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6화 훔볼트 오징어
그러던 중 어느 지점에서 속도를 늦춘 배. 주위를 둘러보던 선장이 무전기를 들었다.
“다 온 것 같습니다요.”
“좋아, 이제 집어등을 켜게.”
집어등을 켜자, 휘황한 빛이 번쩍인다. 환한 불빛에 함께 온 어선 두 척이 신호하듯 깜빡거리자 저 멀리 은빛의 물결이 넘실거리는 것이 보였다.
“이쯤인 거 같으니, 물돛을 내리게”
강태준의 명이 떨어지자 사람들은 낙하산 모양의 물돛이 수면 아래로 떨어뜨렸다.
시앵커라고 불리기도 하는 이 장비는 장비는 미리 가져온 낚싯배를 고기떼 위에 오래 머물게 하기 위한 장비다. 명에 따라 사람들이 복대를 매는 것을 본 복만이가 불안한 어조로 물었다.
“아니 복대라니 대체 뭘 잡으려는 겁니까?”
“기다려 봐. 안 그러면 허리 삐끗할 수도 있으니까.”
“아니 대체 뭘 잡으려는 거요?”
어로 장비들을 챙긴 선원들이 전신무장을 하는 것이 은근히 불안하다.
다들 말없이 따라왔지만 범상치 않은 장비들의 모습에 모두들 긴장한 태세를 감추지 못했다.
잠시 후 사방이 어둠이 깔린 가운데 환한 빛을 내뿜는 야광등이 수면을 밝힌다.
퐁당 하는 소리와 함께 캄캄한 바닷속에 던져진 낚싯줄이 끝없이 수면 아래로 향했다.
이윽고 밝은 야광 불빛에 반응하듯 입질이 오자 묵직함에 비틀거리는 복만이었다.
“이놈 뭐예요? 엄청 묵직한데.”
“놓지 마.”
먹이를 꽉 물었는지 좀처럼 힘을 주지 못하는 복만이에 도와주는 사람들.
잠시 후 나타난 물건에 숨을 들이켜야 했다.
촉수에 갈고리가 걸렸는지 버둥거리는 녀석. 빨판 옆에 날카로운 갈고리가 달려 있는 것이 몹시도 징그러워 보였다. 밑을 내려본 복만이가 헙 하고 숨을 들이켰다.
“아니 뭔 오징어가 이렇게 커?”
“붉은악마(Diablo rojo)다!”
“어어, 조심, 엄청나게 사나운 놈입니다. 잘못하면 살점이 뜯겨나갈지도 몰라요.”
“아니 그건 좀 빨리 말해달라고!”
파리하게 질린 복만이가 소리를 질렀다. 녀석이 먹물을 쏘았지만 선원들은 놓치지 않고 힘을 주었다. 힘겨운 사투 끝에 올라온 녀석의 크기는 생각보다 더 컸다.
2미터가 넘는 덩치에 먹물에 얼굴을 쏘인 복만이가 오만상을 찌푸렸다.
“스벌. 따가워. 이게 대체 뭡니까?”
“훔볼트 오징어. 그 얼굴이나 씻어. 임마. 염증 생긴다.”
복만이는 얼굴을 연신 닦으면서도 오징어의 엄청난 눈을 떼지 못했다. 길이는 2미터 무게는 50킬로를 넘어가는 대형 오징어는 보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이 드는 크기.
보통 500~700g 정도 하는 일반 오징어에 비하면 그야말로 거인 중의 거인이 아닐 수 없었다.
“이거 이제 어떻게 합니까?”
“거 뭐 하나. 내장부터 처리하고 다시 작업해야지.”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작업자들은 뜯어낸 내장을 추에 감아 다시 던졌다. 먹물과 냄새를 맡은 오징어들이 몰려들자 이제부터 본격적인 조업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한두 마리 정도 올라온 녀석들이었지만 동족의 냄새를 맡고는 쉴 틈 없이 먹이에 달려들었던 것이다.
한밤의 조업은 몇 시간이 지나서야 끝났다.
사투 끝에 바닥에는 큼직한 전리품들이 널려 있었다. 그러자 이번엔 곤살레스가 말했다.
“잡으라니까 잡긴 했습니다만…… 이걸 어따 쓰겠다는 건지? 현지에서도 워낙 냄새가 심해서 잘 먹지 못하는 놈인데요.”
“글게요. 육질이 두꺼워서 이도 잘 안 들어갈 거 같은데.”
연근해에서 잡히는 생물 오징어들과 달리 훔볼트 오징어는 살 표면에 염화암모늄이 다량으로 들어 있어 암모니아 향과 신맛이 나서 식용으로는 별로다.
그러자 강태준이 정체불명의 흰 살덩이를 내밀며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이거부터 드셔 보셔.”
김이 나는 것이 바께스에 갓 삶아온 것이다. 동글동글한 것이 눈알 같기도 한 살덩이에 하나씩 집어 드는 선원들. 잠시 주저하던 복만이가 먼저 맛을 보았다.
