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9화 통신 회사 인수
연이은 충격에 강동기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저한테 왜 이런 제의를 하시는 겁니까?”
“저는 반도체의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업을 시작한다 해도, 고작해야 손목시계 칩 따위로 만족하긴 어렵지 않겠습니까? 저희도, 박사님도 말입니다.”
“그건 어떻게?”
“실리콘 밸리 쪽에서 반도체 사이클에 대해 운 좋게 강의를 들어 본 적이 있거든요. 앞으로 반도체의 쓰임은 무궁무진할 테니 앞으로 지속적인 투자를 하려면 오너의 역할이 누구보다 중요해질 테고요.”
강동기는 그 제의에 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점령군처럼 들어와 선심 쓰듯 이용해 먹으려는 상대와 운영에서 전권을 보장하고 지분을 인정해 주겠다는 상대 가운데 누구를 선택할지는 불문가지가 아닌가. 강동기는 강태준의 제안을 수락하고, 오성에게 거절 통보를 보냈다.
뒤늦게 사직 소식을 보고받은 이재무의 표정이 딱딱해졌다.
“강동기가 스카웃 제안을 거부했다고? 어째서?”
“자기는 이미 할 만큼 했으니 여기 일에 손을 떼고 미국으로 돌아가겠답니다. 여기선 할 일이 없을 거라 하더군요.”
“어디 다른 놈이 채간 건가?”
“그건 아직은 알 수 없습니다.”
“아니, 이게 어떻게 된 거냐, 재희야. 이건 우리 쪽 계획과 너무 다른데?”
하지만 이미 비행기를 탔다는 말에 다들 난감해했다. 대정 반도체를 압박해 자금줄을 막고, 먹어치운 건 모두 이재희의 작품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계획을 전면 수정할 수밖에 없지 않나.
이재무의 입에선 고운 말이 나올 리가 없었다.
“사업을 다 인수해 놓고, 이제 와서 턴키 베이스로 지을 사람이 없으면 어쩌라는 건가?”
“걱정 마십시오. 형님. 이미 강동기가 가기 전에 엔지니어들 인선과 배치는 끝내 두었으니까요.”
“그게 정말인가?”
“예. 차 회장 말로는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갔답니다. 디퓨전과 포토 레지스트, 이온 임프란테이션, 파이널 테스트까지 가능한 엔지지어들을 미리 뽑아 놓은 상태니 강동기가 없어도 상관없습니다.”
“그래도 괘씸하군. 이 제안을 거절하다니. 그렇게 우리랑 일하기 싫었다는 건가?”
“걱정 마시지요. 사서 떠먹여 준다는데도 싫다는데 어쩌겠습니까? 그쪽 손해일 뿐입니다.”
이만한 사업에 투자할 업체는 몇 없다는 생각에 아쉬움을 다독이는 이재무였다.
그 시각, 강동기는 실리콘 밸리로 돌아간 강태준과 함께 연구실부터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다.
“일단 사업 시작 전에 연구용을 쓸 파일럿 시스템부터 설치해야 합니다.”
“시스템 설비 개편이라면…… 혹시 생각해 두신 부분이 있습니까?”
“피닉스 쪽에 아는 분들이 있어서요. 이번에 오토모빌 생산 라인에서 폐기된 설비부터 가져오면 됩니다.”
예전에 주립대 연구소에서 쓰던 서류 양식대로 구성하고, 연구소 리모델링용으로 중고 와이어 본더와 다이본더를 두 대씩 들여오기로 한 것이다. 강태준은 내심 감탄했다.
“아, 이미 다 계획이 있으시군요.”
“밥 먹고 평생 하던 일이니까요. 그보다 서니베일 쪽 업체를 인수한다고 해도 자금이 꽤 많이 들 텐데, 근데 정말 순수하게 자기자본으로만 지을 생각이십니까?”
“설마요. 일단 벤처 캐피털 쪽에서 자금을 끌어모아야죠. 가능하시다면 강 박사님께서 나서 주시겠습니까?”
“죄송합니다만 제가 나서 봐야 별 도움은 안 될 겁니다. 애초에 제가 대외활동이 적어서 그쪽 사람들을 끌어모으기엔 실적이 부족해서요.”
강동기는 본인 스스로를 너무 알고 있었다. 반도체 분야 전문가이긴 하지만, 미국에서 부사장직은 고사하고 기술이사직만 맡으면서 회사 내부 일에만 집중한 탓에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을. 그러나 후회는 이미 늦었다.
“저도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영업을 해보는 건데 좀 아쉽군요.”
“뭐. 걱정 마십시오. 그 부분은 마침 생각해 놓은 사람이 있어서요.”
강태준이 찾아간 사람은 나사의 론델 박사였다. 당시 막대한 재정 적자를 겪으며 예산이 대폭 삭감된 나사에서 대규모 구조조정이 있었다는 소식을 들었던 것이다.
추가적인 유인 우주선 계획에 대해 별로 효용성 없다는 시각을 갖고 있었던 만큼, 강태준에게 협력해 줄 수도 있다는 판단이 들었다.
