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4화 특허 소송
“동양인이. 스타인벡 기념회를?”
“그렇다니까?”
“그 인간 노동 전문 아닌가. 동양인 기업가가 좋아한다 묘하구만.”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지. 배급사가 말을 들어줄 정도로 입김이 세다는 게 대단한 거지.”
“그 인간이 누군데?”
“강태준이라고 보통 사람이 아니야. 군수사업자인데 베트남전에 운송물건을 공급했는데 커리어가 장난이 아니더군. 하는 사업이 한두 가지가 아닐세. 문어발이 따로 없지.”
하는 영화마다 히트를 치는 마이더스의 손이라던가. 마치 팬이라도 된 듯 일대기를 떠벌이는 남자에 들은 상대가 눈을 빛냈다.
“그럼, 그 사람 섭외 가능하겠나?”
“섭외를? 왜?”
“그래. 재미있는 인사 아닌가. 게다가 아무래도 가려운 데를 긁어 줄 수 있을 거 같아서 말이야.”
자화자찬보다 외국인으로부터 칭찬을 받는 편이 더 뽕이 차는 법이 아닌가.
뜻하지 않은 초대장을 받고 어안이 벙벙했다.
“레니 비틀 쇼에서 초청장을?”
“흥. 누군지 모르겠는데 레니 비틀이 누구죠?”
“CBS에서 1 뉴욕의 연예 칼럼니스트이자 유명 사회자입니다.”
방영 시간을 확인한 광필이가 김샛다는 표정으로 반문했다.
“에이 시간대가 심야인데요. 이거 이래서 관심을 끌겠습니까?”
“무시할 사람이 아니에요. 자기 이름을 딴 쇼를 진행하고 있다는 건 그만큼 메리트가 있다는 거죠. 고정 매니아층이 있는 사회자고 발언권이 엄청난 사람이에요.”
“그런 사람이 나를 왜 초청했죠?”
“아무래도 영화사에 대형 투자자기도 하시니. 제대로 관심을 끈 거죠.”
“뭐 한번 나가 보지요 그럼. 혼자 나가는 건 좀 그런데…….”
“적절한 대상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강태준은 구로사와 감독과 함께 출연하게 되었다. 레니 비틀은 굉장히 유쾌하기 생긴 남자로 붙임성이 좋아 보이는 사람이었다.
“안녕하세요. 레니 비틀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신 분은 굉장히 특별한 분이지요.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님. 그리고 최근 주가를 올리고 있는 동양의 큰손, 미스터 강입니다.”
“거, 오랜만이군요. 구로사와 감독님. 거의 10년 만인데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안녕하지 못했지. 이 얼굴이 안녕한 걸로 보이는가? 참 허튼 소리를 하는구먼.”
건성으로 대답하는 구로사와에 땀을 삐질 흘리는 사회자였지만. 그는 프로였다. 곧바로 표정을 수습한 비틀은 쾌활하게 답했다.
“하하. 짓궂으시긴 이번 개봉한 작품이 흥행하지 않았습니까? 게다가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도 진출했고 말입니다.”
“몇 년 놀았으니 인간적으로 밥값은 해야지. 그리고 칸 진출이 뭐 대수라고.”
“역시 감독님이십니다. 그럼 이번에도 수상을 기대해도 될까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나. 상은 내가 주는 게 아닌데. 뭐 주면 사양하지는 않지 말이야.”
누가 보면 싸가지 없다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구로사와 감독은 충분히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었다.
“하하, 역시 엄청난 자신감이군요. 그럼 같이 모신 분을 만나 볼 시간이네요. 미스터 강. 몇 번을 고사하셨는데 이번에 어렵게 출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인 말씀을 이렇게 초대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듣자 하니 굉장한 사업가라 하던데? 원래 베트남에서 군수산업으로 돈을 많이 버셨다던데. 별로 관련이 없어 보이는 영화업에 투자하게 되신 계기가 뭡니까?”
“뭐 원래 돈만 벌면 심심하잖아요. 먹고 사는 게 해결되면 문화에 관심을 두는 게 수순 아니겠습니까. 사람이 빵만으로 살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하하. 맞는 말씀입니다. 다만 영화계에서 마이더스의 손이라는 말이 들리던데 그 비결이 뭔지 궁금하군요. 듣자 하니 투자한 영화가 모두 히트를 기록 중이던데. 지난번에 상영한 폭주 기관차도 꽤나 호평이었구요.”
“하하. 돈냄새가 풍기는데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뭐 절반은 운이지만요.”
강태준과의 토크진행은 꽤나 부드러웠다. 일단 영화 자체는 물론이거니와 그 외적으로도 꽤나 흥미로운 포인트가 많았던 것이다. 특히 토크가 강태준이 구로사와 감독을 구한 사건에 이르자 다들 감탄을 금치 못했다.
“대단하십니다. 그야말로 선견지명이군요.”
“감이라는 게 무섭더군요. 제가 좀 위험한 일을 많이 겪어서 그런 촉이 살아 있다고 할까요?”
“투자자로서 배우고 싶은 능력이네요.”
