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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재벌 강태준-285화 (285/361)

285화 진짜와 가짜

“발언을 허락합니다.”

증인 앞으로 나온 강태준이 무릎과 허리를 굽혀 증인과 눈높이를 맞추었다.

“증인은 진주유통업자라고 하셨죠?”

“예. 맞습니다.”

“그럼 증인에게 묻겠습니다. 진주와 관련된 규제는 그건 어디까지나 진주의 품질을 유지하기 위한 조치라는 말인가요?”

“네. 맞습니다.”

”그럼 진주양식에서 핵심은 양식기간이고 핵 삽입과 수확까지의 기간에 따른 노하우가 특허의 범주라는 건가요?“

로이를 한번 돌아본 도매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맞는 말씀입니다.”

“최소 4년 이상은 숙성해야 제대로 된 진주가 되는데 직접 보고 확인하기 전에 한국산을 신뢰할 수 없다는 거라는 말씀이시고요?”

“예. 어떤 방식으로 키웠는지 입증할 수 없으니까요.”

“그럼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면 같은 값을 받을 수도 있는 거겠군요. 아니 그렇습니까?”

“네. 다만 품질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 요소가 필요하지요. 외적으로 흠결이 있는지 광택이 어떤지 크기가 어떤지 등등 말입니다.”

장광설을 펼치는 도매상이 다시 나와 차이점을 역설했다. 테라스톤이 가져온 진주는 최상급 중의 최상급이었기에 그냥 보기에도 차이가 있었다. 티끌 하나 흠 없는 진주를 들고 광고를 하는 모습에 귀가 솔깃한 배심원들 테라스톤 사장 역시 꽤나 안심한 듯 속삭였다.

“우리가 반드시 이기겠지?”

“분위기가 반 이상 넘어왔습니다. 논리력으로는 절대로 이길 수 없지요.”

로이는 여유로운 얼굴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번 공판의 핵심은 변호사가 법적인 쟁점을 얼마나 쉽게 풀어 배심원들을 이해시키고 설득하느냐에 있다. 배심원 선정에도 엄청난 돈을 쏟아부었던 만큼 이번 일은 압승이라는 확신이 선 것이다.

그러자 강태준이 다시 나섰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테라스톤사가 했던 행동들은 전부 진주 품질 관리를 위해 불가피한 조처였다는 말이군요.”

“네…… 맞습니다.”

“그럼 이쪽이 테라스톤사에서 품질을 보증한 진주고 이쪽은 아니다?”

강태준이 투명한 봉지에 담은 두 개의 진주 샘플들을 올리며 다시 확인하자 리처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럼 이 자리에서 진주의 품질을 입증해 보고자 합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말을 끝마칠 사이도 없이 망치를 건네받은 강태준이 진주를 쾅 하고 내리쳤다.

단번에 부서져 내리는 보석의 모습에 사람들이 새된 비명을 질렀다.

“오 마이 갓!!”

“자네, 무슨 짓인가 이게!!!”

박살이 난 진주가 쓸모없는 탄산칼슘 덩어리로 화했다. 강태준의 돌발적인 행동에 놀란 배심원들이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나 강태준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망치를 두들겼다.

“갓 뎀. 크레이지!!”

“이런 미친놈이, 경비원. 경비원 어디 있나?”

강태준의 돌발 행동에 주위가 술렁였다. 놀란 판사가 경관을 부르려 하자 변호사가 제지했다.

“자자! 모두 조용! 자 이 제품의 단면을 확대해서 모두가 볼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확대경을 든 채 조각난 진주에 카메라를 가져다 대었다. 그런데 배심원들은 곧 눈을 의심했다. 확대경으로 살펴본 두 진주에서 나타난 진주층의 두께가 확연하게 달랐던 것이다.

“아니. 이게 무슨 일입니까?”

“이게 우리 백경에서 재배한 양식 진주고, 이게 테라스톤에서 최고급이라며 인증한 제품입니다. 한데 보십쇼. 이상하지 않습니까. 저희 제품의 진주층이 훨씬 더 두껍지 말입니다.”

공개변론에 참석한 인원들이 물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정말이었다. 테라스톤이 제시한 제품의 두께는 얇고 들쭉날쭉한 반면 강태준이 키운 진주질의 두께는 두껍고 일정하게 나왔던 것이다. 그걸 본 도매상의 초점이 흔들리자 재판관의 시선이 증인을 향했다.

“아니 리처드 씨 이게 어떻게 된 거죠?”

“그…… 그건…….”

도매상이 아무 말 못 하고 버벅거리자 강태준이 말을 가로챘다.

