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2화 진주 양식
보트를 타고 여러 섬을 지나치는 동안 섬 사이사이를 떠다니는 부표들.
뱃길로 10분 정도 가자 통영의 욕지도가 모습을 드러냈다.
녹도로 불렸다는 섬답게 섬 위의 사슴이 귀를 쫑긋하고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이야, 고놈 맛있게 생겼네.”
“임마 점심 먹은 지 얼마나 됐다고?”
“요새 몸이 허해서.”
“그래 자랑이다. 응, 저거 뭔가?”
“응…… 뭐가요?”
“저 털뭉치 말이야.”
강태준의 눈에 선착장에 놓인 나무판자 근처에 해달 한 마리가 물 위에 둥둥 떠 있는 것이 보인다. 배 위에 조개를 올려놓은 채 한가로이 잠을 청하는 해달.
그 광경을 목격한 사람들도 넋을 잃은 채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귀엽네요.”
“아니, 저놈이 저긴 어떻게 갔지?”
잠시 후 뭍에 올라온 녀석이 물기를 털고 얼굴을 손으로 흩는다.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행동에 멍때리기도 잠시, 삽살개 하나가 쪼르르 달려오더니 녀석을 와락 뒤에서 덮쳤다.
왈!!!
약간 당황한 듯한 녀석이 반항하자 삽살개가 몸으로 녀석을 깔아뭉갰다. 둘이 엎치락뒤치락하는 사이 우악스러운 손이 해달을 목덜미부터 잡아 올렸다.
“거거, 잡았다 요놈!”
목덜미가 잡힌 해달이 끼잉거리며 발버둥 쳤지만 삽살개의 위협에 재차 조용해졌다. 같이 온 삽살개가 꼬리를 살랑이며 칭찬을 해 달라는 듯 멍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래. 잘했다. 랄프. 요놈. 혼자 조개 훔쳐 먹지 말라고 했지!!”
“멍!!”
말귀를 알아들은 해달이 축 늘어지는 모습에 녀석을 잡은 남자가 쯧쯧거렸다.
“또 불쌍한 척은. 안 속아.”
“끼이잉!”
불쌍한 표정을 짓는 녀석의 콧잔등을 손가락으로 때리자, 해달이 킁 하고 재채기를 했다.
체념한 녀석이 잠잠해지자 강태준이 그를 향해 말했다.
“아니, 노 이사, 그놈은 뭔가?”
“아, 요새 이 지역에 출몰하는 녀석입니다. 매번 양식장서 훔쳐 먹다가 걸려서는 아주 상습범이에요. 그래.”
“그래? 손버릇이 못됐구만. 혼나야겠어.”
“끼잉!! 끼잉!!”
“어이 가만있어. 사장님이 말씀하시잖나?”
푸륵 거리는 해달이 다시 발버둥 쳤지만 남자는 녀석을 케이지 안으로 넣었다.
케이지 안에 들어간 해달이 낑낑거렸지만 옆에 있던 삽살개가 멍하고 짖자 재차 잠잠해졌다. 강태준을 본 노건진이 웃음을 지었다.
“암튼 좀 늦게 오실 줄 알았는데 빨리 오셨습니다.”
노건진은 노기철과 먼 친척으로 통영에 내려와 양식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진주조개 양식을 시도하다 망할 뻔한 것을 강태준에 연이 닿아 인수한 것이다.
“자네가 빨리 오라고 했잖은가. 설마 요놈 보라고 온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요. 자 들어오세요.”
콘크리트로 쌓아 올린 시설 안으로 들어가자 백경 마크를 단 직원들이 핵을 이식하는 작업에 열중하고 있다.
고정대에 진주조개를 올려놓은 작업자가 확장기를 삽입해 조개 입을 벌리면 살을 재빨리 절개해 소독약과 함께 절편한 외투막과 함께 핵을 심는 과정이었다.
“호오, 다들 열심히들 하는구먼.”
“꽤 작업 속도가 늘었는데요.”
이들이 하는 작업은 다름 아닌 진주 핵을 삽입하는 작업이다. 동그랗게 가공한 진주 핵과 살점을 살에 인위적으로 붙이면 조개가 그걸 분비물로 감싸 진주층이 쌓이게 되는 것이다.
홀린 듯 작업을 구경하던 춘삼이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야, 신기하구만요. 진짜. 이렇게 진주가 만들어진다니.”
“거, 생각보다 무지 쉬운 원리구만 그니까 난소에 핵만 넣어주고 적당한 곳에서 키우면 알아서 자라는 거.”
복만이가 지껄임에 노건진이 고개를 저었다.
“쯧쯧. 보기는 쉬워도 이게 그냥 자라지 않지요?”
“아, 아닙니까?”
