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3화 테라스톤
어이가 없어진 강태준이 되물었다.
“아니, 원석을 만들어도 오직 일본에 수출할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까?”
“아이러니한 일 아니겠습니까. 곤이치 선생이 진주 양식에 도전할 때까지는 일본 회사들은 도전자였습니다만 이제는 반대지요. 진주거래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다른 나라들은 그 룰에 따라야 합니다.”
테라스톤이 주축이 된 일본 판매상들이 판매망을 포함한 모든 것을 규제한다. 진주 산업의 90%를 일본 회사가 좌우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버마부터 서어즈데이 아일랜드, 호주, 필리핀제도, 인도니쟈, 타히티, 태국, 쿡 아일랜드까지 손이 안 미치는 곳이 없었다.
“말도 안 되는 폭거군요. 방도가 없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일본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진주 양식을 후원하고 독점권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협회나 기업연합 모두 한통속입니다. 10mm 미만의 모든 진주는 일본 내에서 양식하는 게 원칙이고, 10mm보다 큰 진주들은 판매를 위해 일본으로 보내야 합니다.”
“가격까지 그쪽에서 매긴다면 그건 완전 독점 아닙니까? 그런 말도 안 되는 조건을?”
“키를 쥔 게 테라스톤이니까요. 현재 다른 나라들은 양식을 할 수 있는 기술이 없습니다. 그렇지 못하면 모패를 제공받을 확률이 요원하니 울며 겨자 먹기로 따르는 거죠.”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러자 강태준으로서도 하는 수 없었다.
“할 수 없지. 일단 서울 본사에 공장부터 설치하도록 하지. 국내에서 가공 후 완제품을 시판하는 게 좋을 거 같네.”
“그냥 강행하신다고요?”
“유명 업자들을 초청해서. 가공을 못하겠으면 우리가 직접 가공해서 팔면 그만 아닌가. 아예. 완제품으로 만드는 게 나아.”
정 안 되면 암시장에라도 팔아 버리면 그만. 그러나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지 강태준이 가공업체를 만들려고 하자 어떻게 된 일인지 전방위에서 로비가 들어왔다.
“저기 사장님? 상공부에서 양식업 철폐에 대한 지침이 내려왔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일본과의 외교 마찰을 우려되니 직접적인 침해는 그만두라는 권고인데요. 이번 건은 좀 셉니다.”
외교부 쪽 인사도 연락이 왔다고 했다. 방국진을 통해 알아본 결과 상황이 심각하다고,
“뭐라고요?”
“강 사장 이번에는 넘어갈 수 없겠나? 일본에서 진주 양식을 강행할 경우 수산업 관련 협력을 중단하겠다고 협박했네. 국립 수산 진흥원과 진행 중인 모든 사업이 파토날 위기야.”
“아니, 그게 말이 됩니까?”
“테라스톤에서 압박에 나선 것 같아.”
이 그렇게 되자 난감해진 것은 백경그룹이었다. 상공부에서 내려온 지침을 재차 확인한 광필이가 짜증이 난다는 듯 보던 서류를 와락 집어던졌다.
“아니, 이건 뭐 아예 개별 가공은 꿈도 꾸지 말라는 소리 아냐?”
“오염 방지를 위해 양식업을 전면 규제하겠다라. 언제부터 이 나라가 이렇게 친환경적이었나? 개같은 놈들 지들이 일본인인가? 한국인이야?”
“그만큼 떡값 받아먹은 놈들이 많다는 거겠죠.”
그뿐만이 아니었다. 테라 스톤은 백경 쪽과 접촉해 은근히 헐값에 팔기를 종용했다.
‘어차피 우리 외에 팔 곳도 없지 않겠는가?’
그렇게 되자 강태준도 화가 났다.
“특허에 대한 로얄티면 몰라도 이렇게까지 나오는 건 너무 폭거 아닌가?”
“100년이 넘은 기술을 아직까지도 독점하려는 건 문제가 많은 것 같아요.”
강태준의 성정상 이대로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어쩌시려고요?”
“이대로 당할 수는 없지 않나? 다른 해결책이 있나 알아봐야지.”
곧바로 미국으로 날아간 강태준이 설유하를 만나 사태를 논의했다.
“지금 소송을 하겠다고요?”
“네…… 아무래도 이놈들이 너무 괘씸해서요.”
사안을 살펴본 설유하가 솔직한 감상을 말했다.
“흠…… 애매하네요. 반독점 위반이라 솔직히 소송이 승산이 높지 않아요.”