“보시다시피 생육기간이 짧으면 이렇게 진주층도 얇아집니다. 예전엔 품질이 엄격히 유지되었을지 모르지만 최근 진주양식은 그야말로 시간과의 경쟁이 되었죠. 양식업자들은 처음에는 반년을 줄였고, 다음에는 1년을 줄였습니다. 다음에는 1.5년 그리고 마지막으로 6개월 미만으로 양식기간을 체계적으로 줄였지요. 그리고 이게 바로 그 결과물입니다.”

강태준이 다시 진주층의 두께가 얼마나 차이가 있는지 확인시켰다.

“저희 진주는 7년이 넘게 인고의 세월을 통해 만들어 낸 역작입니다. 한데 테라스톤 사에서 품질을 보증한 진주는 진주핵만 이렇게 큰 놈이죠. 보기에는 테라스톤 사의 제품이 훨씬 좋아 보이지만 본질을 보십시오. 이런 것처럼 진주층의 두께가 화장 두께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면 이게 상품으로서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그건 엄연히…….”

말을 이어 가려고 했지만 달리 할 말이 없다.

조용해진 법정에서 강태준의 목소리가 높혔다.

“진주는 진주층이 최소 0.5㎜ 이상 덮여 있어야 상품 가치를 인정받는 걸로 압니다. 천연 진주가 보석으로 인정받는 것은 그만큼 인고의 세월이 묻어 있기 때문입니다. 최소한 일생 동안 소지할 만큼은 충분히 진주층 두께가 있는 진주를 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말은 결정타였다. 외관상의 흠결만 여부만 보고 진주를 공수해 온 로이로서는 이번 사태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급해진 로이가 이의를 제기하려 들었지만 배심원들의 분위기는 이미 싸늘해진 뒤였다.

“그럼 우리가 지금까지 착용해 온 진주가 제대로 된 물건이 아니었다는 거야?”

“이런 나쁜놈들! 감히 짝퉁을 팔다니!”

“이런 사기꾼들 같으니라고!”

배심원들이 콧김을 들썩이며 극도의 불쾌감을 쏟아 내었다. 상당수의 배심원이 테라스톤의 주 고객이기도 했던 만큼 배신감은 더 컸다. 심상치 않은 변화를 느낀 판사가 서둘러 진화에 나섰다.

“조용. 좌정하십시오!! 변론기일은 이주 뒤로 잡겠습니다.”

화들짝 놀란 테라스톤 사에서는 어떻게든 사태를 진작시키려고 했지만 이미 흘러 나간 기사를 막을 수는 없었다. 다 이길 거라 생각하고 기자들을 죄다 불러 모은 것이 오히려 화근이었던 것이다.

[림스틱 바른 진주의 참상, 시판 진주의 8할은 진주도 아닌 탄산칼슘 덩어리]

[껍데기를 씌운 보석이 시가 100만 달러로 둔갑하는 마법]

‘X레이라도 찍어서 대령해라.’

‘내 진주도 무늬만 씌운 가짜였다고!’

강태준의 행동에 깊은 인상을 받았는지 각지의 유명인들도 비슷한 퍼포먼스를 벌였다. 대규모 리콜 사태가 이어지자 테라스톤의 브랜드 이미지에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지금껏 어디에 숨었는지 양심선언을 하며 나타난 보석 감정사들이 판을 뒤집어 버린 것이다.

“테라스톤은 양식업자들에게 임의로 품질 보증서를 발급해 줬지만 이 보증서라는 것은 사실 실제 등급과는 무관합니다.”

“진주 등급은 대부분 거짓말입니다. 테라 스톤이 모든 등급을 좌우하고 있습니다. 테라스톤 직영이 아니면 A급 판정을 받기는 지난하지요.”

마치 바겐 세일을 등급 장사를 한다는 말을 실토했다. 의도적으로 직영이나 관계사 외에 다른 곳에서 산출된 진주의 등급을 깎아내린다는 이야기였다. 색 광택, 크기는 물론이거니와 진주의 탈색과 가공 과정에서 조작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덧붙이자 보석 업계는 뒤집어졌다.

-우리 테라는 무고합니다. 반독점법 위반 주장은 근거가 없다는 점이 재판을 통해 밝혀질 것입니다.

상황이 극도로 불리해지자 테라스톤에서는 부랴부랴 대변인을 통해 성명을 내고 긴급 점검에 나섰지만 한번 나빠진 이미지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반대로 백경에서는 싱글벙글이었다.

“장난이 아닙니다. 환불이 벌써 수천 건이 넘었습니다.”

“유럽에서도 뿔난 명품 업체들에게 된서리를 맞았다네요.”

