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7화 항만노조
꽤나 비싸 보이는 난초 옆에는 자그마한 꽃이 피어 있었다.
“석곡이라 꽤 귀한 거구먼. 누가 보냈나?”
“양재문 사장님입니다. 이번에 축전을 보냈더군요. 페루 진출 축하한다고.”
“거, 병 주고 약 주나. 이게 다 누구 덕인데. 그럴 거 같으면 대금 독촉이나 하지 말든지…….”
밤샘한 복만이가 툴툴대자 강태준이 미소를 지었다.
“하하. 너무 미워하지 말아. 이번에 좀 미안했는지 통 크게 신조선도 두 척이나 내줬으니 말이야.”
“얼씨구, 형님? 죽자고 싸울 땐 언제고 대인배가 되셨소?”
“하하. 좋은 게 좋은 거지. 사실 태동산업이 잘 풀리는 게 어업 발전을 위해서도 좋지 않겠나? 정부 쪽에서도 꽤나 기대가 큰 거 같기도 하고 말이야.”
강태준은 난 끝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리스크 때문에 한발 물러서긴 했어도 솔직히 응원하는 마음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확실히 송규익 선장까지 스카웃한 걸 보면 칼을 갈고 준비한 모양이긴 하죠.”
“그렇지. 일선 선장급만 4명이니 그 정도면 드림팀 아닌가.”
“근데 이억수 그노마가 뭐 약 먹었습니까? 송규익이를 순순히 내줄 줄이야. 그래도 나름 아끼던 인재를 뺏겼으니 그놈 성정이면 길길이 날뛸 법도 하지 않습니까?”
“그러게. 남 잘되는 꼴만 보면 배 아파서 똥탕 튀길 놈인데 이상하군요. 하긴 계속 언론에 맞다 보니 몸을 사리는 거 아니겠습니까. 아니면 철이 들었을 수도…….”
“설마 그럴 리가. 사람 본성이란 게 쉽게 변하지 않아.”
이억수가 인격적으로 문제가 있는 인간이긴 해도 경영능력은 상당한 수준이라는 건 부인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무엇보다 흠씬 두들겨 맞으면서도 매번 오뚝이처럼 살아나는 맷집을 보면 절로 감탄이 나오지 않을 수 없을 정도. 강태준이 잠시간 생각에 잠겼다.
“불안하구만. 강철완 쪽 사정 좀 알아봐.”
“아니 그 양반이야 좌천당하지 않았습니까.”
“적어도 뭐 하는지는 파악해야 하지 않나? 뭐 피해자 연합이라도 만들어서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지 모르니 말이야.
강태준은 생각에 잠겼다. 이제 곧 베트남 전쟁도 사실 끝물 아니겠나. 반전 여론이 반등하는 지금, 달달하게 빨대를 꼽던 시절은 이제 곧 안녕이라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거, 슬프구먼. 미국처럼 좋은 호구도 없는데 말이야.’
천조국의 꿀을 발수 없다니. 어떻게든 더 짜낼 방법이 없을까, 궁리를 거듭하던 그때 문득 달갑잖은 소식이 전해졌다.
-속보입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국제항만창고노동조합(ILWU) 지도부가 총파업을 결의했습니다. 미서부 해안의 29개 항구를 대표하는 서부항만노조(ILWU)와 태평양해사협회(PMA) 사이의 단체협약이 만료됨에 따라 양사 간의 이견 차를 좁히지 못해 파업이 발발한 것으로…….
-해운사들은 이번 수출입 제한이 미 경제 전체에 치명적인 충격을 줄 것이라 경고하고 있으나 토니 블랙번 노조 사무국장은 항만이 셧다운 하더라도 물러설 뜻이 없다 예고하고 있어 협상에 난항이 예상됩니다.
-전국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
-우리는 사람답게 살고 싶다! 임금과 퇴직금을 보장하라!
머리에 붉은 띠를 맨 노동자들이 우루루 몰려나오더니 성조기를 불태우는 광경에 영자 신문을 돌려보던 백경그룹 임원들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아니, 미국서 파업이라니 이게 무슨 일이고?”
“양키 놈들이 무시무시하구만.”
“근데 어떻게 되는 겁니까? 서부 항만이 막히면 가발이랑 통조림 수출길도 막히는 건데? TV 수출은?”
