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2화 대구가 제철
그만큼 C-MOS칩이 생산에 들어간 것은 획기적이었다. 무엇보다 기술 변방이었던 한국에서 이 정도 첨단 기술을 만들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고무적인 일. 볼브 같은 명차 회사에서 백경을 선택했다는 것은 한국인에게 자부심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전혀 반대인 회사도 있었다. 백경이 먼저 C-MOS를 개발했다는 소식에 긴급회의를 소집한 오성전자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살벌했다.
“백경이 개발을 끝낼 때까지 우린 대체 뭐한 건가? 아니, 어떻게 그걸 모를 수가 있어?”
“면목 없습니다.”
연구진들은 죄스러운 듯 모두 땅만 바라보고 있었다. 분을 참지 못한 이재무가 씩씩거리며 중얼거렸다.
“강동기 그 자식, 감히 우릴 이렇게 엿을 먹이다니. 김 비서, 법적으로 해 볼 만한 건 없나?”
“쉽지 않을 겁니다. 법적 분쟁을 다루려면 미국에서 싸워야 하는데, 현재 법무팀 중에 백경만큼 빵빵한 곳이 없습니다. 아마 별도의 조치를 다 취해 놓았을 겁니다.”
“미치겠군. 그래서 이렇게 손 놓고 당하고만 있으라는 건가?”
이슈를 선점당한 오성으로서는 이제 후발주자가 된 셈이었다. 백경의 주가가 오른다는 이야기는 반대로 오성에게는 악재였다. 극도로 침울해진 분위기에 눈치만 보는 연구원들. 잠시 후 이재희가 입을 열었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속도가 늦어진 건 아쉽지만 우리도 개발을 서둘러야 합니다.”
“저쪽에서 이미 C-MOS 시장을 선점했다는 게 문제지. 막대한 개발비를 퍼붓고도 성과가 이따위면 차라리 정리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어.”
“형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반도체 사업은 이제 걸음마 단계입니다. 시장은 무한하고 앞으로 팔 곳도 많습니다. 지금 반도체를 포기한다는 건 전자산업 전체를 포기한다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이재무의 폭탄선언에 이재희는 매우 다급해졌다. 원래부터 이재무는 이번 사업에 대해 별로 탐탁지 않아 했다.
본인이 후계 경쟁을 앞서나가는 상황에서 굳이 리스크를 질 이유가 없지 않은가. 반대로 이재희는 입장이 달랐다. 사업 부진을 빌미로 프로젝트가 취소되면 그룹에서 완전히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될지도 모르는 만큼 필사적이었다. 그런 이재희를 구해 준 건 다름 아닌 아버지였다.
“그래, 재희 말이 맞다. 아직은 아니지.”
“아버지, 여기는 어떻게?”
갑자기 등장한 회장에 화들짝 놀란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섰다. 이재무는 지팡이를 짚고 등장한 아버지의 모습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쯧쯧. 내 이럴 줄 알았다. 상황이 이 모양인데 대책은 못 세울망정 형제끼리 싸움질이냐?”
“송구합니다.”
“백경 놈들에게 밀렸다고 벌써부터 죽을상이라니, 이놈들아. 오히려 좋은 일이 아니냐. 앞으로 반도체 사업이 어떤 식으로 발전할지 미리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 말씀은……?”
“투자는 계속한다. 재무 너는 전자 쪽에서 손 떼고, 재희가 총괄해라.”
“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사공이 여럿이니 배가 산으로 가는 게 아니냐. 어차피 재무 네 녀석이 이쪽 분야까지 커버하기는 전적으로 무리였다.”
“하지만 아버지!”
“어쭙잖게 나서지 마라. 이건 근본적으로 네 책임이야 이놈아, 네놈이 중심을 못 잡아서 이 꼴이 된 것이 아니냐?”
이재무가 항변하려고 했지만 이병구가 도끼눈을 치켜뜨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잔말 말고 이번에는 내 뜻에 따르도록 해라. 김 사장도 본사로 돌아와. 자리 마련해 둘 테니.”
“예. 알겠습니다.”
