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7화 바스크 케미트로닉스
“뭐? 800평짜리 대형 천막을 만들어 달라고?”
“기한 내에 가능하겠습니까? 축사용 윈치처럼 만들면 됩니다.”
“뭐, 그거야 이어 붙이면 되니 불가능한 건 아닌데…… 그 큰 걸 전시 후에는 어쩌려고? 쓸모는 있고?”
“공장 창고용으로 활용하면 되니까 걱정 마세요.”
문화재청에서는 난감함을 표했지만 석조전을 양보했던 만큼, 강태준도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경복궁 전시회에는 내국 업체만 60여 개, 합작회사 12개, 외국인 직접투자사는 물론 출품업체를 포함해서 총 98개 업체가 출품했다.
상품 박람회가 열린 적은 있었지만 이런 식의 본격적인 전자전은 처음인 만큼 국내적인 관심도는 높았다.
주요 전시 품목으로 라디오와 흑백 TV, 어탐기와 계측기 등 전자기기와 반도체 소자와 IC회로, 절연체, 공기청정기 등이 소개되었다. 전시회의 흥행을 위해 라디오 조립 경연대회가 함께 개최되었고 듀얼(Dual) 게임기도 합류했다. 인피그램 쪽에서 만든 신제품도 출품되었다.
“모비딕(MOBIDICK)? 제목이 의미심장하군요 이건 뭡니까?”
“잠수함 시뮬레이션 게임입니다. 일종의 워게임이죠.”
스텔스 기능의 잠수함이 어뢰를 조준해 쏘는 게임이었다. 대잠수함전을 소재로 실제 계기판이나 잠수함 운용 방식을 도입해 현실성을 살렸다고 할까. 하지만 임원들은 약간 우려하는 기색을 보였다.
“아직은 게임이란 게 조금 생소할 것 같군요. 이게 재미가 있을까요?”
“걱정 마세요. 쇼맨십이라면 자신 있으니까요.”
개발자이자 게임 시연자로 온 위즈는 자신만만했다.
게임기 앞에 앉자 바닷가에서 들리는 파도 소리와 함께 물에 반쯤 잠긴 조종석 유리창이 일렁거리는 묘사가 일었다. 선체가 흔들리며 승무원들이 각종 계기판과 장비 점검을 하는 모습이 도트로 표현되고 곧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1, 2, 3. 밸브 차단 완료, 캡틴, 잠항 시작합니다.
조이스틱을 닮은 조종간을 움직이자 웅∼ 하는 추진음을 내며 서서히 물속으로 가라앉는 잠수함.
사업가들 대부분은 게임을 해 본 적은 없지만, 그 모양은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관람객들이 모이자 처음에는 AI에게 밀리는 척을 하던 위즈가 포위망 속으로 달려들었다.
“오오!!”
“수면 위로 도망쳐!!”
관람객들은 자기도 모르게 상황에 몰입했다. 슝 소리와 함께 날아드는 어뢰에 한꺼번에 여러 적함을 상대로 선전하는 위즈. 스노클링을 하며 간간이 상대를 격파하던 마지막 U보트가 등장하자 일대일 대치 상태가 되었다.
“피격! 갑판 손상! 손상률 20%”
“추가 잠항 불가, 강제 부상 시작합니다.”
어뢰에 스쳐 피격 판정을 받은 잠수함의 체력 게이지가 붉은색으로 변했다. 쏟아지는 포탄 속 갑판에서 덱건을 꺼낸 잠수함이 총포를 퍼붓는 순간, 화려한 폭발 임팩트와 함께 적함이 바닷물을 뒤집어쓰며 침몰했다.
그 장면을 본 모든 사람이 환호했다.
“대단하군요. 어떻게 한 겁니까? 이 원근법은 대체 어떻게 구현한 거요?”
“이거 진짜 같군. 실전연습용으로도 쓸 수 있나.”
실제 군인들도 크게 관심을 보였다. 가상으로나마 잠수함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 인상적이었달까. 넓은 바닷속을 구현한 지도 역시 전통적인 워게임보다 훨씬 몰입감 있게 구현되어 있었다. 강태준은 이참에 새로운 형태의 보드게임도 시연을 보였고 그것도 좋은 반응을 얻었다.
“게임 좋아하는 건 역시 만국 공통이군요.”
“남자는 건 원래 다 커도 어린이니까.”
전시회는 대호황이었다. 모비딕이 인기를 끈 덕분도 있겠지만, 별 기대 없이 왔던 바이어들은 한국의 전자 산업 수준에 꽤나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신흥개도국이 얼마나 잘할까 의문부호를 가졌던 것과 달리, 막상 출품된 제품들은 선진국과 비교해도 퀄리티 면에서 크게 뒤지지 않았던 것이다. 전시회의 효과 덕분일까, FIC를 통해서 서독 회사가 접촉을 해 왔다.
