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6화 비버리힐스
리틀 오사카에서의 대히트를 시작으로 캘리포니아롤이 무서운 기세로 팔려 나가기 시작했다.
훌륭하게 게살의 대체재로 자리매김했다.
고객입장에서는 맛있는 프리미엄급 맛살을 부담 없는 가격에 맛볼 수 있고, 식당입장에서는 단가상승의 압박에서 벗어나 게살 요리를 싸게 제공할 수 있으니 양쪽의 니즈가 훌륭하게 맞아떨어진 것.
강태준은 미국인에게 익숙한 치킨 스톡을 넣은 게살 스프를 같이 팔았다.
계란을 풀어 간단히 데우기만 하면 먹을 수 있는 간편식이라서일까. 인기는 선풍적이었다.
[게맛살 돌풍, 50일 만에 200만 개 넘게 팔려]
게맛살의 흥행은 예정된 것이었다. 거기엔 마침 일기 시작한 홈메이드 열풍에 편승한 탓도 컸다.
레스토랑에서의 플레이팅을 흉내 내는 사람들이 늘면서 높은 인기를 구가하게 되었던 것이다.
게맛살의 수요가 늘어나자 레스토랑은 물론 일선 호텔과 뷔페, 웨딩홀 등에서 맛살을 공급받고 싶다는 제의가 물밀듯이 밀려 들어왔다.
호평에 힘입은 강태준은 생산라인 증설에 나섰다.
현재의 어육 생산량만으로는 도저히 급증하는 수요를 따라잡을 수 없었던 것.
매출전표를 확인한 강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꽤 인기가 높은데. 그래?”
“이 속도대로라면 올해 1,500만 불 이상 매출 달성은 충분할 거 같습니다. 특히 유럽 측 어묵 수출량이 지난 분기 대비 600톤으로 12.4%나 증가했답니다.”
노기철의 보고를 본 강태준은 고무적인 성과에 화색을 띄었다.
“오, 게맛살이 유럽시장에 먹힌다던가?”
“슈베흐 사 쪽에서 창립기념식 때 제공한 메인 디쉬가 꽤 이슈가 되었던 모양입니다. 프랑스 쪽에서 주문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주로 샐러드나 스낵용입니다.”
“역시 미식에 목숨을 건 놈들이라 뭘 좀 아는구만.”
“예. 아무래도 찐 어묵이 튀김보다는 훨씬 본연의 맛을 느끼기 좋지 않습니까. 건강식이라는 인식이 높고, 가격 부담이 덜하다 보니 수요가 늘어난 것 같습니다.”
“국내 생산을 독촉해야겠군.”
그간 유럽 시장에서는 일본산 가마보코에 밀려 별 재미를 보지 못하고 있었던 만큼 이번 일은 꽤나 고무적이었다. 지금이야말로 판도를 바꿀 분기점이랄까.
서둘러 귀국한 강태준은 부산 어묵 공장으로 바로 향했다.
-위생은 생명, 생명을 지킵시다.
새 설비가 설치된 공장. 성형기에 배합육과 색소를 넣고, 시트를 성형하는 과정 롤러에 통과시켜 결에 맞춰 세절하는 과정이 한창이다. 게맛살 시트를 재결합 절차까지. 수증기와 소음으로 가득한 공장 안에서는 위생모를 쓴 황철득이 바쁘게 움직이는 중.
강태준을 본 황철득이 서둘러 인사를 건넸다.
“아이구, 사장님 오셨소. 이거 벌써 왔네 그래.”
“꼭두새벽부터 힘 좋으십니다.”
“지금처럼 호경기에 쉴 수야 있나? 그보다 여기까지 웬일인가 바쁘신 분이.”
“물량 때문이죠. 뭐. 잘돼 갑니까?”
“그럭저럭.”
시설 점검차 공장을 순시해 보니 공장 안은 아주 깨끗했다.
두드려 팬 명태살을 실로 뽑아서 뭉치는 모습을 보니 스트레스가 절로 풀린다고 할까.
