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5화 통상 분쟁
“말도 안 된다니.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형님.”
“세상에 기능직을 그렇게 예우하는 경우가 어디 있나? 다 단물 빨아먹고 버리기만 하지.”
“그거야 그 회사가 그랬던 거죠. 회사가 엄연히 다른데 대우가 다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유. 세월이 얼마나 지났는데. 10년이면 상전벽해구만.”
“거, 이 박사님. 전자기기면 그쪽 장기 아니에요? 속는 셈 치고 가 보세요. 그래.”
“그려. 우리 이 박사만큼 물건 잘 고치는 사람이 어딨나? 예전에 기능올림픽도 우승했다며. 아, 우승이 아니고 은메달이었나?”
“메달 색이 뭐가 중요하나. 아무튼 그게 그거지.”
“거 참. 시끄럽소들. 내 알아서 할 테니 신경 끄소.”
버럭 성질을 내긴 했지만, 이희경은 그날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메리칸 드림. 풍운의 꿈을 안고 시작한 세탁 사업은 오일 쇼크가 터지면서 그야말로 개박살이 났고 삶은 점점 팍팍해졌다.
실업수당으로 근근이 버티고는 있었지만 그것도 한계. 이젠 슬슬 일자리를 구해야 할 터.
생각에 골몰하느라 밤잠을 설친 이희경 목이 타서 거실로 돌아 나오려는 찰나, 마누라와 맏이가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어찌할 줄 모르는 그가 우두커니 서 있는 그때, 아들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수입은 쥐꼬리만 한데, 다음 달 집세는 어떻게 낼지 모르겠어요.”
“쓸데없는 소리 말고. 아버지 주무시지 않니.”
“아빠도 참, 엄마가 요새 청소 나가는 건 알아요?”
“니네 아빠는 몰라도 돼. 그간 고생했잖니. 이참에 적금 깨면 된다.”
“그냥 내가 학교 포기할게요. 적금 깨는 건 그만두세요.”
“그건 안 돼! 어떻게 붙은 학교인데.”
“어차피 졸업해도 빚쟁이로 시작인데요 뭘.”
아들의 그 말에, 도저히 나설 수가 없었던 이희경 주임이 입술을 깨물었다.
“에라이…… 그래. 10년만 딱 10년만 죽은 듯이 살자.”
다음날 곧장 지원서를 작성한 그는 무작정 지원처로 찾아갔다. 하지만 지원자들 면면을 본 그는 가슴이 덜컥했다. 생각보다 지원자들이 너무 젊었던 것이다. 자기보다 십 년은 젊을 듯한 팔팔한 나이의 중년들을 본 이희경은 괜히 위축되는 것을 느꼈다.
“28번!! 들어오세요!”
“28번!”
“옙!”
면접실로 들어가 젊은 얼굴의 책임자를 본 이희경은 자연스레 얼굴이 굳었다. 어딘가 모르게 포스가 느껴지는 시선이었다.
‘저 사람. 어디서 본 거 같은데?’
기억을 더듬는 그였지만 생각할 틈도 없이 질문이 들어왔다.
“기능올림픽 출신이라고요? 그럼 경력은?”
“주임까지 해 봤습니다. 지금도 라디오나 간단한 기계 정도는 다 고칠 줄 압니다.”
“그래요? 현역일 때는 어떤 걸 주로 담당했습니까?”
간단한 질문이 끝나고, 그는 곧바로 다음 장소로 안내되었다.
직사각형의 작은 방에는 이미 다른 지원자들이 대기 중이었다.
미리 온 지원자들이 앞에 TV가 하나씩 배정되어 있었다.
“이건 뭡니까?”
“실전입니다. 한번 고쳐 보시죠. 시간제한은 따로 없습니다.”
말을 마친 안내인은 서류에 무언가를 체크하곤 방을 나가 버렸다.
옆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TV를 수리하는 데 바빠 안중에도 없다.
이희경도 작업에 돌입했다.
내부를 확인한 그는 곧바로 심각성을 알아차렸다.
‘X 되었군.’
코드 불량부터 해서, 고장 난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반나절이 다 지나갈 때까지 정신없이 회로를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며 하나씩 문제점을 시정해 나갔다.
그렇게 날이 어둑어둑해질 무렵 문득 옆을 돌아본 그는 흠칫했다.
고개를 들고 보니 주위에 그 혼자밖에 남지 않았던 것이다.
벽면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던 젊은 담당자가 흥미롭다는 얼굴로 그를 지켜보는 중이었다.