“음…… 오? 이거 닭고기 비슷한 맛이 나는데요?”
“그게 바로 오징어 입이다.”
“아 정말요?”
깜짝 놀란 복만이가 살점을 돌아보며 신기해했다.
“어부들 간식으로 그만이지. 이 정도면 몸통도 암모니아 냄새만 제거하면 좀 먹을 만하지 않겠나?”
식품으로 가공한 오징어는 곧바로 영화관을 비롯한 각지로 수출되었다.
제품을 먹어본 바이어들이 생각보다 먹을 만하다는 데 동의했던 것이다.
한국의 인사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 * *
같은시각 인사동 입구에서 종로 방향으로 가는 길.
일제시대에 지은 것으로 보이는 대리석 건물 앞 그때 어슬렁거리는 남자 하나가 영화관을 찾았다.
“어이구야. 호남이. 자네는 여기 또 왜 왔나?”
“뭐긴 뭐겠어. 영화 보러 왔지. 형수는?”
“간만에 수다 떨러 갔지 뭐. 나도 적적해서 나왔지 뭔가. 근데 오늘은 마누라가 없네?”
평소와 다르게 옆구리가 허전한 모습에 의아해하는 박상구.
그러자 겸연쩍은 얼굴로 머리를 긁었다.
“바람맞았소. 친정 내려갔는데 당분간 나한테 말 걸지 말라네. 주식으로 잃은 돈 채워 넣기 전에는 말이야.”
“그러게 주식을 몰래 왜 해서는.”
“담양유업 그노마들이 그렇게 확 폭망할지는 몰랐지 그래. 하한가 치고 올라설 줄 알았더니 아예 폭삭 주저앉아 버리다니…….”
연이은 고소에 점유율을 빼앗긴 담양유업은 결국 견디지 못하고 폭삭했다.
추가로 악재가 터지면서 완전히 넘어가 버렸던 것이다.
“쯔쯔, 왜케 미련해. 강 선장님 성격 모르나. 한 번 제대로 물면 절대 안 봐주는 거.”
“허허. 그러게, 내가 미쳤지.”
“그니까 나처럼 그냥 땅 투기나 하지 그랬어?”
“돈이 있어야 땅을 사지. 그게 말처럼 쉽나? 암튼 부럽소이다. 형님은 재운이 있나 보이.”
“그게 내 재준가? 뭘 모르면 따라하기가 최고야. 잘난 사람 말을 들으면 떡고물이 떨어지는 법이지.”
을지로에 투자한 박상구는 갑판장 일을 끝낸 이후, 돈방석에 앉았다. 그리고 청계천 상가건물 하나를 인수해 세를 따박따박 받아먹는 위치가 된 것이다.
“그러게. 형님 말대로 했음 나도 건물주나 되었을 텐데. 다시 그냥 이참에 백경이나 들어갈까 싶소다.”
“아서라. 지금 거기 들어가고 싶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 줄 아나. 니 스펙으로는 명함도 못 내밀어.”
“하긴…… 재갑이 그 인간이 청탁이나 받아 줄 인간이 아니지. 그냥 진득하게 다닐 걸 그랬소이다.”
“암튼 영화나 보자고.”
영화관 내의 분위기는 혼잡했다. 짜빈동 대흥행 덕분인지 공포 영화가 많았다. 빨간 손수건이라던지, 검은머리 용병이라던지. 강철의 대원수라던지.
영화를 살피던 호남이가 입맛을 다셨다.
“에잉. 허구한 날 군대라니. 요새는 볼 영화가 없구먼.”
“그럼 액션영화라도 보는 게 어떤가?”
“홍소복이 주연인 영화인데 눈요기가 되더군.”
영화를 고른 둘이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 뭔가 식욕을 자극하는 냄새가 스멀스멀 풍겨 나왔다.
“근데 이게 뭔 냄새인가?”
코를 솔솔 자극하는 향긋한 냄새에 절로 고개가 돌아간다. 고개를 돌리자 빵 모자를 쓴 매점 직원이 뭔가를 굽고 있었다.
“하나 들어 보실라우요. 버터구이 오징어랑 옥수수입니다.”
“버터구이 오징어? 그게 뭔가?”
“함 드셔 보시라우요. 이게 맛이 쥑입니다.”
오동통한 살덩이가 큼지막하게 썰려 있다.
달콤 짭짤한 맛과 쫄깃한 식감.
기데없이 한입 맛을 본 호남이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워매…… 이게 뭔 맛인가?”
“존맛이죠? 이기 남미 요리대회에서 대상 받은 음식이라지 말입니까.”
“오 그래? 쫄깃한 게 아주 내 취향이구먼. 근데 오징어가 이따구로 컸나?”
“외국에서 자라는 놈들인디 존거 먹고 커지지 않았겠습니까. 한국처럼 영양실조 걸린 놈들이랑은 궤가 다르지 말입니다.”
