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8화 은행잎
“아니, 저자식들이 내가 그렇게 심지 말라고 일렀거늘…….”
식수작업을 하는 공무원들의 모습에 발끈했는지. 차에서 내린 광필이가 씩씩거렸다.
“아니 썩을 우리 회사 앞에 냄새나게 왜 은행나무를 심어? 누구여. 이런 거 심으라고 한 게 설마 경쟁사 사주라도 받았소?”
“저 진정하시고. 선생님. 이게 숫나무입니다. 악취는 암놈만…….”
“아니, 누굴 바보로 알어. 나무에 수놈 암놈이 어딨나. 내가 이딴 거 심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
공무원과 옥신각신하건 말건 강태준이 경관을 둘러보기에 여념이 없다. 먹거리가 부족하던 시절 은행열매는 좋은 간식거리였던 만큼 강태준으로서는 추억의 일환이랄까.
노란 은행알이 보도 위에 한 무더기 떨어져 뒹굴면 새벽녘에 주운 과육을 벗겨 은행알을 종이팩에 넣고 전자레인지에 돌려서 먹는 재미가 아주 쏠쏠했었다.
과육의 구린내만 제외하면 꽤 괜찮은 간식이었던 만큼 괜스레 센치해지는 강태준.
다툼이 길어지자 강태준이 광필이를 말렸다.
“저 광필아…… 그냥 보내 줘라.”
“아니 형님…… 그게, 이 자식이 거짓말을 치잖습니까?”
지나치게 당당한 녀석을 어찌해야 할까. 슬쩍 옆으로 데려간 강태준이 귀엣말을 했다.
“은행나무에 암놈 수놈이 있단다.”
“정말요?”
“그래. 저거 수놈 맞다. 그냥 넘겨라.”
그제서야 광필이가 머쓱한 듯 공무원과의 실랑이를 끝냈다.
“이런 젠장. 이번 한 번만이요 그래. 이번만 봐주는 거야.”
“예예.”
그때만큼은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넘기던 강태준이었지만 정작 이상한 일은 다음부터였다 출근하던 강태준의 눈에 이상한 장면이 띄었다.
포댓자루를 든 남자 하나가 멀쩡한 은행잎을 부지런히 따고 있던 것이다.
멀리서 운전대를 잡은 춘삼이가 이상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저거 뭐 하는 걸까요?”
“글쎄, 나도 잘 모르겠는데?”
사람들이 시선에도 잎 따는 데 정신이 팔린 남자. 궁금증에 슬며시 차를 세운 강태준이 옆으로 다가가 물었다.
“거기서 뭐 합니까?”
“아구 깜짝이야. 허, 아무것도 아닙니다. 청소입니다 청소입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긴. 꽃 따는 것도 아니고 이걸 왜 모읍니까?”
지나치게 수상해 보이는 행동에 추궁하는 강태준. 하지만 남자가 눈치만 볼 뿐 우물쭈물 말이 없다. 이럴 때는 기름칠이 필요한 법. 강태준이 슬그머니 100달러짜리 지폐를 꺼내자 화색이 돈 남자가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아 그게 수집상에서 이걸 모아 오면 돈을 준다고 했습니다.”
“은행잎을? 무슨 용도로?”
“색소 원료차 쓴다고만 말을 들었습니다만, 정확히는 모릅니다.”
고품질의 은행잎을 대량으로 사들인다는 소리에 강태준의 눈이 가늘어졌다.
“은행잎을 색소 원료용으로 수출한다?”
“네네. 작년쯤부터 갑자기 수요가 생겼습니다. 은행잎 취급 업체들이 찾아와서 입도선매식으로 선금을 주고 사 가더군요.”
“보통 어떤 걸 사 갑니까?”
“생잎 채로 상태를 꼭 확인하고 사 갑니다. 미리 말린 것은 절대 사 가지 않더군요. 신선하지 않으면 필요 없다고요.”
“좋아요 고맙습니다.”
농림부의 진언에 따르면 거래를 맡은 회사는 서독의 뮈젠버그 상사에서 12톤 내지 15톤 정도 분량을 수입하길 희망하고 있다고 했다.
요청하는 단가는 ㎏당 1달러에서 1달러 30센트 정도. 확인차 보사부에 다녀온 춘삼이가 보고를 올렸다.
“우선 시험용으로 15톤이고 앞으로 계속 늘릴 예정이랍니다. 산림청 쪽에도 연락을 해 봤는데 경기도 일대에서 따로 채취하고 싶다고 연락이 왔네요.”
“이거 이거 뭔가 냄새가 나는걸?”
