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9화 하우스 오브 클렘
조가비 문양을 본 강태준은 곧바로 상대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하우스 오브 클렘. 네덜란드와 영국에서 시작된 다국적기업.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석유회사이자 슈퍼메이저. 석유 회사를 오일 메이저라고 하면 석유의 탐사, 개발, 생산, 수송, 정제, 판매의 전분야를 지배하는 기업인 것이다.
“찰스 제이든이라고 하네. 미욱하지만 부회장을 맡고 있다네.”
“이거 아주 높으신 분이셨군요.”
별로 놀라지 않는 강태준에 신사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강사장을 보려고 수소문했는데 동에 번쩍 서에 번쩍이라 만나기가 쉽지 않더군. 여기서 보다니 인연인 모양일세. 어디 이야기 좀 하겠나?”
“뭐 사양하지 않지요.”
강태준과 나란히 걸으며 제이든과 이야기를 나눴다.
“최근 유엔 산하기구인 아시아극동경제위원회(ECAFE)가 아시아 지역 대륙붕에 대해서 자체조사를 실시했다고 들었네. 듣자 하니 한국도 자원개발에 관심이 많다더군.”
“저희 같은 개발도상국에서야 당연히 관심이 있지요. 하지만 기술이 없으니, 그림의 떡이 아니겠습니까?”
“허 그래도 정부의 의지는 상당하던데? 굴프 사도 벌써부터 움직이지 않았나?”
“정보가 빠르시군요.”
“경쟁사가 움직이고 있는데 가만있을 수야 없지 않나.”
뒷짐을 지고 걷던 제이든이 조근조근한 어조로 말했다.
“어때? 우리 쪽 협상 조건도 들어 보는 건? 우리가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할 수 있는데 말이야.?”
“하하. 죄송하지만 미국의 지원을 받는 입장이라서요. 빌어먹는 주제에 상전의 노릇을 안 볼 수는 없지요.”
“그렇다고 독점권을 주는 건 국익에도 별로 도움이 안 될 텐데. 알겠지만 미 제국주의자 놈들은 양심에 털도 안 난 놈들이라서 말이야. 알겠지만 그런 놈들과 손들 잡았다간 알맹이만 홀랑 빼앗기게 될 걸세.”
“협상을 원하신다면 그쪽에서 바라는 곳이 어딥니까?”
“영일만 일대를 포함해 서해안 제 2 구역 일대를 탐사하길 원하네.”
“그건 어렵겠는데요. 거기는 굴프사가 선점한 지역인데 말입니다.”
“조건에 따라서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것 아니겠나?”
제대로 떡밥을 물었군. 강태준은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사실 개발 독점권 떡밥은 강태준이 일부러 흘린 것으로 얼마 전에 시추팀의 성과랍시고 내보낸 대대적인 기사 덕분이었다.
-포항 영일만 일대 지하서 두께 1백m 이상인 배사암반이 발견되었습니다. 여기에는 서남해 일대의 해저에 부존자원이 분포되어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특히 이번에 채집한 원유는 유황성분이 불과 15∼18% 정도로 22∼25%가 함유된 사우디아라비아산보다 압도적으로 우수하며 물리탐사가 끝난 영일만 전역에 유전충이 확인될 경우 매장량 수십억 배럴로 전망되고 있어 향후 기대감이 커지고 있습니다…….
시추 갱정의 면적으로 볼 때 유전충의 평면적은 30km.
우즈홀해양연구소 에버튼 박사의 보고서가 올라가자 탐사결과를 확인한 굴프사에서는 서둘러 한국과 협상을 시도했다.
한국 정부에 연안 대륙붕 개발 신청서를 정식으로 제출한 것이다.
대륙붕 개발 독점 개발권에 관한 협정서.
노골적으로 대륙붕을 혼자 먹으려고 한 굴프 사에서는 총력을 기울여 로비를 시도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설마 저게 되리라고 방관한 업체들이었지만 독점권 배분이 실제로 통과될 움직임을 보이자, 몸이 달아오른 다른 메이저들이 뒤늦게 뛰어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강태준은 하나도 모르는 척 말했다.
“꽤나 어려운 걸 바라시는군요.”
“왜 이러는가. 내 알기로 자네가 이쪽 분야에 대해서는 꽤나 전문가라던데? 그쪽 능력이면 충분히 의사결정에 영향을 끼칠 수 있지 않나?”
