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양재벌 강태준-330화 (330/361)

330화 오너의 선택

“진동, 진동이라…… 뭔가 해결책이 없을까?”

뭔가 생각이 날 것 같으면서도 생각나는 것이 없다.

“진공을 만들어 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로터리 펌프 같은 걸 이용하면?”

“크기 문제 때문에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실험실 환경이라면 몰라도, 공장 규모의 펌프를 구현하긴 어렵습니다.”

여러 가지 의견들이 난무했지만 안타깝게도 제대로 된 의견은 나오지 않았다. 긴 회의에 지친 강태준이 결국 중재에 들어갔다.

“결론을 지금 낼 필요는 없으니 일단 필요한 것부터 합시다. 공장에서 지금 제일 시급한 부분은 단가 문제 아닌가요? 제조비를 절감할 수 있는 방법부터 찾지요.”

“예. 살펴보았는데, 금속 헤더 부분 교체부터 진행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지금 방식은 글래스메탈 씰 방식이라 제조비가 비싸서요.”

“오케이, 그럼 일단 실리콘 헤더부터 리드 프레임 방식으로 교체합시다.”

지금 방식은 보통 TO형 트렌지스터에만 사용하고 있는 사양 산업이니, 바꾸는 것이 옳다는 데는 모두가 동의했다. 대략적인 의견을 정리한 강태준은 차량에 올라탔다. 경호를 맡은 최만수가 운전석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이제 퇴근이십니까?”

“오늘은 내 담당은 자네인가?”

“네. 제가 명색이 헤드인데 그래도 서포트는 제대로 해야죠.”

“고맙군. 집으로 가 주게.”

차량에 타자 롤스로이스가 부드럽게 움직였다. 경호회사를 맡은 최만수가 운전기사를 자처했다.

“요새는 매일같이 야근이십니다. 회장님.”

“그러게 말이야. 오늘은 평소보다 좀 힘들군.”

“많이 피곤해 보이셔요. 좀 쉬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쉴 수가 있어야지. 일은 계속 터지는데, 방향을 정해 줘야 하지 않나.”

“하하. 세부적인 것은 아랫분들한테 맡겨도 되지 않습니까? 이제 사업도 안정화되었고 규모도 커지지 않았습니까? 건강이라도 상하시면 그게 더 큰일이니까요.”

“그러게. 내가 왜 그렇게 달리는지 좀 모르겠군. 그러는 최 중사는 무슨 낙으로 살고 있나?”

“아이구. 저는 애 보는 맛에 살죠.”

이번에 낳은 자식 자랑을 늘어놓는 녀석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강태준은 문득 생각에 잠겼다. 생각해 보니 별로 아쉬운 것도 없는 인생이 아닌가.

예전처럼 돈에 쪼들리거나 아쉬운 것도 없는 마당에, 지금껏 뭔가에 쫓기는 것처럼 사업만 해 왔다.

자극이 필요해서 그런 걸까. 아니면 강박 때문일까.

‘아이가 생기면 좀 달라질까?’

생각해 보니 그동안 너무 무던하지 않았나. 그간 혼인신고만 해 놓고 신혼여행도 못 갔을 정도였으니 너무 여유 없이 살았다. 내심 설유하에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던 강태준은 밖을 내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마천루로 가득하던 역세권을 지나가자 잔잔히 펼쳐진 밀밭이 끝없이 늘어서 있었다.

탁 트인 벌판을 보니 뭔가 답답했던 기분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차가 참 정숙해서 좋구만. 역시 롤스로이스라서 그런가.”

“원래 그렇지요, 하하. 그래서 고스트 아니겠습니까? 차는 많이 몰아봤지만 저도 이만큼 좋은 차는 처음 봅니다.”

“그렇지. 우리나라도 이런 명품을 만들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말이야.”

계속 발전하는 중이긴 하지만 한국은 아직 갈 길이 멀다. 은근 부러워하던 강태준은 뭔가 깨닫고 있었다. 이렇게 차가 정숙한 이유가 진동이 적어서라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가만, 생각해 보니까 차가 편안한 이유가 있지 않나?”

“그거야 서스펜션 때문 아니겠습니까? 기술력의 차이란 게 그런 거죠.”

달리는 차가 주행 시 충격을 흡수하니, 탑승자가 편안하게 탈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걸 카메라에도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 괜찮은 아이디어라 생각한 강태준은 다음날, 곧바로 회의에서 의견을 타진했다.

“서스펜션 원리를 응용한다고요?”

“그래. 미 공군 사령부에서도 원자탄 진동을 피하려 스프링 위에 건설되었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흠. 글쎄요. 그 정도로 진동이 잡힐까요?”

“일단 간이 실험 베이스부터 만들어 봅시다.”

반신반의하긴 했지만 그럴듯한 이야기라 생각한 기술진들도 시험에 돌입했다. 현가장치에 쓰는 스프링으로 카메라 기초를 만들어 보기로 한 것이다. 땅을 파고 진동 차단제를 1.5m 이상 깊이로 가득 채운 다음, 그 위에 시멘트를 부어 단단하게 굳혔다.