같은 이야기가 길어지자 뒤에 있던 촬영 감독이 신호를 보냈다. 정신을 차린 사회자가 얼른 말을 이었다.
”아차, 그럼 이제 주제를 바꿔 봅시다. 듣자 하니 “진주”라는 작품의 재상영을 요구하셨다 들어서요. 수익성 때문은 아닌 거 같고. 연유가 대체 뭡니까?”
“제 개인적인 사감이 많이 들어갔습니다. 개인적으로 제가 스타인벡의 팬이기도 하고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작품을 공유하고 싶기도 했고요.”
“호오, 그래서 어떤 점에서 인상 깊으셨습니까?”
“아시다시피 스타인벡은 사회참여적인 작가 아니겠습니까. 불편한 현실을 꼬집는 데 도가 텄죠. 제가 좀 청개구리 기질이 있어서 그런 점이 맘이 들더군요. 저도 예전에 자동차 만지면서 기름밥 좀 먹었거든요. 그래서인지 작품이 전하는 메시지에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하하, 그렇습니까? 기름밥이라니 전혀 그렇게 안 보이시는데?”
“좋게 봐주셔서 감사하네요. 사실 진주 이야기는 산업계 암투를 시사하는 내용으로 현시창에서도 의미가 있습니다. 사업적으로 보면 틀린 부분이 많지만요.”
“호오 어떤 게 말입니까?”
“예전 사람들은 진주를 발견하는 것이 커다란 행운이라고 생각하지만 지금의 진주는 예전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흔한 보석이라는 말씀이죠.”
강태준은 갖가지 추임새를 넣어 가며 진주 양식에 대해 썰을 풀어놓았다. 흔하게 접하기 힘든 사업에 관련된 이야기라서인지 다들 숨을 죽이고 이야기에 집중했다.
“호오 신기하군요. 진주라는 게 그런 식으로 만들어지다니.”
“예전에는 신의 눈물이었지만 이젠 조개의 눈물로 만드는 것이죠.”
“멋진 비유군요. 듣자 하니 저도 하나 가져 보고 싶은데요.”
“옙, 그래서 가져와 봤습니다.”
기다렸던 소리가 나오자, 강태준은 준비한 보석함을 열어 엄선된 진주를 보여 주었다. 조개껍대기 위에 올려진 핑크빛의 진주들은 예술의 극치.
영롱하게 빛나는 모습에 사회자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오오, 이게 진짭니까.”
“그럼 진짜죠 가짜겠습니까?”
“오오. 탐스럽네요.”
저도 모르게 입맛을 다시는 사회자의 행동에 강태준이 슬쩍 운을 떼었다.
“원하시면 하나 가져가십시오.”
“오오…… 정말입니까? 이 귀한 걸?”
“안타깝지만 저희가 파는게 아니라서 말입니다. 사실 팔 수 없거든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사실 저희가 진주 양식을 성공하긴 했지만 판매에 제약이 걸려서 팔 곳이 없더군요.”
“아니 이렇게 좋은 물건을 팔 수 없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독점기업인 테라스톤사가 진주의 모든 유통을 관리하고 있으니. 일본을 제외한 다른 국가로 팔기 위해서는 사업허가를 받아야 합니다.”
“네? 그게 정말입니까?”
“그렇구 말구. 원래 테라스톤 놈들은 좀생이들이란 말이지. 예전에 그쪽에서도 투자하기로 한 영화가 있었는데…….”
불쑥 끼어든 구로사와가 주저리주저리 불평을 늘어놓았지만 아무도 제지하지 않았다. 비하인드 스토리라는 것이 생각보다 재미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한참을 돌려까기를 시전하던 구로사와에 강태준이 푸념했다.
“저는 불합리하다고 생각하지만 관행이라니 어쩔 수 없지요. 그래서 확인을 받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소송을 제기할 생각입니다. 과연 테라스톤이 글로벌 표준을 자처할 자격이 되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소송이라고?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말에 사회자는 사레가 들릴 뻔했다.
“네. 지금 진심이십니까?”
“예. 결국 권리는 누가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쟁취하는 거지요.”
“흠. 맞는 말씀이긴 합니다만 좀 더 유화적인 해결책도 있을 것 같은데요.”
“있지요. 하지만 지금 단계에서 과연 유화책이 통할지 모르겠군요. 게다가 이번 일은 독과점의 폐해를 고발한다는 의미에서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쪽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계란으로 바위치기가 될 수도 있겠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죠. 스탠더드 오일의 아이다 타벨도 마찬가지였지요. 나비의 날갯짓이 될지 모르지만 이번에도 정의는 승리할 거라고 믿습니다.”
인터뷰가 끝나자 사회자는 담당 피디를 찾아 대응책을 논의했다. 사안의 파급력을 생각하면 가만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피디의 대응은 심플했다.
“뭘 고민하나. 그냥 방영해.”
“그러다가 일이 잘못되면 저희도 같이 말려드는 수가.”
“미친 소리, 우리가 책임질 일이 없잖은가. 이건 특종이야! 당장 뉴스 데스크에 연락해 보게.”
