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양재벌 강태준-300화 (300/361)

300화 라텍스

“아, 드물긴 하지만 꽤 쓸 만한 집안이 하나 있기는 합니다.”

“누군가 그게?”

“두바텐 가문입니다. 법조인 집안으로 현지 영향력이 강한 토호지요. 최근 정계에 두각을 드러내면서 급부상하고 있지요.”

두바텐은 대대로 법조인을 배출해 온 가문이다.

현지에서는 선거를 통해 공직을 세습하는 방식으로 기득권을 유지해 온 가문이라고. 하지만 그 말이 별로 맘에 차지 않는지 시원찮다는 표정을 하는 복만이였다.

“별로 대단치 않아 뵈는뎁쇼? 그렇게 따지면 우리 집안도 무안서 방귀 좀 뀌는 유지였잖습니까?”

“그건 전혀 모르는 말씀입니다. 민다나오 지역에서의 두바텐의 영향력은 지대합니다. 거의 왕이나 다름없지요. 가주인 비센티도 세부 시장을 역임했고 다비오 시 공직에도 혈족이 대거 포진되어 있으니까요. 거기에 첫째인 로데릭이 대통령 행정비서관으로 발탁되어 중앙정계 진출이 가시화되고 있는 중이라 위세가 대단합니다.”

“오오, 대통령 행정비서관이라 그건 좀 끌리네요?”

“예. 다른 곳이라면 몰라도 민다나오에서의 입김은 무시할 수준이 못 됩니다. 거기에 잘 훈련된 사병집단까지 가지고 있으니, 어지간한 문제는 그쪽 집안을 통하면 어렵지 않을 겁니다.”

가문의 대표인 비센티는 현재 다바오주 부지사를 역임하고 있는 실권자다.

현 대통령인 마르코가 장기집권할 것이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쪽 라인을 타는 것도 꽤 나쁘지 않은 선택. 더 고민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 강태준이 움직였다.

“그쪽과 접선해 봐야겠네. 그럼.”

“흠, 그쪽도 나름 콧대가 높을 텐데 쉽게 만나 줄까요?”

“뭐 장군을 잡으려면 말부터 쏴야 하지 않겠나? 일단 주변부터 노려야지.”

처음부터 대마를 노리는 건 어려우니 일단은 외곽부터 공략하는 게 순리다.

강태준은 비센티를 모시고 있는 수석비서관에 주목했다. 그는 두바텐 가문에 대대로 봉직해 온 가신으로 미국 유학까지 다녀온 수재였다.

복구지원은 그쪽과 교류할 수 있는 좋은 명목이었다. 강태준은 몇 달간 수산청장 등 공직자들과 어울리며 자연스럽게 자리를 가졌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인간관계를 쌓다 보니, 조금씩 교육이나 투자 같은 문제까지 관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강태준의 조언으로 주식에서 몇 번 재미를 보자 강태준을 꽤나 신뢰하게 된 부시장과의 접선을 주선해 주었다.

수십 번의 허탕 끝에 어렵사리 마련된 자리였지만 강태준은 신중하게 처신했다. 시골 잡상인처럼 정면으로 접근해 봐야 호감만 떨어질 뿐. 일단 신뢰구축이 우선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몇 번의 만남에도 강태준은 속내를 이야기하지 않았다. 몇 번 라운딩을 뛰며 청탁의 기회가 있었지만 강태준은 소소한 이야기만 할 뿐 따로 구체적인 사업을 논하지 않았다.

그렇게 되자 오히려 관심을 가진 것은 부시장이었다. 매번 사업가들과 만날 때면 청탁이나 이권 개입 이야기만 했던 터라. 인간적으로 접근하는 강태준이 신선하게 느껴진 것이다.

강태준을 편하게 느낀 부시장은 꽤나 자주 그를 호출했다.

그렇게 어느 날 면담시간이 거의 끝날 무렵, 부지사가 슬쩍 속내를 털어놓았다.