“이제 다했습니까?”
“예…… 아, 예.”
TV 상태를 확인하는 담당자에 이희경의 손에 땀이 쥐어졌다. 올림픽 때도 이렇게까지 긴장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다행히 수리는 제대로였다. 치익 소리와 함께 멀쩡하게 작동되는 TV에 감탄을 하던 담당자가 중얼거렸다.
“완벽하군요. 이 폐품을 이렇게 고쳐 낼 줄이야.”
“그러면 합격입니까?”
“물론입니다. 내일부터 출근하세요.”
다음날 도착한 그는 과장급 대우라는 말에 어안이 벙벙했다.
회장이 직접 시험을 주관했다는 것을 안 것은 나중의 일. 그날 합격자는 이희경을 포함해 고작 5명밖에 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렇게 중년의 기능직들이 대거 몰려오자 수리센터의 퀄리티도 크게 올랐다.
백경에서는 A/S만 강화한 것이 아니었다. 불량률을 낮추기 위한 노력으로 생산 라인을 전면 개선하는 데도 힘썼다. 하지만 항상 일제와 비교해서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 적지 않았다.
“절단면이 거친 게 일본 제품과는 차이가 좀 있군. 마감이 깔끔해야 잘 팔리는데…….”
“아무래도 철 가공 기술에서 차이가 발생하는 느낌입니다.”
후가공에 드는 공임까지 생각하면 국산화율을 더 높이고 싶지만, 싼 게 비지떡이라고 말하기엔 아쉬운 부분이라 생각하던 중 강태준은 돌파구를 찾았다. 오일 쇼크로 인해 파낙에서 새로 개발한 수치 제어 공작기계에 대한 수요가 격감하면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전기 유압 모터 방식이라고?”
“예, 기름값이 비싸고 전기가 많이 소모되기는 하지만, 철 가공에 이만한 것도 없다는군요.”
“좋아. 가격 고민하지 말고, 바로 도입해 봐.”
강태준이 품질 관리를 위해서 직류 서보모터를 장착한 수치 제어 기계를 다수 도입했다.
일반 전기모터에 비해서 힘이 좋은 유압 모터 덕분일까 분기별 매출이 고점을 찍었다.
[한국산 TV 미국 폭격! 연중 10만 대 판매 예상]
[백경, 전자제품 매출 국내 1위, 성운사의 아성 제치나]
백경에서 만든 한국산 컬러 TV는 무서운 기세로 팔려 나갔다. 싼 가격에 괜찮은 품질. 빵빵한 A/S까지 탑재한 한국산 TV는 경기 불황에도 선전했다. 미국 시장에 새로운 다크호스가 등장한 것이다.
언론의 설레발도 있었지만, 판매량이 높아지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
반면 경쟁사인 성운사는 그야말로 살얼음판 같았다.
내수가 부진한 가운데, 백경그룹에 매출 1위까지 빼앗기자 위기감을 느낀 것이다.
“이봐, 백경에서 자체 TV를 판매하는 사이에 우리는 뭘 했나? 세상에 후발 주자한테 뒤처지는 게 말이 돼!”
“그게…… 어차피 국산 부품 비율은 50프로가 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까지 반제품만 만들 수는 없어. 새 합작사를 물고 오든 기술 이전을 받든 당장 대책을 마련해 오게! 어서!!”
국내 굴지의 전자업체로 입지를 다져 왔던 성운사로서는 1위를 빼앗겼다는 사실이 엄청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쇄신을 예고한 성운사에서는 연구개발팀을 구성해 국산화 총력전에 돌입했고, 다른 한국 TV 제조업체들 역시 자연히 충격을 받았다.
모두가 곧바로 자체 제작 TV를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하자 자연히 품질 경쟁이 불붙었다.
기술 경쟁이 심화되면서 별별 물건이 다 나왔다. 시간 예약이 가능한 TV, 20인치 컬러 브라운관에 5인치 흑백 브라운관을 함께 내장한 2화면(POP) 방식, 음성 인식 기능과 리모컨 기능을 내장한 TV 등을 잇달아 출시했다.
그걸 가만히 보고 있을 미국이 아니었다. 앞서 미국 의원들은 일본제 TV가 판매량이 늘어나자 의사당 앞에서 TV를 부수는 퍼포먼스를 벌이는 등을 통해 대미 TV 수출 규제를 받아 낸 전적이 있었다.
한국제 TV의 점유율이 크게 높아지자 미 국제무역 위원회(ITC)에서 칼을 빼 들었다.