“바스크 케미트로닉스에서 투자 유치 제의를 해 왔다고요?”
“네. 한국과 싱가포르를 대상으로 투자 검토를 하고 있었다더군요. 조만간 극동 쪽에 거점을 두고 싶다고 합니다.”
강태준으로서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바스크 케미트로닉스는 프랑크푸르트에 위치한 실리콘 제조 업체로 한국의 외자도입법이 100프로 투자를 허용하지 않아 투자를 주저하다 합작 파트너로 백경 그룹을 선택한 것이었다.
강태준 곧장 협상에 나섰다. 바스크 쪽에서는 이미 수년간에 걸쳐 극동에 대한 조사를 해 왔었고 꽤나 적극적이었기 때문에 진전은 빨랐다. 그런데 부지 협상과 기술 이전 검토를 마치고 세부 조건을 조율하던 중, 어이없게도 청와대 비서관실 쪽에서 뜬금없이 딴지를 걸고 나섰다.
“제련 사업 시 전기 요금 할인이 불가능하다고요? 아니, 이런 중요한 업체를 한국에 유치하는데 그 정도 배려도 안 된다는 말입니까?”
“아무래도 다른 회사와의 형평성 문제가 있어서 어려울 것 같소.”
상공부 허가까지 받고 나왔는데 조건을 뒤집다니 황당한 일. 갑자기 정부가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180도로 방향을 선회한 것이다. 이유를 알아보자 궁색한 답변이 들어왔다.
“그게 사실, 전자 전문가한테 의뢰를 했는데 외국 업체와 합작해서 만드느니 차라리 공사 형태로 발족시키는 게 나을 것 같다고 했답니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이 좋은 조건을 거부한다고요?”
“정신이 나갔군. 대체 어떤 자식이 초를 친 거지.”
사정을 알고 보니 미국 컬럼비아 대학의 김희완 교수에게 기술 자문을 받았는데 조건이 터무니없다는 말을 들었다는 것이다.
“김희완 교수? 그 인간이 누군데?
“예, 나름 정밀 기계 쪽 전문가인데 국책사업을 많이 담당했답니다.”
“그건 웃기는군. 정밀 기계라면 반도체가 전문 분야가 아니지 않나?”
“그게 좀. 각하께서 김 교수 말이라면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어서 말입니다.”
백경 측에서는 오재갑이 직접 날아가 대체 어찌 된 것인지 협상해 보려고 했다. 3번의 장고 끝에 겨우 어렵사리 김희완 교수를 만나 논의를 타진했지만, 협상이 결렬되었다는 소리를 들었다.
“아니, 왜 그냥 왔어?”
“자기를 고문으로 써 달라더군요. 너무 터무니없는 조건을 걸어서 도저히 수락할 수 없었습니다.”
“얼마인데 그래?”
“기술 검토료를 요구하더이다. 차관 도입 금액의 1프로를 달라더군요.”
설립비만 5,000만 달러가 족히 넘는 사업을 제 자본만 갖고 하는 사람은 없지 않나. 차관액 3,000만 달러 이상이면 1프로만 해도 30만 달러가 넘는 거액이다.
현실적으로 그건 어렵겠다 하자, 김희완은 대통령과 비서실장까지 들먹이며, 자기는 한국 전자공업을 일으킨 사람이니 국내에서 사업을 하려거든 어떻게든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거라며 강짜를 부렸다.
“미친, 이런 빌어먹을 자식이 있나?”
“이유야 뻔한 것 아니겠나. 돈이 될 거 같으니, 숟가락을 얹어 보겠다는 거겠지.”
”맞습니다. 정 안 되면 자기들이 직접 공사를 설치해서 경영을 하겠다고 하더군요.”
“혼자서 나댈 리는 없고. 믿는 구석이 있나?”
“비서실일 수도 있고 어느 선에서 개입을 한 게 분명하겠지.”
이런 큰일을 자기 혼자 저지를 사람은 없지 않나. 머리가 복잡해진 강태준이었지만 일단 해결책을 찾아볼 참이었다. 그런데 차관 도입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강태준이 경제 기획원 쪽을 찾자, 갑자기 어디선가 엄청나게 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니, 기술 타당성 검토가 필요하다니 그게 무슨 소립니까!”
“이보세요. 박사님. 그게 규정이라니까요?”
“이미 공장을 설립할 때부터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인가를 하고, 이제 공장이 완성 직전입니다. 시설재 보강까지 끝나는 판에 타당성 검토가 왜 필요하단 말입니까?”
“그거야 제가 판단할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납득할 수 없습니다. 이건 처음 약속이랑 너무 다르지 않습니까?”
