지금 다시 지으려고 해도 공기를 맞추기 쉽지 않다는 점이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불가항력에 의한 피해였지만 모두가 그런 사정을 양해해 주진 않을 터.

강태준 입장에서는 자칫 잘못하면 막대한 양의 위약금을 물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하는 수 없지요. 다시 빨리 짓는 수밖에. 이미 계약한 물량은 다른 회사 쪽으로 하청을 주는 수밖에 없겠군요.”

“알겠습니다.”

“일단 돈은 생각 말고 최대한 빨리 설비부터 수소문해 보세요.”

스태그플레이션으로 인해서 설비 가격이 급등한 상황이라 추가 지출은 피할 수 없었지만, 강태준은 일단 신용을 우선하기로 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때아닌 악재로 백경그룹의 주가가 흔들리자 눈치 빠른 주주들이 공매도에 나선 것이다.

“재수도 오질나게 없지. 세상에 벼락을 맞다니.”

“근데 이번 건은 좀 크군. 천하의 백경이라도 타격이 없을 수는 없겠는데.”

“하긴 백경 그룹 주가가 너무 올랐지. 거품이 낀 만큼 빠질 필요가 있을 거 같아.”

상황을 지켜보던 작전 세력이 개입해 흔들기에 나서자 여론이 급격히 출렁였다. 타겟이 된 것은 인피그램을 비롯한 게임회사들과 백경식품, 그리고 물산을 포함한 상장사들이었다.

그간 연이은 신사업 성공으로 백경 그룹에 대한 가치 평가가 상당히 높아져 있는 상황이었기에 그 낙폭도 어마어마하게 컸다.

“어떡할까요. 작전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냥 둘수 없지요. 당장 자사주를 대량 매입하십시오.”

자기 회사가 작전꾼들의 타겟이 되는 꼴을 그냥 둘 강태준이 아니었다. 주가 방어를 위해 부랴부랴 자사주 매입에 나선 강태준은 대량으로 현금을 투입해 추가 공격을 막아 냈다.

다행히 주가 하락을 힘으로 때려 막긴 했지만, 자금 사정이 일시적으로 경색되는 건 피할 수 없었다. 그렇게 되자 통운 인수 계획도 차질이 빚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주가 방어에 돈을 너무 많이 썼습니다. 이렇게 되면, 아무래도 정부가 보유 주식을 공매 입찰할 시점까지 저희가 실탄이 충분할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이제 와서 통운 인수 계획을 백지화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고지를 코앞에 두고 좌절할 그가 아니었다. 강태준은 궁리 끝에 증권계의 대모이기도 한 백 할머니를 찾아가기로 했다. 백 영감과 함께 만난 이후로 편지로 안부를 묻기는 했어도 다시 보기는 오랜만이었다. 평창동 집에 찾아가자 한결 포근해진 외모의 그녀가 강태준을 맞았다.

“아이구 강 회장 왔구먼. 여기 앉아. 한동안 소식이 없더만 혹 돈 빌리러 왔나?”

“뭐 겸사겸사요. 제2금융권 준비는 잘 되십니까?”

“그럭저럭이지. 여기저기 숟가락 얹으려는 놈들이 한둘이 아니라서 말이야. 그래도 어떻게든 진행되는 걸 보니 내가 헛살지는 않았나 보이.”

잠시 후, 손녀로 보이는 꼬마 아가씨가 식혜와 간단한 다과를 내왔다.

평생 소망이던 금고 설립이 코앞이라서인지 표정이 매우 온화해 보였다.

강태준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그녀가 묵묵히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 추가 자금이 문제라고?”

“예. 일시적으로 돈이 묶이는 바람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빌리는 것보다 손쉬운 방법이 있잖나. 주가를 끌어올려서 차금을 만들어 보지?”

“그러려면 주식을 더 많이 사야 했는데, 방법이 생각이 잘 안 나네요.”

그러자 백 할머니가 잠시 고민하더니 명쾌한 어조로 대꾸했다.

“호호. 무슨 그런 어려운 생각을 하는가? 규정을 이용하면 되지.”

“네? 무슨 규정 말입니까?”

“증권거래법상 기세와 관련된 규정 말일세. 거래가 이루어질 때 복수 가격을 형성시키게 되어 있는 규정을 약간만 손보면 되는 거지.”

증권 파동 이후 신설된 증권거래소 업무 규정 14조 2항을 살짝만 고치면 된다는 말에 귀를 쫑긋한 강태준이었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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