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양재벌 강태준-322화 (322/361)

322화 바터 무역

환경이 개선되면서 광부들은 곧 매일 출퇴근하는 월급쟁이 생활에 익숙해졌다. 정해진 시간만 일하고 의식주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크진 않아도 따로 사택이 제공되었고, 쌀이나 부식 역시 넉넉하게 나왔다.

거기에 강태준은 광산촌에 가장 먼저 학교를 설립을 지원했다.

“자식 교육 걱정은 마시고 열심히만 일해 주십시오.”

장학금을 지급하자 광부들은 자식들 교육에도 신경을 쓸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마음이 편해지자 1인당 일일 능률도 많이 개선되었다. 국영기업체인 석탄공사의 일일 OMS는 1톤이었지만 강태준의 민영 탄광에서는 무려 2톤이나 되었던 것.

추전역 정암터널이 조기 개통되며 수송 능력이 배가된 것도 반가운 일이었다.

“이제 연간 340만 톤은 수송할 수 있을 겁니다.”

“원유 수급지는?”

“사전 정지 작업은 이미 마쳐 놨습니다만, 아무래도 최종 점검차 한 번은 정부 측 인사와 함께 사절단으로 다녀와야 할 거 같습니다.”

강태준이 선택한 곳은 다름 아닌 쿠웨이트. 좁은 땅에도 불구하고 세계 석유의 10%가 매장되어 있는 지역이다. 석유 메이저를 거치지 않고 민간회사인 백경그룹이 직접 원유를 공급받으려면 한국 정부를 앞세울 수밖에 없었던 만큼, 실무적으로는 백경이 한국 정부의 위임장을 받아 국영공사와 직접 계약하는 형식이었다.

그러자 이원석이 고개를 갸웃했다.

“쿠웨이트라고? 그쪽은 지금껏 생산을 전량 굴프나 클렘 사가 맡지 않았나? 차라리 사우디랑 교섭하는 편이 나을 거 같은데?”

“그쪽은 천진그룹과 오성이 잡고 있으니 뚫기 어렵지요. 앞으로 쿠웨이트 역시 수익 증대를 위해 자력 판매 비중을 높일 겁니다. 우리는 정부 직접 판매분을 노려야 합니다.”

추후 수급 물량이 어느 정도 되느냐의 결정은 전적으로 공급자 측에 맡겨져 있다는 점이 관건. 결국 로비력이 핵심이라는 말에 이원석의 표정에도 비장함이 어렸다.

“좋네. 내가 힘을 써 보지.”

이원석의 로비가 통했을까, 강태준은 이원준 천경물산 사장 및 최창규 상공부 차관보와 함께 민간사절단의 일원으로 쿠웨이트를 방문할 수 있었다. 천경물산과 합작해 정부의 인가를 받아 놓은 20만 배럴 규모 정유공장의 원유 공급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당시 국내 정유사는 한국석유공사, 울산정유, 오성에너지, LK 등 4사가 이미 각축 중이었으니 강태준이 수직계열화를 하겠다는 명목으로 5번째 정부의 인가를 받아 낸 것 자체가 대단한 것이다.

걸프만에 도착한 강태준은 수도 쿠웨이트시티에 있는 리치 호텔에 투숙했다.

하지만 여독을 푸는 동안 쿠웨이트의 회담 일정이 미뤄졌다. 분단국에 대한 등거리 외교 정책을 내세워 남북 어느 일방과의 외교 관계 수립이 어렵다는 입장을 밝혀 온 것이다.

손바닥 뒤집듯 바뀐 태도에 이원준이 난색을 표했다.

“쿠웨이트에서는 소비국별로 개별 판매 라인을 할당하지 않는다고 하던데, 한국만의 특별 배정은 없다는군.”

“그러면 담당자를 만나서 딜을 해 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그러자 외교 특사로 함께 온 통역이 고개를 저었다.

“그게 쉽지 않을 텐데요. 아랍 왕족들은 사람을 가려서, 어지간하면 직접 만나는 일이 없습니다. 민간 비즈니스 맨들을 상대로 협상하는 자리에는 이런 사람들이 직접 얼굴을 내밀지 않아요.”