“요 근래 나이를 먹었는지 몸이 예전 같지가 않구먼. 몇 년째 다리가 시리고 저리는데 뭔 문제인지 모르겠네. 눈도 자꾸 침침하고 말이야.”

각종 보약재를 챙겨 먹고 있지만 별로 개선 효과가 없다는 소리를 들으니 만성피로 같다고.

요 근래 체력적인 한계를 느끼고 있다는 소리에 강태준은 은근히 동병상련을 느꼈다.

“사실 저도 그렇습니다.”

“그래? 자네도?”

“그럼 보약이라도 지어 드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공진단이라는 게 있는데 이게 기운을 북돋는 데 효과가 있더군요?”

“그래?”

“저도 복용하는 약인데 꽤 쓸만합니다. 장어엑기스랑 같이 드시면 원기회복에 도움이 되지요. 게다가 특히 밤에 그만입니다. 스테미나 음식으로 최고거든요.”

“정말인가?”

귀가 솔깃했는지 부지사는 관심을 보였다. 나이가 들어도 남자로서의 자존심은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약 구할 수 있겠냐 적극적으로 문의하는 통에 한국에서 명의를 모셔와 체질검사까지 했다. 1년 치 약을 지어 간 장관은 얼마 후, 정말 효과가 있는지 흥분한 듯 연락을 해 왔다.

-자네 말대로 요새 아침에 일어나는 게 괴롭지 않구먼. 피로가 싹 가셔서 그런지 잠도 깊어지고 건강이 많이 좋아졌다네. 고마움의 표시로 인사를 하고 싶군.

약효가 제대로 돌아서일까. 부지사는 꽤나 호의를 보였다.

강태준을 저녁식사에 초대까지 한 것이다.

처음 보는 으리으리한 대저택을 본 복만이가 혀를 내둘렀다.

“으리으리하군요. 거의 성인데요. 집 안에 연못이 있다니?”

“이건 소박한 거야.”

“네? 이런 대저택이 말입니까?”

“여기 부자들은 클라스가 달라 집에 골프장이 18홀쯤 있어야 부자라는군. 그래.”

“와. 그게 말이 됩니까?”

몇 개의 철문을 넘어 분수가 나오는 화원에 들어가자 사용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안내원으로 나섰다. 콧수염을 멋지게 기른 비센티가 드레스를 입은 부인과 함께 강태준을 맞이했다.

얼굴이 발그레한 것이 꽤나 혈색이 좋아 보이는 모습에 강태준이 미리 가져온 선물을 내밀었다.

“아니, 이건 또 뭔가?”

“저희 나라에서 유명한 화가가 그린 작품인데 빈손으로 오기 그래서요.”

“아니 뭘 이런 걸…….”

그림을 살펴본 부지사가 자기도 모르게 감탄을 토했다. 마치 그림 위로 튀어나올 것 같은 역동성이 대단했다. 예술작품을 여러 번 본 그로서는 명품을 가릴 눈썰미가 있었다.

“흠…… 붓터치가 대단하구먼. 힘이 있어.”

“저희 나라에서 유명한 작가가 그린 그림입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지요.”

강태준이 선물한 것은 백종섭이 그린 소 그림이었다.

꽤나 감동한 듯 호의적으로 나왔다.

“이렇게 값진 선물을? 이 정도 되었으니 나도 뭔가 자네에게 해 주고 싶은데…… 혹시 바라는 게 있나?”

“하하.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너무 속물 같지 않겠습니까? 괜찮습니다. 이건 선물입니다.”

“그렇게 재지 말고 솔직히 털어놓아 보시게. 자네도 사업가인데 이런 먼 곳까지 올 때는 뭔가 바라는 게 있어서가 아닌가?”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저도 몇 마디 올리겠습니다.”

몇 번 겸양을 한 강태준이 못 이기는 척 사업 이야기를 꺼냈다.

