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화 푸드 크루세이드
다들 나쁜 짓을 성공시킨 아이들처럼 지나치게 흥분한 기색이었다.
강태준으로서도 당혹스럽기 짝 없는 일이었지만, 존경의 염을 보내고 있는 동생들의 기대를 꺾고 싶은 생각은 없었던 만큼 그냥 얼버무렸다.
“뭐 물론 이 정도야. 당연히 예측했던 것 아닌가?”
“역시 형님이십니다.”
“블루 박스는 전량 폐기하는 게 좋겠어. 혹시 타겟이 될지 모르니까.”
“맞지요. 이런 일일수록 보안이 중요하지요. 그렇고 말고요.”
“일단 지금부터 작업을 밀어붙이자고.”
장애물이 사라진 지금이야말로 사업을 밀어붙일 시간이었다. 그래픽 디자인 회사와 컨설팅 계약을 맺고 컴퓨터 엔지니어링 회사인 롬본 엔지니어링을 인수했다.
“이참에 새로운 회사를 설립하면서 전반적인 조직 개편을 단행하도록 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예? 부서를 나누지 않고 아예 분사를 하겠다는 말씀입니까?”
“아무래도 현재 산업 구조상 비디오 게임에서 우리 회사가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높아요. 비디오 게임을 독점유통을 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으니까요.”
“하긴 독과점이 문제가 될 수도 있겠군요.”
“혹여 우리를 경쟁자로 알고 있는 핀볼 배급사들의 주장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미리 선제적인 대응이 필요할 듯합니다.”
신작 게임과 제품을 연구개발을 촉진하기 위해 연구소를 설립에 앞서 강태준은 새로운 회사 분사를 계획했다.
그간 강태준은 소송 대리인인 로이로부터 비디오 게임의 독점 유통과 관련해 법적 분쟁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경고를 지속적으로 받고 있었던 것이다.
‘자칫 잘못하면 테라스톤처럼 여러 개로 쪼개질 수도 있으니 말이지.’
전방위 로비에도 불구하고 테라스톤은 결국 법무부의 기업 분할 명령에 5개 업체로 찢겨 나갔다. 그야말로 오체분시를 당한 꼴이 된 것이다.
이처럼 미국의 반독점 규제는 기업 손보기 수준으로 끝나지 않았다.
독과점 제소로 톡톡히 재미를 봤던 강태준으로서는 미국의 독점금지법이 얼마나 무서운지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페이크 경쟁사를 만들어 내는 방식.
다른 배급업자들에게 이중으로 판매할 수 있는 루트를 확보하고자 한 것이다.
새 기업인 버닝 게임즈의 대표는 버니가 주도하기로 했다. 애초에 다른 타이틀을 개발하기에 이른 것이다. 강태준이 생각한 것은 일종의 레이싱 게임이었다.
“넵? 3D로 만들라고요?”
“위즈한테 듣자 하니 삼각법으로 구현할 수 있다고 그러던데?”
노가다에 가까운 작업이었지만 불가능하지는 않다. 라인 드로우라는 알고니즘을 사용한 방식이었다.
라인드로우는 랜더링 분야는 물론 모델 재설계에도 쓰이는데 윤곽선, 리지 및 밸리 선과 하이라이트를 통해 가깝게 구현할 수 있다.
길에 따라 조이스틱을 움직이고 차를 피하는 단순한 게임으로 마권 게임 개발을 하던 시스템 애널리스트가 붙어 만들어 낸 것이다.
굉장히 빠르게 만들어 낸 게임이었지만 생각 이상의 인기를 얻었고 그에 힘입어, 여기저기 우후죽순 유사한 게임들이 출시되기 시작했다.
“뭔가 경쟁구도가 생긴 느낌이네요.”
“그보다 이제 우리 회사가 대체 몇 개지?”
그러자 잠시 생각하던 오재갑이 어림해 보았다.