버벅거림 없이 순조럽게 흘러가는 공정에 강태준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찐어묵이 잘 팔린다고 하니, 원적외선 기계를 좀 더 들여놓으면 좋을 거 같군요.”
“그러면 라인 하나만 더 늘려 주면 안 되겠나? 이번에 이쪽에서도 하나 제품을 개발해 봤거든.”
“어 정말입니까?”
“정말이고 말고. 자 한번 드셔 보시게.”
아무 생각 없이 맛을 본 강태준은 꽤 놀랐다. 기존의 게맛살보다 좀 더 선홍빛이 강했지만 맛은 더 좋았던 것이다.
“색감이랑 풍미가 한층 더 진한데요.”
“흥국은 파프리카 색소로 대체하고 랍스타랑 새우 액기스를 섞었지. 원료가 해산물이다 보니 태풍이나 수온변화 등의 기후여건에 따라 수급량이 들쭉날쭉할 수 있으니까 말이야.”
“그것도 그렇고 이 향은 어떻게 개선한 겁니까?”
“게 껍데기에서 키토산을 뽑고 올리고당을 넣어 풍미를 첨가했네.”
어차피 맛이라는 것이 후각이 팔 할 아니겠나.
코 막고 먹어 보면 다르겠지만 이 정도면 매우 훌륭한 수준.
“생각이 깊네요. 이걸 누가 떠올린 겁니까?”
“핸더슨 역할이 컸지. 십 년 가까이 연육 소세지를 먹어서 그런가 완전 준전문가더군.”
“핸더슨이라니 이거 상이라도 줘야겠는걸요. 봉급이라도 올려 줘야 하나?”
생각해 보면 연육 소세지는 소시지보다는 맛살에 가까운 물건. 미군에 납품을 하면서 까다로운 요구사항에 맞추기 위해 노력하다 보니 절로 맛에 대한 감각이 생겨난 것이다. 잠시 생각하던 강태준이 한 가지 아이디어를 더 떠올렸다.
“생각해 보니 이거 시각적으로도 개선이 필요할 듯싶습니다.”
“어떻게 말인가?”
“지금의 스틱모양은 좀 뭐랄까 모양이 밋밋하잖아요. 소세지도 문어 모양으로 칼집을 내면 더 맛있지 않습니까. 그런 면에서 게맛살도 칼집을 내준다면 좋을 거 같은데요.
”예를 들면?
“짬뽕에 넣는 오징어에서 솔방울 무늬의 칼집을 내는 방식을 응용해 보지요.”
강태준의 말에 황철득도 관심을 보였다.
“흥미롭구먼. 꽃송이처럼 말인가?”
“썰어 낸 형태로 가공하면 혀에 밀착하는 표면적이 넓어져서 맛을 음미하기도 좋고, 탱글탱글한 식감도 살아나지 않겠습니까.”
“그거 은근 토핑용으로 따로 팔면 안주용으로 딱이겠어.”
“네네. 맞습니다. 품은 좀 들겠지만 아무래도 그게 고급스러워 보이니까요.”
해외에서의 판매량이 높아지자 자신감이 생긴 강태준은 국내 공략을 시작했다. 맛살을 메인으로 두고, 참치 통조림. 장어구이, 버터구이를 한데 묶어 세트화한 것이다.
“원산지 확인부터 최종 검품까지 이중으로 검수하세요. 절대 불량품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일까 국내 반응은 상당히 괜찮았다.
명절 특수를 타면서 게맛살이 대형 마트에 성공적으로 안착하자, 강태준은 곧바로 다른 투자처에 눈을 돌렸다.
“생산라인이 보강되면, 휴게소에서 어묵바를 출시해 보는 것도 좋겠어.”
“어묵을 바처럼 만든다고요?”
“꼬챙이에 어묵을 끼워서 파는 거지. 미국에서 보니 드라이브 앤 쓰루 같은 곳이 많더군. 고속도로 휴게소나 학생들에게 간식용으로 팔아 볼 생각이야. 직영매장 개설을 통해 시장을 적극 개척하면 좀 더 접근성이 높아지지 않겠어?”