“일단 경각심을 주자는 거죠. 그래도 도와줄 거 아닙니까?”
“뭐 어쩔 수 없지요. 다만 그냥은 안 돼요. 소송해 줄 변호사를 찾아봐야죠.”
강태준의 눈빛을 본 설유하는 말릴 수 없음을 알았다.
하지만 건수를 전해 들은 법조인들은 대부분 난색을 표했다.
“그건 부담스럽군요. 테라스톤 같은 대기업을 상대로 한 소송이라니 승산이 없어요.”
“잘 모르시는 거 같은데 특허 소송은 시간도 길고 아주 까다롭습니다. 해석의 여지가 너무 커서 오래 걸립니다.”
“마누라가 진주 광이라서. 테라스톤에 밉보이는 건 싫군요. 이만…….”
주얼리와 관련된 특허 소송을 전담한 변호사들이었지만 다들 쉽게 나서려 들지 않았다. 사건 이야기만 나오면 펄쩍 뛰며 고개를 돌리던가.
양해를 구하고는 도망치기 일쑤였던 것이다.
몸을 사리는 변호사들의 행동에 설유하도 화가 났다.
“아니, 이런 겁쟁이들을 봤나? 왜들 저래요? 돈 좋아하는 사람들 아니었나?”
“참으세요. 테라스톤 사의 뒤끝은 엄청나게 유명하니까요. 일단 큰 고객의 눈 밖에 나기 싫은 거지요.”
“아무리 그래도 이건 소송을 피한다고밖에 되지 않아요. 그 정도 용기도 없다는 건가요?”
사무장이 위로했지만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비어 버린 식사 장소 식은 스테이크가 맛이 없었다. 묵묵히 단백질을 욱여넣던 그때 젊은 변호사 하나가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나섰다.
“문제는 아무래도 상대가 로이 스테덤이라서요. 혹시나 나섰다가 광대가 되고 싶지 않은 겝니다.”
“로이 스테덤? 그게 누굽니까?”
“테라스톤 사의 고문 변호사죠. 이기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녀석이거든요. 뒷조사는 기본에 절도, 업무방해, 갈취는 물론 탈세나 뇌물 공여 사기 등등 이기기 위해서는 뭐든지 하는 놈이죠.”
어이없어진 복만이가 대꾸했다.
“아니, 변호사가 그래도 됩니까?”
“애초에 막가기로 작정한 사람을 누가 막습니까? 게다가 원래 정치를 하던 양반이라 협잡질에 아주 능하거든요. 몇 년 전에 광풍이 불었던 빨갱이 놀음도 그 양반 작품이지요.”
“그래서 승산이 없다는 겁니까?”
“뭐 승소의 가능성이 없지는 않습니다. 미 법원은 생물특허를 조성물을 제한하여 해석하고 있으니까요. 진주 소송이라 사안만 보면 꽤 먹음직하지요.”
“그렇습니까? 그런 말씀을 하시는 분은 누구시죠?”
강태준이 관심을 보이자 젊은 변호사가 고개를 숙이며 눈을 찡긋했다.
“랄프 레버입니다. 소비자 보호 운동과 관련된 소송을 주로 전담했죠. 대정부 소송이나 기업을 상대로 한 소송에는 나름 프로페셔널이라 자부합니다.”
“능력 있는 아웃사이더시구먼. 헌데 왜 이 사건에 관심을 두었소?”
“돈이죠. 게다가 이걸로 유명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근데 왜 찾아오지 않았습니까?”
“뭐 재 차례는 아직 아닌 것 같아서요. 원래 눈이 높으신 분이잖습니까?”
사실 강태준이 소송을 준비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미리 기다리고 있었지만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지극히 솔직한 대답에 강태준은 맘에 들었다.
“좋아.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일단 여론에 불부터 지펴야지요. 이런 건 소송을 해봐야 묻혀 버리지 않겠습니까. 목적을 확실히 해야 해요. 뭘 얻을 건지.”
배심제를 택하는 미국의 제도를 볼 때 일단 여론을 이편으로 만드는 쪽이 유리한 만큼 일단 사안을 알려 주는 것이 좋다고.
“그럼 계기라면 어떤 걸 말입니까?“”
“진주에 대해 주의를 환기시킬 만한 이슈가 있어야겠죠. 뭐 그런 거 없습니까? 100만 달러짜리 진주를 훔친 도둑이라든지.”