협상은 대부분 창구 역할을 하는 민간인을 앞세우는데 최종 마무리 단계에 가서야 직접 책임자를 만나 서류에 사인하는 식이기 때문에, 거래 중 직접 만나기는 매우 어렵다.

하지만 사절단이 방문하기 전에 이미 사우디 측 창구인 베드윈을 통하여 상당한 수준의 협상이 진척을 봤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건 이상한 일이었다. 강태준이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흠. 이렇게 나오는 이유가 뭘까요. 뭔가 방해 공작이 있지 않고서야.”

“그럴까?”

“혹 짚이는 건 없나요? 저도 일단 알아보겠습니다.”

통상대표부를 통해 알아보니 베이루트 쪽에서 돌아가는 사정을 알게 되었다. 한국과 쿠웨이트 간 외교 관계 수립을 기꺼워하지 않은 이스라엘 방송국이 한국의 중동방문에 대해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다는 것이었다. 어이가 없어진 이원석이 중얼거렸다.

“편가르기 하자는 것도 아니고, 설마 그 정도로 삐졌다는 건가?”

“그쪽이야 중요한 문제일 수도 있지요. 뭐, 그렇다면 해결책도 단순하겠네요. 한국 쪽에서 성명을 발표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응? 우리가 말이야?”

“립서비스야 어려울 것도 없지 않습니까. 어찌 되었든 간에 한국 정부에서도 이스라엘보다는 아랍과의 관계가 더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냉정한 국제 정세를 생각하면 어느 쪽에 줄서기를 할지는 자명한 일이다.

텔렉스로 정부에 긴급히 타전하자 청와대에서 직접 지령이 내려왔다.

‘중동 산유국과의 외교 교섭을 시급히 추진하기 위해 가능한 한 모든 조치를 취하시오.’

정부 특사들은 곧바로 아랍인들을 소집해 친아랍 정책을 발표하기로 한 다음 인터뷰를 진행했다.

[수에즈는 이집트의 것. 이스라엘의 시나이 반도의 점령 반대]

[시오니즘과 공산주의는 동격. 향후 아랍의 평화를 위해서라도 체계적인 전환이 필요]

뻔한 소리였지만 다행히 효과가 있었다. 입바른 소리를 늘어놓은 지 며칠도 지나지 않아 쿠웨이트 셰이크 국왕과의 회담 날짜가 정해졌다는 소리가 전해진 것이다.

마치 이러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사절단을 메살라 궁으로 초대하기로 했다는 말에 사절단은 준비를 서둘렀다.

회담은 상당히 우호적인 분위기로 진행되었다. 민간 실무자의 장으로 참석한 강태준은 수십 번 준비했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한국이란 나라는 신흥 공업국이고, 원유 수급이 경제 발전에 절실하다는 이야기였다.

국왕은 꽤나 성의 있게 경청하는 자세를 취했지만, 실무자들의 표정에는 미덥잖은 기색이 역력했다.

6.25의 잔상이 너무 짙게 남아 있는 탓일까, 중동 국가들은 코리아라는 나라에 대한 의식은 희미했다. 기껏해야 전쟁의 불씨를 딛고 일어난 소국이라는 것 정도였던 것이다.

‘임팩트를 줄 필요가 있을 것 같은데.’

이쯤에서 분위기를 환기할 필요성이 있다.

강태준은 슬쩍 만찬이 끝날 무렵 귀엣말을 건넸다.

“최 중사, 유단자들은 준비되었나.”

“옙.”

“그럼 바로 모시도록 하게.”

최만수가 사람들을 모시러 밖으로 나가자 강태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양해를 구했다.

“자자. 여러분, 저희 나라에서 온 무술인들이 시범을 보인다고 하니 즐거운 마음으로 관람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강태준이 박수를 치자, 앞으로 흰 도복에 검은 띠를 맨 사람들이 들어섰다. 그때까지만 해도 태권도가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알리도 없는 사람들인 만큼 다들 시큰둥했다. 그러나 그 눈빛은 곧 경이로 바뀌었다.

합!!~

흰색 태권도 도복을 입은, 다부진 한국 청년들이 나오더니 갑자기 기합 소리를 내며 벽돌 더미를 깨부숴 버린 것이다.

