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양재벌 강태준-328화 (328/361)

328화 반도체 전문가

“미 국방부 특별 관리 대상?”

“네, 뒷조사를 해 봤는데 시크릿 클리어런스(Secret Clearance)라고 말을 아끼더군요. 정보 조회가 안 된다고 하길래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기에 그래?”

“미국 국방부에서 프로젝트를 담당했다면 그럴 법도 하지요.”

그때, 위즈가 입을 열었다. 게임 사업 시연을 위해 참석한 위즈는 아직 돌아가지 않고 한국에 머물러 있었는데, 당연하다는 듯이 중얼거린 것이다.

“미 국방부 프로젝트?”

“표면 연구란 게 사실 대부분을 포괄하는 의미거든요. 원래 해군 잠수함에서 잠망경으로 해상을 가리키는 걸 의미하는 단어니까요. 그래서인지 실리콘 밸리에서는 그런 말이 있어요.”

“무슨 말?”

“모든 문제는 표면에서 온다.”

“오, 뭔가 의미심장한데?”

“웨이퍼 원판 위에 산화막을 키운 다음 확산을 원하는 부분을 녹여 실리콘을 노출시키면 그게 바로 반도체 기술의 핵심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표면연구라는 건 거의 모든 것을 포괄하는 의미죠.”

고작해야 1mm밖에 안 되는 두께의 원판 위에서 집적밀도에 따라서 무궁무진한 일이 벌어진다는 것. 그 말에 복만이가 코웃음을 쳤다.

“세상에, 무슨 탄도 미사일 개발이라도 했다는 건가?”

“오토모빌 반도체사업부의 생산부장으로 있었다면 충분히 그럴 만도 하지 않겠어요? 일단 그쪽이 넘버 원이니까요.”

“호기심이 가는군. 실질적으로 투자가 가능할지 알아봐.”

실제 설비투자가 어느 선에서 이루어졌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수소문해본 결과 꽤나 세부적인 조건을 들을 수 있었다.

“3인치 웨이퍼를 도입해 칩을 만들겠다고?”

“기존에 한국에 진출한 반도체 조립 업체들과는 차원이 달라요.이건 금속 캔을 씌우는 임가공 공장이랑은 급이 다른 기술력이에요.”

“좋구먼. 그게 실리콘 제련 공정보다 훨씬 낫네.”

강태준으로서는 탐나는 조건이었다. 5,000만 달러 이상을 투자해도 결과를 확신하기 힘든 사업과 없고 이미 반도체 최고 전문가의 지휘 아래 공장까지 완비된 사업이라니.

이건 비교 대상이 다르지 않나. 내심 구미가 당겼다.

“일단, 그쪽에 문의를 넣어 보게.”

“어쩌시려고요?”

“직접 만나서 투자를 받을 의사가 있는지 확인해 봐야 하지 않겠나.”

“우리한테 관심이 있겠습니까?”

“자금난이 심할 때니 아마 후원자가 필요할 거야.”

* * *

과연 예상대로 김포군 오정면 전자칩 공장은 매일같이 회의를 거듭하고 있었다.

“이번에 발주 물건값이 너무 뛰어올랐어요.”

“화물 운항이 유류난으로 취소돼서 딜리버리가 불확실합니다. 지금이라도 생산 기자재랑 원료 수급처를 바꾸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건 안 됩니다. 회사의 운명이 시제품 생산에 달려 있어요. 불량률이 나오면 치명적입니다.”

강동기가 만든 반도체 회사는 자금난에 허덕이고 있었다.

김포군에 연 대정반도체의 자본금은 고작 100만 달러.

미·일 반도체 팹 공정 설립 비용이 보통 천만 달러는 족히 넘는 만큼 원래 반도체 투자금의 1/10밖에 되지 않는 금액이었다. 심지어 제품 생산 때까지 자금을 지원키로 했던 투자자의 약속도 이뤄지지 않았다.

“세상에. 일정이 이렇게까지 꼬일 줄이야.”

“오일 쇼크를 누가 예상이나 했겠나. 인력으로 되지 않는 것도 있는 거지.”

사실 처음 손목시계용 칩을 만들기로 결정했을 때만 해도 강동기는 패기가 넘쳤다. 손목시계용 칩에 쓰는 C- MOS는 집적회로(IC)의 전력 소모를 크게 줄인 기술로, 개발자 역시 같은 대학 출신 선배인 김대융 박사였기에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반도체 기계의 사용 허가를 얻으려고 할 때부터가 난관이었다.

돈을 구하러 다닐 때마다 여기저기 딴지를 걸고 들어왔던 것이다.

“그걸로 외화 대출을 또 한다고요?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요.”