“생육 조건이 다 맞아도 1년에 고작해야 1mm도 안 자랍니다. 그중에 상등품은 10%도 안 되고. 거기다 여기는 일본 나고야보다 겨울철 바다 수온이 낮아 겨울에는 제주도까지 옮겨야 합니다.”
“생각보다. 품이 많이 드는구먼요.”
“조개란 게 생각보다 키우기 섬세한 녀석이거든요. 저도 7년이나 키워 놓았다가 단번에 말아먹지 않았습니까?”
“거기다 이런 아고야 진주 모패는 일본에서 기술 유출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어서요. 양식에 필요한 모패를 수출하지 못하게 하고 있으니 다른 나라에서 양식될 경우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방해하거나 전량 사들이고 있으니까요. 국립수산 진흥원에서도 그래서 포기하지 않았습니까.”
“그래도 도전하는 이유가 뭡니까?”
순한 모범생이 된 복만이의 질문에 노 사장에 눈을 찡긋했다.
“보석의 마력 아니겠습니까? 원래 무모하다 생각하는 일일수록 대가가 값진 법이죠.”
“그러게. 갑자기 신수가 환해진 걸 보니 뭔 일 있었구먼.”
“예.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노건진은 서둘러 보여 주고 싶은 게 있다며 발걸음을 옮겼다. 사장실이라 적힌 표지판과 무색하게 사무실 한쪽에는 껍데기를 깐 조개껍질이 한가득 쌓여 있었는데 다른 한쪽에는 물통에 담겨진 놈들이 널려 있었다. 어질러진 공간을 보던 강태준이 이마를 찌푸렸다.
“아니, 뭘 보라는 건가?”
“잠깐만요. 이걸 잘 보십시오.”
노건진이 손칼을 꺼내더니 물통에 담겨 있던 조개를 칼로 잡아 뜯었다.
쩍 소리와 함께 물이 튀어나오더니 흰색의 살점을 만지작거리는 노건진.
파묻힌 살 속을 헤치고 영롱한 빛깔의 진주가 튀어나왔다.
약 15mm 정도 되는 크기의 완벽한 구체에 사람들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오오. 이건 진주 아닌가?”
“아니, 벌써 수확을 할 리는 없고 어떻게 된 거요? 분명히 전에 키우던 놈들은 냉수대 때문에 다 전멸했다고 들었는데.”
“저도 그런 줄 알았는데 다 그런 건 아니었습니다. 사실 요놈이 찾았지 뭡니까?”
조개 살점을 본 해달이 앞발로 케이지를 긁었다. 살점을 집어주자 케이지 안의 해달이 얌전히 받아먹었다.
“원래대로라면 다 얼어 죽었을 터인데 신기하지요. 떠밀려가서 아무래도 발전기 폐열 덕분에 살았나 봅니다.”
“천운이군.”
육안으로 보기에도 흠잡을 데 없는 모습에 복만이가 홀린 듯 중얼거렸다.
“품질이 아주 좋아 보이네요.”
“청정해역에서 양식돼서인지 몰라도 광택과 색상이 단연 뛰어나네요. 아마 천연 진주 못지않을 겁니다.”
“얼마나 회수했는데 그래?
“대략 100관 정도 됩니다.”
생각지도 않은 행운이었다. 강태준이 처음 양식장을 인수해 재투자를 결정했을 때만 해도 완전히 전멸한 뒤였다고 생각했었으니 이 정도만 돼도 기적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100관이라…… 375kg이면 생각보다 엄청날 거 같은데.”
“그래서 이걸 어떻게 처리할지 여쭙고자 불렀습니다.”
“일단 물건을 팔려면 거래처를 알아보는 게 좋겠어.”
일단 강태준은 스튜어트 소령을 통해 하와이의 판매업자인 데라우치 씨를 하와이의 라우이섬 야자수가 널린 대저택의 내부에는 액세서리를 만드는 각종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벽에는 진주에 관한 설명과 방문객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강태준을 환영한 데라우치 씨가 한껏 웃으며 친절하게 맞이했다.
“보석을 팔고 싶다고요? 가져오셨습니까?”
“예. 샘플이 여기 있습니다.”
“오오. 이거 아주 좋은 품질의 아코야 진주군요.”
루뻬를 들어 꼼꼼히 진주의 상태를 확인한 그는 한눈에 상품의 가치를 알아보았다. 진주의 흠집이 거의 없고 핑크빛 광택이 은은하게 감도는 것이 귀티가 났다.
“이건 의심할 여지없는 A급들이군요. 층이 균일하고, 색도 맑습니다.”
“과찬이십니다.”
“그럼 가격은?”
“퉁 쳐서 100만 달러 어떻습니까?”
“그건 너무 적은 거 같은데요.”
진주는 표백과 연마과정을 거쳐 비로소 보석으로 생명력을 얻는다. 진주 역시 중심축을 벗어나지 않게 섬세하고 높은 기술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실랑이 끝에 강태준과 조건에 합의했다.
