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8화 나전칠기
그러자 웹스터가 빙그레 웃었다.
“수영복은 엄연히 보조장비일 뿐입니다. 정말 정당함을 원한다면 아주 팬티까지 벗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적어도 저희는 사람의 몸을 갖고 장난을 치진 않습니다.”
“아니, 그게 무슨 뜻입니까?”
“요 근래 공산권 선수들의 몸매를 보니, 부럽기 짝이 없습니다. 타고난 체질이 아니고야 그런 몸을 어떻게 만들 수 있는지 이해가 안 돼서요. 그래서 이걸 준비해 봤습니다.”
기자들의 시선이 집중되자 웹스터가 마치 기다렸다는 듯 준비된 표를 가져왔다.
“아니, 이건 뭡니까?”
“최근 동독 선수들이 보여 준 기량 변화 그래프입니다. 알아보니 국가대표가 된 선수들의 기록이 최근 1년 새 5번이나 갱신되었더군요. 한두 명도 아니고 이 정도로 폭발적인 기량 증가는 도저히 말로 설명할 수 없어서요. 특별한 훈련 방식이 있는지 아니면 도핑테스트가 우선이라고 생각됩니다만?”
웹스터가 작심하고 던진 발언에 선수연맹 관계자들은 당혹감을 금치 못했다.
‘아니 이 인간이, 여기서 물타기를 시전해!’
‘아니 이 자식들이. 괜한 질문을 해서는!!!’
이렇게 되면 귀찮아지는 것은 자기뿐만이 아니다. 원망이 쏟아지자 기자는 입을 다물었지만 이미 늦었다.
기다렸다는 듯 국제 수영연맹이 빠르게 움직인 것이다.
국제도핑시험관리(IDTM) 시험관들이 선수들의 자택을 급습해 도핑테스트를 하자 당황한 선수들 중 일부는 테스트를 회피하기 위해 혈액샘플이 담긴 유리병을 부수거나. 검사보고서를 찢기까지 했다.
사안이 보고되자 비난의 여론이 들끓었다.
“아니, 구린 것이 없고서야 검사를 극구 막을 이유가 있나?”
“비열한 공산주의자들은 스포츠맨십을 모르는군. 수영복을 문제 삼다니 개가 웃을 소리다. 오히려 약쟁이가 더 문제 아닌가?”
“그래. 도핑으로 낸 성적은 전수조사하자. 모두 무효처리해야 한다!”
동독을 대상으로 하긴 했지만 그 뒤의 소련이 타겟라는 것을 모를 사람들이 아니다.
약물 파동이 스포츠계 전체로 번지자 성난 사람들은 해명을 요구했다.
그러자 동독 측에서는 곧바로 반박 성명을 내며 발뺌했다.
-우리는 도핑을 한 적이 없다. 전적으로 오해다.
-도핑문제는 일부 선수들의 일탈일 뿐…….
그러나 답변은 궁색했고 증거는 여기저기 산재했다. 꼬투리를 잡은 언론에서는 계속해서 물어뜯기 바빴다. 그 사이 황색 언론에서는 전혀 다른 부분에 주목했다.
[상어비늘에 운동역학을 접목한 수영복.]
[NASA의 압도적인 능력은 어디까지인가. 미-소 우주 경쟁이 다시 물 위에서 재개.]
오늘 국립과학연구원의 앤리 박사는 상어 비늘 사이 미세한 소용돌이가 발생하여 기록 단축에 영향을 준다는 점을 발표했다. 국제수영연맹에서는 의복규정에 관하여 전혀 문제될 게 없음을 다시 한번…….
압도적인 성적과 명분을 등에 업은 미국은 힘으로 논란을 찍어 눌렀다. 수영 대회가 첨단 기술 경쟁으로 변질됐다는 비난 여론은 체제 우위를 홍보하는 기류에 묻혀 버린 것이다.
‘역시 미국이 세계 최강이다!’
‘미국의 기술력은 세계 제일!!’