제조업 보호를 위해 대미 수출 규제 논의가 가시화된 것이다.
“미국 제조업의 위기입니다. 타국이 미국의 일자리를 빼앗아 가고 있습니다!”
“경제를 살리려면 통상 제재는 불가피합니다!”
그건 위기감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1970년대를 기점으로 세계 경제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눈에 띄게 하락했다. 무엇보다 인건비가 올라가면서 제조업 경쟁력이 급격히 약화되었고, 탄탄했던 경제는 양적인 면과 질적인 면 모두 수직으로 하락하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를 제일 먼저 감지한 곳은 대형 로펌들이었다. 미국의 대형 로펌에서 ITC과의 통상 분쟁으로 인한 특허 소송이 급증할 것을 예상하고 각국의 통상 전문가들을 영입하고 있었다.
설유하로부터 정보를 전해 들은 강태준은 촉각을 곤두세웠다.
“한국을 상대로 시장질서유지협정(OMA)이 발효될 가능성이 크다고요?”
“네. 지금 일본과 대만과 이미 협상이 끝났으니, 한국에서도 대미컬러 쿼터제가 현안에 오를 확률이 높아요.”
“그럼 지금이라도 빨리 대비해야겠군요.”
민주당의 성향은 자유무역주의에 가깝지만, 미국이란 나라는 국익을 위해서 당적을 가리지 않는다. 부랴부랴 자료를 준비하는 사이 자율 규제 권유가 현안에 오르면서 미국의 통상 압박이 현실화되었다.
ITC에서 자율 규제 논의를 이유로 한국 상공부 관계자를 호출하자 상공부 상역차관보와 함께 주요 전자업체 임원들이 대거 날아갔고, 소식을 들은 강태준은 곧장 워싱턴으로 직행했다.
그런데 워싱턴에 도착해 보니, 의외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미리 도착한 업계 대표들이 호텔에서 서성이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협상장에 계셔야 할 분들이 왜 여기에 서 계십니까?”
“그게, 정부 간 협상이라 들어오지 못하게 하더군요. 대사관 문턱도 못 밟았습니다.”
업계 대표들의 대사관 방문조차 허용하지 않았다는 말이었다.
되지도 않는 변명에 강태준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아니, 그렇다고 여기서 그냥 손가락만 빨면 됩니까?”
“미국에서 허락하지 않는데 어쩌겠소?”
“그럼 얌전히 당하고 있자고요? 시키는 대로 있으면 안 되지요”
호구도 아니고 무슨 짓인가. 결과가 나올 때까지 대기를 타라는 말에 강태준은 참을 수 없었다.
강태준이 지체 없이 곧바로 협상장으로 쳐들어가자. 그 뒤를 따라 수행원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갑자기 몰려든 인력에 경비원들이 달려와 일행을 막았다.
“통행 금지! 여기서부터는 아무나 출입할 수 없습니다. 신분증을 제시하십시오.”
“저는 협상에 관련해 한미 통상 관련해서 전권을 부여받은 사람입니다. 경제 자문으로서 이번 회의에 참석할 자격이 있습니다.”
“저, 맞습니다. 강 사장님께서는 대통령 경제 특별 고문으로서 협상 권한을 가진 분입니다.”
강태준이 위임장을 내밀자 상역차관보가 옹호하며 그를 감쌌다. 그들로서도 전문가 도움 없이 협상을 계속하는 것이 부담이었던 만큼 강태준의 등장이 너무도 반가웠던 것이다. 그러나 강태준이 다른 전자업체 임원들까지 데리고 회담장으로 들어가려고 하니, ITC에서는 강짜를 부렸다.
“강 회장님께서는 들어오시지요. 다만, 그 외 다른 분들은 자격이 없습니다. 모두 밖에서 대기해 주십시오.”
“왜 자격이 없습니까. 이분들도 각 경제 대표자분들입니다.”
“여기는 공적인 자리입니다. 공식적인 직함을 달고 오십시오.”
“아니, 당사자 없는 합의가 말이 됩니까? 그런 탁상행정은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계속 자격을 운운하신다면 저희는 전부 철수하겠습니다.”
강태준이 강하게 나갔다. 들여보내지 않으면 협상하지 않겠단 실랑이가 계속 이어지자, ITC에서도 결국 공식 발언을 자제하는 조건으로 합석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기 싸움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양자는 자리에 앉기 무섭게 날 선 공방을 이어 갔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