그 위에 마스크 제조 설비를 설치하고 다시 실험을 해 보자, 과연 진동이 눈에 띄게 줄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와. 정말 이게 먹히네.”

“그러게요. 진짜 정밀도가 많이 개선되는 게 눈에 보이네요.”

놀라울 정도로 극적인 변화에 다들 감탄했다.

별짓을 다 해도 줄어들지 않던 정밀도 문제가 단번에 잡힌 것이다.

“아마. 오토모빌 디비전에서도 이렇게 만들겠지요. 이런 걸 혼자만 숨겨 두고 있었다니.”

“이제라도 알았으니 되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카메라 설치는 모두 무진동 기초로 만들도록 합시다.”

강태준 또한 어렵게 알아낸 정보의 누설을 방지하기 위해 공정을 극비로 정했다. 일단 진동을 억제하기 위한 기초 공정을 끝낸 다음, 설비를 따로 옮겨 새로 건설하기로 한 것이다.

이제 구체적인 생산 품목을 정하는 일이 남았다.

“IC나 PNP 트랜지스터 생산을 전면 포기한다고요?”

“반도체 개발은 시간이 핵심이지요. 이런 고가 장비로 15년이 넘은 구형 트랜지스터를 만드는 건 돈 낭비지요. 어설프게 구제품에 투자하다간 표준 LSI 생산에 지장이 생길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단기에 투자비를 회수하는 건 기대하기 어려울 겁니다.”

임원진의 걱정은 당연했다. 실리콘 제련만큼은 아니더라도 수천만 달러가 드는 사업이다. 자금 회수가 늦어지게 된다면 재정에 안 좋은 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컸다.

“제품만 개발되면 수익성은 충분히 있습니다. 칩은 하나당 6달러밖에 안 되는데 웨이퍼는 최대 200개까지 뽑아낼 수 있지 않습니까. 손익분이야 생산이 시작되면 금방 메꿀 수 있으니, 일단 선도자로서 위치를 선점하는 게 중요하지요. 안 그렇습니까, 강 박사님.”

그러자 강동기 역시 강태준의 편을 들었다.

“네. 맞습니다. 현재 대중적으로 사용 중인 2인치짜리 웨이퍼는 얼마 지나지 않아 구형이 될 겁니다. 앞으로 폐기 처분해서 매물로 나오는 설비가 있으면 무상으로 들여올 수 있어요. 추후 트랜지스터가 필요하다면 그걸로 만들면 됩니다.”

“그렇다고 언제 그렇게 될지는 모르지 않습니까?”

하지만 임원들 상당수는 여전히 불안해했다. 이런 발전 속도가 빠른 첨단 산업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어느 순간이 적절한 투자 시점을 판단하는 일이었다. 신기술 도입이 너무 빨라도 시장이 성숙되지 않아 힘들고, 너무 늦으면 수익을 내는 게 요원하기 때문. 기술이 대체되는 타이밍을 노린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강태준은 굳건했다.

“신기술이 IC칩을 대체하는 시기가 생각보다 빨리 올 겁니다. 우리는 최단기간을 목표로 일단 표준 C-MOS 칩 개발에 올인합니다. 일단 표준형부터 개발해 놓고 나머지를 생각하죠. 손목시계 쪽도 염두에 두고요.”

“그럼 손목시계 칩까지도 말입니까?”

“당연히 그래야지요. 현재 배터리로 생산될 제품은 대부분 C-MOS 기술이 들어가게 될 거라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이쯤에서 승부수를 걸어야 합니다.”

유류 파동으로 인해 불황이 극심하긴 했지만, 위기의 다른 말은 기회였다. 강태준이 생각하기에 지금은 곧 과감한 투자로 잠재적인 경쟁자를 꺾어 놓을 때였다.

강태준의 계획은 일단 최대한 자금 여력을 쏟아부어 최단기간에 C-MOS 시장을 장악하고. 첫 단추는 안전벨트용 C-MOS 제품으로 시작하되 손목시계용 LSI 회로로 점점 범주를 넓혀 가자는 판단을 한 것이다.

“미국에 시험 운전을 마치고 나면, 추후 설비는 라인을 똑같이 카피해서 한국에 들여놓기로 하지요. 새 제품은 6~12개월 단위로 가격을 유지하는 동안 신제품을 론칭하는 방식으로 정합시다. 마케팅 쪽은 누가 맡기로 했지요?”

“놀런이 맡기로 했습니다. 인피그램 쪽을 통해서 유통할까 하는데요. 아무래도 게임 산업 쪽이 접근하기 쉬우니, 인지도 측면에선 그편이 유리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홍보용 레이싱 게임도 만들어 볼 생각입니다.”

저번에 잠수함 시뮬레이션 게임의 반응이 상당히 괜찮았기에, 게임 제작팀에서는 비슷한 류의 실사 게임을 만드는 데 재미를 붙였다. 공중전을 다룬 공군용 시뮬레이션이라든지. 아니면 레이싱이라든지. 이번 레이싱 게임은 듈(Dual) 게임기처럼 코인형으로 만들어서 야외 게임기 설치를 염두에 두고 개발할 생각이라고 했다.