“제 기량을 그렇게 과대평가하시다니 영광이긴 하지만 저도 사업가라서요. 아시겠지만 저도 수출에 한 발을 걸치고 있는 상황이라 그렇게 경거망동하기 힘듭니다. 무엇보다 트러블을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강태준의 반응이 시큰둥하자 상대의 목소리가 빨라졌다.
“자네도 한국인 아닌가 국익을 생각해 보게. 아무리 좋은 조건이라고 해도 어느 한쪽에 개발독점권을 몰아주는 건 경제 주권에 반하는 일이야. 아무리 좋은 조건이라도 변동이 있지 않겠나. 나중에 배 째라 나온다면 어떻게 할 건가. 분명히 후회할 일이 발생할 거야.”
“그거야 모르는 일이 아니지만 저희 같은 약소국이 무슨 힘이 있습니까. 아시다시피 한국이 미국의 지원을 받는 입장에서 눈치를 안 볼 수는 없습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게 장담컨대 유전 탐사에서만큼은 우리가 굴프보다 더 능력이 있지. 역사도 오래되었고.”
“…….”
“그쪽에서 정유공장을 짓는다고 하던데 우리가 적극적으로 도와줄 수도 있네.”
“그 말 진심이십니까?”
“믿어 주시게나. 우리 영국만큼 계약에 확실한 민족은 없다네.”
혐성의 원조가 할 소리는 절대 아니지만 여기서 그걸 꼬집을 생각은 없었다. 잠시 생각하는 척하던 강태준이 뜸을 들였다.
“그렇군요. 근데 생각해 보니 클렘사 같은 대기업은 자회사도 아주 많지 않습니까?”
“어마어마하게 많지.”
“그럼 가구도 많이 필요하겠네요. 고작 100개는 부족하지 않으실까 싶은데?”
“허허. 이제 대화가 좀 통하는 것 같구먼. 얼마를 원하나?”
표정을 고친 제이든이 은은히 미소를 지었다.
* * *
그로부터 몇 달 뒤 포항.
이곳저곳에서 터지는 플래시에 눈이 부시다.
기자들이 구름같이 몰려온 곳에서는 협정서에 조인하는 현장이었다.
기자들이 촉각을 곤두세운 것은 지금이야말로 영국계 회사인 클렘 사와 한국 간에 양해각서가 체결되는 순간이었기 때문.
-오늘은 역사적인 날입니다. 앞으로 클렘 사와 백경이 합작한 한국 국영 석유공사는 국립지질연구소와 합자한 아시아극동경제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대륙붕 전역에 걸쳐 가스전과 해저유전을 탐사하기로 정했습니다.
또 미국의 굴프 사와 세브론 사는 서해 및 남해 일원 84,000㎢에 대한 개발권을 개략적인 주요 원칙사항에 합의하고 계속 협상을 진행하고 있다고…….
[한국-클렘 사 석유개발 계약 체결]
경제 위기를 겪고 있는 한국에서는 대부분의 악재를 물타기 할 만한 호재였고, 간만의 희소식에 급 고무된 영국에서는 마거릿 공주가 방문해 직접 감사를 표했다.
양국의 장관들이 모인 자리.
클렘 사와의 서명문 교환이 끝나자 조인식을 보고 있던 광필이가 투덜거렸다.
“아니 첨부터. 조건이 너무 후한 거 아닙니까. 탐사기간 20년에 생산기간이 40년이라니…… 이거 돈 버는 주체가 누군지 모르겠습니다.”
“대신 투자 규모가 훨씬 커지지 않았나? 하한선이 2,000만 달러니 리스크는 그쪽이 받는 거지.”
대신 대륙붕 탐사와 개발에 투자하는 자금규모는 엄청난 수준이었다.
12년간 탐사비로 최소한 2,000만 달러를 투자한다는 조건.
협약서에는 투자기간을 3기로 제1기에 최소 350만 달러, 제2기 500만 달러, 제3기 1,150만 달러였다. 중간에 포기하면 설비도 그대로 포기하는 조건인 만큼 꽤나 파격적이었지만 오재갑의 표정은 그렇게 밝지 않았다.
“이걸 잘한 건지는 모르겠습니다.”
“왜?”
“그게 석유가 실제 나온다면 저희가 무슨 욕을 먹을지 모르지 않습니까. 거기다 타국에 대륙붕 탐사까지 맡긴다니 말들이 많아서요.“
“별걱정을 다 하는구먼. 오히려 그쪽에 도와 달라 하는 게 동기부여가 확실하지. 어떻게든 지들이 유리하기 위해서라도 대륙붕을 넓게 확정받으려고 하지 않겠나?”
