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1화 VR 혁명
답답해진 이재희가 측근에게 불만을 토로했다.
“애초에 개발이라는 것도 투자와 같지. 선택과 집중이야말로 투자의 기본 아닌가. 이렇게 근시안적이어서야 원. 일단 하나부터 해결해야 옳지 않나?”
“그러게 말입니다. 김 사장도 너무합니다. 너무 단기 수익에만 연연하는 것 같습니다.”
“이래서 전문 경영인은 안 된다는 거야. 어떻게든 강동기를 잡아야 했는데.”
하필 공동 사장이 이재무의 측근인 김재박이라 함부로 쳐내기도 어렵다.
이재희는 마음이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 애초에 반도체 권위자인 강동기가 있었다면 교통정리가 쉬웠겠지만, 외부에서 데려온 기술진들은 당최 말을 제대로 들어 먹지도 않았던 것.
소위 말해서 장인의 곤조를 부린다고 할까. 조직간 융화를 생각하지 않고 과감하게 스카웃을 한 것이 오히려 독이 된 것이다. 이재희로서는 후회막심이었다.
“처음부터 어떻게든 방향을 잡고 강력하게 끌고 갔어야 했는데.”
“이제라도 한쪽 팀은 포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대로는 개발 속도만 한없이 느려질 뿐입니다.”
“이미 늦었어. 지금 와서 그런 말을 들어 먹겠나. 이제는 어쩔 도리가 없네.”
연구 속도로 보아 지금이라도 한쪽을 포기하고 연구 인력을 하나로 모으는 것이 현실적이었지만, 누구도 그 의견을 함부로 내놓을 수 없었다. 기술자들이 서로 경쟁이 붙은 지금, 어느 한쪽을 포기시키는 것은 책임을 떠안는 것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거기다. 더 중요한 부분이 있었다.
‘형님은 아직도 나를 견제하고 있군.’
이재무가 벌써 불혹이 넘은 나이였지만, 이병구는 후계자에 대한 이야기를 공식적으로 하지 않고 있었다. 큰 실수만 하지 않는다면 자연스럽게 그룹을 물려받을 거라는 평이 대세이긴 했지만, 아버지를 잘 아는 이재희는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룹 전체까지는 몰라도, 전자만큼은 아버지 본인이 이끌고 싶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이재희가 할 수 있는 일은 기껏해야 불필요한 정치질을 하지 못하도록 양쪽을 중재하는 역할 정도였다.
그렇게 시간이 대책 없이 흐른 1975년 3월. 한국 국내에서 처음으로 볼브 사의 신차 시연회가 열린다는 소식이 들렸다. 동대문 운동장을 빌려 신차 런칭 행사와 시연회를 진행하겠다는 소식이었다. 이번 행사에는 김윤묵 볼보자동차코리아 대표와 스웨덴 대사가 참석하고 실제 도로 상황과 유사한 세트를 구성해 생생한 경험을 제공할 예정이라고 했다.
“세상에 별일 다 있군, 볼브 사가 한국에 진출하다니.”
“그러게 말입니다. 한국 시장도 많이 성숙한 모양입니다.”
자동차광이었던 이재희도 볼브 사로부터 초청장을 받았다. 손목시계용 C-MOS칩 개발은 여전히 지지부진한 상황이었지만, 자동차광인 이재희로서는 놓칠 수 없는 행사였다.
예정대로 전시회장에 도착하자 이미 굴삭기나 트럭 같은 차량들이 보였다.
이미 관람객들을 대상으로 중장비 기사와 함께 시승식도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거 생각 이상으로 궤도가 안정적이네요.”
“눈썰미가 좋으시군요. 크기는 좀 작아도 트랙 폭이 1,240mm로 타사보다 더 넓어 동작 시의 안정성은 더 뛰어납니다.”
시승식은 꽤나 인기였다. 내구성을 중시하는 볼브답게 시승에 동원된 차량들은 튼튼해 보였고 정비에 심혈을 기울여서인지 꽤나 좋은 평가를 얻었다.
“차량이 참 좋군. 타사 장비보다 외판도 두껍고, 움직임도 훨씬 부드러워.”
“그러게 말입니다. 우리 회사에도 몇 대 들여놔야 할 것 같습니다.”
간만에 나들이여서 그런 걸까. 양쪽에 아들들을 끼고 나온 이병구 회장도 평소보다 표정이 밝았다. 암 수술을 받은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활기였지만, 함께 따라 나온 이재무는 다소 지루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그보다 이런 거 말고 승용차는 어디 있나. 신차를 소개한다고 하던데.”
“하하. 곧 소개될 예정입니다.”
“그래 봤자 소형차 아닌가. 뭐 대단하다고?”
”이번 신차는 2,000cc를 넘을 예정이라는데요? 헤리티지 모델의 후속이 나온다는군요.”
