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양재벌 강태준-299화 (299/361)

299화 민다나오

‘은행잎 차?’

속으로 올라오는 텁텁함에 잔을 내려놓는 슈벨만. 혀끝은 달지만 속이 쓰리다. 이미 예상했다는 듯 강태준이 부드럽게 그를 달랬다.

“거 서로 탐색전은 고만합시다. 명색이 선진국이라는 나라가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타국의 생물 자원을 이렇게 헐값에 수탈하는 건 별로 좋지 않은 태도입니다.”

“그걸 말이라고. 강도짓을 하는 건 그쪽이 아닌가?”

“허허, 뾰족하게 굴지 마세요. 우리도 자원을 제값 받고 팔겠다는 거지. 저희도 가공할 능력이 없어서 안 하는 게 아닙니다. 원료의약품으로 수출하면 훨씬 가격이 높아지지 않겠습니까?”

“당신,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가?”

약간 화난 듯한 슈벨만의 태도에도 강태준은 여전히 능글맞았다.

“팩트를 이야기하는 거지요. 아시겠지만 저희 회사에서는 말라리아부터, 진해거담제, 구충제까지 다루는 약품이 꽤 많습니다.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못 할 것은 없지요.”

“허튼 소리를 하는구먼. 그렇게 자신 있다면 직접 그렇게 해 보던지.”

“그거야 두고 보면 아시겠지요. 굳이 자력개발이 아니라도 이쪽에 눈독을 들인 업체들이 꽤 많을 것 같은데 말이죠. 만일 저희가 이 정보를 풀어 버린다면 어떻게 될까요?”

얄밉게 중얼거리는 강태준에 이를 악문 슈벨만이 주먹을 꼭 쥐었다.

한 대 죽빵이라도 갈기고픈 심정이었지만 칼자루를 쥔 것은 상대방.

심호흡을 한 슈벨만이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진짜 원하는 걸 말씀하시게. 그쪽에서 바라는 게 따로 있을 거 같은데?”

“사업가가 이익 외에 뭐가 필요하겠습니까. 다만 기본적인 신뢰가 우선 아닐까요?”

“신뢰라, 애매한 단어군. 어떤 방식으로 그걸 증명할 수 있다는 말인가?”

“합작법인을 세우면 어떻겠습니까? 우리?”

슈베흐 사에서는 여러모로 고민했지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얼마 후, 오성일보 전면에 대문짝만한 기사가 실렸다.

[백경제약-슈베흐 간 합자회사 설립]

[한국의 위상을 한 단계 위로. 첫 유럽시장 도전 성공!]

첫해 계약금은 무려 1백62만 달러어치.

콧대 높은 유럽 시장에 처음으로 진출했다는 소리에 언론에서는 설레발을 쳤다.

언론에서 자랑스레 자기 업적인 양 인터뷰를 하는 모습에 광필이가 볼멘소리를 했다.

“허, 이 자식들 얼굴에 철판 깔았네요. 솔직히 지들이 한 게 뭐 있다고?”

“좋은 게 좋은 거지. 대충 모르는 척하고 손들어 주게. 그보다 은행잎 확보 물량은 문제없나?”

“예. 약 20개 재배단지들과 협약이 끝났습니다. 일단 계약한 물량은 800톤 정도고, 추후 연간 2천 톤이상까지 증산 가능한 수준입니다.”

슈베흐 사와의 합작은 여러모로 큰 도움을 주었다. 무엇보다 독일 보사부에서의 자양강장제 심사를 수월히 통과했다는 것이 큰 이득 중 하나.

독일, 영국 등 EU 여러 나라에 수출하기 위해 슈베흐의 이름을 빌린 것이 주효했던 것이다.

거기에 슈베흐와 합작해 국내에 엑기스 공장까지 세워진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보합세였던 주가도 반등의 기회를 맞았다.

“월남전 끗빨이 다 떨어져 가는데 불행 중 다행입니다.”

“근데 정말 전쟁이 끝나는 겁니까? 이렇게 아무 성과도 없이 말입니까?””