여론의 관심을 끌 방법이라. 한참 전에 얼핏 보았던 올드 무비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럼 존 스타인벡의 작품을 재상영해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 사람 작품 중에 <진주>(La Perla) 라는 작품이 있었던 걸로 아는데?”
“진주? 그게 뭐예요?”
설유하의 질문에 강태준이 대신 답했다.
“한 십수 년 전에 나온 영화인데, 간단히 말하면 진주를 둘러싼 암투 이야기죠. 주인공인 카노와 라 파즈( La Paz)라는 구매조직간의 알력이 나옵니다. 딜러는 공급가가 낮게 유지되도록 조작하고 가격을 담합하는 조직이 있습니다. 근데 키노라는 멕시코 어부가 갑자기 엄청난 가치가 있는 천연 진주를 캐낸 거지요.”
“오 그래서요?”
“딜러들은 주인공 키노가 얻은 진주의 가격을 후려치지만 키노는 딜러에게 팔기보다 제값을 받으려고 하지요. 하지만 수도로 가는 길에 진주를 노린 일당의 습격을 받고 불행해지는 내용이죠.”
멕시코 감독이 만든 영화다 보니 미국에서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고.
“확실히 현재 내용과 비교하면 시사점이 있긴 하네요. 근데 그게 과연 이슈가 될까요?”
“인간은 감성의 동물이니까요. 사실 이 동네는 생각보다 마초적인 곳이라 이렇게 감성에 호소하는 편이 더 나을 거 같네요.”
“정확히 맞는 말씀입니다. 사실 링겔 뽑은 황혼기 노인네들이라 비아냥거리기는 하지만 대다수의 미국인들은 유럽에 문화적 열등감을 품고 있지요. 그리고 전 스타인벡은 노벨상 수상으로 미국인들의 문화적 자긍심을 세워 준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분노의 포도 등 대문호로 알려진 스타인벡은 철저히 일생 동안 비주류 소설가였다. 정부와 문단에서는 대학을 중퇴하고 노동판을 전전한 이 인물을 반동분자로 보았던 것이다. 덕분에 FBI는 스타인벡을 주요 시찰 대상에 올렸고 주류 문단은 그를 질투하며 난해하지 않은 문장을 트집 잡았다.
“어찌 되었든 잘 먹고 잘 살았으니 승자는 그 사람이긴 하죠.”
“그래서 노벨문학상 수상자에 대한 헌정을 통해서 이슈몰이를 하자?”
“첫 번째 스텝이라는 겁니다. 뭐 소재 자체도 그렇고, 아무래도 모양새가 이쁘지 않습니까. 동양인이 미국인 소설가를 존경해 기념회를 제안했다? 내국인 입장에서 뭔가 뽕이 차는 거 같은데?”
“꽤나 그럴듯한데요?”
하지만 실제로 가능할지는 의문부호다. 실제 가능성을 여부를 타진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배급사에 문의를 하자 미끼를 물었다.
“스타인벡의 사망에 대해 헌정하는 의미로 마련하고 싶다?”
“가능하겠습니까?”
“흠…… 뭐 그거야 어렵지 않지만…… 이유가 뭡니까?”
“제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가라서요. 미망인께서 꽤나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으신 듯해서 도와주고 싶어요. 마침 탄신일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까?”
강태준이 그럴듯하게 둘러대었다. 배급사 입장에서 볼 때 일반 사람이 한 말이라면 그냥 흘려듣겠지만 몇 개나 히트작을 찍은 힘 있는 투자자께서 하시는 말씀을 성의 표시로라도 무시할 수는 없었다.
“흠…… 괜찮은데요. 그럼 어느 정도가 좋겠습니까?”
“많이는 아니고 영화관 몇 개 정도만 열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시사성 있는 쟁점을 많이 다룬 만큼 파급력이 있었다. 배급사인 워너 역시 꽤 좋은 취지라고 판단한 듯 별생각 없이 동참했다.
[스타인벡의 부고 2주년을 기념하며]
{노벨상 수상자, 스타인벡의 역작을 다시 보다}
재상영이 이루어진 상영관 자체는 소규모 독립영화 수준에 불과했지만 언론은 꽤나 비중 있는 소식으로 사안을 다루었다. 문화인으로서 스타인벡이 갖는 위상을 고려할 때 재조명은 늦은 감이 있었다. 팬으로서 꽤나 향수를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동방의 한 외국인 사업가가 미국인의 소설을 소재로 한 작품을 재상영해 달라는 요구했다는 점이 관심을 끌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