“오 그래? 그거 기대되는군.”
5~60년대를 풍미했던 볼브 아마데우스는 두 개의 공기흡입구와 리어윙을 장착한 모델로, 당시로서는 매우 혁신적인 디자인이었다. 그래서일까. 인기가 어마어마했는데 출고 후 스웨덴에서만 30만 대가 넘게 팔린 스테디셀러이기도 했다.
“자자, 모두 들어오시랍니다.”
마침 신차 소개가 임박했는지 사회자가 대기하고 있었다. 미리 출입증을 받고 도착한 취재진들이 쫙 깔린 가운데, 감색 양복을 입은 사회자가 마이크를 들고 대기 중이었다. 마지막으로 이재희 일행이 도착하자 참석자의 면면을 확인한 사회자가 볼륨을 높였다.
-안녕하세요.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저희 모터쇼에 참가해 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저희 볼브에서는 1970년경부터 교통사고 연구팀을 꾸리고 드라이브 시 발생한 사고와 유형을 기록해 가며 연구 데이터를 꾸준히 축적해 왔습니다. 이번 신차 역시 안전 프로토콜을 중점으로 설계한 제품입니다.
차량을 덮긴 천을 벗기자, 새빨간 컬러의 세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날렵하게 생긴 외관에 비늘을 연상케 하는 형상의 범퍼가 인상적인 차였다.
취재진의 시선이 모여드는 가운데 사회자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자. 볼브 클라도 셀라케를 소개합니다. 이 차량은 아마데우스의 후속으로, 어깨까지 감싸는 방식의 3점식 안전벨트에 부스터 쿠션과 어린이용 안전벨트를 장착한 모델입니다. 이번 모델은 백경 그룹에서 새로 개발한 안전벨트용 C-MOS 기술이 적용되어 벨트 미착용 시 시동이 걸리지 않습니다. 또한 정숙성을 높이기 위해 최신의 서스펜션 설비를 설치했으며…….”
범퍼의 문양을 상어 비늘 형태로 만든 것은 공기 저항을 최소화하기 위함으로 최대 2,000cc 95마력까지 발휘하는 엔진을 장착해 파워와 가성비를 동시에 겸비한 제품이라는 소개였다.
뒤이어 기능에 대한 설명이 끝도 없이 이어졌지만, 충격을 받은 이재희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C-MOS라니. 그게 무슨 소립니까? 그건 우리가 개발하는 제품 아닙니까?”
“이게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설마 강동기가 백경그룹 쪽으로 갔다니.”
“아니 그것보다 이게 무슨 소립니까. 볼브랑 합작이라니. 그런 말은 없었잖습니까?”
멋모르고 참석한 오성그룹 임원진들 역시 혼란의 연속이었다. 그건 가벼운 마음으로 참석한 기자진 역시 마찬가지였다.
“안전벨트가 뭐 어쨌다는 건가. 김 기자, 저게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겠어?”
“글쎄요? C-MOS 기술이라면 반도체 관련 기술인 거 같은데요?”
“반도체라니, 그게 차량이랑 무슨 관계가 있는데?”
“그게 저도 정확히는 잘 모르겠습니다.”
관람객들 태반은 사회자의 말을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애초에 이들에게는 C-MOS라는 것이 너무 생소했던 것.
하지만 미묘한 분위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이런 사태를 예측이라도 한 듯 사회자가 새로운 인물을 소개했던 것이다.
“아무래도 차량에서 뭐가 바뀌었는지 모르실 분이 있을 것 같아 이 자리에 따로 전문가를 모셨습니다.”
그 순간 뚜벅뚜벅 걸어오는 인물에 시선이 쏟아졌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백경그룹의 강태준이었다.
“아니, 저 사람은 강 회장 아닌가?”
“그러게, 갑자기 여긴 왜 나온 건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강태준 회장의 뒤로 정체불명의 기계가 함께 등장했다. 안마의자처럼 생긴 기구에는 뭔가 이상한 것들이 잔뜩 달려 있었고, 운전대와 차 키까지 달려 있었다. 사회자가 신기한 듯 입을 열었다.
“아니, 강 회장님. 이게 뭡니까?”
“하하. 앞으로 전자 기술의 미래라고 할까요? 저희가 개발한 게 뭔지 설명하려면 이만한 게 없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흠, 여기 이 헬멧은 뭔가 외계인 고문 도구처럼 생겼는데요? 저거 안전한 겁니까?”
“하하. 치과용 장비처럼 생기긴 했지만 겁내지 마십시오. 아야 하지 않으니까요. 혹 지원자 없습니까? 한번 누군가 나서 주시면 감사할 거 같은데 말입니다.”
강태준이 주위를 둘러보며 농을 하자, 아까부터 궁금해하던 기자 하나가 손을 불쑥 들었다.