이야기를 듣던 비센티가 식사를 하다 말고 관심을 보였다.

“그래서 자네 말은 해조류를 생산해 첨가물로 쓰고 싶다?”

“네. 카라기난은 날염공정에 주로 쓰이는 수용성 호료입니다. 분산안정제로도 활용할 수 있고 치약, 샴푸, 페인트, 의약품 등과 가공 식품의 농후제와 분해 방지제로도 사용되거든요.”

주의 깊게 경청하던 그가 와인을 한 모금 머금더니, 약간 의심쩍은 얼굴로 물었다.

“흠, 그만한 가치창출이 될지 모르겠군. 이 지역이 과연 경쟁력이 있겠나?”

“해조 농장을 만든다면 무엇보다 시장성 면에서 압도적이지요. 일단 필리핀에서 생산 가능한 카라기난의 양은 11만 톤 이상인데 이건 전 세계 시장을 좌우할 수 있는 규모입니다. 거기에 부가적인 이익도 있지요.”

“그게 뭔가?”

“오일값 상승에 맞서 대체연료를 뽑아낼 수 있습니다.”

“바이오 에탄올 말인가. 하지만 그런 거는 솔직히 상업성이 없지 않나.”

에탄올용 자동차 개발과 함께 시작된 만큼 꽤나 역사가 길지만 값싼 화석연료에 상대가 되지 않아 사장되는 추세였다.

“물론 현재로써는 그렇지요. 하지만 그건 현재의 저유가 정책이 지속될 때 이야기 아니겠습니까?”

“그게 무슨 소린가?”

“최근 중동 쪽 정세가 불안정하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이야기지요. 거기에 산유국들도 따로 OPEC이라는 조직을 결성해 자원을 무기화하는 움직임을 보이는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산유국들이 담합해 오일값을 올릴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미국이 가만히 있겠나?”

“한 손으로 모두를 막을 수는 없는 일이죠.”

“확실히 그건 부인할 수 없군.”

“한번 생각해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지금이야 애물단지지만 추후에 오일값이 상승한다면 이야기가 다르죠. 청정자원으로서 고용창출과 소득상승 등 연관 산업에 미치는 파급효과도 클 것입니다.”

“오일 대체제라…….”

“일종의 보험이지요.”

부지사는 속으로 생각했다. 국제정세를 생각해 보면 충분히 일리가 있는 소리. 실제로 돈이 되지 않더라도 그런 대체재가 있다는 존재를 어필하는 것만으로도 투자금을 얼마든지 끌어들일 수 있다. 마음의 결정을 내린 부지사가 물었다.

“그래 좋네. 그렇다면 농장 규모가 어느 정도면 될 것 같은가?”

“최소한 1만 헥타르 정도는 필요하다고 봅니다.”

1만 헥타르면 3,000만 평 수준. 무려 여의도의 33배 크기다. 엄청난 넓이에 놀란 듯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는 복만이었지만 듣고 있던 부지사는 실망한 듯 얼굴을 찡그렸다.

“허허. 고작 그걸로 누구 코에 붙이려고? 그 정도 규모로는 내수도 감당하기 어렵지 않겠나?”

“그럼 생각하고 있는 규모는 어느 정도이신지?”

그러자 부지사가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가볍게 10만 헥타르부터 시작해 보는 게 어떤가?”

* * *

그로부터 몇 달 후, 사말섬. 다바오.

녹음이 푸르른 가운데 바닥까지 훤히 보일 만큼 맑은 바닷물이 잔잔하게 흐르고 있다.

산호초 근처에 얼굴만 내민 열대어가 총총히 움직이는 모습이 육안으로 보여지고 있는 모습에 마음이 포근해진다.

“시원하구만.”

“항상 느끼는 거지만 풍경 하나는 무지 끝내주는군요.”

빼어난 경치에 감탄하는 오재갑에 늪지대로 이루어진 하구는 대부분 맹그로브 덤불로 덮여 있었다.

