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6화 래쉬가드
‘함부로 말도 못 하겠네 이제.’
그건 정말로 지나가듯 한 이야기였다. 비키니 섬에 핵폭탄이 떨어진 이래 수영복의 판도는 노출이었다. 어느 나라든 예외 없이 가슴이 거의 드러날 정도거나 노출이 심한 아슬아슬한 패션이 유행했던 만큼 노출이 점차 대담해지는 시대, 시대에 역행하는 듯한 의복이 오히려 관심을 끌 줄이야.
당당하게 런웨이를 걷는 모델들의 모습에 설유하가 감탄했다.
“이쁘다. 저게 정말 점례가 만든 거예요? 대단하다.”
“이건 다 오빠 덕분이죠.”
“정말 대단하다. 우리 태준 씨는 패션에도 조예가 깊군요.”
존경의 눈초리를 보내는 설유하의에 강태준이 머쓱해했다.
“에이 저쪽이 거진 다 했죠. 뭐 저는 아이디어만 제공했으니까요.”
“와, 진짜 멋있어요. 재능이 진짜 있네요. 전례 씨.”
“고마워요, 언니. 근데 점례가 아니라 이왕이면 에리카라고 불러 주세요.”
“아, 미안해요.”
몹시 정색하는 점례에 설유하가 민망해하자 옆에 있던 광필이가 대꾸했다.
“왜 부모가 주신 이름을 자꾸 바꾸려고 그러나. 점례가 어때서? 구수하고 정감 있는데. 난 점례가 좋아.”
“아니. 진짜 그럴 거예요?”
“뭐 어떤가. 점순이가 아닌 것만 해도 다행이지. 생각해 보니 점순이도 괜찮은데. 그것도 잘 어울린다. 야. 점순아 봄감자가 맛있단다?”
“아, 지금 뭐요?”
사람이 너무 어이가 없어지면 말을 못 한다고 입이 푸들거리는 점례였다.
사레가 들린 춘삼이가 옆에서 풋 하고 물을 뿜었다.
옆에서는 오재갑이 입술을 일그러트린 채 간신히 참고 있었다.
‘에구, 저러다 한 대 맞겠구먼.’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점례의 얼굴이 심상찮다.
폭발하려던 점례를 말리려던 그때, 어디선가 구원의 동아줄이 내려왔다.
“미스 에리카?”
점례가 고개를 팩 돌리자 바비인형처럼 생긴 금발의 미녀 하나가 서 있었다.
케롤라 헤레라.
전 유럽에 명성을 떨치는 유명 패션 디자이너. 선망하는 대상을 만난 점례의 눈동자가 찢어질 듯 커졌다.
“어머, 실례지만 그쪽이 에리카 씨 맞으시죠?
“네. 설마 그쪽이 케롤라 씨?”
“뭐 소개할 시간을 덜었네요. 그보다 이런 생각을 해내다니. 꼭 만나 보고 싶었어요.”
그녀가 손뼉을 탁 치며 부드럽게 점례의 손을 감자 어쩔 줄을 몰랐다.
“대체 이런 걸 어떻게 생각한 거예요?”
“어, 음…… 그게…….”
평소 우상으로 생각하던 사람이 눈앞에 있어서일까. 머리가 하얘져서인지 아무 말 못 하는 점례.
구원을 청하는 눈빛에 강태준이 나섰다.
“서핑보드 타는 사람들한테서 모티브를 얻었지요. 서핑할 때 슬라이딩을 하면 모래에 쓸려 따갑기도 하고 다칠 확률도 있지 않습니까?”
“서핑보드요?”
“네. 겨드랑이 쪽 살이나 근육이 많은 사람한테도 이게 꽤 도움이 되지요. 게다가 살이 쓸리는 증상을 완화시킬 수 있으니까요.”
“역시 기능성을 염두에 두고 만든 거네요. 어머 그보다 그쪽은 낯이 익는데? 설마 그 진주 소송하신 분?”
“네. 강태준입니다. 행사 주최자이자 에리카 씨 후원자죠.”