말을 대놓고 하지 않았지만 베트남전 여파로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한 미국인들은 승리에 목말랐다. 물론 거기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국제 공인 기록을 갈아 치우는 선수들 덕에 뽕에 중독되어 버린 탓도 컸다.
반대급부로 제품을 개발한 백경과 천경물산에까지 관심이 쏟아졌다. 브랜드 인지도가 급상승한 천경물산은 국내 수영복 판매량이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538% 증가했다.
세계 각국에서 발주 의뢰가 쏟아지자 협력사인 천경물산은 행복한 비명을 질렀다.
“큰일입니다. 스판덱스 생산량이 따라가지 못할 수준까지 늘었습니다.”
“당장 듀폰사에 연락해서 원단부터 받아 와. 아니…… 오성 쪽에도 연락하게. 특허문제는 어떻게 되고 있나?”
“사모님 말로는 곧 물질특허가 나올 거라고 하네요. 폴리우레탄 재질로 내염소성을 향상시키는 것에 대한 특허입니다. 상어비늘에 대한 것도요.”
“다행이구만. 그래도 웹스터 그 인간이 아주 뻔뻔하지는 않구먼.”
“그 인간이 수수료로 처먹은 게 얼만데. 밥값 해야죠. 듣자 하니 이번에 빌딩을 몇 개나 세웠던데.”
압도적인 성적을 내 미국의 영웅이 된 웹스터는 스포츠 스타로 등극했다.
출연하기로 한 프로그램만 수십 개.
거기에 강태준과 함께 자기 이름을 건 브랜드까지 론칭하는 바람에 돈방석에 앉기로 예약되어 있었던 것이다.
“정말 물 들어오는데 노를 젓는군요.”
“근디 이거. 난리도 아니구만. 신성한 스포츠계가 이렇게 썩었을 줄이야. 도핑에 걸린 인원이 무려 30명이 넘는다니 말세야 말세.”
유명 선수들만 추렸는데도 그 정도니 스포츠계가 받은 충격은 이루 말할 데가 없다. 그러나 강태준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빙산의 일각이랄까. 기술 도핑이나 약쟁이나 본질적으로는 그게 그거 아니겠나? 놈들 마음도 이해는 가. 어떻게든 이겨 보고 싶어서 그런 것이니.”
“아니 명색이 개발자인데 형님이 그런 소리를 하시면 됩니까?”
“뭐 내가 틀린 소리를 했나? 암튼 본인이 그런 행동을 했으면 책임은 져야지. 그보다 다음 일정은?”
“시카고입니다.”
“서두르자고.”
강태준이 날아간 곳은 시카고에서 열리는 레오콘(ReoCon) 가구박람회.
북미 시장에서 개최된 인테리어 쇼다. 각지에서 몰려온 관람객들로 붐비는 전시회장의 모습에 춘삼이가 신기한 듯 두리번거렸다.
“이게 고작 1년밖에 안 된 박람회라는 게 믿기지 않는군요.”
“그러게 바이어들이 엄청나게 몰려오는구만.”
가구박람회라고 하지만 전시가 적용되는 범위는 무지하게 넓다. 업무공간은 물론, 의료, 교육, 주거 주방, 욕실 조명, 타일, 벽지 등등.
디자인과 최신 기술까지 다양한 분야의 전시가 이뤄진다.
세계 유수의 가구 브랜드가 다양한 제품을 선보이고 있었다.
스칸다나비아 풍의 가구를 눈여겨본 춘삼이가 말했다.
“아야. 확실히 세련된 게 아파트 전시에 좋겠네요. 근데 가구들을 보니 조립식도 많군요.”
“북미의 경우 DIY가 일상화되어 있거든. 인건비가 비싸니 말이야. 반대로 동양권은 집으로 직접 가져가서 조립하는 경우는 적지.”
“흠 그런 차이가 있군요.”
“그렇지 그래도 잘 봐 둬. 여기에 전시되는 제품들 중 상당수는 상업 트렌드를 선도할 테니까.”
