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양재벌 강태준-316화 (316/361)

316화 PL 480

강태준이 주목한 것은 전후의 개간 성공 사례였다.

“그냥 지원해 달라 하는 것보다는 마음에서 우러나오게 하는 편이 낫지 않나?”

“전쟁에서 입은 내상을 전쟁으로 치유한다. 아이러니한데요?”

“그래. 그게 바로 명분의 힘이지.”

똑같이 미국이 벌인 전쟁이지만 한국전과 베트남전은 대조적인 부분이 많았다. 무엇보다 한국전쟁은 중공으로부터 자유 진영을 수호한다는 명분은 물론, 우방 획득이라는 실리까지 모두 챙긴 전쟁이 아니던가.

전국을 물색한 강태준은 강원도 신철원에서 약 4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동화정착사업마을에 주목했다. 110세대 530명의 주민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전후에 생긴 마을이었다.

“상이군인들이 무려 60세대라고?”

“예. 나머지는 북한 출신 피난민들이라고 합니다.”

좋은 롤 모델이라고 생각한 강태준은 촌장을 만나 대화를 나누어 보기로 했다.

하지만 처음 그를 만난 촌장은 그다지 썩 좋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다큐 촬영이요? 저희는 동물원 원숭이가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런 의도가 아닙니다. 위치에 대해서는 철저히 안보를 준수할 생각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어디서 찾아오는 사람이 있지 않겠습니까?”

“국내 방영이 아니니 걱정 마십시오. 원치 않으시면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요소는 전부 모자이크로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거듭 망설이는 촌장에게 강태준은 사생활에 피해가 가는 일은 없도록 할 것이라고 계속 강조했다. 장애인을 비하하거나 과도하게 감정에 호소하는 작품이 아님을 확답받고 난 뒤에야 촬영을 허락받을 수 있었다.

“130정보를 다 맨손으로 개간했다고? 사람이 할 짓이 아니군.”

“노가다죠. 사람이 배수진을 치면 어떻게든 되더군요.”

돌산을 깎아 논밭으로 만들어 내는 과정은 험난함의 연속. 정말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를 개간하여 마을 하나를 일구는 과정은 성한 사람도 해내기 힘든 과업이었다.

촬영이 진행되면서 강태준을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팔다리가 하나씩 없는 사람들이 개간을 통해 땅을 일구는 과정이 울컥함을 자아냈던 것이다. 심지어 의족이나 의수는 전부 촌장이 직접 만든 거라고 했다.

용도에 맞게 여러 형태를 지닌 의수에 강태준이 신기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걸 다 고안하시다니, 대단하시네요.”

“전쟁에서 한쪽 팔을 잃었을 때는 막막했지요. 몇 달간 멍 때리다 뭐라도 해 보려고 만들었습니다. 한쪽 팔로 뭘 하려고 하니 너무 불편하더라고요.”

“그래도 대단합니다. 직접 제작하려면 힘든 점이 많았을 텐데요.”

“말 마십시오. 처음에는 자살도 몇 번이나 떠올렸을 정도니까요. 주변의 도움이 없었다면 대체 어떻게 시작할 수 있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아, 이건 편집 부탁합니다.”

울컥한 촌장이 덤덤하게 웃었다. 오른쪽 어깨 밑이 휑한 그도 몸이 성치 않은 사람이었다. 농사일이 힘들지 않냐 묻자, 입에 겨우 풀칠하는 수준이긴 해도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는 게 정말 행복하다는 말에 다들 숙연해졌다.

영상의 말미에는 이 사업을 지원했던 그랜든 프래함이 나와서 말을 보탰다.

“우리는 평화를 위해 싸웠습니다. 극동의 이 작은 마을은 자유의 상징이자 전초기지입니다. 미국은 초심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자유를 쟁취했고, 그 결과 한국은 이제 잿더미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촬영 마지막 날, 촬영에 협조해 준 감사의 표시로 결핵 예방 키트와 트랙터를 증정하려고 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자기들보다 더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써 달라며 정중히 사양했다.

“그러면 여기 촬영 대금이라도.”

“좋은 일 하신다는데 받을 수야 있겠습니까. 좋은 일에 써 주십시오.”

이미 전란을 겪은 사람들은 크게 바라는 것이 없었다. 편집을 끝낸 다큐멘터리는 6.25 일정에 맞춰 시카고 일대에 시범적으로 방영되었다. 휴머니즘과 인도주의적 구호의 면모를 돋보이게 하는 장면은 많은 사람들의 눈시울을 붉혔다.