강태준과 악수를 나눈 그녀가 눈웃음을 쳤다.
“TV서 볼 때보다 핸섬하시네. 박력 있던데요. 혹시 파트너는?”
“죄송하지만 이미 임자 있는 몸입니다.”
“아쉽군요. 그거. 그러면 소재는 어떤 건가요?”
옆에 나란히 선 설유하를 본 카레라가 입맛을 다시더니 곧장 관심을 돌렸다.
별로 승산이 없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이야기를 나누던 둘의 이야기는 전문적인 영역으로 넘어갔다.
“호오, 그렇게 설계했다는 거군요. 소재의 특징을 살려서 밀착으로.”
“특성상 일종의 몸매 보정 효과도 있지 않겠습니까?”
“확실히 그렇네요. 전신을 덮으면 화상이나 피부에 상처가 있어도 부담 없이 입을 수 있을 거 같아요. 대단하네요. 에리카 씨.”
칭찬을 받은 점례가 화들짝 놀라더니 고개를 저었다.
“네? 아네. 별로 대단한 건 아니네요.
“아니긴 이런 발상의 전환은 아무나 못 하는 거예요. 자신감을 가져도 돼요. 그보다 강 사장님. 그 모델이 걸고 있던 진주 브로치 탐나더군요. 디자인이 끝내주던데?”
“하하. 그건 쇼가 끝난 직후에 바로 매장에서 출시할 예정이니 기다려 주십시오.”
“감사. 암튼 에리카. 나중에 같이 일했으면 좋겠네요.”
윙크를 한 헤레라가 명함을 내밀더니 슬며시 인파 사이로 사라졌다. 잠시 후 흥분한 듯한 점례의 얼굴이 마치 사랑의 빠진 소녀의 그것처럼 변했다.
양 볼은 어느새 발그레해져 있었다.
“들었어요? 내 패션이 정말 대단하데요.”
“거 칭찬받아서 참 좋겠네. 참 잘했어요. 도장이라도 찍어 줄까 그래?”
옆에 있던 광필이의 비아냥거림에 점례의 눈매가 뾰족해졌다.
“아니, 대체 아까부터 왜 그러는데요? 그렇게밖에 말 못 해요?”
“난 솔직히 이 패션 반대여. 전신수영복이라니 자연스럽지 않잖아.”
“아니 뭐가 자연스럽지 않다는 거예요?”
“솔직히 말해서 그냥 해녀복 아닌가? 오히려 몸선이 드러나는 게 더 남사스러워.”
“아니, 그걸 말이라고 해요?”
둘이 목청을 높여 투덕거리더니 화난 점례가 고개를 팩 돌리고 사라졌다.
“저거, 갑자기 왜 저래.”
“분위기 좋더니만…… 광필 씨 너무 민감한 거 같아. 안 그래요?”
경호원으로 참석한 복만이가 침중하게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형수님 이번만큼은 저도 동의하기 힘들군요. 인간의 몸은 그 자체로 예술이고 수영복은 그런 자연스러움을 최대한 드러내는 용도일 때 의미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자연미를 저렇게 둘둘 싸매는 건 비인간적인 조치라고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굳이 옷을 입을 거 같으면 수영장에 왜 갑니까?”
옆에 있던 최 중사도 한마디 하자 복만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런 걸 입는 건 그 자체로 중죄라고 사료됩니다. 그리고 솔직히 형님. 전 형님이 이렇게 이단적인 분이신 줄 처음 알았습니다.”
“맞습니다. 사장님 나빠요.”
핸더슨까지 가세했지만 강태준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나 참, 어이가 없구먼. 그게 왜 내 잘못인가? 언젠가 발명되어 수많은 남자를 좌절시킬 것이었다면 이쪽이 처음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아니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인류의 역사에는 반동분자가 항상 존재하기 마련이지. 발전이란 그런 식으로 이루어지는 거고 유감스럽지만 저 제품도 누군가는 만들어 냈을 물건이라고 생각해 봐.”