“좋습니다. 선금은 50만 불로, 나머지는 세공 후의 가격으로 정하지요. 세공비는 나중에 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가공업자는 제가 구해 오지요.”
“좋습니다.”
‘가공업자를 찾는 일이니만큼 얼마 기다릴 필요는 없겠군.’
그러나 강태준의 생각과 달리 쉽게 풀리지 않았다.
진주 유통을 매의 눈으로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 * *
주오구 긴자 상업지구.
일본 내 가장 땅값이 비싼 곳 중 하나인 주오.
이곳에는 일본 근대 보석 산업의 기초를 쌓은 굴지의 회사가 있다.
이름하여 테라스톤 사(社).
최초로 진주 양식에 성공한 이해 각국의 진주산업계를 제패한 굴지의 보석회사.
그 제국의 계승자인 쥰페이에게 들려온 소식은 통영에서 진주 양식에 성공했다는 소식이었다.
“설마, 한국 놈들이 아코야 진주 양식에 성공했다고?”
“예. 그렇습니다.”
“확실한가. 대체 어디서 기술이 유출된 거야?”
“그게 잘 모르겠습니다…….”
“멍청하긴. 그럼 진주가 땅에서 솟았다는 건가?”
“죄송합니다. 사적으로 양식하는 거라 미처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쯧쯧. 그럼 시중에 풀릴 물량이 얼마 정도 되는가?”
“대략 50~100관 정도로 추정됩니다. 아무래도 해외 쪽으로부터 거래를 트려는 것 같습니다.”
테라스톤 사의 사주이자 2대 사장인 미나모토 쥰페이가 인상을 썼다.
최근 미니스커트 열풍과 함께 진주수요가 크게 줄어들어 심기가 매우 불편한 상태인 그로서는 달갑잖은 일이다.
잠시 등받이에 기댄 그가 거슬린다는 듯 고개를 흔들며 명을 내렸다.
“팔지 못하게 막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예? 좀 버리기엔 아깝지 않습니까 인수해서 팔아도.”
“허튼소리, 그놈들이 양식을 했는지 어찌 아나? 사기를 쳤는지 다른 수를 썼는지 거기다 백 프로 훔친 기술로 만든 거 아닌가. 그런 근본도 알 수 없는 물건을 팔 수는 없지.”
지금으로부터 50여 년 전, 진주목걸이 하나로 맨해튼의 6층짜리 저택을 살 수 있었던 시절, 세계 보석 판도를 바꿀 일이 발생했다.
일본의 한 어부가 세계 최초로 진주 양식에 성공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성과가 인정받기까지는 쉽지 않았다. 유럽의 보석상들은 교묘한 모조품이라 폄하했고 경제 불황에 뒤쫓긴 보석상들은 물고기 비늘의 추출물로 입혀진 유리알로 만든 모조 진주를 시장에 마구 내놓았다.
불신과 기득권의 벽의 돌파구는 철저한 품질관리뿐.
아버지는 모조품들을 보는 대로 사들였고 수만 개가 넘는 모조품과 품질이 낮은 양식 진주를 공공 소각장에 직접 밀어 넣었다.
이후 천연진주와 양식 진주는 동일하다는 학계의 연구가 나왔고 신뢰를 회복한 진주산업은 기사회생했다. 그렇게 일본은 진주의 수출 대국으로 떠올랐다.
특권층의 전유물이던 진주는 만인의 보석이 된 것이다.
‘아버지 이 왕국은 제가 지키겠습니다.’
그 뒤로 그는 다짐했다.
부조리한 외침으로부터 반드시 지켜 내겠다고.
* * *
“엣 구매가 어려울 거 같다고요?”
“예. 정말 죄송스럽지만 그렇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자금난이 발생해서.”
데라우치 씨가 해약을 통보하자 강태준은 다시 거래처를 찾아 나섰다.
하지만 계약은 쉽지 않았다. 어디서는 품 제로, 어디서는 자금 문제로.
거래처를 찾는 족족 퇴짜를 맞자 백경에서도 뭐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아니. 도장 찍기까지 해 놓고 구매할 수 없다니. 갑자기 못 사겠다는 이유가 뭡니까? 솔직히 말씀해 주십쇼.”
“그게…… 압력이 들어왔습니다.”
재촉에 한동안 침묵하던 바이어 하나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그래서, 테라스톤 때문에 아무도 못 산다고요?”
“양식업계의 불문율입니다. 테라스톤 사에서 지령을 내렸습니다. 진주는 일본으로만 팔아야 한다고요.”
“일본에서만요? 어째서요?”
“진주 판매상들이 담합을 해서 내부적으로 가격과 수가를 조절하고 있는 중이거든요. 그래서 원칙적으로는 일본 외의 나라에 가공 진주를 팔 수 없습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