나사 안은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그러나 강태준을 따뜻하게 맞은 론델은 새 제안에 흥미로워했다.
“저를 자문으로 초빙하신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론델 박사님처럼 저명하신 분께서 오신다면 저희 회사에 대한 신뢰도 높아지겠지요.”
“흐음, 제가 도움이 될 수 있을까요? 제가 로켓 개발자이긴 하지만, 반도체 쪽은 전문 분야가 아닌데 말입니다.”
“그 정도면 족합니다. 박사님의 명성이라면 크게 도움이 될 겁니다.”
“좋습니다. 달에 사람도 보내 본 마당에 또 이룰 것이 뭐 있겠습니까.”
이미 반평생을 우주 산업에 투자한 론델은 얼굴마담 역을 기꺼이 자처했다.
새로운 도전이 흥미가 일었던 것이다.
그렇게 론델이 수주에 발 벗고 나서자 사람들의 반응이 달라졌다.
“오오, 론델 씨. 오랜만입니다. 다음 로켓은 언제 쏩니까?”
“조만간 하나 더 쏠 예정이긴 합니다만, 제 소관은 아니라서요. 오늘은 세일즈맨으로 왔습니다.”
나사 출신의 론델 박사가 나서자 효과는 적지 않았다. 서니베일에서는 내용을 과장하고 확대해서 착수금이라도 챙기려는 사기꾼들이 판을 치고 있었던 만큼 이렇게 실적이 검증된 사람들이 직접 영업에 나서는 일이 드물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설비 도입까지의 시간이었다.
“투자를 받아 내기는 어렵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문제는 설치부터 운용까지의 시간일 것 같습니다. 설비 투자부터 실도입까지 최소 2년은 족히 걸립니다.”
“그렇게 오래 걸린다고요?”
“예. 아무래도 오일값 상승이 시장에 영향을 미친 것 같네요. 반도체 장비 업체인 ASML에도 주문이 밀려 있어서.”
“그거야 증산하면 되지 않나?”
”당분간은 추가 증산 계획이 없답니다. 배송 적체도 심각합니다.”
화물선 취항이 유류난으로 줄줄이 취소되면서 롱비치항 쪽 운송료만 두 배가 올랐다. 그렇다 보니 설비를 제대로 도입하지 못한 기존의 반도체 업체 간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었다.
거기다 미국 기업들 간의 신경전이 장난 아닌것도 걸림돌이었다. 신흥 회사가 등장하면 어떤 방식을 동원해서라도 시장 침투를 막으려 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수급하는 방법은?”
“당장 수급 가능한 물량은 소규모에 불과합니다. 이대로 가다간 설계만 해서 어셈블리를 하는 회사로 하청을 주는 수밖에 없을 거 같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차라리 서니베일 쪽에서 쓸 만한 매물을 찾아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베이스가 있으면 시간을 훨씬 줄일 수 있으니까요.”
“어쩔 수 없군요.”
반도체 투자는 결국 타이밍 싸움이라고 할 수 있다. 제로 베이스에서 시작하느니, 차라리 비용이 들더라도 운영 중이던 물건을 헐값에 인수하는 것이 나으리라는 판단이었다.
그래서 상세히 알아보던 중, 시카고 쪽에서 좋은 소식이 들렸다. 오토모빌 시스템을 도입한 공장 가운데 하나가 매각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온 것이다.
“PNP 트랜지스터 공장이 매물로 나왔다고요?”
“네. 시카고 블룸이라는 통신 회사입니다. 원래는 군 통신 장비랑 자동차 계기판을 납품하던 회사였는데, 다이오드 트랜지스터 회로(DTL)를 제조하다가 오토모빌이 흥행하는 걸 보고 과감하게 설비를 도입하기로 결정했다는군요. 근데 그 뒤로 운영이 영……. 아무래도 장비를 짓기는 했는데 신뢰성 면에서 영 거시기한지라 사업 자체가 표류 중이라고 합니다.”
애초에 시카고 블룸에서 설계했던 것은 자동차에 사람이 타기 전부터 벨트를 매고 있는지 상태를 확인하는 기술이었다. 안전벨트가 없으면 시동이 걸리지 않는 인터락 시스템을 개발했는데, 처음 실험실에서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막상 제품 생산에 돌입해 양산에 들어가자, 이상하게도 가동할 때마다 전체 로트가 불량이 되고 전압 문제가 발생해 도저히 사업을 영위하기 힘들어졌다는 게 문제였다.
원인을 찾던 중 오일 쇼크로 직격탄을 맞아 코스트 삭감이 어려워지자, 견디지 못하고 전면 매각에 나선 것이다.
“인수 비용은 얼마입니까?”
“인수 금액은 1,200만 달러밖에 안 되니, 원가나 다름없는 금액입니다. 애초에 이런 설비를 다 갖춘다는 게 쉽지 않으니까요.”
“PNP 트랜지스터 제조 설비면, C-MOS보다 전 단계 아닙니까?”
