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2화 선망선
“아니, 잠잠하던 양반이 뭔 일로?”
“아무튼 급한 일이랍니다. 아무래도 회의 전에 한번 논의할 게 있다는데요?”
간만에 태동산업을 방문한 강태준은 곧바로 태동 본사로 향했다.
미리 기다리고 있던 양재문은 열심히 서류를 보고 있었다. 강태준을 본 양재문이 반갑게 그를 맞았다.
“오 강 사장, 근래 사업이 승승장구한다면서?”
“간만에 안경까지 쓰고, 뭘 이렇게 열심히 보고 계셨습니까?”
“아, 이거? 필렛 공장 동향일세. 요새 스타키스트 쪽에서 새로 필렛 공장을 짓는다는데 우리도 숟가락을 얹어 보면 어떨까 해서. 요 근래 연어 수요가 크게 늘어나고 있어서 말이야.”
“흠…… 연어라니 트롤선이라도 사시려고요?”
“뭐 그 부분도 염두에 두고 있지 뭔가. 아무래도 사모아 쪽 부분이 수익이 약화되고 있으니. 매출 규모를 유지하려면 사업을 다각화해야 하지 않겠나?”
태동을 둘러싼 환경은 몇 년간 크게 변동했다. 사모아에 출항하는 어선의 수는 220척 정도. 외화가득률은 점점 감소하는 추세. 주 어종인 날개다랑어의 어획 감소는 가시적이었다.
다수의 어선은 어가 하락과 높은 조업 운영 경비 하락에 경제적 압박에 시달리고 있었다.
양재문이 하소연했다.
“서태평양 일대에서의 연승선 조업은 현상 유지만 해도 다행이야. 이대로는 경쟁이 심화된다면 살아남기 어렵겠지.”
“확실히 예전보다야 환경이 나빠진 건 사실이지만 걱정할 일은 아닌 거 같은데요. 저희 쪽은 나름 선방하고 있잖습니까? 파푸아뉴기니나 캄차카 어장 개척도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고요.”
“하지만 이대로는 상황을 반전시키기에는 부족하지. 현상 유지만으로는 뒤처질 수밖에 없어.”
“잔걱정이 많으시군요.”
“사실 그래서 준비하는 게 하나 있다네. 이 업계에 지각변동을 가져올 물건 말이야.”
뜸을 들이는 양재문의 행동에 강태문은 괜시리 불안해졌다.
“뭡니까 불안하게?”
“그건 회의를 할 때 말해 주지. 아직 밝힐 단계가 아닌 거 같아서.”
“아니. 그게 무슨. 잔뜩 궁금하게 해놓고서는.”
“하하. 암튼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불렀어. 혹시 놀라지 말라고 말이야.”
“하하 그건 나중에…… 회의실에서 듣게.”
속시원하게 말해달라 독촉했지만 양재문은 빙그레 웃기만 할 뿐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결국 소득 없이 물러난 강태준은 찜찜함을 감추지 못했다.
“하, 사람 참……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이상하네요. 뭐 숨기거나 하는 게 없는 분인데.”
“오 이사는 뭐 짚이는 곳이 없나.”
“솔직히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암튼 이사회 때 알려 준다고 하니 그때 가서 보자고.”
사업가로서의 촉이 불안하다고 외치고 있었지만 강태준은 애써 불안감을 억눌렀다.
어찌되었든 양재문은 태동산업 극 초창기부터 안정적으로 회사를 운영해 온 사람 아닌가.
성향상으로 볼 때 엄청난 모험을 할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믿음은 며칠도 되지 않아 산산조각이 났다.
태동산업 이사회가 열리는 날, 양재문이 선택한 길은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었던 것이다.
“이십여 년 전 탑재모선식 중고선 한 척으로 출발한 태동산업은 그동안 30여 척 이상의 선박을 보유한 명실상부한 원양업계의 1인자가 되었고 지금 연간 200억 원의 매출을 기록하는 회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현재 경상수지 적자 확대, 외채 증가 등의 어려움이 가중되는 가운데 원양어업 전체에 수익성이 악화되고 재무구조 취약성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이런 대내외적 도전을 맞아 저희 태동에서도 새로운 도전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양재문이 영사기를 틀자, 엄청난 크기의 배 한 척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에 도입 예정인 2,200톤급 선망선인 코스모스 호입니다. 어군탐지기와 소나, 레이더, 위성통신장치 등 최신장비를 탑재하고 지름 800m 이상의 초대형 어망을 장착하고 있습니다.”
“2,200톤급? 그게 참말인가?”
“참치를 그물로 잡는다니 그게 말이 되는가?”
영사기에 뜬 사진을 본 이사진이 모두 술렁였다. 증명이라며 내온 사진 덕이었다. 헬기와 함께 조업중인 거대한 참치선에 사뭇 장엄하기까지 한 조업 광경.
사람들은 입을 벌렸다.
“한 번에 저렇게 많이?”