노란색이라면 몰라도. 아직 물들지도 않은 파란 잎을 색소로 사용하다니.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뭔가 다른 용도가 생각날 법도 한데. 하지만 무슨 용도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그렇게 머리를 싸매던 그때, 공교롭게도 비서가 노란 빛깔의 차를 내왔다.
“드십시오.”
“응, 고마워.”
아무 생각 없이 차를 마신 강태준. 약간 떫으면서 달달한 것이 머리를 맑게 해 준다.
평소에 아무 생각 없이 먹던 차였지만 노란빛을 확인한 강태준이 흠칫했다.
“잠시만, 김비서, 이게 뭡니까?”
“아 그거요? 은행잎 차입니다. 차로 따뜻하게 다려서 꿀을 넣으면 피를 맑게 하는 데 아주 그만이라서요.”
“이게 은행잎이라고요?”
자연스럽게 대꾸하는 비서의 말에 강태준은 멍해졌다.
이걸 약용으로 사용한다면 설마.
강태준은 곧장 은행잎이 의학적으로 어떤 용도가 있는지 수소문하자 노기철이 소식을 알려 왔다.
“최근에 징코산이라고 서독의 생약제 전문 메이커인 슈베흐에서 혈액순환개선제를 개발했다는군요. 그 약이 당뇨랑 혈액순환 개선에 탁월한 효능이 있다는데 근데 이거 원료가 뭔지가 일급 비밀이라는데요.”
“아니, 그럼 독일 놈들이 은행잎을 가공해서 약을 만들고 있다는 말입니까?”
“아마도. 노랗게 물들면 효과가 없으니 그 전의 잎을 사 가는 거겠지.”
그제서야 강태준은 한때 전 한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은행나무 수출사건을 기억해 냈다. 은행잎에 유효성분이 가장 많아지는 시기가 바로 9월 이후 단풍이 들기 전까지.
유럽에는 육식을 주로 하는 습관 덕에 혈관 속 피가 엉기는 혈전증 환자가 많았는데 동양인들은 혈전증 환자가 적었다.
그래서 원인을 조사하던 중 한방약재로 은행잎을 혈액순환제로 이용한다는 것을 알게 되어 제품으로 개발하고는 헐값에 원료를 수입해 온 것이다. 기가 찬 광필이가 중얼거렸다.
“그럼 어디 보자, 이놈들 대체 얼마를 남겨 먹는 건가?”
“톤당 천 달러에서 천오백 달러에 수매해서 무려 100배를 남기는 거지요.”
“와따 대단한 놈들이구먼. 이 자식들 정말 양아치네. 남의 나라 자원을 이런 식으로 헐값에 가져가다니. 이거는 잘못된 거 아닙니까?”
흥분한 광필이에 공감하는 노기철. 강태준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사정을 몰랐으면 모를까 알아낸 이상 이대로 둘 생각은 없었다.
“일단 보사부에 진정을 넣고 수출길부터 막아야겠군.”
“그건 아무래도 명분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그쪽이 색소를 핑계로 했으니 우리도 같은 핑계를 대면 되지. 저놈들이 제값을 주지 않고 후려치고 있다고 말이야.”
그러자 오재갑이 되물었다.
“에 그건 좀 궁색한데요? 저희가 실제로 색소를 개발한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뭘 그렇게 고민할 필요가 있나 클로렐라로 염색하면 되지. 은행잎 성분만 조금 들어가면 되는 일 아닌가?”
“어, 정말 그렇네요?”
클로렐라는 실제로 강력한 착색력 덕분에 천연 식용색소로 자주 사용되곤 하기 때문.
그렇게 강태준은 곧장 상공부와 보사부등 관계당국에 수출금지를 요청한 다음 은행잎 수집상들을 불러들였다.
“입도선매라고요? 걱정 마십시오. 위약금은 대신 내드릴 테니 저희한테 파십쇼.”
“꼭 바로 딴 잎이 아니라도 됩니다. 아이구야. 설마 생생한 잎만 받겠습니까. 물론 말려서 팔아도 되지요. 노랗게 변하지만 않으면 됩니다. 저희는 그렇게 까다롭지 않습니다.
강태준은 그 외에 산에 있는 은행나무 밀집지역들 돌며 수급지와 장기계약을 맺었다. 약령시 일대의 약재상들에게 보낼 물량까지 모두 섭렵한 것이다.
당연하겠지만 뒤통수를 맞은 슈베흐 사에서는 꽤나 난감해졌다.
“아니, 수출대행업자들이 계약을 다 파기했다고? 어떻게 된 거야?”