곧이어 맨손으로 나무판자를 박살 내거나, 허공을 차고 올라 360도를 회전하며 박살 내는 등의 시범이 이어졌다.

만찬회에는 쿠웨이트 정부의 왕자, 장관은 물론 군부 측 인사들도 많이 참석하고 있었다.

이들은 현란하기 짝없는 발차기에 다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시연이 끝나자 처음과는 180도로 분위기가 변한 사람들이 열광했다.

다들 우레와 같이 박수를 치기 바빴다.

“이야. 대단하군요. 이게 뭡니까?”

“태권도? 원더풀, 원더풀합니다!”

그제야 숨통이 트이는 듯, 딱딱하던 회담장의 분위기가 부드럽게 풀어졌다. 국왕이 본심을 털어놓았다.

“원유 수출로 우리도 부국이 됐지만, 석유는 유한한 자원이지. 석유 산출량이 감소되거나, 소진될 때를 대비해서 우리도 공업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고 생각하오. 한국이 우리와 어떤 공업 분야에서 협력이 가능한가에 대한 복안이 있습니까?”

“중동 지방은 국토가 넓고 인구가 분산돼 있는데 도시 간 거리가 상대적으로 멉니다. 그래서 아직까지 도로망도 정비되어 있지 않지요. 반면 저희 한국은 돌관 공사를 통해 6개월 만에 도로를 놓은 경험이 있습니다.”

선진국보다 확실히 경쟁력이 있다고 할 만한 부분은 건설과 운송 분야.

강태준은 철저하게 경제적인 측면에서 납득할 이유를 설명하자 국왕도 진지해졌다.

“그래서 대금은 어떻게 지불할 생각이오?”

“제 판단으로는 시멘트와 쿠웨이트의 정부 보유 원유를 바터하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시멘트로 말이오?”

“저희 나라는 시멘트가 아주 풍부한 곳입니다. 공업화에는 시멘트가 많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우리나라에서 클링커를 벌크 상태로 수출한 다음 현지에서 분쇄 포장하면 어떨까요? 클링커 분쇄 공장을 중동에 건설하면, 공업화를 앞당기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겁니다.”

운송 사업의 1차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시멘트는 보통 종이로 포장해 운반하는데 항해가 길어지면 습기가 차서 못 쓰게 되거나, 접안 시설의 미비함으로 인해 하역 작업 때 상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클링커 채로 가져와서 가공하면 확실히 굳어 버리는 문제는 없어지겠군. 하지만 이 열사에 땅에서 건설 공사를 한다는 게 쉽지 않을 텐데?”

“선진국 기술자가 뜨거운 땅에서 고생을 자처하지는 않을 것 아니겠습니까? 저희는 월남의 땡볕에서 숙련된 60만의 제대 장병들이 있습니다.”

강태준은 그간의 바이 아메리칸 정책 덕에 한국이 후진국보다 월등히 숙련된 기술을 획득했다는 점을 역설했고, 쿠웨이트 국왕도 마음을 움직였다. 결국 양자는 계약에 사인했다.

-시멘트와 쿠웨이트 정부 보유 원유를 바터한다.

시멘트 값은 수송비를 포함해 1,250만 달러. 27만 톤.

유가를 배럴당 3달러로 계산해서 도입 가능한 원유 수량은 300만 배럴로 정했다.

계약서에 사인을 마친 후, 강태준을 본 관계자가 웃으며 말했다.

“하하, 좋습니다. 한 가지 조건을 부가해도 되겠습니까?”

“그게 뭡니까?”

“태권도 사범을 정식으로 초청하고 싶군요.”

“하하, 그거야 저희도 바라는 바입니다.”

강태준은 선방했다고 생각했지만, 거래를 주도한 이원준의 표정은 아리송하기 짝이 없었다.

“괜찮겠나? 현재 유가를 고려하면 거진 두 배나 되는데. 거기다 중동 쪽은 하역 접안 시설이 별로 좋지 않아서 수송비가 더 들 텐데 말이야.”

“약속 이행 기일이 150일이나 되는데 무슨 걱정입니까. 선적해서 가는데 한 달, 하역하는 데 열흘이니 한 서너 번 정도 오가면 충분하겠네요.”