강태준의 뻔뻔한 논리에 기가 막힌 복만이가 아무 말도 못 했다. 그때 코가 빨간 백인 남자가 슬며시 다가와 말을 걸었다.
“하지만 그 누군가가 판도라의 문을 연 거 아니겠나. 총기를 쓰고부터는 냉병기의 시대로 돌아갈 수 없는 법이니까 말이야.”
“총기라고요? 저게?”
“그래. 내가 볼 때는 혁명적인 옷이야. 시각적으로든 기능적으로든.”
욕인지 칭찬인지 모를 소리를 지껄이는 남자에 복만이가 어이없어 했다.
자기만의 생각에 빠진 듯한 남자의 행동에 설유하가 조심스럽게 나섰다.
“저기 누구신지 모르지만 이렇게 갑자기 끼어드시면, 그쪽 신원부터 밝히는 게 예의 아닐까요?”
“아, 소개가 늦었구먼. 난 이런 사람일세.”
명함을 받은 강태준이 정체를 보더니 되물었다.
“미국 수영 대표팀 총감독?”
“존 웹스터라고 하네. 볼티모어 수영클럽 CEO지. 그냥 존이라고 부르게.”
“강태준입니다. 아 근데 여기는 왜.”
“랄프가 소개했지. 결혼기념일이 임박해서 마누라한테 진주목걸이라도 하나 사 줄까 했거든. 여기 참석한다 해서 와 봤는데 근데 진주보다 진귀한 장면을 보았군 그래.”
“무슨 말씀이신지요?”
“수영복 말이야. 난 저게 고작 몸 가리는 패션으로만 보이지 않아서. 보아하니 기능성에 초점을 둔 듯한데 말이야.”
“바로 보셨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개발자인 자네가 혹시 시간 내줄 수 있나. 사업상 할 이야기도 있고 아예 내 회사로 가 보지.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이게 인연 아니겠나?”
“회사가 어디 계신데요?”
“볼티모어.”
거리상으로 상당한 거리에 강태준이 난색을 표했다.
“그건 좀 곤란한데요. 시간이야 없다가도 있는 겁니다만 지금 여유가 많지 않습니다.”
“걱정 말게. 바로 날아서 가면 금방이니까.”
“네?”
말이 끝나기 무섭게 허공에서 프로펠러 소리가 들려왔다. 자가용이라고 말한 것은 다름 아닌 전용 헬기였던 것이다.
“왔군.”
“오우야. 쉿. 진짜로요?”
“어서, 타게나! 시간 없어.”
날아간 헬기는 볼티모어 수영 센터 위에 착륙했다. 조경이 잘 정돈된 레크리에이션 센터 앞에는 비치발리볼이며 농구코트까지 함께 갖추어져 있었다. 실내로 들어가니 갓 취학연령이 된 아동들이 옹기종기 모여 놀이를 하고 있었다.
마치 워터파크 분위기. 해맑은 아이들을 보니 마음까지 정화되는 기분이었다.
“와, 애들이 바글바글하군요.”
“원래 이 정도는 아닌데, 서머리그 시즌이라서 그러네.”
“뭐, 뭐 대회라도 합니까?”
“그렇지. 동네 수영대회긴 한데 인기가 좋네. 요새는 좀 규모도 커지는 중이야. 인근 소도시부터 광역도시까지 결승을 치르는데 꽤나 인기가 좋아서 참가자가 늘었거든.”
“얼마나 됩니까?”
“요 근래에는 팀이 여섯 개로 늘어났으니 총 400명쯤?”
엄청난 규모에 복만이가 입을 벌렸다. 워싱턴, 뉴욕, 뉴저지, 등까지 포함해서 8개.
지도자 200명, 회원만 8,000명에 육박한다는 소리에 일반적인 수영 센터를 생각했던 사람들은 크게 놀랐다.
“와우, 그 정도면 전국구인데요. 여기서 뽑힌 애들이 국가대표겠네요.”