“저, 제가 해 보겠습니다.”
“아 마침 계시네요. 그럼 나와 주십시오, 기자님.”
강태준이 손짓하자 기자가 엉거주춤하게 자리에 앉았다. 강태준이 손수 뭔가 투시경 같은 장비를 씌워주자 약간 어색한 듯 목을 매만지며 자세를 잡았다.
“기자님, 뭔가 보입니까?”
“음, 깜깜한 게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요?”
“그거야 탑승을 했으면 안전벨트부터 착용하셔야죠. 그래야 출발을 하지 않겠습니까?”
기자는 시키는 대로 했다. 녀석이 안전벨트를 매고, 운전대를 잡자 강태준이 다시 재촉했다.
“이제. 시동을 거십시오.”
“어떻게요?”
“키를 돌려야 하지 않습니까?”
기자가 시동을 거는 순간 놀랍게도 드르릉 하고 엔진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차량의 헤드라이트가 불쑥 켜지며 도로 화면이 튀어나왔다.
영사기가 돌아가면서 전면에 설치된 하얀 판넬이 스크린으로 변한 것이다.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영상에 기자들이 놀라워했지만, 가장 놀란 것은 자리에 앉은 당사자였다. 기자는 저도 모르게 흰소리를 내뱉었다.
“미친!! 이게 대체 뭡니까?”
“VR이라는 겁니다. 아, 이제 게임 시작입니다. 운전대 잡으세요.”
강태준이 선보인 것은 다름 아닌 VR기기. 최초의 VR 체험 기기가 나온 것은 불과 몇 년 전, 미국의 컴퓨터 공학자가 제작한 헤드마운트 디스플레이(HMD) 시스템이 그 시초였다.
그런데 강태준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이걸 레이싱 게임에 접목해 버린 것이다.
그렇다. 강태준이 만들어 낸 것은 다름 아닌 세계 최초의 VR 게임이었던 것이다.
‘위즈와 놀런이 이거 때문에 몇 달이나 고생했지.’
세계 최고의 엔지니어들조차 몇 달이나 골머리를 앓았을 만큼 시행착오도 많았다. 초기 VR 장비는 천장에 매달지 않고 구현하기 어려웠고, 보여 주는 영상도 착용자의 머리 움직임에 따라 몰입형 영상을 보여 주는 수준에 불과한 극히 원시적 형태에 불과했던 것이다.
아직 성숙되지 않은 기술이 레이싱 게임으로 재탄생한 것은 그야말로 도박수.
재정적 시간적 출혈을 감수한 결과물이었지만 임팩트 하나는 제대로였다.
듣도 보도 못한 경험에 다들 입을 다물지 못했던 것이다.
“이게 가상으로 구현한 거라고?”
“세상에. 강 회장님. 대체 뭘 만든 겁니까?”
그래픽은 조악한 수준에 불과했고 사실 VR이라고 부르기도 많이 민망할 정도였지만, 직접 그 모습을 살펴본 사람들이 받은 충격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했다.
지금 시기에도 3D 입체 영상 기기인 센소라마나 미 극비 작전인 플라이트 시뮬레이터 같은 물건이 있긴 했지만, 그건 정말 알 사람만 아는 수준. 애초에 기술 후진국인 한국에서 이런 최첨단 기술을 시연한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짓거리가 아닐 수 없었기에 그만큼 충격도 배였다.
충격에 빠진 사람들을 돌아보며 강태준이 마이크를 들고 칩 하나를 꺼냈다.
“이게 바로 반도체 기술의 미래입니다. 여기 사용되는 C-MOS 기술은 단지 안전벨트가 아니라. 손목시계용 칩, 컴퓨터, 통신기기 논리 회로 등 산업 전반에 활용될 예정입니다. 더 빠르고 가볍고, 생활에 친숙하게. 기술 혁명이 눈앞에 와 있습니다. 앞으로 이 조그만 반도체 칩이 세계를 바꿀 것입니다.”
시연회에 참석한 기자들 역시 이게 특종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생판 모르는 일반인이 보기에도 시대를 앞선 기술이었던 만큼, 인상도 강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깊은 인상을 받은 기자들은 강태준의 말을 앞다투어 옮겨 적었다.
[반도체 기술, 산업의 쌀이자 전자의 미래]
[공상 과학이 현실로? 가상 현실과 반도체의 상관관계]
[첨단의 선두를 달리는 기업가, 강태준이 말하는 인류의 지향점]
강태준의 VR쇼는 엄청난 돌풍을 불러일으켰다. 현존하는 모든 이슈를 선점할 만큼 파급력이 컸던 것이다. 강태준이 외계인을 고문해서 만들었다는 둥, 이제 한국도 전자 강국이라는 둥 매일같이 설레발을 치는 언론들 덕분인지 관심은 식을 줄을 몰랐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