“설마 이 사람 항구가 서부에만 있나. 쓸데없이 동요하지 말게.”
애써 입단속을 했지만 불안감은 현실화 되었다. 롱비치와 LA 항을 포함한 서부 항구는 아시아권 수출업체들의 주요 관문인 만큼, 서부 항구가 파업에 돌입했다는 이야기는 곧 수출입 물류에 막대한 차질이 불가피하다는 소리였던 것이다.
하지만 나쁜 일은 연쇄적으로 일어난다고 할까.
문제는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사장님, 진중보 국장으로부터 긴급 타전입니다. 지금 부산지부 항만노조에서 총파업을 예고했다고 합니다.”
“아니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아무래도 미국발 파업 소식에 자극받았는지 아마도 이번에 유리한 쪽으로 결판을 지으려는 모양입니다.”
그전부터 임금 인상을 줄기차게 요구하던 박강태 노조위원장을 필두로 모인 노동자들은 사흘 뒤 상오 9시를 기해 기습적인 파업예고를 한 것이다.
그간 관수 물자 노임 인상 투쟁을 벌이고 있던 부두 노동자들이 단결했다는 소식에 직원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아니, 진중보 그 양반은 대체 뭐 한 거야? 좀 호인이기는 해도 이런 사태를 방치할 양반이 아닌데…….”
“아주 작정하고 준비했다는 거겠지. 그보다 왜 하필 지금이지?”
“최근 인사 문제로 노조 내 잡음이 좀 있었던 거 같습니다. 최근에 같은 파벌이던 총무기획부장과 부위원장이 바뀌었다고. 박강태의 노조 내 입지가 흔들리는 중이라 노동자 처우 개선을 승부수로 내민 것 같습니다.”
돌아가는 사정을 짐작한 강태준이 입술을 비틀었다.
“이번에 확실하게 공을 세워서 입지를 굳히겠다는 건가?”
“딴은 그런 취지겠지요.”
“거. 기분 더럽네.”
“이제 어떡합니까, 형님?”
초조해진 직원들이었지만 강태준은 대수롭지 않게 대응했다.
“어떡하긴 뭘 어떡해. 일단 벌어진 일인데. 일단은 항만 노조 측과 접선해 보게.”
“아니, 뭐라고 말입니까?”
“일단 협상부터 해야지. 파업의 목적이 있을 테니, 일단 요구사항이 뭔지부터 들어보자고.”
협상 장소는 사흘 뒤 항만연수원으로 정해졌다. 서로 마주 앉은 뒤에 의례적인 인사를 마친 강태준이 바로 협상에 도입했다.
“그래서 관수 물자 하역 작업 노임을 올려 달라?”
“예. 경제 기획원에서 발표한 내용을 보면 5인 가족의 권고 생계비를 기준으로 항만 노동자들의 평균 수임액은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생활을 영위하기엔 매우 부족한 수치지요.”
"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권고사항이지요. 재작년에 하역 노임을 무려 20% 나 인상한 걸로 압니다만?”
“물가상승률을 고려한 금액입니다. 지금처럼 인플레가 심한 시기에 항만 노무자들의 고충이 크지 않습니까. 요 홍콩 독감 같은 전염병 위험에 노출되면서도 꿋꿋이 현장 업무를 계속해 왔던 만큼 헌신에 따른 보상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강태준도 조금의 양보 의사가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뭐 그 정도야 감안할 수 있지요. 구체적으로 여쭙겠습니다. 그쪽에서 요구하는 금액이 어느 정도입니까?”
“경력 1년 차 일반 노무자 기준으로, 한 달에 2만 원 정도면 어떨까 하네요.”
“엣?”
현재 지급되는 금액의 4배 이상이다. 너무 높은 수치에 강태준이 난색을 표했다.
“그건 좀 너무 과한데요. 저희 백경 미국발 파업으로 상황이 좋지 않은데 그렇게까지 하역료를 올리는 건 저희로서도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른 업장과의 관계도 고려해야 하고 말입니다.”
“허허. 딴 곳은 몰라도 천하의 백경그룹에서 그런 말을 하시다니 좀 이해되지 않는데요. 지난해 베트남 특수로 사상 최대의 이익을 올린 기업 아닙니까. 저희도 일한 만큼 대가를 바라는 것뿐입니다.”