그간 호시탐탐 테라스톤을 노리고 있던 업체들이 반격을 개시했다. 유럽에서 테라스톤 죽이기에 나선 것은 한때 진주 세공으로 유명했던 프렉탈이었다. 테라스톤이 패권을 가져가기 전에 천연 진주시장을 석권했던 기업이었던 만큼 이번 일을 통해 판도를 바꿔 버릴 생각이었던 것이다.

천연 진주 사업이 망하면서 경제가 통째로 흔들렸던 쿠웨이트와 UAE의 큰손들도 과거의 원한을 잊지 않고 공격에 가세했다.

그간 테라스톤이 부당이득을 챙겼다며 사기혐의로 줄소송을 걸었던 것이다.

사태가 그 지경에 이르자 테라스톤은 그야말로 절체절명에 처했다.

최악의 경우 회사를 분사할 상황에 처한 테라스톤에서는 방어에만도 정신이 없었다.

“암튼 테라스톤도 그렇게 쉽게 끝내지는 않을 거야.”

“그럼, 소송이 엄청나게 길어지겠군요.”

“결과는 중요치 않지. 뭐 그래도 뒤처리는 필요하겠지만.”

“맞아요. 나머지는 랄프에게 맡기세요. 추가로 증거를 제출했고, 워싱턴DC 지법에서도 재판을 진행할 근거가 충분하다는 판단을 내렸으니 말입니다.”

소송의 결과가 어찌 되었든 승자는 백경그룹이었다.

무엇보다 큰 이득은 테라스톤과 정면으로 대결한 덕에 브랜드 인지도가 크게 뛰어오른 것이다.

회사 주가가 치솟으면서 테라스톤과의 결별을 선언한 여러 양식장에서도 강태준에게 도움의 손길을 청했다. 덕분에 통영산 진주는 천정부지로 값이 치솟아 올랐고 상당수의 명품업체들이 러브콜을 보냈다.

이번 기회를 잘 활용하면 고가 브랜드로서의 가치를 확고하게 굳힐 수 있는 호기.

이대로 넘기기에는 너무 아까운 기회가 아닌가.

뭔가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고 있던 찰나 춘삼이가 다시 도착했다.

“저 이런 게 왔습니다만 사장님.”

“뭐야 이게?”

아무 생각 없이 봉투를 뜯어본 강태준의 눈이 커졌다. 안에 들어 있는 것은 황금빛으로 금박이 된 초대장이다.

“뉴욕 패션 위크에 참석해 자리를 빛내 달라? 아니, 내가 그렇게 명사가 되었나?”

“그게 아니라, 이거 밑을 봐요. 점례 작품이 여기 나온다는데요?”

설유하 역시 초대장을 함께 받은 모양.

다시 초대장을 들여다보니, 에리카라고 적힌 사인이 밑에 적혀 있었다.

“응 점례가? 패션위크에?”

“아니 몰랐어요? 여기 손편지에 오빠가 조언해 줬다고 하는데?”

“응 내가 언제?”

“아니 그걸 나한테 물어보면 어떡해요. 참. 이렇게 팜플렛까지 보냈는데?”

설유하가 어이없다는 듯 핀잔을 주자 그 모습을 본 강태준의 눈이 커졌다.

“응? 이건?”

* * *

뉴욕, 패션쇼가 열리는 현장.

여름 휴가철을 앞두고 맨하탄 한복판 비치웨어 패션쇼가 열리고 있다.

사뿐사뿐. 런웨이를 걷고 있는 모델들.

한곳에 초청된 가운데 한동안 수영복을 감상하던 일행들이 지루한 듯 중얼거렸다.

“보기는 참 좋은데 똑같네. 점례가 디자인한 옷은 언제가 차례인 거야?”

“저, 저기 나와요!!”

수영복이긴 한데 목부터 발목까지 온몸을 감싸는 형태의 특이함이 오히려 시선을 사로잡는다.

목 한가운데 걸린 진주 브로치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수영복이 온몸을 가리다니. 신기한데”

“근데 불편하지 않아요? 저렇게 꽉 끼는 옷을 입으면?”

“재질이 매끈해서 그렇게 불편해 보이지는 않는구먼.”

“생각보다 예쁜데요 저거? 실선도 없어 보이고.”

이번에 선보인 옷은 다름 아닌 레쉬가드.

스판덱스와 나일론 폴리에스터를 혼합한 소재로 천경물산과 함께 만든 기능성 의복이었다.

설마 했던 강태준으로서는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설마 했는데, 세상에 진짜 저걸 만들어 낼 줄이야. 수영복 디자인을 고민하던 점례에게 지나가던 말투로 말한 게 화근이었을까. 강태준은 얼마 전에 지나가듯 이야기한 말을 떠올렸다.

“비키니가 자신이 없다고? 노출이 대세라면 차라리 역발상을 하면 어떨까?”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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