“기본적인 얼개는 동일하니 상관없습니다. 제조 공정을 활용하면 C-MOS 회로로도 제작할 수 있으니까요. C-MOS가 한 세대 정도 앞선 것이긴 하지만, 하이테크가 반드시 좋은 것도 아닙니다. 현재 가장 수요가 많은 것은 PNP 트랜지스터입니다.”
PNP 시장은 오토모빌이 독점하고 있으니, 작은 파이만 가져와도 이득이라는 의미였다. 그러나 강태준은 제안이 탐탁지 않았다.
“군 통신 설비까지 매각했다는 건 향후의 미래 전망이 별로라는 이야기인데…… 함부로 인수했다가 추후에 적자를 면치 못할지도 모르지 않겠습니까?”
“제 예측으로는, 통신 장비의 단가 상승은 원료가 비싼 세라믹 패키지를 주로 사용해서 그런 것입니다. 추후에 플라스틱 패키지로 대체하고 조립 분야를 해외로 내보내 하청을 준다면 단가를 훨씬 절감할 수 있을 겁니다.”
플라스틱 패키지와 관련된 기술은 어렵지 않다. 홍콩과 일본 쪽 인건비가 크게 올랐으니, 한국이 꽤나 좋은 중개지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좋아요. 그러면 그쪽도 수익을 기대할 수 있겠네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생산 불량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까?”
“제가 직접 확인해 본 결과, 설비 자체에는 문제가 전혀 없습니다. 충분히 해결할 수 있습니다.”
자신 있게 이야기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당시 오토모빌 PNP가 세계 최고의 위치를 차지한 것은 강동기의 공도 적지 않았기 때문. 오토모빌 표면 연구소에서 있을 때 강동기가 실리콘 표면 전기 컨트롤과 관련된 특허 기술을 개발한 전적이 있었던 것이다.
“좋습니다. 그러면 제가 협상하지요.”
강태준은 결단을 내렸다. 가격 조율이 끝나고, 사업부를 인수한 강태준이 인수 직후 처음 한 일은 강동기의 말에 따라 부대 설비를 다 교체하는 것이었다.
“설비를 전면 교체를 하라고요?”
“일단 어느 파트가 오염되었는지 모르니 약품 순도부터 최대한으로 올리고, 포토 레지스트에 쓰던 물건들도 모두 점검하세요. 공급원에 남아 있는 불순물도 모두 체크합시다.”
강태준은 강동기의 조언에 따라 그때까지 쓰고 있던 오래된 약품과 디퓨전 소스, 그리고 웨이퍼를 취급하는 그릇까지 새것으로 갈았다. 그다음에는 배관 중에서 오래되고 의심나는 것을 새로 바꾸었다.
예상대로, 순도를 올리고 실험실에서 개발한 트랜지스터 마스크를 사용하자 불량률이 상당히 줄어들었다. 하지만 산 넘어 산이라고. 마스크 정밀도 문제가 발생했다.
“밀도가 올라가지 않는다니 무슨 소립니까?”
“예. 아무래도 설비 문제는 아닌 것 같은데 계속 흐리게 나옵니다.”
품질 문제가 연이어 화두가 되자, 생산을 앞두고 문제 해결 방안을 돌입했다.
“트랜지스터 회로 확대해 만든 사진이 정확하지 않은 게 문제가 아닐까요?”
“반복 촬영으로 인한 원본의 열화 현상 때문이다?”
“아무래도 패턴 복제 단계에서 문제가 발생한 것 같습니다.”
현재는 흑백 사진으로 웨이퍼 위에 원본을 카피한 사진을 패턴으로 옮겨 반도체를 제작했는데, 이 공정이 정확하지 않아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이었다.
카메라 회사는 물론이거니와 필름회사에도 문의해 보았지만 답은 단순했다.
“그건 어쩔 수 없습니다. 원래 사진을 찍을 땐 피사체가 흔들리기 마련입니다.”
애초에 사진이 흔들려서 발생하는 문제는 어찌할 도리가 없으니 자기네들 잘못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자 강태준이 물었다.
“근접 촬영하면 좀 나아지지 않겠습니까?”
“본질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거 같습니다. 게다가 회로가 복잡해지면 근접 촬영도 한계가 있어요.”
정밀도를 높이려면 피사체를 처음부터 작게 만들어야 하는데, 회로가 복잡해질수록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 피사체를 크게 만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렌즈를 아무리 좋은 것을 써도 마찬가지였다. 렌즈 자체가 가지고 있는 굴곡도를 보정하는 것도 그렇고, 정밀도의 향상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건 어떻게 할 수가 없겠군요.”
“그러게요. 좋은 방법이 없겠습니까?”
“글쎄요. 자동으로 셔터가 닫히도록 카운트 설정을 할 수도 있는 것도 아니고.”
아무리 해도 사진을 찍을 때 발생하는 진동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이 생각나지 않는다.
사진을 찍을 때 미세한 진동이라도 생기면 사진이 흐리게 나오는 건 당연하다.
보통의 경우라면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정밀함이 우선인 반도체 설비에서는 이 정도 진동도 치명적인 문제로 작용했던 것이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