태연하게 지껄이는 행동이 될 대로 되라는 주의다. 배알이 상한 듯 광필이가 비아냥거렸다.
“그래도 적당히 욕심을 부려야지요. 한두 푼도 아니고 노무비를 100프로 이상 올려 받겠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립니까?”
“맞아요. 상도덕에 맞지 않지요. 임금을 올리더라도 단계적으로 올려야…….”
오재갑의 말에 노조원 하나가 발끈하며 말을 끊었다.
“상도덕이라니. 돈을 벌었으면 이윤을 나눠 가지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동안 노동자들을 착취한 돈으로 호의호식하지 않았습니까?”
“시방, 그게 무슨 헛소립니까. 우리가 꽁으로 먹었다는 거여. 그짝이 전쟁에서 목숨 걸고 싸워 봤나? 뭔 개소리여?”
발끈한 광필이가 삿대질을 하자 분위기가 감정적으로 변했다. 그에 강태준이 차분하게 둘을 달랬다.
“자자. 열 식히고 요구사항은 그게 전붑니까?”
“다는 아니고. 부수적으로 몇 개 더 있긴 합니다.”
박강태가 준비된 서류로 내밀었다.
요율산정 기준을 통일하고 쟁의기금 적립제도를 도입할 것,
장비 도입시 실업보상 혜택을 부여.
휴일 특별 근무수당과 야간작업 할증 등등.
하나같이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요구들이었다. 서류를 살피던 그중 한 문구에 주목했다.
“흐음. 다른 부분은 차지하고 퇴직 기금조성이라니. 지금 우리가 선원들 퇴직금이라도 마련해 줘야 한다는 겁니까?”
“실직으로부터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보험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이보소. 우리가 자원봉사자도 아니고. 그게 논리적으로 말이 되는 요구라고 생각하십니까?”
광필이가 콧김을 뿜었다. 어이없어하는 일행과 달리 박강태는 뻔뻔했다.
“현재 소화되는 컨테이너 물량의 90프로가 부산항에서 처리되고 있지 않습니까. 이정도야 당연한 거지요.”
“그거랑 이거랑 무슨 상관인데?”
“서부노조 문제가 해결되려면 꽤 시간이 오래 들 텐데 그간 손해를 생각해보시라는 거죠. 서로 좋게좋게 합의하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아니 당신, 지금 우릴 협박하는 거요?”
분노한 광필이가 볼살을 푸들거렸지만 박강은 여유로웠다. 항만노조는 국내 노조 중 유일하게 클로즈드 숍(closed shop)조항이 적용되는 만큼 소속 조합원이 아니면 하역을 할 수 없으니 이번에 약점을 잡고 배짱으로 나온 것이다.
잠시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던 강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들어보니 일리가 있는 소리군요.”
“형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미소가 짙어지는 박강태. 하지만 다음 순간 여유는 다음 순간 산산이 깨어졌다.
“다만 근데 나는 별로 들어주고 싶지 않군요. 위원장님?”
강태준의 대꾸에 여유로웠던 박강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내 듣기로 항만노조의 구조가 대형 인력회사나 다름없다더군요. 그래서 승진을 하려고 하면 조합 집행부에 조직비 상납이 필수불가결하다고들 하던데…….”
“아니 누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합니까?”
“나야 알 바 아니지요. 하지만 투명성이 재고되지 않고서야 자금을 출자하는 건 좀 어렵겠습니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억측입니다.”
그 말에 강태준이 미리 들고 온 서류를 코앞에 집어던졌다.
“읽어 보세요.”
“이건 뭡니까?”
“노조 집행부 명단입니다. 집행부 임원진을 죄다 친인척으로 채웠던데 이건 좀 아니지요.”
“허허, 그새 제 뒷조사까지 하셨다는 겁니까?”
“아니 왜 이러십니까 아마추어같이. 좀 더 현실적인 제안을 가져와 주시죠. 조합원 공제율에서 얼마만큼이 투명하게 쓰이고 있는지. 집행부에 흘러간 취업비도 어떻게 쓰이시는지 공개하시죠. 그러면 저도 전향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만.”
강태준의 비아냥에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