표준화가 핵심인 아파트의 경우 가구 배치나 인테리어를 이미 완성된 형태로 제공받는 경우가 많은 만큼 앞으로의 사업에 도움이 될까 싶어서였다. 가구관을 지나가다 보니 영어로 한국관이라고 적힌 부스가 나타났다.
장수와 행복을 기원하는 십장생이 정교하게 수놓여졌다.
서양식 가구들이 즐비한 곳에 펼쳐진 갈라파고스. 화려하게 핀 꽃과 나무를 감싼 넝쿨과, 앙증맞은 거북이 등등 어디서도 본적 없는 화려함과 영롱한 빛에 관람객들은 눈을 떼지 못했다.
자개제품을 홍보해 보자고 구상한 건 진주를 사업화한 덕이다.
테라스톤과의 진주 분쟁 이후, 급격히 늘어난 패각처리를 고심하다가 적극적으로 재활용하는 게 어떠냐는 생각이 든 것이다.
마침 통영 이미 나전칠기의 중심지이자 섭패가공으로 유명한 본고장이었던 만큼 제품을 수급받는 것은 수월했다.
그렇게 부스 한쪽에서는 한복을 걸쳐 입은 여인들이 부채춤을 추며 시선을 끄는 가운데, 목석처럼 선 최달건을 본 강태준이 손을 흔들었다.
“어이구. 최 이사님.”
“이사는 무슨…… 최 목수라고 부르게.”
“슈트가 잘 어울리시는데요.”
“어울리긴 겁나게 불편해 죽겠구만.”
어색한 듯 연신 팔을 만지작거리는 통에 강태준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하하. 매번 그러시네요. 자주 입으면 익숙해집니다. 근데 저희가 이렇게 개인부스까지 받다니 의외군요. 원래는 구석 아니었습니까?”
“좀 특이하다고 잘 봐 준 것 같더군. 동양의 신비라나 뭐라나? 원더풀 원더풀 하는데 내가 더 민망해서?”
“어째 장사가 잘 되나요?”
“구경꾼들이야 꾸역꾸역 많이 오는구먼. 어떻게 만들었냐 자꾸 묻는데 대응하기도 귀찮지 그래?”
“하하. 일단 쌀이 있어야 밥을 짓지 않습니까. 일단 관심을 끄는 게 중요하지요.”
보아하니 철민이가 관람객들을 상대로 가이드북을 나누어 주고 있었다. 영어가 능숙해 보이는 것이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다. 강태준으로서도 놀랄 만한 능력이었다.
“저 녀석, 저런 재주가 있었군요.”
“접객 쪽으로는 아주 타고났어. 사실 목공보다는 그쪽이 더 적성인 거 같기도 한데 말이야”
“목공은 별롭니까?”
“그건 아닌데 하도 뺀질거려서 문제지. 실력이 늘려면 진득하니 붙어 있어야 하는데 자꾸 싫증을 내니 원. 사실 여기 요놈 작품도 있네.”
“그게 정말입니까?”
“어디 함 볼련가? 자네가 좋아할 거 같은데?”
그가 가져온 것은 자개가 박힌 만년필이었다. 신기한 듯 요리조리 펜을 돌려 보는 모습에 최달건이 웃었다.
“이야, 이걸 철민이가 만들었다고요 대단한데요. 요철도 거의 없고.”
“제법 그럴듯하지 않나. 사실 자개판이라는게 잘 휘어지지 않은 물건이라 이렇게 만들기 쉽지 않거든. 아직 서랍장이나 장농 정도 만들 수준은 아니지만 요런 액세서리 정도는 잘 만들어.”
그 까다로운 최달건이 제자로 받고 키웠다는 것 자체가 꽤나 근성이 있다는 뜻.
말은 툴툴대지만 애정이 듬뿍 묻어나는 태도에 강태준은 미소를 지었다.
“장족의 발전이군요. 다른 작품들도 있나요?”
“스승님 작품도 몇 점 가져왔지 보겠나? 용당에서 만들었는데 옛날 방식 그대로 만든 걸세.”