“괜한 사업 벌이지 마시고 안전한 사업을 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사업계획서와 경비 내역을 들고 은행들을 찾아갔지만, 은행들로선 반도체에 무지해도 너무 무지했던 것. 천운으로 무역 대리업을 하는 차재범 회장을 만나 자금선을 확보하긴 했지만 외국인이 하이테크 공장을 짓는다는 것도 걸림돌이었다.

“반도체 공정은 첨단 영역입니다. 이거, 자칫 잘못하면 기술 유출로 잡혀 들어갈 수도 있어요.”

강동기는 미국의 첨단 기술을 유출한 반역자로 낙인찍힐 수도 있는 만큼 조심스러운 입장이었다. 사실 그는 오토모빌 반도체연구소에 있을 때 군사 기밀 프로젝트도 수행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어쩝니까?”

“미국에 본사를 설립하고, 한국에 조립 공장을 만드는 식으로 포장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사무실을 두 개나 만들라는 이야기인가요? 그러면 시간이 배로 들 텐데요.”

“너무 서두를 필요는 없습니다. 스텝 바이 스텝으로 갑시다.”

겨우 후원자를 얻은 그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차근차근 진행했다. 머릿속에 모든 설계가 있다고 해도, 계획을 현실화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최대한 금액을 아끼고 아꼈고 생산 설비를 확인해 가며 바쁘게 움직였다. 최소 규모 예산으로 시작했던 만큼 자금은 빠듯했다.

기계 부속과 보수 물품 계획이 여유 없이 짜일 정도였다. 냉동, 통풍 장치, 천장 속의 배관 시설, 고순도 가스 생산까지 설비 하나하나 그의 손을 안 거친 것이 없었다.

그러나 신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설비 도입 계획을 거의 완벽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찰나, 오일 쇼크가 터지면서 모든 계획이 어그러져 버린 것. 중간 다리 역할을 하는 켐넷의 김한규 씨와 상의해 시제품 생산까지는 지원을 확답받았지만, 투자금은 벌써 예산을 훌쩍 초과한 지 오래였다.

“추가 자금이 더 필요합니다. 유류 파동이 장기화될 조짐이에요.”

“허, 큰일이네. 시설재가 들여오기 전에 엔지니어를 보내서 사용법을 익혀야 하는데…….”

돈 들어갈 구석은 산더미인데 자금 압박은 끝도 없었다.

하마처럼 돈을 집어삼키는 설비는 이제 공포스럽기까지 할 정도.

그러던 중 우려하던 일이 터졌다.

“저, 차 회장이 보자고 하십니다.”

“나를?”

물주인 차 회장이 다이렉트로 호출을 하다니. 이건 안 좋은 신호다.

강동기의 우려대로 호출은 돈 문제였다.

“저희가 재정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이제 없습니다. 우리 능력으로는 이게 한계입니다.”

“그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추가 지원은 극히 어렵습니다. 우리 스스로 회사를 운영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차 회장은 덤덤하게 이유를 설명했다. 거기에는 강동기가 검증된 설비만 요구해서 시간과 비용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는 뉘앙스도 섞여 있었다.

강동기는 억울했다. 모든 건 오일 쇼크 때문에 일어난 일 아닌가.

그가 필사적으로 감정을 억눌렀다.

“제가 지분 50%를 포기하고 돈 문제에선 모두 손을 떼겠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이렇게 나오는 건 상도덕이 아닌 거 같습니다.”

“압니다. 그래서 저희도 지분을 모두 매각할 생각입니다. 회사를 제대로 운영할 수 있는 자금력을 가진 곳에 말이지요.”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차 회장이 눈짓하자,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왔다. 상대를 확인한 강동기의 눈이 커졌다.

“이재무 사장님입니다.”

“이재무요. 잘 부탁드립니다.”

“설마 오성그룹이 이 회사를 인수한다는 말입니까?”

강동기는 악수를 받지 못할 만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가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 낸 회사를 넘기다니. 그러나 혼이 나간 표정에도, 차 회장은 흔들림 없었다.

“네. 회사가 어려워 지분을 모두 오성그룹에 넘기기로 했습니다. 오늘 지분을 전부 매각하니, 저는 여기서 손을 떼지요. 강 박사님은 남아서 운영에 도움을 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말입니까?”

폭탄선언. 그야말로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이재무가 그를 보며 말했다.

“공짜로 일해 달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강 박사님께서 원래 지분의 50프로를 받기로 하셨다지요?”

“예. 그렇습니다만?”

“제품 양산과 판매 성공을 보장하는 대신 그 대가로 10프로의 지분을 드리기로 오성과 합의했습니다. 자, 여기. 계약서에 서명하십시오.”