강태준의 소송이야기에 소식을 들은 진주와 관련된 특별 프로그램이 긴급 편성되었고, 인터뷰한 내용이 만천하에 중개되었다.
-테라스톤사에 소송이라고 저놈 진심이야 블러핑이야?
-거짓말이 아닌 거 같은데. 그러면 소송 하려고 판을 깔았다는 건가?
곧이어 진주산업의 실태에 관한 기사가 연이어 나왔다. 업계를 강타한 소식은 백경 측에서 법원에 소장을 접수했단 소식이었다.
-미국 워싱턴DC 연방 지방법원이 백경 그룹이 테라스톤을 상대로 제기한 반독점 소송을 진행키로 했습니다. 진주 업계에서 부당하게 경쟁을 제한해 독점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주장이 일리가 있다는 판단을…….
[백경그룹, 테라스톤사에 제소. 반트러스트법 위반이 쟁점.]
[갈 곳 잃은 진주산업, 어둠속을 지배하는 보이지 않는 손.]
테라스톤 문제가 부상하자 여론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테라스톤 사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사람들이 그간의 불합리했던 관행을 하나둘 폭로하기 시작했던 것.
폭탄을 맞은 테라스톤사에서는 그야말로 난장판이 되었다.
“설마 저놈들이 대놓고 소송을 걸다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침착하시죠.”
“침착이라니. 이걸 보고도 그런 소리를 하는 건가. 여론이 죄다 우릴 공격하고 있어.”
타임지에 대문짝만하게 나온 칼럼을 본 쥰페이 회장은 당혹감을 금치 못했다.
일이 이렇게 커지다니 안절부절못하는 쥰페이와 달리 고문 변호사인 로이의 표정은 태연했다.
“여론 불타는 거야 하루 이틀입니까. 소송은 입으로 하는 게 아닙니다. 바람잡이 정도야 할 수 있겠지만 다 외부인이에요. 차라리 소송을 빨리 진행하죠.”
“이거, 정말 이길 수 있겠나?”
“걱정 마십시오. 소송 자체가 실수라는 걸 알게 해야죠. 아주 눈깔에서 즙을 짜게 해 줄 작정입니다.”
“그럼 자네만 믿지. 그래.”
자신감 넘치는 로이의 말에 평정심을 찾은 회장이 심호흡을 했다. 테라스톤사에서도 방침을 정했다. 긴급성명을 발표하고 곧장 전략기획팀을 구성해 반격에 나선 것이다.
변론이 열리자 양자는 치열한 법정 다툼이 시작되었다.
“진주핵이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인가 인위적으로 삽입하는 것인가를 제외하면 양식진주와 천연진주의 차이는 거의 없습니다. 같은 논리로 타국에서 생산한 진주도 일본산 진주와 별 차이가 없어요.”
“양식을 성공한 방식이 이토록 똑같다면 그건 저희 기술을 훔친 것이 분명합니다. 진짜 양식 진주는 물에서 약 4년이 될 때까지 자라게 만듭니다. 이 과정은 매우 복잡하며 지난한 일이지요. 폐사해서 성체가 되는 제품은 절반이 채 되지 않고, 상품성을 갖춘 제품으로 탄생하려면 각고의 노력을 거쳐야 합니다.”
양자의 대립은 첨예했지만 사안 자체는 간단했다. 실제로 테라스톤사가 진주시장을 점유하는 데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이 있냐는 것에 초점이 모아진 것이다.
강태준은 테라스톤사에서 꽤나 오랫동안 전 진주시장에 시장지배적 사업자였음을 강조하며 판매에 부당한 위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품질 유지를 위해서 불가피한 조치였다? 그걸 믿으라는 겁니까?”
“예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으니까요. 저희 테라스톤사에서는 십수 년 전 모조품을 수거해 불태워 버렸던 전적이 있습니다. 때문에 한때 진주 사업 자체가 완전히 망할 뻔하지 않았습니까?”
“그때랑 지금이랑 같은가. 입에 침을 바르고 거짓말을 하지.”
여론전에서도 총력전이 펼쳐졌다. 테라스톤의 공격은 그렇게 만만치 않았다. 어떻게 구워삶은 것인지 처음에 협조하기로 했던 증인들도 돌아서는 이들이 나왔다. 막대한 보상금을 챙긴 이들은 테라스톤사에 유리하게 말을 번복하기도 했다.
“판매를 강요한다니, 그런 관행은 없어요.”
“절대적인 명예훼손이며 음해가 분명합니다. 제가 테라와 수십 년을 거래해 왔지만 그건 절대적으로 오해입니다.”
“테라스톤이 진주시장을 장악한 것은 우수한 품질 때문이지요. 보석의 가치를 폄하하는 일입니다.”
로이와 1 대 1 대담을 마치고 온 보석 판매상들은 법정에서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고 나머지는 다들 한목소리로 규제의 존재를 부인하는 데 열을 올렸다.
소송이 불리하게 진행된다는 것이 누가 봐도 명백했지만 백경에서는 쉬이 반격의 실마리를 잡지 못했다.
그렇게 가만히 있던 강태준이 불쑥 나섰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제가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