“치안만 좋으면 관광지로 그만이지. 근데 돈이 많이 들어서.”

“근데 아까부터 자꾸 뭘 꾸역꾸역 드시는 겁니까?”

“바다 포도여. 맛있네 이거.”

“바다 포도요?”

“한번 먹어 볼 텨.”

투명한 녹색에 알알이 열매가 맺힌 듯한 것이 톡톡 터지는 맛이다.

짭조름하면서도 끈적한 식감을 음미하던 오재갑이 묘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식감 한번 독특하네요. 짝 달라붙는 게 캐비어 같기도 하고.”

“그렇지? 현지인들이 염장해서 샐러드로 많이 먹는다는군. 초밥이랑도 잘 어울리고 말이야.”

“굳이 관심 가지시는 이유가 있습니까?”

“뭐 여러 가지 용도로 생각 중이지. 듣자 하니 피부 보습용으로 쓴다 하더군. 머드팩에 추가하는 방법도 검토해 볼 생각이야.”

“흠…… 좋은 생각이긴 하군요. 근데 종묘양식장이 이쪽 방향 맞습니까? 어째 자꾸 딴 곳으로 가는 거 같은데.”

“둘러볼 곳이 있어서 말이지. 거기는 알아서 냅두고 일단 딴 거부터 보자고.”

카누를 젓던 일행은 잠시 뭍에 배를 대고는 열대 우림으로 이루어진 숲길로 올라갔다.

올라가는 길에는 여러 군데, 신기하게 생긴 나무들이 많았다. 야자수, 대나무, 난초 등등.

얼마나 갔을까. 무지갯빛의 총천연색으로 이루어진 나무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일부러 페인트칠을 한 것처럼 알록달록한 색이 인상적인 모습에 복만이가 홀린 듯이 중얼거렸다.

“와우 신기하구만요. 이게 다 뭐랍니까?”

“민다나오 고무나무라는 거야. 여기 특산품이지.”

나무결을 만져 보니 꺼끌꺼끌하면서도 뭔가 느낌이 묘하다. 태양빛에 비추어 천변하는 것이 마치 판타지 세계에 와 있는 기분이랄까. 일반 나무는 한 가지 색을 띠지만 이 나무는 특이하게도 여러 가지 껍질의 색깔을 동시에 발현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와. 더 신기한 걸 보여 줄 테니.”

홀린 듯 나무를 감상하던 복만이를 재촉해 안으로 들어가자 울창한 숲이 사라지고 새지저귐 소리가 들려왔다. 키 작은 관목들이 우거진 가운데 나무 몸통에서 흰 액체가 흘러내리고 있는 모습. 상처투성이의 나무들은 죄다 고무나무들. 나무 몸통에 매달려 있는 작은 종지 안에는 고무액이 가득 채워져 있는 모습에 오재갑이 신기해했다.

“여기는 농장 아닙니까?”

“이번에 인수한 고무나무 군락지네. 이번에 MOU체결하면서 보니 처치 곤란인 생고무 시설이 많더구만. 그래서 가공시설째 인수하기로 했지.”

“규모는요?”

“대충 3천 에이커 정도 되나?”

“그렇게 넓습니까?”

“별로 넓은 것은 아니지 원래 모로족들이 운영하던 땅인데 최근에 고무값이 떨어지는 바람에 좀 곤란해졌다는군. 정부랑 갈등이 심해 협상을 하느라 힘들어서 우리한테 그냥 짬처리 한 거지 뭐.”

최근 주정부와 토착민 간의 갈등이 불거지면서 무력 충돌이 자주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고무농장을 가지고 사기를 치는 놈들까지 나타나자 양 집단 사이에 불화가 커졌고, 이 일을 어찌 처리할지 골머리를 앓던 주 정부에서 제3자인 강태준에게 농장을 넘겨 버린 것이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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