김재박은 토 한 번 달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할 말 끝났으니 다들 나가 봐. 나는 재희랑 따로 할 말이 있다.”
이재무가 입을 우물대었지만 결국 아버지의 말을 따랐다.
이재희와 단둘이 마주 본 이병구가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원하는 대로 되었구나. 정말 반도체 사업을 계속할 생각이냐?”
“예. 감사합니다.”
“고마워할 것 없다. 아버지로서가 아니라 사업가로서 냉철하게 판단한 결과야. 이제부터 일이 잘못되면 오롯이 네 책임이다.”
“물론입니다. 아버지. 저도 그 정도 각오 없이 시작하진 않았습니다.”
결기를 다지는 이재희를 물끄러미 보던 이병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나가 봐. 예산안부터 다시 짜오거라.”
그러자 옆에서 시립하던 측근이 중얼거렸다.
“정말 셋째가 혼자 하게 놔두실 참입니까? 양쪽에서 견제가 심할 겁니다.”
“막내한테도 기회는 줘야지. 천하의 오성그룹을 아무한테나 물려줄 수는 없지 않겠나?”
“그럼 둘째는?”
“두고 봐도 똑같아. 계열사 사장은 몰라도, 그룹을 이끌 그릇인지는 모르겠군.”
나이가 들면서 수성에 급급해진 이재무는 도전적인 색깔을 잃어버리고, 점점 현실에 안주하는 색깔을 보이고 있었다.
동생까지 견제하는 모습에 점점 실망감이 커지는 이병구였지만, 그는 매우 냉철한 사람이었던 만큼 겉으로는 별로 표시를 하지 않았다. 이제 이재희의 경영 능력을 확인하는 시험대. 그렇다면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줘야 한다.
“그럼 초기 투자액은 얼마 정도로 하는 게 좋겠습니까?”
“예산은 300억 정도는 필요하지 않겠나? 아마 몇 년은 쏟아부어야겠지.”
“그렇게 많이 말씀입니까?”
“이왕 밀어줄 거면 제대로 밀어줘야지 않나?”
투자에 신중하지만, 사업성만 확인되면 과감한 지출을 주저하지 않는 것이 이병구의 특징이었다. 패스트 팔로잉 전략으로 덩치를 키워 온 오성에게는 오히려 합리적인 판단. 사실 오성호라는 거인을 이끌기에 적합한 사람인지 테스트이기도 한 것이다.
[오성그룹, 반도체 개발 총력전 결의]
[반도체 강국으로서 발돋움하기 위해 필사즉생의 각오로 임할 것]
아버지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이재희 역시 결기를 불태웠다. 단독 사장 취임 직후, 임원진을 모두 물갈이하고 삭발 쇼를 하면서 반도체 기술 개발에 임할 것임을 천명한 것이다.
“이야, 역시 오성이네. 여기서 멈칫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대놓고 밀어주네요.”
“C-MOS 사업부도 컴팩트하게 정리했다고 합니다. 아주 독기를 품었는뎁쇼?”
“뭐 열심히 하니까 좋구먼. 오성 쪽에서 저렇게 나오면 오히려 홍보가 돼서 나쁘지 않아.”
앞서나가는 입장인 만큼 강태준은 여유로웠다. 시연회에서 VR의 여파 덕인지, 볼브 사의 신차는 국내 착륙과 동시에 6개월 치 예약분이 매진되는 기염을 토했다. 덕분에 안전벨트 기술을 향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다른 메이저급 회사들에서도 주문이 폭주했던 것이다.
칩 가격이 장당 6~8달러로 치솟으면서 수요가 폭증하자 미국 공장에서는 24시간 풀 가동에도 공급이 딸릴 정도였다.
“이제 몇 개월이면 바로 흑자 전환될 거 같습니다.”
“그거 좋은 일이군. 이게 다 강 박사 덕분입니다.”
“아닙니다. 제가 한 일이 무어 있겠습니까?”
겸양을 하는 강동기였지만, 고무적인 성과를 낸 것은 그의 공이 절반 이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해가 지나가면서 C-MOS 판매량은 안정세를 찾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강태준으로서는 슬슬 때가 되었음을 느꼈다.