“계속 확전을 이어 가기는 어렵지 않겠나? 아무리 전투에서 이겨도 도돌이표니. 지금 상태로는 아마 몇 년 못 가겠지.”

수렁에 빠진 미군은 퇴각 전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공격하는 등 체면치레를 하기 위해 분전했지만, 별 성과는 없었다. 시계가 100미터도 안 되는 정글에서 철저히 게릴라전으로 일관하는 북베트남군을 상대하기란 요원한 일.

고엽제에 폭탄까지 뿌려 대며 발악했지만 트롤링을 일삼는 남베트남군 덕분에 골치를 썩고 있었던 것이다. 패색이 짙어진 것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만큼 다들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장비는 언제 뺍니까? 철수할 때 장비를 어떻게든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게, 슬슬 이제 생각해 봐야지.”

미군 철수가 본격화되면서 새로운 투자처를 생각할 때지만 아직까지 딱히 성과는 없었다. 중동 쪽에 토목공사 수주를 타진하며 교두보를 확보하려고 했지만 아직까지는 유럽과 미국 업체들이 꽉 잡고 있는 터라 좀처럼 아직 수주 소식이 들려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지지부진하던 찰나, 무역협회를 통해서 구호지원 요청이 들어왔다.

“태풍이 필리핀에 상륙했다고요?”

“그래. 민다나오 지역에 식수나 기본적인 생필품도 받지 못하는 등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라는군. 아무래도 우리 쪽에서도 도의적으로 옷가지나 이불 같은 걸 보내기로 했네.”

천경물산 이원준의 말에 강태준도 고개를 끄덕였다.

“영사관에서 직접 지원 요청이 올 정도면 꽤나 심각한가 보군요.”

“말도 말게. 피해 규모가 물경 5,000만 불이 넘는다는군그래.”

“그거 장난 아니군요.”

“어마어마하지. 가옥이 5000채 이상 쓸려 나갔는데 사망자도 수백 명이 넘는다는구먼.”

몇 해 전에 큰 수해를 겪은 강태준도 남 일같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가만 민다나오 섬이라…… 꽤 괜찮은 지역인데 그래?’

생각해 보니 카라기난의 원료인 카파피쿠스와 유케우마의 주산지 아닌가. 바나나 커피는 물론이거니와 목재 같은 원자재가 풍부한 만큼 해외 투자를 해 볼 법도 하다.

하지만 설인모에 법적 자문을 구하자 약간 시큰둥한 답변이 돌아왔다.

“흠, 필리핀 투자는 재고하는 게 좋을 거 같은데?”

“어째서 그렇습니까?”

“필리핀에 영사로 파견된 무관들한데 듣기로 그쪽 일대는 치안이 많이 좋지 않다는군. 세부 같은 곳이면 그나마 낫지만 잠보앙가 같은 곳은 좀 많이 막장이야. 이슬람 반군과 무장조직들이 난립해 있어 툭하면 분쟁이 터지니 말이야.

민다나오 섬은 2차 대전 시까지 독립을 희망했지만 필리핀 중앙정부를 그런 의사를 무시하고 무력으로 합병해 버렸다. 그 과정에서 피로 쌓은 원한이 해소되지 않으면서 불만이 쌓였던 토착 세력과 필리핀군과의 국지전이 수시로 일어나는 상황이었다.

외국인을 겨냥한 테러도 심심찮게 발생할 정도.

그러나 그런 불안한 치안요소는 사실 강태준에게 장애물조차 되지 않았다.

“허허. 뭘 그 정도 가지고 그러십니까. 베트남처럼 전쟁지역은 아니잖아요?”

“뭐. 생각해 보니 그렇긴 하구먼.”

“이참에 수해지원도 할 겸 그쪽에 투자 좀 도와주시죠. 아무래도 군부 쪽 협력이 필요할 듯싶어서요.”

“아니 군부는 갑자기 왜 끌어들이려고?”

그러자 듣고 있던 강태준이 눈을 찡긋했다.