옷깃을 꽉 잡힌 최 국장은 매우 난감하다는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박사라 불린 남자는 요지부동이었다.
흥분한 나머지 목까지 새빨갛게 변해 있었던 것이다.
씨근덕거리던 박사가 씩씩거리다 무언가를 깨달은 듯 고개를 돌렸다.
“설마 또 김희완 그 인간인 겁니까? 제 프로젝트에 훼방을 놓는 사람이.”
“박사님, 고작 개인에게 무슨 힘이 있습니까. 경제 정책이라는 게 경우에 따라서 변하는 법 아니겠습니까. 오일 쇼크로 나라가 전반적으로 어려운 상황이니 양해를…….”
“양해라니! 공장이 열기도 전에 닫게 생겼는데 이해라니요. 그쪽에서 개입한 게 아니라면 이건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목소리가 커지자, 최 국장도 참다 못했는지 목소리가 달라졌다.
“박사님 사정이 급한 건 알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겁니다. 이렇게 소란을 피우시면 저도 경비를 부르는 수밖에 없습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박사가 부르르 떨었다.
박사가 경제 기획원 문을 박차고 나가자 강태준을 뒤늦게 확인한 국장이 고개를 숙였다.
“아, 회장님. 이거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트러블이 좀 있어서.”
“괜찮습니다. 그보다 저분은 누구신가요?”
“아, 강동기 박사님입니다.”
“강동기 박사님요?”
“오토모빌 쪽에서 일하시던 분입니다. 대단한 분이죠. 2년 4개월 만에 석·박사를 모두 마치셨으니.”
“2년 4개월 만에요? 그게 가능합니까?”
“오하이오 대학 Ph.D 자격 시험에서 수석을 했다는군요.”
강태준은 깜짝 놀랐다. 석·박사를 3년도 안 되어 끝내는 것도 모자라 수석이라니. 그건 완전히 천재 아닌가. 순수 토종 한국인이 그걸 해냈다면 정말 보통내기가 아닌 것이다.
“연구 주제는 어떤 쪽이었습니까?”
“아. 우리 강 회장님께서도 관심이 있으실 법하네요. 벨 연구소에서 실리콘 쿡북(cook book)을 연구하셨다고 합니다. 그 뒤에 오토모빌에서 표면 연구를 주로 하셨고요.”
“호오. 그런 분이면 미국서도 꽤 좋은 대우를 받으실 수 있을 텐데. 여긴 왜 오신 겁니까?”
“한국에서 사업을 시작하셨어요. 근데 자금 수급 문제가 생겨서 말입니다.”
“사업이요?”
“네. 손목시계용 LSI를 만든다고 하시던데 이번에 한국행 화물이 유류난으로 취소돼서 생산 일정이 불투명해졌거든요. 그보다 뭘 논의하러 오셨죠?”
“아. 실리콘 제련 공정 때문입니다.”
경제기획원 쪽과 회의를 했지만 이미 강태준의 신경은 온통 그쪽에 가 있었다.
그사이 협상은 진전 없이 끝났고, 같이 회의를 마친 복만이가 투덜거렸다.
“아, 젠장. 머리 아프네. 이거 아무래도 그 강희완이라는 작자가 아주 사람 돌게 만드네요.”
“정 안 되면 세계은행 쪽 차관을 받으면 되지 않을까? 막디 박사가 한국 반도체 지원에 꽤나 긍정적이라던데.”
“그것도 힘들 것 같은데요. 그러면 KIST가 필연적으로 껴야 할 테고, 아시다시피 전자계산기 개발에 미쳐 있어서. 거기랑 협의를 하느니 차라리 상공부 쪽에 기름칠을 하는 편이 낫지요.”
“…….”
강태준은 말이 없자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 있자 오재갑이 물었다
“형님? 무슨 생각 하십니까?”
“아, 응. 뭐라고?”
“그게, 실리콘 제련 공정 말입니다. 아무래도 미국 차관보다는 다른 도입선을 알아보는 게 현실적이지 않을까요?”
강태준으로서는 결단을 해야 할 시점. 잠시 고민하던 강태준이 마음을 바꿨다.
“바스크 케미트로닉스 쪽은 잠시 접어 두고, 아까 나간 강박사부터 알아보게. 그 사람이 뭘 하고 있는지 전부 다.”
“아니, 왜요? 비스크 쪽은 어쩌고요?”
“그거야 어차피 당장 해결될 문제도 아니잖나. 알아보고 싶은 게 있어.”
사정을 살펴보니 강동기 박사의 약력은 그야말로 엘리트란 말이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링컨연구소 연구책임자 IBM, 오토모빌 생산부장, 서니베일 어셈블리 기술 이사까지. 거쳐온 회사들의 면면도 엄청났다.
하지만 더 중요한 부분이 있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