“여기서부터는 내가 손을 대지 않아도 되겠군요.”
“무슨 섭섭한 말씀을.”
“아닙니다. 앞으로는 우리 강 사장이 제대로 이끌어 주세요. 앞으로 강동기 사장이 말하는 건 내 말이라 생각하고 잘 따라 주시기 바랍니다.”
양자 효율과 판독 노이즈 저감 성능 개선 같은 전문가 영역은 개발자한테 맡기고 자기는 큰 방향만 잡아 주면 될 것이다. 강태준은 솔직히 실리콘 제련 쪽도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다. 바스크 케미트로닉스와 합작해 발광 다이오드를 포함한 반도체 소자 연구 쪽에도 분야를 넓히기로 한 것이다.
반도체 사업부에서 손을 뗀 강태준은 다시 물류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이번 일로 재차 깨닫게 된 것은 물류의 중요성이었다. 강동기가 그렇게 심혈을 기울인 반도체 사업을 타인에게 넘겨줄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생각하면 결국 설비가 제때 도착하지 못한 영향이 크다.
아무리 주도면밀하게 계획을 짜더라도 수송이 제때 적합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소용없지 않나. 간발의 차이로 물건값과 배송료가 달라지고, 생산 스케줄이 모두 꼬여 버리기 때문이다.
물론 오일 쇼크라는 불가항력이 있었지만, 사건이 터졌을 때 얼마나 빠르게 대처할 수 있을지가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법. 강태준도 물류 대란을 연이어 경험하면서 화물을 더욱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시스템 구축의 필요성에 대해서 인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확실히, 역사가 조금씩 미묘하게 바뀌고 있다.’
큰 틀에서는 복원력이라는 것이 작용할지도 모르지만 확실한 건 시간의 축이 크게 비틀리고 있다. 중동전쟁부터 오일 쇼크까지, 결과와 시간이 미묘하게 달라지면서 강태준 스스로도 통제할 수 없는 변인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미래 정보를 선점한다는 장점이 아예 없어지진 않겠지만 그것만 전적으로 믿고 있을 수는 없다. 그래서 강태준은 물류 시스템 구축에 심혈을 기울였다. 뭔가 사건이 터졌을 때를 대비함이었다. 물론 동시에 정보력을 강화하는 쪽도 힘을 썼다.
“해외에 파견하는 상사 주재원들을 두 배로 늘립시다. 입사부터 가장 성적이 좋은 사람들 위주로 선발하도록 하지요. 향후에 주재원 출신들이 우선 승진할 수 있게 특별히 배려할 생각입니다.”
“주재원들을 말입니까?”
“듣자 하니 지금 백경 내부에서도 공채랑 타사 출신 간에 갈등이 있다고 들었어요. 거기다 내 입으로 하긴 좀 그렇지만, 영도회 출신들을 두고 무슨 성골이니 진골이니 말까지 나온다고 하던데 맞습니까? 오 사장?”
“예. 부끄럽지만 그렇습니다.”
오재갑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다. 조직이 커지면서 어디서나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었지만, 이번에는 정도가 심했다. 사실 최근의 인사 개편 때는 영도회 출신들이 엄청나게 약진하는 양상을 보였던 것이다.
부장, 임원급 비중만 30%에 달할 정도였으니 인원 대비로는 그야말로 압도적인 수치였다. 철저한 능력주의에 코드 인사와는 담을 쌓은 오재갑이 고심 끝에 승진 대상자 비율을 하향 조정했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다면 절반이 넘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오 사장이 어떤 마음으로 그렇게 정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차별이 꼭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어떤 곳을 가더라도 실적을 내는 사람이 대우받기 마련이고. 그런 사람들을 생판 외부인을 동일선상에서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조직이 고착화되는 건 별로 좋다고 보지 않습니다.”
“그 말씀 전적으로 이해합니다.”
“이번에 고과에 밀려서 아쉽게 떨어진 사람들에게도 재도전의 기회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해외에 관심 있는 사람들 위주로 차출해 보세요.”
