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4화 QC 도입
‘아니 이 사람들이, 정신이 나갔나?’
수출로 먹고사는 입장에서는 뭐 하는 짓인가. 강태준이 덕수궁 앞에 도착하자, 단상 위는 소비자들의 성토장이 된 지 오래였다.
전시장에 올라온 것은 변압기 눈침이 잘못 붙거나 불 조절이 안 되어 새까맣게 탄 전기밥솥이나 접촉 불량으로 화재의 위험이 있는 전자레인지.
접착제로 대충 붙인 고무신, 세탁 후 물감이 빠져 줄어들어 버린 옷 등 다양하기 짝이 없었다.
전시장에는 이미 해외에 파견된 기자단까지 와서 바글바글한 상황이었다. 이정선 상공부 장관과 문한석 유통경제부 국장까지 참가한 대회는 그야말로 대성황이었다.
소비자 단체장과 학회장들은 서로 자화자찬을 하며 우쭐거렸다.
“하하, 대성공입니다. 이거 세상에 사람들이 관심이 이리 클 줄이야.”
“이 정도 호응이라면 내년에는 더 크게 행사를 치러야겠군요.”
장관이 나서서 호응하는 꼬라지를 본 강태준은 맥이 탁 풀렸다.
세상에 추문을 퍼트려도 유분수지. 불량품 전시회라니. 스스로 국가 이미지에 똥칠을 하고, 그걸 정부가 나서서 주도해 동네방네 떠드는 것이 말이 되는가.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아니, 강 회장 아니요? 여기는 웬일인가? 아 설마 백경 제품이 여기 있을까 싶어서 그러시는가?”
“하하. 걱정 마시오. 백경 제품은 아예 리스트에 없더군. 역시 품질 관리 하나는 대단해요.”
상공부 장관이 강태준에게 안심하라는 듯 눈을 찡긋했다. 그러자 강태준의 굳은 표정이 펴지지 않았다. 한숨을 쉰 강태준이 조용히 타일렀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은 지금 큰일 날 일을 벌이고 있습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불량품에 대한 경각심을 주자는 취지는 좋습니다만 우리나라는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 아닙니까. 세상에 어느 나라가 이렇게 불량품이 많다고 대놓고 선전까지 합니까? 그것도 상공부가 나서서 불량품 성토회를 하다니 이러면 누가 저희 나라 제품을 믿고 사 가겠습니까?”
“하하. 걱정도 팔자요. 누가 그걸 세세히 보고 사겠소이까. 강 회장.”
”맞소. 그렇게 민감해하실 일은 아닌 거 같은데.”
“일본이나 독일처럼 나라가 곧 제품의 브랜드 가치를 결정짓기도 합니다. 국가 이미지를 생각해서도 이건 너무 나간 듯싶습니다.”
강태준의 날카로운 지적에, 아까까지 훈훈했던 분위기가 급격히 가라앉았다.
사람들도 우물쭈물한 것이 그제야 자기가 무슨 짓을 한 것인지 눈치챈 느낌.
그러나 그냥 인정하기 싫었는지 기자 하나가 시비조로 나왔다.
“강 회장님 말씀은 참으로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소비자들도 충분히 알 권리가 있지 않습니까. 그럼 제품에 어떤 하자가 있어도 국익을 위해 항상 숨기자는 말입니까?”
“그런 뜻은 절대 아닙니다.”
“그럼 무슨 대책은 있습니까?”
함께 온 비서들은 불안한 표정들이 역력했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꼬투리를 잡힐 여지가 크다. 그러나 비서들이 조마조마하건 말건 강태준의 대답은 명쾌했다.
“간단한 방법이 있지 않습니까? 품질 관리 기사 제도를 만들면 됩니다.”
“품질관리기사? 그게 뭡니까?”
“미국에서는 ASQC라는 단체에서 자격증을 주고 자격증을 받은 사람들이 공산품의 품질 관리를 주도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품질 관리 기사를 선발해 검사를 진행하면, 불량품 유통을 상당 부분 근절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자도 지지 않겠다는 듯 다시금 앞으로 나왔다.
“아니 누가 자격증을 발급한다는 말입니까? 설마 전경련에서 발급한다는 말씀은 아니겠지요? 고양이에 생선을 맡기는 꼴일 텐데 말이죠.”