“어디 보자, 크게 운송, 기계, 전자, 의약, 식품, 유통 같은 회사가 있고 계열사를 포함하면 총 36개 정도 되네요.”
“그렇게 많이? 그간 어떻게 운영해 온 거지?”
생각해 보니 무작정 일을 벌이기만 했을 뿐 뒤처리를 제대로 한 적이 없지 않나. 그렇게 주먹구구식으로 운영했는데 이 큰 회사가 멀쩡히 돌아가다니 불가사의한 일이다.
“그게 형님이 던지고 가시면 저희가 처리했죠. 그냥 대충 맡기셨잖습니까?”
“저희가 감당 못 하는 물량은 외주 주고 뭐 그렇게 처리했죠 뭐. 인력은 영도회나 다른 데서 그냥 되는 대로 뽑았고.”
“재갑 형이 제일 고생 많이 했어요. 거의 뭐 다 끝장이었죠 뭐.”
알아보니 물밑에서 묵묵히 서포트해 준 덕이었다. 강태준이 지금까지 벌인 일들을 커버 쳐 주고 있었던 것이다. 전생에 재벌 타이틀을 가라로 딴 게 아니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안 되겠구먼. 이참에 물갈이도 할 겸, 직제 개편을 해 보도록 하지.”
미 국세청(IRS)에 털린 이후, 강태준은 처음으로 조직 개편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사업이 너무 다변화되다 보니 정리할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다.
“지금부터 직제 개편안을 발표하겠습니다. 원양어업 부문 본부장 밑 총괄 부회장에 오재갑을 일단 기본적으로 소비재를 중심으로 한 국내 백화점 부문은 김광필. 해외 유통 파트는 로빈 장, 홍보 밑 조사실장은 김춘삼. 전략기획팀장에 설인모, 기술 개발 부문은 천대광, 출판은 방국진…….”
거의 3개월간 사장과 임원급은 물론 일선 실무진에 이르기까지 전반적인 인사 개편이 단행되었다. 무안과 관련된 물산 파트는 이중혁과 황인철이, MSG를 필두로 한 식품 개발 부문은 노기철과 안연복이 나란히 사장급으로 승진했고, 공장을 맡은 차대응도 전무급으로 승진했다.
섬유 파트는 전적으로 천경물산 쪽 의견에 따라 신규 영입으로 가닥을 잡았다.
목재부문은 최달건. 소비재 유통 관리는 김철민, 고철 부문은 황철득의 조카인 황선홍이, 의약연구 계통은 마리아 소장을 위시로 한 유엔과 캐나다 구호팀이 대거 영입되었고, 병원장급은 킷 갑슨과 기존에 협업하던 세브란스 의료진을 포섭했다.
영화산업 쪽으로는 백경 픽쳐스를 새로 만들면서 이번 샤크어택을 맡은 슈피겔 감독이, 이와사키 감독이 주주로 등극했고. 호프만을 비롯한 유명 배우진들이 주주로 참여했다.
제주도 쪽에 용기 사업부는 반삼평이, 농업 부문은 외삼촌을 비롯한 무안 협동조합원들이 맡았고 우순해 박사가 연구소장에 오른 것이다.
카발 자동차에 박진환과 최창렬 등 임원진은 그대로 직급만 한 단계씩 상승했다.
추가로 경비업체와 관련해서는 최만수와 핸더슨을 총괄 매니저로 앉혔다.
오성과 협업 중인 오앤비 인터네셔널 쪽은 아예 미국 쪽 외부인사를 새로 영입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그렇게 상장사인 식품과 물산, 기계 등의 지분을 교환한 강태준은 재정비의 시간을 가졌다.
사실 이유는 계열사간 서열을 정비하고 지배구조 확립을 위해서였다.
원양어업으로 시작한 그룹이었지만 지주회사가 된 것은 백경출판이었다.
강태준이 81프로 지분을 갖는 백경 홀딩스의 회장으로 등극한 것이다.