“다른 회사에서 훨씬 좋은 조건을 제시해서 그만.”
계약을 파기하는 상사들이 속출하자 시중에 은행잎이 씨가 말라 버린 것.
그뿐만이 아니었다.
선을 대고 있던 한국 정부 관계자로부터 경고장이 날아든 것이다.
“아무래도 조심하겠소이다. 보사부에서 움직이고 있네.”
“상공부와 한국제약협회에서 클레임을 넣은 회사가 있소.”
“그게 어딥니까?”
“백경그룹이라는 곳이요. 은행잎을 베이스로 섬유나 식품에 쓸 국내 부존자원 보호 측면에서라도 수출을 막아야 한다고 하더군.”
핑계로 댄 말이 발등을 찍게 생겼으니 슈베흐 입장에서는 황당 그 자체.
현지에 파견된 실무진들이 서둘러 거래를 요청했지만 강태준은 대화의 급이 맞지 않는다며 정중히 사양했다.
-본사에서 전권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대화할 필요가 없는 것 같군요.
“제기랄. 본사 전무급 이상이 아니라면 대화할 가치가 없다고?”
“이런 빌어먹을 녀석들을 봤나?”
분명히 이건 약점을 알고 하는 짓이다. 상대에 굽힐 것인가 왈가왈부하자 슈벨만 회장이 몸을 일으켰다.
“아무래도 안 되겠군 내가 직접 한국으로 가지.”
“아니 회장님께서 그럴 필요까지는 없지 않겠습니까. 오히려 잘못된 메시지를 줄 수도 있습니다.”
“상황이 그렇게 녹록지 않아. 생산에 차질이 빚어지기라도 하면 물어줄 위약금만 수백만 달러가 될 수도 있네.”
이미 은행잎 물량을 확보했다고 여기고 오더를 받아 둔 것이 문제.
회장이 직접 방문한다고 하자 지사에서는 그야말로 난리가 났지만 슈벨만은 곧바로 백경 본사로 향했다.
대양을 날아온 대표와 마주앉은 강태준. 백발이 성성한 슈벨만 회장의 안색은 별로 좋지 않아 보였다.
“아주 빨리 연락하셨군요.”
“본론에 들어가서 말하지. 거두절미하고 은행잎을 모두 매입한 이유가 뭔가?”
“그쪽이 그건 더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엄연히 색소 연구용으로…….”
말이 길어질 듯하자 강태준이 귀찮다는 듯 말을 끊었다.
“쓸데없는 말은 삼갑시다. 은행잎을 약용으로 쓴 건 동양이 먼저 아니겠습니까? 저희 나라 의서인 동의보감에 이렇게 쓰여 있군요. 은행잎은 폐와 위를 맑게 해 기침을 멈추는 데 큰 효과가 있고 혈액순환에 도움이 된다고. 중국에서는 은행잎과 씨를 5,000년 전부터 생약으로 이용해 왔지요.”
정곡을 찔린 슈벨만의 이마에 그늘이 졌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그걸 대체 어떻게 안 건가.”
“의미가 있습니까?”
“아니. 됐네. 별로 알고 싶지 않군. 그럼 값은 얼마를 원하나?”
“톤당 10달러 정도면 적당할 거 같습니다.”
단숨에 열 배 값을 요구하는 태도에 헛기침을 하는 슈벨만.
표정이 달라진 그가 정색했다.
“이보시게. 지금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그건 폭리 아닌가?”
“폭리라고요? 제가 장난하는 것으로 보입니까?”
“솔직히 수지가 안 맞지 그럼. 은행잎이 한국에서만 나는 것이 아니지 않나. 재료를 미끼로 남의 장사 못 하게 하려는 발상은 어이없군.”
“그래서 못 주겠다는 겁니까?”
“나도 남아야 장사를 하지 않겠나. 이런 식이면 저희도 수입선을 중공이나 제3국으로 바꿀 수 있다는 말일세.”
수입선을 바꿀 수 있다는 협박이었지만 강태준은 도리어 여유롭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 그렇게 하십시오. 가능하다면.”
“진심인가?”
“거기라고 은행잎이 없는 것이 아닐 텐데 굳이 이 극동의 먼 곳에서 수입하는 건 이유가 뭔지 대충 알 거 같은데?”
“큼. 대체 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군.”
“모르는 척하시면 제가 더 섭섭하지요. 제가 알아본 결과로는 한국산 은행잎에 든 진액의 성분이 징코라이드 성분이 다른 나라에서 재배되는 제품보다 월등히 뛰어나다고 하던데요?”
강태준이 패를 까 버리자 슈벨만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