“그럴 리가요. 한국 정밀기계 센터 산하에 QC학회가 있지 않습니까? 공산품 관리에 필요한 자격 제도를 KS법과 연계해 강제 규정으로 만들고, 표준협회 교육을 받게 하면 되지요.”
강태준의 논리정연한 말에 사람들은 모두 그 절묘함에 고개를 끄덕였다.
“옳거니, 그 말이 전적으로 맞는 소리구먼. 세상에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한 번도 못 했지?”
“앞으로는 그런 방법도 생각해 봐야겠군요.”
그러자 이번에는 장관이 옳다구나 하고 나섰다.
“그럼 염치없겠지만 백경에서 혹시 참고할 만한 가이드를 제공해 주실 수 있겠소? 저희도 진지하게 제도 도입을 검토해 보고 싶은데 말입니다.”
“기꺼이. 도움이 된다면야 협력해야지요.”
마침 상공부 표준국장이 나와 있어서일까. 진전은 빠르게 이루어졌다. 품질 관리와 관련된 제도를 짜고, 정부에 부의해서 빠른 시일 내에 신뢰성 시험 센터를 발족시키기로 한 것이다.
제도의 입안자인 강태준이 공산품 QC검사를 처음 자청했다. 모두가 좋은 결과였지만 단 한 사람은 달랐다. 졸지에 교육 제도구성까지 떠맡게 된 차대응이었다.
“아니 회장님, 무슨 표준화 작업을 우리가 해요? 이건 남 좋은 일만 하는 거 같은데.”
“그러게 말입니다. 정부 입장에서야 산업을 통제할 수 있어서 좋겠지만, 저희 스스로 목줄을 채우는 꼴이 될지 모르잖습니까?”
“그렇게 한쪽으로만 생각하지 말게. 품질 관리가 잘 돼서 불량품이 줄어들면 서로 좋은 일 아닌가? 학생들이 취업할 곳도 늘어나고 말이야.”
강태준이 웃으며 차대응을 타일렀다. 사실 백경그룹 입장에서는 이런 식으로라도 상공부와 연을 맺는 편이 꼭 나쁘다고 볼 일도 아니었다. 국산제 TV 생산이 막바지에 들어간 만큼 수출입 규제와 관련해서도 정부와 조율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렇게 뽑힌 공산품 품질 관리원들은 의외의 곳에서 도움이 되었다. 막판 검사를 앞두고 TV 성능 시험을 통해 동양인과 서양인 간의 미묘한 차이를 짚어 낸 것이다.
“아무래도 브라운관의 색조 밸런스를 바꾸는 편이 나을 것 같은데요.”
”네. 어떤 점이 문제라는 말씀이시죠?“
“동양인은 녹색이 강한 것을 선호하니 상관없지만 미국 쪽에서는 적색이 더 강한 것을 선호하니까요. 이 색감은 좀 부자연스럽게 보이지 않을까 합니다.”
일반인은 거의 쉬이 알아내기 힘든 차이였지만 품질 관리를 맡은 직원들 가운데 군에서 미국인과 함께 합숙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조사 결과를 반영한 국산 TV는 우수한 품질로 좋은 반응을 얻으며 시장에 안착한 것이다. 차대응은 백경 마크가 들어간 TV가 팔리는 모습을 보며 코끝을 훔쳤다.
“반제품이나 조립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런 때가 오긴 오는군요.”
“그러게 말이야. 이제 우리도 어엿한 전자업체가 된 거지.”
지금까지 산니와 합작해 수출한 TV는 SKD(Semi Knock Down) 방식으로 조립한 물건들이었다. 반제품보다는 조금 나았지만, 일부 부품은 현지에서 조달하는 수준에 불과한 수준.
그런 만큼, 부품 상당수를 국산화해 자력으로 완제품을 만들어 냈다는 것은 기술력의 진보를 의미했다.
1단계를 마친 강태준은 미국에 현지 법인을 세우는 방안을 검토해 보았다.
“시카고 쪽에 거점을 두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무래도 유통망을 고려했을 때 확장성이 좋아요.”
“거기도 좋지만 역시 샌프란시스코 쪽이 더 좋지 않겠습니까. 산호세 쪽에서 고급 인력을 구하기가 편합니다.”