“일단 복구지원단부터 구성하려구요. 치안이 문제라면 치안을 해결할 사람들을 데려가면 그만 아니겠습니까?”

* * *

까악까악~~~~

필리핀 민다나오 섬 해안가.

도로 한가운데 끊어진 나무와 전신주들.

깨진 콘크리트에서 튀어나온 철근이 속살을 드러내고 있다. 재해당국과 함께 피해 실태를 조사하기 위해 시찰을 나온 해양생물학자 브루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피해가 장난이 아니군요.”

“이번 태풍이 역대급이라더군. 상륙 시 속도가 줄어서 망정이지 피해가 더 클 뻔했어.”

팔라오 수산청장의 표정도 밝지 않았다.

이번 손실은 지난달 중순 필리핀 남동부 민다나오섬을 강타한 태풍 케이트의 영향 때문.

다행히 상륙 전 기세가 다소 줄었지만 최고 시속 240km의 강풍이 남긴 상흔이 적지 않았는지 아직 해안가는 무너진 건물들로 수북하다.

해안가에 쓸려 나온 그물과 부표 등을 살펴본 브루노가 고개를 저었다.

“어민들 피해가 크겠군요. 실종자 수색 작업은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쉽지 않네. 구조 작업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군. 화산이류 때문에 길이 무너진 곳도 있어서 고립된 마을도 있고 여러모로 문제인 거 같네.”

태풍 피해를 예감한 정부에서는 일찍이 대피령을 내렸지만 별로 효과적이지 않았다.

지대가 낮은 마을들의 손실은 극심했다. 흘러내린 토사로 농작물 유실과 가옥 파손은 물론 특히 어업에서의 피해는 궤멸적인 수준.

하지만 안 좋은 소식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델리오 사에서도 투자를 원점으로 재검토하겠다고 하더군요.”

“뭐라고, 이런 개 같은 놈들을 봤나? 그럼 투자는 어쩌고?”

“기후 리스크 부분에서 검토가 부족했다고 발뺌하더이다. 아무래도 이번 태풍 영향 때문인 거 같습니다.”

“이런 제길. 양해 각서 따위를 믿은 게 잘못이지 역시 코쟁이들 따위를 믿는 게 아니었는데 말이야.”

거대 식품기업인 델리오 사에서 태풍 피해를 이유로 투자지를 변경하겠다 통보한 것이다.

고작 위약금 3만 달러.

수년간 공들인 사업이 날아가 수산청장이 분노했지만 해코지를 할 방법도 없다. 그렇게 분노를 삭이려던 찰나 다행스럽게도 희소식 하나가 전해졌다.

“청장님. 지금 유엔군 사령부에서 구호물자가 도착했다고 합니다.”

“아니, 그게 정말인가?”

“예. 지금 막 다비오 항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다비오 향으로 가 보니 유엔 마크를 단 바지선이 입항하고 있었다. 소식을 듣고 나온 것인지 바글바글한 사람들. 항구에 도착한 컨테이너선을 본 이재민들은 환호했다.

“구호물자다!”

“다행이군. 이 정도면 맨땅에서 자지는 않겠어. 그래.”

다행히도 컨테이너에 실린 물건들은 다양했다. 방수 시트와 텐트 담요, 모기장, 비누, 속옷은 물론 각종 통조림과 위생 키트 등등.

하역이 시작되자마자 몰려드는 이재민들에 항구 주위가 시끌벅적해졌다.

“저 저, 줄 서세요 줄!!”

“거기, 뒤로 가세요. 끼어들기 없깁니다.”

통제에 나선 군인들이 나섰지만 역부족이다. 막무가내로 밀려드는 사람들에 질서가 흐트러지자 잠시 후 확성기를 든 강태준이 단상에 섰다.

잠시 후 귀를 찌를 듯 고막을 찌르는 소리에 귀를 막는 사람들. 사람들의 시선이 이쪽을 향하자 확성기를 든 강태준이 명했다.