정 안 되면 항구 접안 시설을 개축하면 되지 않나. 정 불가하다면 모 회장처럼 불을 질러 버려도 되고. 아, 클링커는 그냥 운송해도 상관없겠지.

* * *

-CIA를 철폐하라!!

-마약쟁이는 물러가라!!

그 사이, 하루가 멀도록 시위가 터지는 미국에서는 극심한 내홍을 겪고 있었다. 골드 게이트로 낙마한 닉슨이 은폐와 증인 매수에 필요한 돈을 CIA 자금으로 처리하라 명령했다는 것이 이유.

실제로 증인 매수 계획이 실행된 것은 아니었지만, 조사 과정에서 그동안 묵혀 두었던 흑역사들이 차례로 드러난 것이 문제였다.

CIA에 대한 이미지를 시궁창에 처박은 것은 에어 아메리카가 수행한 헤로인 수송 사건이 결정적이었다. 골든 트라이앵글에서 나온 마약이 전사자의 관짝에 실려 남미로 흘러갔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전방위적인 공격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정보기관이라도 그렇지. 자금 확보용 마약이라니. 이게 말이 되는 소리요?”

“CIA를 당장 폐지해야 합니다. 지금 정보당국은 국가 안보에 해를 끼치고 있습니다.”

미 공화당의 새로운 기수를 맡은 제럴드 포드 의원은 방송에 출연해, 중앙정보국 폐지를 골자로 한 정보기관 개혁안까지 제시하며 강도 높은 비난을 이어 갔다.

존폐의 위기를 맞은 CIA의 돌파구가 된 것은 중동에 대한 정세 분석 보고서였다.

[최근 국제 정세 확인: 중동전쟁의 재발 가능성에 대하여.]

-10월 초순 전후 이집트에서 기습적으로 이스라엘을 공격, 중동에서 또 한 번의 전면전이 일어날 가능성이 큼. 전쟁이 일어날 경우. OPEC에서 석유 수출을 중단, 석유를 무기로 활용할 가능성이 있음. 경제 충격에 대비해 아랍에 선제적 조치를 취할 것을 요망함.

CIA 신임 국장인 조지 부시가 제출한 보고서를 확인한 백악관에서는 국무회의를 열어 전반적인 대책을 마련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이게 믿을 수 있는 정보요?”

“피그스만 사태를 잊으셨습니까? 정보국 철폐를 막기 위한 면피용 발언이 분명합니다.”

“그래도 마냥 무시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말도 안되는 소리, 아랍어도 제대로 모르는 놈들이 첩보는 무슨.”

“신중해야 합니다. 파이잘도 경고하지 않았습니까. 잘못하면 다 잃게 될 거라고.”

CIA에 대한 신뢰성은 이미 심해를 뚫고 있었다. 현지어를 제대로 할 줄 아는 미국 국적자가 없어 이중간첩에 놀아나기가 일쑤였으니, 정보의 신뢰성이 의심되는 것도 당연하지 않겠나.

그럼에도 백악관은 여러 정보를 종합한 결과 우려가 일견 타당성이 있다는 데 중지를 모았다. 유엔을 통해 아랍권에 대한 무기 금수 조치를 취하는 한편, 북해산 브렌트유와 미국 서부 텍사스산 원유(WTI)를 증산하라는 계획을 허가한 것이다.

소극적인 조치였지만 이 행동이 도리어 아랍의 위기감에 불을 지폈다.

“무기 금수 조치라니. 이미 공세 정보가 노출된 것이 아닌가?”

“그럴 리가 없지요. 녀석들도 심증일 뿐입니다.”

“그렇다 해도 욤 키푸르까지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금수 조치가 발효되기 전에 당장 공격해야 합니다.”

이집트는 몸이 달았다. 이집트군 하나면 몰라도 동맹인 시리아군의 경우 대부분의 무기는 프랑스제가 아닌가. 소련과 유럽제, 미제를 혼용하는 아랍군 입장에서 무기 금수 조치가 제대로 지켜질 경우. 제대로 싸우기 힘든 상황이 될 것은 누구라도 예측 가능한 일.

결국 사다트의 선택은 공격을 앞당기는 것이었다. 그렇게 6월 5일. 이집트와 시리아는 휴전선을 넘어 각각 시나이반도와 골란 고원을 향해 진격했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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