“정확히는 여기서 선발을 거친 아이들이 국가대표가 될 기회를 얻는 거지. 사실 미국 전 지역에 센터를 증설 운영할 계획이었다네. 아쿠아 테라피와 퍼스널 트레이너를 두고 별도로 운동 재활지도자를 둘 생각이었지.”
“꿈이 아주 원대하십니다. 그래.”
“뭐 그래서 감독직을 수락하는 데 고민이 많았지. 일에 집중하기 어려워질 거 같아서 말이야. 그래도 뭐 일단 맡았으니 성과를 내야 하지 않겠나?”
그렇게 중얼거리던 그는 한쪽 구석으로 향했다.
“여기서부터는 관계자가 아니면 출입할 수 없는 곳일세.”
눈을 찡긋한 웹스터 옆으로 안내원 하나가 다가왔다. 안내를 따라 들어가자 선수들이 훈련하는 모습이 보였다.
스쿼트 같은 맨몸운동부터 몹시 다양했다.
“이게 다 훈련 기구들입니까. 대단하네요.”
“다양한 조건에서 훈련을 경험하게 하는 게 성적 향상에 좋더군. 이왕이면 지루하지 않게 해야 능률도 오른다네.”
훈련장에는 레인마다 각자 다른 코칭 프로그램으로 짜여 있었는데 시설뿐만 아니라 선수 개개인의 영양관리에도 신경을 많이 쓰는 것을 보였다. 특히 보충제가 인상적이었다. 수영장 옆에 프로틴 바, 프로틴 쉐이크와 같은 보충제부터 바나나, 스테이크 같은 음식들까지 산처럼 쌓여 있었던 것이다. 복만이가 입맛을 다셨다.
“이런 환경에서 운동하면 실력이 늘 수밖에 없겠네요.”
“그러면 뭐 하나. 국제대회 성적은 점점 떨어지고 있는데.”
“에, 어째섭니까?”
“소련 놈들 때문이지 사실 요새 도핑이 심각해지고 있거든. 덕분에 우리 미국 선수들이 상대적으로 피해를 보고 있다네.”
완곡하게 보조 수단이라고 말하고는 있지만 도핑이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수준의 경기력 향상이 있었다고 웹스터가 불편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빨갱이 놈들은 인간이 아니야. 한 인간의 인생을 망치는 일이 버젓이 자행되고 있지. 나중에 어떤 부작용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말일세.”
“아니 왜 그렇게까지 하는 겁니까?”
“체제의 우월함을 선전하려면 약물보다 싸고 효과적인 방법도 없으니까. 최고 기량을 가진 선수들에게는 다른 종류의 약을 처방하고 있다는 소리도 있다네.”
“아니, 그거는 불법이지 않습니까?”
“안 걸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니까 사실 새삼스러울 건 없어. 고대에서 스포츠선수들은 경기력 향상을 위해 뭐든지 먹었다. 환각성분이 있는 버섯이나 희독말풀 같은 것도 꾸역꾸역 처먹었다 뒈지는 경우도 있었고. 다만 지금은 정도의 문제지.”
2차 세계대전 후 국가의 자존심이 짓밟힌 동독은 체제 경쟁을 위해 운동 경기에서 성과를 내는 데에 골몰했고 그래서 손을 댄 것이 약물이었다. 약물로 엄청난 성과를 거두자 그리고 이제는 공산주의 본산이라고 할 수 있는 소련에게까지 그 여파가 번진 것이다. 어이가 없어진 점례가 물었다.
“도핑테스트는 안 해요?”
“IOC의 엉덩이는 무겁거든. 의무위원회를 편성한 게 고작해야 2년 전의 일인데다 잡을 수 있으면 신인가 그냥 요식행위가 반이지. 하지만 우리도 이대로는 볼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네.”
“뭐 요점은 거의 들은 것 같은데 그게 저를 부른 것과 무슨 상관입니까?”
“그러니 우리도 대응해야 하지 않겠나 싶어서. 저쪽에서 저렇게 나온다면 우리도 과학의 힘을 빌리는 수밖에.”
그 말에 강태준의 눈이 게슴츠레해졌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