“그거 논리가 그럴듯하구먼.”
정체는 다름 아닌 훔볼트 오징어였다 시장에서는 가문어라는 희한한 이름으로 화한 식자재는 순식간에 밥상을 하나씩 점령하기 시작했다. 넓은 귀는 오징어젓갈로, 긴 다리는 호프집 등에서 술안주용으로 팔려나갔다. 그리고 다리와 몸통 살은 버터구이 오징어로.
빠르게 퍼지는 오징어에 매출을 확인한 광필이는 경악했다.
“무슨 놈의 매출이…… 이거 진짭니까 자동차 부품 판매량을 훌쩍 뛰어넘었는데요?”
“그게 정말이요?”
“세상에. 이따위 고무 타이어 같은 놈이 간식용으로 그렇게 팔릴 줄이야.”
“원래 위대한 발명이란 건 별것 아닌 것에서 비롯되는 법이지.”
살에 염화암모늄 농도가 높아 천덕꾸러기 신세였던 과거를 생각하면 실로 상전벽해였다. 그렇게 되자 없어서는 안될 식재가 되었던 것이다. 안연복 역시 목소리가 밝았다.
“짬뽕 매출도 많이 늘었어요. 중국집에서 난리들이라서.”
“그러게요. 용화루 가서 한번 먹어봤는데 장난 아니더군요. 식감이 쫄깃한 게 아주 얼큰한 거랑 잘 어울려요.”
“일반 오징어만큼의 풍미는 없었지만 식감이 쫄깃한 데다 가격이 훨씬 싼 장점이 있으니”
얇고 흰 질감에 쫀득한 식감의 중독성으로 인해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게 된 것이다.
대통령까지 소식을 듣고 먹고 간 명동 용화루의 해물 짬뽕은 그야말로 시대의 명물로 자리 잡았다. 그리하여 짬뽕용으로 자른 오징어 살은 시중에 거의 품귀 현상이 돌 정도.
그러나 훔볼트 오징어의 수입업체가 오직 백경유통뿐이었기에 백경은 돈을 쓸어 담을 지경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강태준은 그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생물이니 수급 조절 제대로 해. 혹시 신선도 문제로 문제 생기면 안 되니까. 터미널이랑 휴게소 쪽에도 간식으로 같이 공급해 보도록 하게. 그보다 어묵 개발은 어때요?”
“여러 가지를 시도해 보긴 했는데, 구약감자분말을 쓰는 게 제일 좋은 거 같습니다. 비린내 제거제로 탁월하더라고요. 산도조절제를 넣어서 조만간 시판할 계획입니다.”
안연복의 시원한 대답에 강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하면 화학공정보다는 자숙공정을 이용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하던데, 저번에 가쓰오부시 연구했던 팀을 모아서 새로 연구해 보는 게 좋을 거 같군요.”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대왕오징어가 생각보다 버리는 부위가 있으니 아쉬워요. 오징어살 중에서 취식하기 어려운 부위를 가공해 보는 건 어떤가. 결대로 길게 찢어서 오징어채로 가공해 보도록 해봐요.”
“그러잖아도, 몇 가지 조리법을 개발했는데, 건조해서 조미만 한 물건에 고춧가루 양념으로 버무려서 오징어채로 만들어 봤습니다. 식용유를 넣고 볶았는데 맛이 꽤 훌륭하더군요.”
“오호. 오징어채라, 식감이 꼬들해서 맛있을 거 같습니다. 표준제조법을 만들면 좋겠네요. 제품을 대량으로 생산하려면 가이드라인이 필요할 테니.”
“네, 식품공장에 레시피 적어서 통일시키도록 조치하겠습니다.”
“좋습니다. 일단 페루 생산부 쪽에 이야기해서 빨리 쿼터 확보부터 진행해요. 일단 홍보가 급선무니 리마 쪽 축제 전문가부터 섭외하도록 합시다.”
애초에 훔볼트 오징어는 남미가 원산지인 만큼 그쪽 소비도 늘려갈 생각이다.
더하여 현지인 농부, 조리사, 요리 평론가, 수산업체 대표 등 요식업계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을 죄다 초청해 훔볼트 오징어와 관련된 견해를 나누는 자리도 마련할 예정이었다.
‘돈 들어갈 일만 산더미군. 그나마 영화가 흥행하지 않았으면…… 어휴.’
자금은 숨통이 트였지만 어째 일을 할수록 결재 거리만 늘어난다. 태동에서의 계열분리 과정은 스무스했지만 어찌 되었든 분사라는 작업은 진통이 수반되는 일이었던 것이다.
거기에 양재문 쪽으로부터 인수하기로 한 트롤선 6척 대금은 물론, 신규 어업 허가와 관련한 보증금이 크게 올라 부담도 가중될 수밖에 없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매만지던 그때 춘삼이가 큼직한 난초를 들고 왔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