“신기하네요. 그 아무것도 없던 마을이 저렇게 발전했다니 아니 막스, 울어요. 당신?”

“아니. 눈에 뭐가 들어간 것 뿐이야.”

한국전 참전군인으로 참전했던 막스는 영상에 몰입했는지 저도 모르게 눈을 훔쳤다.

잊고 있었던 전쟁의 참상과 고난의 행군을 떠올랐던 것.

전란의 상처를 딛고 열심히 사는 사람은 가슴속에 깊은 울림을 주었다.

미국 언론은 이런 감수성 넘치는 접근을 놓치지 않았다. 한국전 이후 한국이 발전하는 과정이 조명되면서 케어를 중심으로 진행했던 자조 프로젝트가 다시 부각되기에 이른 것이다.

식량 전문가인 맥거번으로서는 호재, 대통령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세상에는 여러 타입의 빈곤이 존재합니다. 물질적 빈곤, 정신적 빈곤. 우리는 물질적으로 풍요롭지만 정신은 가난합니다. 우리는 풍요 속의 빈곤에서 살고 있습니다. 전쟁은 손쉬운 방법이지만 해답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세계에 기여할 수 있습니다. 세계에는 아직 도움의 손길을 바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맥거번은 미국이 세계의 경찰이라는 책임감에서 벗어나자며 새로운 역할을 주문했다.

백악관 연설을 통해 푸드 크루세이드를 포함한 미국의 구호 정책에 대해 역설하며 한국을 무려 열두 차례나 언급했다.

어느새 줄을 갈아탄 언론에서도 연신 호의적인 기사를 쏟아 내었다.

[한국전 발발 22주년을 기념하여, 참전용사 희생에 경의]

[백경그룹, 한국의 발전은 전적으로 미국 덕분, 워싱턴서 참전용사에 기념 만찬회 열어]

백경그룹은 6.25를 맞아 보은 행사를 열었다. 워싱턴 한국전 참전용사기념공원을 조성하고 미 한국전 전사자를 위한 추모의 벽 건립에 손을 보탤 것을 밝힌 것이다.

“미국 참전용사들에게서 거액의 기부금이 도착했습니다.”

“재향군인단체와 상이군인 협회에서 한국을 후원하고 싶다는 독지가들이 속출하고 있답니다.”

그 효과는 지대했다. 여론의 환기는 미국으로서도 한국에 대한 지원을 다시 고려하는 계기가 되었다. 복잡한 정치적 역학적인 고려는 물론, 베트남전에 기꺼이 군대를 보낸 혈맹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한 것이다.

“베트남은 포기하더라도 남은 우방을 지켜야 합니다.”

“지금껏 우리 미국은 인지 부조화를 겪고 있었습니다. 무력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이젠 꿈에서 깨어나 현실을 직시할 때입니다.”

베트남의 적화는 피할 수 없지만 남아 있는 집토끼를 지키자. 미국이 소련이나 체코도 아닌 베트남에게 패배했다는 것은 상징적이었다. 수십억 달러가 넘는 자금과 30만 명이 넘는 전사자들이 가져온 교훈은 더 이상 강경책만으로는 패권을 지킬 수 없다는 사실.

결국 선택한 길은 경제적인 협력을 통한 긴장 완화였다. 농산물 원조를 통해 반공 국가들을 늘리는 한편, 각국에 개입해 영향력을 확보하고자 한 것이다. 미 언론은 그 역할을 수행했다.

[베트남 철수 지지. 한국 마지막까지 동맹으로서 소임 다할 것]

[미국, 북 베트남과 해빙 무드, 무의미한 전쟁을 끝내자]

신정부와의 협상 끝에 한국은 미국의 식량 원조를 늘리는 대신 한국군 현대화를 지원한다고 합의했다. 베트남전 철수에 대해 미온적이었던 한국 정부로서도 별로 나쁠 것이 없는 딜.

박 정권에서는 미국의 통 큰 결정을 지지한다며 입장을 180도 선회했다.

PL 480 예산이 재배정되면서 무역의 첨병인 백경그룹 역시 수혜를 입기는 마찬가지였다. 잉여 농산물 운송을 담당하는 대가로 원조물자를 배정받게 된 것이다.

“대충자금이라니, 말로만 들어 봤지 장난이 아니군요. 이런 걸 그동안 제분협회에서 독식해 왔다니.”

“그러게. 원재료로 세이브되는 금액만 2,500만 달러라니. 이건 그냥 땅 짚고 헤엄 치기군.”