“영업과 제작은 별개 아니겠습니까?”
“실제 제품을 만드는 것은 우리입니다.”
시카고 쪽에 기반을 둔 로빈과 산호세 쪽에 기반을 둔 놀란이 미묘한 신경전을 벌였다.
“무슨 고민을 그렇게 길게 합니까. 양쪽에 지사 설립으로 가고 본사는 뉴욕에 짓는 걸로 하지요.”
“뉴욕이요?”
“장사를 하려면 경쟁이 가장 심한 곳에서 승부를 걸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트랜드에 가장 민감한 지역의 동향을 알아야 빠르게 대처할 수 있어요.”
현지인을 직접 뽑을 생각도 했지만, 책임자로는 본사와 공장 간의 의사소통이 잘되어야 한다는 말에 수출본부장은 영도회 6기 출신인 박공찬이 뽑혔다. 박공찬은 강태준의 직속 후배이면서 니찌겐조와 오성상사 등을 거쳐 해외에 다년간의 경험을 쌓은 엘리트로, 유타 대학에서 석사 과정을 밟은 수재이기도 했다.
QC센터 설립에 기여하면서 강태준은 QC협회가 소속된 정밀기계센터(FIC) 인사들과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한국 정밀기기센터는 한국과학기술연구소나 국립공업소와 함께 전자공업 진흥 업무를 수행하는 첨단 산업의 첨병으로 한국 최고의 브레인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강태준은 전자영업부 설립과 함께 산업 저널인 TV dalion에 출연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FIC의 뉴욕 사무소장인 박다인 씨를 자주 만나게 되었다.
“서비스 센터를 증축하고 싶은데 방법이 없을까요?”
“기존에 A/S팀을 운영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미국이란 나라 자체가 워낙 넓다 보니, 전체를 커버하는 게 어렵더군요. 숙련된 수리 인력을 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규모가 작았을 때는 문제가 없었지만, 영업 규모가 워낙 커지다 보니 아무리 신경을 써도 제조 불량으로 인한 클레임이 들어오지 않을 수밖에 없었던 것. 말을 듣던 박다인 씨가 머리를 짜냈다.
“그렇다면 기능 올림픽 우승자들을 모아보는 것은 어떨까요?”
“기능 올림픽이라면 국제직업훈련경연대회(International Vocational Training Competition) 입상자들 말인가요?”
“네. 뉴욕이나 시카고 등에서 성운사 관계자들이 많이 정착해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기능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고 난 후 이민을 와서 세탁업을 하고 있던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세상에, 대회 우승을 하고도 이민이라니 어째서입니까?”
“뭐, 전시 행정이란 거 아니겠습니까. 처우 개선이니 뭐니 해도 사람의 인식이란 게 참. 현실적으로 제대로 집행되는 경우가 있어야 말이죠.”
당시까지만 해도 블루 칼라에 대한 관심이 커서 우승이라도 하면 카퍼레이드를 하고 대통령이 훈·포장을 직접 목에 걸어 주는 등 요란뻑적하게 축하 파티를 벌였지만 현실적인 마이스터에 대한 대우가 별로 좋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당시로써는 거액인 100만 원의 대통령 포상금을 받으면 장기를 살려 창업을 하거나 기술을 발전에 힘쓰기보다는 그냥 훌쩍 이민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흠. 그런 사람들이 뽑는다고 오겠습니까?”
“그거야 알 수 없지요. 오일 쇼크 이후로 자영업자들이 많이 어려워졌다는데, 혹 월급쟁이가 그리워졌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듣자 하니 일리 있는 소리였다. 강태준은 속는 셈 치고 공고를 붙였다.
-전자 수리 업무 담당 숙련자 구함. 경력 인정.
-특이사항: 기능올림픽 출신 우대
-사택 공급 및 장려금 지급. 장기 근속 시 대리점 지원.
수리를 전담하는 곳치고는 봉급도 매우 높았다. 공고를 본 대부분이 반신반의했다.
“이게 정말인가? 대우가 너무 좋은데?”
“그러게. 이거 등이 따땃하겠어 그래.”
“기술인을 대우하겠다고. 개소리도 찰지구만. 그딴 거 다 헛소리요.”
배가 불룩 나온 남자가 옆에서 끼어들었다. 전 성운전자 출신의 이희경 주임이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