춘삼이도 공감이 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아이스크림처럼 말이군요. 확실히 부재료에 따라서 접근성이 좋아지겠네요.”
“그래. 돈 들어오는 대로 휴게소 설치 장소부터 알아보게. 입점 장소부터 알아봐야지.”
“알겠습니다.”
춘삼이가 밖으로 나가자 강태준은 안경을 벗고 휴식을 취했다. 뻑뻑해진 눈을 비빈 강태준이 천장을 보며 다시 생각에 잠겼다.
’다른 건 괜찮은데 아무래도 게맛살 특허 문제가 마음에 걸리는군. 전국 카마보코 수산가공 협동조합 연합회라 좀 싸한데 그래?‘
퀄리티에서 확실한 차이를 보여 주는 만큼 국내 업체 중에서는 감히 경쟁자가 없었지만 일본 업체들이 걸림돌이다.
섬나라인 덕분에 일찍부터 수산업이 발달한 일본은 원래부터 어묵 제조로 이름이 높은 곳.
아니나 다를까. 게맛살의 대히트하자 곧바로 유사품을 우후죽순 내놓기 시작한 것이다
특허 관리 소홀로 송두리째 이익을 빼앗긴다면 좀 아쉽지 않겠나.
실제 역사에서는 일본 업체가 당한 일이지만 강태준은 그 전철을 그대로 밟을 생각이 없었다.
“생각해 봐야 소용없군. 이런 생각하지 말고. 유하 씨한테 물어봐야겠어, 그래.”
설유하는 뉴욕 주, 캘리포니아 주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후 공정 거래와 국제통상 전문 변호사로 활동하며 비버리힐스의 고급주택가에 살고 있었다.
충동적으로 비행기를 탄 다음 캘리포니아로 도착한 강태준.
미국에서 손꼽히는 부촌답게 잘 정돈된 거리에서 차를 몰던 강태준이었다.
’여기쯤인가?‘
눈요기를 하던 강태준이 주소지로 도착하자. 설유하가 밖에 나와 있는 것이 보였다.
잔디를 깎는 중이었는지 콧노래를 부르며 식물에 물을 주는 모습이 편안해 보인다.
뒤늦게 강태준을 확인한 그녀가 깜짝 놀랐다.
“어머! 웬일이에요. 말도 없이.”
“간만에 생각나서 왔어요. 집이 참 좋은데요. 여기. 유하 씨 겁니까?”
“그럴 리가요. 로펌에서 빌려줬지요. 패소 후에 매물로 나온 걸 싸게 인수한 거예요.”
그녀가 사는 곳은 무려 5개의 침실과 6개의 욕실이 딸려 있는 대저택이었다. 고급진 나무바닥에 벽난로, 매트한 분위기의 주방에 원목 가구 벽돌로 된 벽제가 편안한 분위기를 자아낸다고 할까.
수영장 야외 그릴과 게스트하우스까지.
“그래도 대단하구먼요. 이제 보니 우리 유하 씨가 능력자인가 보네.”
“그걸 이제 알았어요? 그보다 왜 왔어요? 또 일 때문이죠?”
“그거야 부수적인 이유고 당연히 보고 싶어서 왔지요.”
“말이나 못하면?”
잠시후 마실 것을 가져오겠다고 말한 설유하가 얼음이 동동 뜬 레모네이드를 가져왔다.
“오, 맛있네요.”
“그래서 요새 어떻게 지냈어요?”
“뭐 바빴죠. 이것저것 사업을 하느라.”
“어디 한번 썰 좀 풀어 봐요. 어떻게 살았나 궁금하니까.”
“재미없을 텐데?”“그래도 해 줘요.”
여느 때처럼 사업 이야기를 하는 강태준의 말에 턱을 괸 채 흥미롭게 들었다.
“게맛살이라. 별걸 다 만드네요. 근데 뭐가 문제인데요?”