공정 환율이나 공매 환율로 원조물자를 배정받은 사람은 재처분을 통해 엄청난 차액을 누릴 수 있었다. 거기다 UN 군환율을 통해 달려 교환 비율을 조정할 수 있었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버프 씨드, 크레프트, 파스탈로프, 투피 인더스트리, 파핑스타, 어지간한 식품업계들이 다 지원했구먼.’

수출을 희망하는 식품회사 리스트를 확인한 강태준은 미소를 지었다. 미국에서 구호물자로 들어오는 업체들의 면면은 다들 쟁쟁하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구호 물품이라는 명칭이 달리면 비과세, 면세 혜택이 주어지는 만큼 그들로서도 큰돈 들이지 않고 인지도를 높일 수 있는 기회였던 것이다. 하지만 혜택이 큰 만큼 날로 먹으려는 업체들도 상당수였기 때문에 강태준은 꼼꼼히 제품을 확인했다.

“칼로리 바라니, 신제품을 보급하고 싶다고?”

“일단 저개발국들에 시범적으로 제공할 목적인 듯합니다. 필리핀이나 인도를 목적으로 한 것 같습니다.”

“그건 안 돼. 한국에 독점 판매하면 생각해 보겠다고 하게.”

배짱 장사를 해도 아쉬운 것은 저쪽이지 않나. 그렇게 리스트를 확인하던 중. 마침 씩씩거리며 사무실로 돌아온 황철득이 맹물을 벌컥 들이켜며 씩씩거렸다.

“아니, 이 시간에 식사하러 안 가셨습니까?”

“아따 식당에서 밥을 안 파네. 밥을.”

“그거야 당연하지요. 오늘 무미일이잖아요. 면 드세요, 면.”

그러자 씩씩대던 황철득이 중얼거렸다.

“아니, 무슨 여기가 공산주의 국가야? 쌀밥을 팔지 않는다니 이게 미쳤나. 밥도 죄다 잡곡만 처넣고들 말이야.”

“좋은 게 좋은 겁니다. 잡곡이 몸에 얼마나 좋은데, 쌀밥만 먹으면 각기병 걸려요.”

“이 나이 처먹고 내가 먹고 싶은 것도 못 먹나. 그러면 공깃밥 크기라도 좀 키우든지. 이게 뭐냐? 조만한 스뎅통에 담아 주면 어쩌라고. 새 모이도 아니고. 이게 뭐야?”

“불평하지 마십시오. 학교 도시락에도 쌀밥 못 싸 간답니다.”

혼식 장려 운동의 여파였다. 정부는 미국에서 대규모로 도입된 원조 농산물을 이용해 저곡가 정책을 펴는 동시에, 절미 운동을 통해 쌀 소비를 줄이려 했던 것이다. 아버지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어서일까. 그 말을 들은 복만이는 우려를 금치 못했다.

“거, 무안 사람들은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곡가가 많이 떨어지면. 농가에 좀 타격이 있지 않을까요?”

“걱정 마, 그 부분은. 우리랑 계약을 맺은 농가들이 공급하는 곡류는 정부에서 전량 수매하기로 했어.”

“그거 다행이군요.”

“그보다 간척 사업 관련 진행은 어떻게 되고 있어?”

“장성량 의원 쪽에서 밑 작업이 끝났답니다. 대충자금 전용 허가가 끝나면 바로 공사에 돌입할 예정입니다.”

“생각해 보니 진짜 오래도 끌었군.”

“그러게요.”

강태준의 감회는 남달랐다. 거제도 개발 사업은 멸치 조업 시작할 때부터 염두에 둔 숙원 사업이었다.

기존에는 거제대교를 짓기 위해 여러 번 시도를 했지만 땅을 보유하고 있는 토지 소유주들과의 견해차를 좁히지 못해 반쯤 포기하고 있던 찰나였다.

더불어 막대한 자금과 인력이 소요되는 데다 물론 대형 공사를 치를 만한 토목기술자를 섭외하지 못해 계속 표류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이번에는 일본 토목회사에 근무해 간척 사업 실무에 밝은 박응훈을 기술 상무로 영입했고 현장기술자로 방조제 축조 시공 경험이 풍부한 박찬제를 불러들이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십장들 대부분 일제 시대 때 간척 공사장에서 일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인 만큼 경험도 빠삭했다.

‘앞으로 중동에 진출하려면 미리미리 경험을 쌓아야지.’

늦었다 생각한 지금이 제일 빠른 시점 아니겠는가.

“아, 강 사장 지금 오셨나?”

현장에 도착하니 익숙한 얼굴이 그를 감싸 안았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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