확실히 장인이 만든 물건은 궤가 달랐다. 광을 낸 자개장에 매화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오색영롱한 천연 빛의 자개는 굴곡이 없이 매끈하기 그지없었다.
“섭패장이랑 온종일 달라붙어서 만든 걸세. 한 점을 완성하는 데 약 6개월이나 걸렸다네. 하이구야. 그 양반 그 나이에 얼마나 닦달하는지. 귀에 딱지가 얹을 뻔했어.”
“고생 많으셨겠습니다.”
“어쩔 도리가 있나? 간만에 그렇게 즐거워하시는 걸 처음 보았어. 어차피 양식 덕에 진주패가 모자랄 일은 없을 테니 이왕 할 거면 처음부터 눈도장을 찍어야 하지 않겠나.”
“전적으로 옳은 말씀이지요. 확실히 첫 끗발이 개 끗발이니까요?”
부스는 나름 성황리에 진행되었다. 그렇게 전시회가 끝물로 다가갈 즈음. 콧수염을 기른 노신사 하나가 나타났다. 지팡이를 든 초로의 노신사는 말쑥하게 양복을 빼입었는데, 마치 색 바랜 골동품을 보는 듯한 묘한 분위기가 흐르는 사람이었다.
‘유대계 재벌인가?’
숨길 수 없는 기품에 곁눈질하자 멀찍이 떨어진 곳에 보는 눈이 있었다.
옆에는 흰 담비옷을 입은 노부인이 함께 왔는데 제법 귀티가 났다.
“어머나 이것 좀 보세요. 이뻐라.”
“호오. 이런 곳이 있었군. 간만에 와 보길 잘 했구만 그래.”
영국식 억양이 섞인 노신사의 발음이 귀에 쏙쏙 틀어박혔다.
감탄을 연발하는 노부인의 행동은 제법 푼수 끼가 넘쳤다.
한참을 구경하던 노신사도 관심을 보였다.
“이거 조개껍데기 같은데 다 일일이 손으로 붙인 건가 그래?”
“맞습니다. 전복 껍데기를 수집해 절단한 다음 가공했습니다.”
“만져도 되나?”
가만히 쓸어 본 그가 감탄했다.
“튀어나온 부분이 없는데 이거 어떻게 만든 건가?”
“자개 위를 다시 옻칠해 틈을 메꾼 겁니다. 자개의 표면을 갈아서 광택을 내고 자개와 같은 높이로 옻칠을 바른 거죠.”
“엄청나게 수고로운 일이구먼. 그래서 이거 파는 건가?”
“뭐 전시상품이기는 하지만 팔긴 합니다.”
“가격은 얼만가?”
“대략 2만 불입니다.”
브랜드조차 없는 가구 하나치고는 헉 소리 나게 비싼 고가였지만 신사는 가격을 듣고도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남자는 재미있다는 듯 도리어 빙그레 웃었다.
“어때 허니, 이런 거 하나 정도는 거실에 두는 것도 좋지 않겠어?”
“우리만 쓰기는 아까운데요. 이왕이면 다른 사람들한테도 선물하고 싶어요. 저희 회사 사명이랑도 비슷한 부분이 있잖아요.”
“호 그래? 생각해 보니 그렇구먼. 그러면 이거 한 100개쯤 주문할 수 있겠나?”
최달건의 눈이 퉁방울만 해졌다. 옆에 있던 철민이가 아무 말 못 하자 강태준이 나섰다.
“뭐, 가능은 합니다만 이게 공임이 많이 들어서, 대략 6개월은 족히 기다리셔야 할 겁니다.”
“허어. 당장은 곤란하겠구만.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떻겠나? 마침 그때쯤이면 한국에 방문할 수도 있을 거 같은데 현지에서 받아 가는 건?”
“현지라면 무슨 말씀이신지?”
“아. 소개가 늦었구먼. 난 이런 사람일세.”
그 말에 신사가 자연스럽게 명함을 내밀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