보통 주재원들은 직장생활의 꽃이라고 하지만 일선 과장급 정도 경력을 쌓은 인재들은 해외 파견을 기피하는 성향이 강했다. 파견을 갔다 오면 자리가 없어지는 경우는 있어도, 승진하는 경우는 오히려 드물었기 때문. 커리어에서 마이너스가 되는 것을 강태준이 대놓고 밀어주겠다고 공언한 것이다.
‘해외 시장을 경험해 봐야 보는 시야를 넓힐 수 있어.’
인사 적체를 방지하고, 보직 순환을 통해서 유대감을 강화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현지 언론은 물론 특파원들과의 교류도 힘썼다. 정보를 취합하는 즉시 문제점을 알아차려 대처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고자 한 것이다.
그렇게 강태준이 인력 개편에 힘쓰는 사이,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 겨울이 되었다.
이른 새벽, 강태준 일행은 거제 위판장을 찾았다. 강태준에게는 일종의 연례행사 같은 일로 현지의 사정이나 분위기를 알아볼 수 있는 좋은 수단이었다.
특히 강태준이 직속으로 관리하는 거제 위판장은 진해만에서 가장 큰 대구 집산지였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덕장에 걸린 대구와 물메기들이 반기는 가운데 큼직한 대구 궤짝을 나르는 사람들과 좌판을 깔아 놓은 상인들로 붐볐다.
“무슨 대낮도 아니고, 장난이 아니구먼요. 다들 밤잠도 없나 봅니다.”
“다들 좋은 물건이 있나 나온 거죠. 올해는 특히 대구가 아주 풍년이라는군요.”
“그렇습니까?”
“수온 때문에 조업이 몇 년 뜸했잖습니까? 대구가 이래 많이 잡히긴 진짜 간만이라는데요. 아, 지금 경매 시작하려나 봅니다.”
안연복의 말처럼 경매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자 입찰 경쟁이 바로 시작되었다. 상인들이 진열된 대구를 보고 손가락을 펴며 입찰가를 부르면 경매인이 가장 높은 가격을 부른 번호로 낙찰을 알리는 방식이었다.
“에, 대구 한 야마에 5천, 5천, 나왔습니다. 아 5천 3,000원 10번!”
한 건 낙찰에 10초. 경매는 2시간여 동안 끊기지 않고 이어졌다.
위판장에 나온 대구는 총 2,400여 마리.
안연복도 한 궤짝 낙찰받는 데 성공했다.
“어때요. 낙찰받은 물건은 맘에 듭니까?”
“네. 크고 실한 놈입니다.”
안연복이 낙찰받은 물건은 길이만 1미터가 넘고 한 마리 무게만 20kg이 넘는 대물이었다. 퉁방울처럼 튀어나온 눈깔이 맑고, 아가미가 선홍색인 것이 반질반질 광택이 났다.
싱글벙글한 안연복의 모습에 강태준도 기분이 좋아졌다.
“이거, 물량이 지난해보다 훨씬 많은 거 같은데?”
“오늘은 평소보다 좀 적은 편이랍니다. 며칠 전 경매에선 3,000여 마리가 거래되었다 하네요.”
복만이의 말로는 근처 어판장과 부산 마산 일대의 어시장에서 매매한 물량을 더하면 이번에 잡은 물고기만 2만 마리가 훨씬 넘을 것이라고 했다.
“그보다 안 선생. 그걸로는 뭘 할 겁니까?”
“젓갈부터 담그려고요. 이게 진짜 별미거든요. 대구란 물고기는 아가미, 알, 눈, 껍질까지 하나도 버릴 게 없는 생물입니다. 특히 고니로 탕을 담그면 그 맛이 끝내주지요.”
“오, 저도 하도 오래전에 먹어서 그런가. 기억이 가물가물하네요.”
“아니, 그런 섭한 말씀을. 오늘 제가 제대로 기억나게 해 드리겠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일행은 용화루로 향했다. 대구는 비린내가 거의 없어 생선을 잘 먹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호불호가 갈리지 않는 물고기다.
담백하고 맑게 끓여 낸 대구 백숙을 생각하자 저도 모르게 군침이 돌았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