오성의 비서진들은 정신을 차릴 틈도 주지 않고 계약서를 들이밀었다. 강동기는 기가 막혔다. 오성 전자는 오앤비 인터네셔널과 세요전기 등의 합작 회사로 시작한 회사 아닌가. 70대 들어서 이제 냉장고 등 백색가전에도 발을 넓혔지만, 반도체 산업과는 거리가 먼 기업이다.

하지만 차 회장을 비롯한 일동은 합의가 되어 있었는지, 서류도 보지 않고 사인했다.

아무도 내용을 읽지 않는 걸 보니, 이미 양쪽에 합의는 끝났고 더 이상 엮이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강 박사도 묵묵히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지분 이전에 관한 사인을 마치고 나오자 비서가 쫓아 나왔다.

“박사님. 한 장이 비었습니다. 여기도 사인하셔야지요.”

“뭡니까. 그게.”

“아까 말씀드렸잖습니까. 기술 정착과 판매를 보장하는 대신, 지분의 10프로를 받으시는 내용의 계약서입니다.”

“내가 무슨 쓸모가 있다고. 설비랑 인력은 다 가져다 놓지 않았습니까.”

“강 사장님. 이러지 말고 쉽게 갑시다.”

나를 볼모를 잡겠다는 건가. 억지로 계약서를 받아 들긴 했지만,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망설이는 강 박사의 태도에 이재무가 선심 쓰듯 말했다.

“아무래도 우리 강동기 박사님께서 충격이 크신가 보군요. 생각할 시간을 드리지요. 인수는 내일부터니까요.”

돈 가방을 가득 가져온 비서들이 차 회장에게 건넸다.

두둑한 가방에 차 회장이 홀가분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다 멈칫했다.

텅 빈 듯한 강동기 박사의 눈빛에 걸렸던 것이다. 양심이 찔린 차 회장이 변명했다.

“나로서는 어쩔 수 없었소. 미안하외다.”

가방을 챙긴 차 회장이 자리를 떠나자 오성 직원들도 자리를 비웠다. 다들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모습에 패잔병처럼 혼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움직일 힘도 없었다.

얼마간 지났을까. 어둑어둑해질 무렵, 밖에서 덜컥 소리가 들렸다.

헤드라이트 불빛이 껌뻑이자 당직을 서던 경비가 앞으로 나왔다.

“여기가 대정 반도체 공장인가.”

“뉘십니까, 그쪽 분들은?”

“백경에서 나왔습니다. 연락이 안 돼서 직접 찾아왔는데, 이게 어떻게 된 거요?”

강태준이 명함을 건넸다. 하루에 그룹 실세를 두 번이나 보게 된 강동기의 눈이 흔들렸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인지…….”

“자자, 일단 응접실로 갑시다. 구체적으로 할 이야기가 많아요.”

얼마 후 자초지종을 듣고 난 강동기는 어이가 없는지 허허 웃었다.

거친 숨을 들이쉬는 그에게 강태준이 비서에게 눈짓을 하자, 비서가 얼른 물을 떠 왔다.

“뭘 갑자기. 자, 선생님. 여기 물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켠 강 박사가 긴 한숨을 토했다.

“조금만 더 빨리 오시지 그랬습니까. 이미 늦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잠시 후 지분을 전부 넘겼다는 소리에, 강태준도 어이가 없었다.

정말 간발의 차 아닌가. 벙찐 표정을 한 복만이가 고개를 숙였다.

“오성 놈들이 벌써 왔다 갔다고?”

“아, 젠장, 이 자식들 보게. 뒤에서 호박씨를 까? 설마 우리가 접촉 못 하게 일부러 방해한 거 아닌가?

”그러게요. 생각해 보니 좀 이상하긴 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돌아가는 사정을 보니 충분히 예측 가능한 시나리오였다. 약간 열이 받기는 했지만 강태준은 곧 멘탈을 부여잡았다.

“그래서, 그 서류에 사인했습니까?”

“아직 안 했습니다.”

그 말에 강태준은 안도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됐네, 그럼. 어차피 난 강 박사님을 보러 온 거지. 딴 건 부수적인 거니까.”

“그래도 100만 달러는 좀 아깝네요. 돈 좀 세이브할 수 있을까 했더니.”

“그냥 새로 지으면 되지. 뭐. 한번 지은 걸 또 짓는 게 뭐가 어렵겠어? 여기 브레인이 있는데.”

“그렇네요. 우리가 돈이 없나 사람이 없지.”

“네? 지금 다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그러자, 강태준이 미리 준비해 온 서류를 앞으로 내밀었다.

“스카웃 제의를 하는 겁니다. 사장으로 모시는 대신. 투자금 1,000만 달러에 원래대로 지분 50프로, 어떻습니까?”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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