명실상부한 백경 그룹의 출범이었다.
* * *
그렇게 백경이 대 개편의 진통을 겪는 사이 미국은 혼란기였다.
닉슨의 선거 패배 이후 엄청난 후폭풍이 몰아닥친 공화당은 그야말로 초토화되었다.
대선 패배로 완벽한 식물 상태에 빠졌고 닉슨은 자기가 좋아하지 않는 TV연설까지 해야 했다.
“나는 사기꾼이 아닙니다. 대통령은 재직 중 행위로 탄핵을 제외한 그 어떤 사법절차에도 구애받지 않는 것이 원칙입니다.”
정무적 통치행위였다는 변명은 전혀 통하지 않았다. 닉슨의 자기변호는 오히려 미국인들의 혐오감을 불렀다. 오히려 사기꾼이라는 멘트만 뇌리에 박혀 버린 것이다. 닉슨의 몰락을 앞당긴 것은 같은 팀이었던 앵그뉴의 폭로였다.
선거 대패 후 검찰의 압박이 강해지자 앵그뉴는 혼자만 살겠다며 검찰과 딜을 시도했던 것이다.
-오늘 새벽 앵그뉴 의원이 정계 은퇴를 시사했습니다. 이번 공화당의 패배 책임에 대해 통감하며 앞으로는 야인으로 돌아가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앵그뉴라는 피라미 대신 대통령을 잡기 위해 FBI는 협상을 받아들였고, 그 결과는 처절했다. 그간 묻어 두었던 뇌물과 공금 횡령 사건이 쌍으로 터지면서 닉슨을 필두로 한 온건 보수파는 그야말로 멸망해 버린 것이다.
탄핵소추의결안이 발의되는 등 그렇게 혼란의 절정이 지나고 맥거번이 제37대 대통령에 취임해 연설을 했다.
-맥거번 후보는 추후 대외정책에 있어서 베트남 철군을 앞당길 것이며, 식량 안보 계획과 관련해서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 시사했습니다.
-美 연준 금리 인상할 계획으로 정체되었던 농산물 수출을 늘려 금본위제 폐지에 따른 조정작업의 일환으로 대외 원조를 늘릴 생각이라고 합니다.
철군을 공약으로 걸었던 만큼 ‘미국이여 돌아오라(Come Home, America)’라는 슬로건을 대선 공약으로 내걸었다.
그 사이 백경 그룹 전략 기획팀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일국의 대통령이 바뀐다는 것은 대외정책에 큰 변화를 야기하는 일.
기존에 알고 있던 역사적 흐름과 많은 부분이 비틀어진 만큼, 강태준으로서도 대비해야 했던 것이다.
“맥거번 후보의 성향에 대해 분석은 끝났나?”
“네. 기본적으로 식량 안보 정책에 비중을 두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대외 기조에서 있어서 포용 정책을 밀고 나갈 것이라 생각합니다.”
가장 주된 부분은 원조 정책과 관련된 부분이었다. 가격지지 정책을 축소하고 공급통제와 소득지지 직불제를 도입하겠다 천명한 것이다. 농업법을 도입해 목표가격과 결손보상제, 융자 제도 도입 등 소비자를 보호하고 농산물이 국제가격에 제대로 유통될 수 있도록 유도하겠다는 취지였다.
“역시 사우스다코타 출신답네요. 농업정책에 빠삭하군요.”
“장기로 하는 분야에 투자한다는 거지. 근데 좀 골치 아프군.”
애초에 맥거번은 케네디 정부 시절 대통령 직속 “평화를 위한 식량 (Food for Peace)” 프로그램의 첫 총책임자였고 농업 및 식품업 진흥에 관련된 활동을 중심으로 의정 활동을 쌓았던 만큼 예견된 변화이기도 했다.
하지만 베트남 철군이 예전보다 훨씬 앞당겨지면서 기존보다 일찍 발을 빼게 된 것은 별로 달갑잖은 변화였다.