호사가들이야 자원을 외국에 팔아먹는 계약이다 자력개발이 우선이다 떠들었지만 사실 죄다 개소리였다. 유전 탐사라는 것이 한두 푼으로 될 일도 아니도 기술적으로도 까다로운 점이 많은 만큼 한국 같은 개발도상국이 자체적으로 추진하기에는 걸리는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던 것이다.
사실 대륙붕 개발 신청서를 정식으로 제출할 때까지도 대륙붕 획정조차 되지 않았을 만큼 관심도 없었으니 차라리 클렘사를 통해 대륙붕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한 것이 이득 아니겠는가.
해저탐사기술이 전혀 없는 한국 입장에서는 잘되면 그만. 안돼도 그만.
어차피 리스크는 죄다 투자자가 지는 셈이고, 사실 실제로도 전혀 걱정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석유는 무조건 안 나올 테니까.’
나오더라도 경제성이 있을 확률은 제로에 가깝다. 어차피 지들도 도박인 줄 알고 들어오는 거 아닌가. 당시 경제성이 있는 유전을 발견할 확률은 3~4%에 불과했던 만큼 성공하지 못한다고 해도 별도 특이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지층 구조상 가능성이 없지 않으니 거짓말을 치는 게 아니지 않은가.
그러나 그걸 모르는 굴프 사는 광분해서 날뛰었다.
[굴프사 한국과의 정유공급 협상 전면 재검토]
[클렘 사와의 계약은 상도덕에 어긋나는 결정]
몹시 유감이라는 말로 그치지 않고 압박을 보낸 것이다.
“굴프 사에서는 굉장히 열이 받은 모양이네요. 이건 상도의 위반이라며 정유사업에서 철수하겠다며 으름장을 놓고 있습니다.”
“거참, 코쟁이 놈들 아니랄까 봐 웃기는 놈들일세. 그게 언제부터 지꺼였다고 찜을 하고 그래? 그리고 무지하게 나중에는 고마워할걸.”
“네?”
“먼저 들어온 놈이 유리한 게 아니라는 뜻이야.”
시추공 윤활유가 시추공에 불가피하게 스며들어 가는 행운이 설마 다시 생기겠나.
뭐 속은 놈이 바보니 솔직히 미안하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하지만 어찌 되었건 간에 굴프사가 아무리 지랄을 떨던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무엇보다 베트남 전쟁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미국으로서는 품위유지를 위해서라도 파병에 가장 큰 지분을 가진 한국에 그렇게 막 대할 수 없었던 것이다.
대통령도 몹시 만족한 듯 강태준을 치하했다.
이제 수수료로 얻은 공돈을 어떻게 할지 고민해 볼 시간이었다. 그렇게 즐거운 생각에 잠겨 있는 강태준에게 뜻밖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강 사장, 지금 와 봐야겠네. 낙동강에 큰일이 생겼어.”
“그게 무슨 소립니까?”
“일단 무조건 와 보게. 예삿일이 아니야.”
폐수 방류라도 하다가 걸린 건가. 이원준의 호출에 급히 낙동강을 찾은 강태준. 도착하자마자 실태를 파악한 강태준은 숨이 턱 막혔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강물이 완전 녹차 빛이 되어 버렸구먼.”
녹차라떼가 되어 버린 낙동강의 상태는 그야말로 처참했다. 녹색으로 된 이끼가 강 전체를 뒤덮어 버리자 탁해지고 이상한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이원준의 호출에 해안가에 도착해 살펴보니, 해안가에 떠밀려 온 물고기들이 집단 폐사한 채 떠밀려 내려와 있었다.
폐사된 물고기를 치우고 있는 직원들 사이에 이원준의 모습이 보였다.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원래는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몇 주 만에 갑자기 불어나더니 이 모양이야. 아무래도 폭염으로 인해 물이 마르면서 유속이 느려진 게 이유인 거 같아.”
“상황이 어느 정도로 심각합니까?”
“장난이 아니지. 지금 속도라면 상류로 번지는 건 시간문제라더군. 잘못하면 조업을 완전 중단해야 할지도 몰라서 대책 마련을 위해서 불렀네.”
이상고온으로 인해 오랫동안 비가 내리지 않으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녹조 발생으로 인해 물이 오염되자 섬유업자인 천경물산에는 그야말로 비상이 걸렸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