“자, 여러분 구호물자는 충분히 있으니 통제에 따라 주십시오. 물자를 나눠 드리기 전에 간단한 건강검진이 있을 예정이니 부디 협조 부탁드리겠습니다.”

“예. 여러분. 의사선생님들께서 오셨으니, 좀 불편하시겠어도 통제에 따라 주십시오.”

마리아를 비롯한 구호단체 소속 의사들이 흰 가운을 입고 나타났다. 강태준이 손짓하자 검은 옷을 입은 보안요원들이 바리케이트를 치듯 줄을 세웠다.

강태준과 함께 동고동락했던 방첩대원들.

베트남에서 쌓은 짬이랄까.

흥분이 가라앉은 사람들이 얌전하게 줄을 서자, 그제서야 조금 숨통이 트였다. 뒤늦게 배지를 본 강태준이 인사를 올렸다.

“필리핀 재해복구지원단장을 맡은 강태준입니다.”

“아주, 잘 오셨습니다. 이렇게 오시다니 천군만마로군요.”

손을 흔드는 반응이 그야말로 환영일색이었다. 엄청난 피해에 일손이 부족했던 현지 공직자들은 자발적으로 일손을 도왔다. 곧이어 실무진을 지휘할 채동묵 대령 하 복구부대가 도착하자 곧 빡빡했던 업무도 숨통이 트였다.

“일단 전염병은 없다고 합니다. 다행히 식수 문제는 크지 않은 거 같습니다.”

“다들 협조적이라서 다행이네. 난민 지원 상황은 좀 어떤가?”

“일단 보급품은 걱정 없습니다. 유엔 제네바 본부에서 급한 김에 예비비를 전용한다고 하더군요. 향후 5개월간 총 700만 불의 예산을 추가 집행할 예정이랍니다.”

“정말이야? 유엔에서 간만에 일다운 일을 하는구먼.”

“그러게요. 엄청나게 꾸물대더니만 이렇게 빨리할 수 있으면서 말이죠.”

한국에서의 비정상적인 속도전에 경도되어서인가 별로 시원치 않다는 분위기에 강태준이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 속도면 꽤 빠른 거야. 그보다 어민들은 반응은 어때?”

“뭐 좋지는 않죠. 양식업자들 피해가 극심했던 모양입니다. 이번 피해로 이재민이 많이 발생해서 해조 농장에 지원할 인력 모으기는 어렵지 않을 듯싶습니다.”

“불행중 다행이네. 그래도 결국 문제는 지주들을 어떻게 설득하냐겠지. 사업을 하려면 현지 유력자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니까.”

“그렇긴 합니다만 현지에서 지원을 받는 것은 좀 쉽지 않을 거 같습니다. 필리핀의 상류층이라고 할 수 있는 지주세력들은 변화에 소극적이라서 인프라 구축에 미온적인 사람들이 많더군요.”

복구지원 덕분일까 경계심을 많이 사라진 사람들이 많았지만 현지 유력자들은 여전히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고 있었다 더욱이 전통적인 필리핀 명문가들은 공업화가 자기네 기득권을 파괴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해 외국인에게 꽤나 배타적인 성향을 보이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더욱이 화교도 선진국 출신도 아닌 강태준이 사업을 벌이기엔 인지도 면에서 불리한 점이 적지 않았다.

“너무 잘난 가문들에 줄 댈 필요는 없어. 어차피 그놈들도 계산기 돌리지 않겠나. 우리 같은 중견 기업보다 다국적 기업들이랑 협력하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할 테니.”

“그렇긴 합니다만.”

“뭔가 적당한 녀석들부터 알아보게. 중앙정계 쪽에 진출을 희망하는 현지 유력자라면 좋을 거 같은데.”

힘의 균형에서 너무 차이가 나면 홀랑 잡아먹힐 수 있으니 신중해야 한다.

그렇다고 현상유지만 하면 충분한 보수적인 집단도 끌어들이기 힘들기는 마찬가지.

그렇게 마땅히 같이할 파트너가 없나 물색하던 강태준은 해양학자 브루노에게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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