“근데 73년까지 미군을 전부 철수하겠다니, 이건 2년이나 빠르잖아.”
“그러게요. 그래도 대충 5년은 유예가 남을 줄 알았더니.”
그러자 이번에는 설인모가 나섰다.
“그렇다면 이번 변동되는 대외정책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싶군.”
“어떻게 말인가요?”
“미국 국제개발처(USAID) 쪽에서 동시에 인도주의 구호를 표방하고 있지 않지 않나. 이번 정책에 잘 편승하면 케어에서 하는 푸드 크루세이드 사업 관련 지원을 다시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그러자 회의의 말석에 자리 잡은 복만이가 물었다.
“푸드 크루세이드라고요? 그게 뭡니까?”
“아이젠하워 행정부 당시 미국 경제협조처(ICA)에서 주도한 사업이지.”
“아, 케어 패키지 말이군요. 저도 군에서 먹어 본 적 있습니다.”
광필이가 아는 척을 했다. 케어는 제2차 세계대전 후 구호물품을 유럽에 전달하기 위해 창설된 단체로 주한유엔민간원조사령부의 지휘를 받아 한국의 재건사업에도 손을 보탠 전적이 있었다.
곧이어 설인모의 설명이 이어졌다.
“물론 케어 자체도 그렇고 푸드 크루세이드란 거 자체가 그렇게 순수하지만은 않아. 인도주의적 구호를 표방하는 동시에, 미국의 우방에 대한 지원정책 성격이 강하거든.”
“대외적으로 순수한 NGO를 표방하지만 본질은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함이란 거죠?”
“맞아. 케어는 PL480을 통해 미국의 잉여농산물 정책에 깊이 개입해 있지.”
PL480으로 불리는 농업무역발전 및 원조법을 통해 미국 정부는 이 규정을 미국의 우월성의 근거이자 기아와 긴급구제를 명분으로 사용했다.
“여기서 핵심은 3관이야. 섹션 416의 변경을 통해 잉여농산물 사용을 보장하고 있거든. 원조당국인 유솜과 한국정부가 합의하면 농산물을 팔아 얼마든지 다른 용도로 전용할 수 있다는 거야. 아마 들어 봤을 걸 대충자금이라고.”
PL480 1관 판매대금을 수혜를 받은 지원국이 적립한 현지통화를 가리켜 대충자금이라고 부른다. 그제서야 복만이도 이해를 한 모양인지 무릎을 치며 감탄했다.
“아 이만승 그 자식이 대대로 해 처먹은 자금 말이군요. 그 말인 지원을 받기만 하면 무조건 이득이겠네요.”
“맞아요. 구호원조로 받은 잉여 농산물을 팔아 개발원조로 전용할 수 있다는 소리니까.”
“원재료뿐이 아니지. 여기로 들어오는 제품 중에는 고단백 식품도 있어. 미국에서 원조를 끊으면서 민간 기업이 들어올 수 있게 바꿨거든.”
한미 구호협정상 면세통관은 물론 운송비용 부담까지 덜 수 있다. 애초에 미군과도 운송계약을 한 경험이 있는 만큼 백경이 제일 유리한 입장이긴 한 것이다. 그러자 오재갑이 잠시 눈치를 보며 말했다.
“흠 근데 가능할지. 좀 의문입니다. 아무리 정책 기조가 바뀌었기로서니 그렇다고 이미 끊긴 지원을 다시 해 줄까요?”
“사실 나도 그게 좀 걸려. 어떻게 하면 지원을 다시 받아 낼 수 있을지 잘 모르겠거든.”
팔짱을 낀 채 해결책을 모색하던 임원들. 생각에 잠겨 있던 강태준이 입을 열었다.
“그거야 지원을 하도록 판을 짜야지요.”
“뭐 어떻게 말인가?”
“단순하게 접근하죠. 미국으로서도 상처 입은 자존심을 회복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