“다른 곳은 전부 출원이 통과됐는데 일본만 특허 출원이 지연되고 있어요. 외부 기관이 심사 과정에 개입한 걸로 봐서 의도적으로 그러는 거 같아서 말이죠.”
애초에 미국과 유럽 등 주요국에 어육 제조방법과 장치 특허를 출원했지만 이상하게도 차일피일 특허를 미루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많은 나라들이 국내 기업을 보호하기 위해 특허를 지연시켜 꼼수를 쓰는 경우가 적지 않았던 만큼 합리적 의심이 들 법한 행동이었다.
“흠.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네요. 그럼 서류를 확인해 볼까요?”
“지금요?”
“서류 가져왔죠? 봐요.”
급 업무 모드로 돌아간 안경을 쓰고는 하나하나 서류를 살폈다.
“공정상 수작업이 필요한 기계로 특허출원을 받는다라 이건 좀 애매한데요.”
“어떤 점이 말입니까?”
“수작업으로 생산하면 손힘에 따라 강약이 다르게 나올 거 아니에요. 이렇게 되면 생산할 때 제품의 퀄리티가 들쑥날쑥해지거든요.”
“그게 많이 문제가 됩니까?”
“특허출원을 받고 싶으면 규격화가 중요하죠. 여기 면발 형태의 어육을 자동적으로 결속해 주는 경우도 그래요. 이게 어떤 점에서 다른지 논거가 부족해요.”
“그렇다고 너무 자세히 쓰면 기술 유출 위험이 있지 않습니까?”
“꼬투리 잡히기 싫으면 어느 정도는 보정하는 게 좋죠. 정정이 불가능한 흠결이 있는 경우엔 보정명령 없이 특허청장관의 이름으로 특허출원을 각하처분할 수 있으니까요.”
마치 자기일인양 열심히 서류를 살펴보는 설유하.
그 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시선에 설유하가 헛기침을 했다.
“왜 그래요. 부끄럽게.”
“아니 우리 유하 씨는 역시 일을 할 때 제일 예쁜 거 같아서.”
“무슨 소리를.”
얼굴이 빨개진 그녀가 손부채를 했다.
“아, 갑자기 덥네. 근데 뭐 안 가져왔어요? 갑자기 머리를 쓰니까 배가 고프네.”
“안주 좀 가져왔지요. 그래.”
기다렸다는 듯이 게맛살을 꺼내는 강태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 설유하였다.
“아니, 또 게맛살이요?”
“먹어 보고 이야기해요. 이것저것. 혹시 샐러드 있어요?”
“아. 있어요.”
“잠시만 기다려 봐요. 내 좋은 걸 대접할 테니.”
강태준이 준비한 것은 양배추에 토마토, 올리브를 섞고 오이와 아보카도를 섞은 다음 치즈와 게맛살을 얹은 간단한 샐러드였다.
슬며시 맛을 본 설유하가 기분 좋다는 듯 콧소리를 냈다.
“헤. 맛있네요. 이거. 비주얼도 그럴 듯하고.”
“은근, 꿀맛이라니까요. 유하 씨한테만 대접하는 겁니다.”
“그거 영광이네요.”
기분이 좋아진 설유하와 둘이서 오붓한 술자리를 즐겼다.
은은한 조명 아래. 와인이 들어가니 발그레한 볼이 예뻐 보인다.
“왜 그래요?”
“입술에 뭐가 묻은 거 같아서.”
두 개의 그림자가 포개지려는 순간, 갑자기 위층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갑작스런 방해에 놀란 둘이 양쪽으로 떨어졌다.
“이게 무슨 소리죠?”
“혹시 도둑인가?”
“설마요. 이 동네에 그럴 리가.”
“쉬!”
강태준이 국자를 든 채로 살그머니 계단 앞으로 향했다.
그러자 큼직한 털뭉치가 꿈틀이마냥 계단을 기어 내려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정체를 확인한 강태준이 김빠진 소리를 냈다.
“호야?”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