“그거 괜찮은 생각이군요. 스폰을 받으면 더 좋을 거 같은데, 그럼 혹시 안전벨트에 구체적으로 관심을 가진 업체가 있습니까?

“미국에서는 사실 부수적인 기능 취급이라서 별로 관심이 높지 않더라고요. 유럽 스웨덴의 볼브 사가 관심이 있는 거 같습니다.”

“볼브요? 그 내구성으로 유명한 회사 말입니까?”

“네. 아무래도 광업권 문제와 엮여서 그런지, 광물 수입을 타진하고 있습니다. 그쪽이 한국 진출을 희망하고 있는 상황이라 신차 론칭 기일에 맞출 수 있을지도 문의 중입니다.”

스웨덴은 당시 광산 채굴권을 따기 위해 대북 교역을 시도하는 중이었다.

오일 쇼크로 광물 가격이 폭등하고 실제 수송비 문제가 현안에 오르게 되자, 방향을 틀어 남한 쪽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었다.

“볼브라면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업체 아닙니까. 그쪽과 협력할 기회라면 가격이 문제가 아닐 텐데……. 언제까지 준비되어야 합니까?”

“내년 3월입니다.”

“좀 많이 빠듯하긴 하군요. 가능하겠습니까?”

“확답을 드릴 수는 없지만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일단 최대한 빠르게 시제품 생산 일정을 잡아 보십시오. 가격 변동부터 시장 변화, 경쟁 업체 데이터까지 꼼꼼하게 확인하세요. 이번 일의 성패가 우리 백경의 100년을 좌우할 겁니다. 모두 최선을 다해 주세요.”

“옙!!”

강태준의 의지에 힘입어, 각자 할 일을 배정받은 임원들은 다들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모두가 이번 일의 중요성이 심상치 않음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백경 그룹과 달리 오성 쪽의 시계 회로 개발은 난항을 거듭하고 있었다.

“칩 개발 상태가 아직인가?”

“아직은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니, 최고의 프로세스 엔지니어들을 데려왔다면서? 개발 속도가 이리 느려서야 되겠나? 그게 다 돈이야, 돈.”

아니, 이렇게 된 건 네놈 때문이잖아. 연구원은 속으로 그 말을 삼켰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훈수질은. 시도 때도 없이 끼어드는 이재무 때문에 속으로 울컥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문제는 그것 하나에 그치지 않았다. 사업부에서의 파벌은 공동사장에 따라 둘로 나뉘어 있었는데 양 파벌의 수장인 김재박과 이재희의 의견이 양쪽으로 갈렸던 것이다.

“일단 현존하는 시설로 수익을 뽑아 내는 게 중요합니다. TV에 들어가는 트랜지스터나 IC만 만들면 수익이 날 텐데요.”

“지금 이게 반짝 몇 년만 뽑아먹을 사업이라 보십니까? 일단 개발을 하기로 했으면 거기부터 집중해야지요.”

“일단 이익을 뽑아야 투자를 하지 않겠습니까? 수익률을 개선하고 난 뒤에 생각하지요.”

이재무의 측근인 김재박은 일단 수익부터 창출하자는 생각이었고, 오너의 자식인 이재희는 투자후 회수는 나중이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렇게 이재희가 간신히 개발 쪽으로 방향을 돌려놨더니, 칩 개발 방식에도 두 가지로 갈려 버렸다.

회로 개발은 LCD로 갈지 LED 방식으로 갈지를 두고 의견차가 나온 것이다.

“LED로 갑시다. LCD는 고전압이 필요해서 개발이 까다롭습니다. 따로 반면 LED는 어두운 데서도 잘 보이지 않습니까?”

“그래도 LCD가 좋지요. 일단 배터리 수명이 훨씬 길잖아요. 가성비를 생각하면, 소비자 입장에선 오래가는 게 좋죠. 원료인 솔라 셀 가격이 많이 하락했으니 지금만큼 좋은 타이밍도 없습니다.”

스카웃한 프로덕트 매니저들도 이 부분에는 양보가 없었다. 각자 제 전문 분야가 있는 사람들이다 보니 어느 한쪽이 주가 되어 버리면 사내 입지에서 차이가 명확해지기 때문이었다. 기술진이 오락가락하자 아무것도 모르는 경영진으로서는 판단이 쉽지 않았다.

“이 사람들이 진짜. 그래서 어느 쪽이 더 이득일지 모르겠다는 건가?”

“예. 아무래도 장단점이 명확해서 솔직히 판단이 어렵습니다.”

“고민이 왜 그렇게 길어. 그렇다면 일단 둘 다 개발하면 되지 않나 그래.”

골치를 썩고 있던 이재무의 결론은 심플했다. 당시 공정에 설치된 3인치 웨이퍼의 효율이 2인치의 2.1배는 되니, 두 종류를 생산해도 생산에 지장이 없을 것 같다는 판단이었다.

위에서는 나름 절묘한 절충안을 내놓은 셈이라 자화자찬했지만 사실 그게 최악의 수였다.

개발 인력이 양쪽으로 분산된 탓에 시간이 더 지체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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