“헬기에 모터보트까지 요란뻑쩍지근하구먼.”
수군대는 이사들을 뒤로하고 양재문이 다시 말했다.
“자, 보시는 것처럼 선망선은 고기 떼가 식이 활동을 하는 특성을 역이용한 어법으로 단 한 차례의 투망으로 일거에 몇백 톤씩의 어획을 달성할 수 있습니다.”
“뭐…… 그래서 중요한 건 투자비지 얼마고…… 그 배?”
“선가는 총 1,200만 달러입니다.”
“뭐…… 뭣이? 배 한 척에 1,200만 달러? 거 미친 거 아닌가?”
엄청난 금액에 놀란 이사들은 모두 기함했다.
1,200만 달러라면 독항선 수십 척을 살 수 있는 거금 아닌가.
“조업에 필요한 헬기와 모터보트를 합친 가격이니 되려 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번에 밴 캠프 사로부터 500만 달러 지원을 약속받았습니다.”
“밴 캠프가 지원을 오. 그라믄…… 수익성이 있긴 하다는 말인디……”
“예. 나머지 자금 역시 사내 유보금으로 충분히 감당 가능한 수준입니다. 일단 거래처가 확보되었으니, 판매 문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오 그러면 저렇게 수천 톤을 내리 잡는 것도 꿈은 아니라 이 말인가?”
수익성에 혹한 이사들이 몇몇이 탐심을 내보였다 하지만 모든 이사가 동의한 것은 아니다.
일부 보수적인 이사들은 배의 크기에 우려를 나타내며 걱정을 표했다.
“아니, 수입은 그렇다 쳐도 이건 좀…… 너무 급작스럽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회사의 미래를 담보로 저 배를 사겠다는 소리 아닙니까?”
“그러게…… 저런 배가 출항했다 엎어지기라도 하면 그야말로 폭삭 망한다는 이야긴데.”
“차입금 비율이 높아지더라도 회사가 이익이 나면 금방 갚을 수 있어요.”
“그건 일이 잘 풀렸을 이야기지요. 세상에 어찌될 줄 알고, 선망선 1척 값이 그렇게 비싸서야. 너무 위험한 도박 아니겠습니까?”
“그러게. 게다가 금어기가 도입되면 저 배는 어쩌는 거요?”
“꼭 참치만 잡을 생각은 아니지요. 금어기에는 북양 쪽에도 나갈 생각인데요. 주요 어획물인 명태 수요량이 엄청나니 그걸로 손실을 벌충할 수 있으니까요.”
“흥! 그런 논리라면 차라리 트롤선을 사는 게 낫지비. 여기서 굳이 몇 배는 비싼 선망선을 끌어들일 이유가 있나?”
“그래요. 저건 너무 도박이에요.”
갑론을박이 계속되자 의견이 양쪽으로 갈렸다. 협력사이자 주주로 참가한 미쓰시오측에서도 조심스레 반론을 펼쳤다.
“우리 미쓰시오도 별로 좋은 선택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일단 1,200만 달러를 투자하는 것도 문제지만 선가 상환계획이 터무니없어 보이는군요. 거기에 선망어법을 안다고 해도 노하우를 가진 회사들이 쉽게 기술을 알려줄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건 걱정 마십시오. 선박이 건조되면 저 양재문이 직접 현장에 나가 조업 지도를 할 테니까요.”
“양 사장이 직접 말이요?”
그러자 양재문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선망조업은 가다랑어 채낚기와 유사한 부분이 많아 이 분야 전문가를 다수 섭외했습니다. 더욱이 이번에 견문을 넓히기 위해 직접 선승도 해 봤구요.”
“그렇다면 쿼터배분은, 아무리 배가 좋아도 고기를 못 잡으면 말짱 황 아닌가?”
“이번에 파푸아뉴기니 쪽에서 확보한 물량이면 충분합니다. 괌에 기지를 설치하고, 바로 조업을 시작할 예정입니다.”
양쪽의 의견이 팽팽한 가운데 한 이사가 승부수를 띄웠다.
“그러면 이곳에 전문가이자 사외이사인 강 이사님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강태준 이사님께서는 가능성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시는지?”
“맞소이다. 강태준 선장이라면 선망업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지 않겠소?”
부사장직에서 물러나 사외이사로 옮긴지는 좀 되었지만 대주주인 강태준은 태동에서 무시 못 할 발언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모두 양재문의 말에 따라 지지선언을 표명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강태준은 기대를 배신했다.
“저는 솔직히 반대입니다.”
“반대라고? 왜인가 그게?”
의외의 대답에 급 당황한 사람들이 웅성거렸지만 강태준의 말은 멈추지 않았다.
“고기 떼를 포획하기 위해서는 단지 배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군의 성향을 포함한 생태를 확실히 파악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모터보트와 헬기 사이 합이 맞아야 합니다. 이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신규 어업 장비를 도입하는 마당에 적응에 시일이 걸리는 거야 당연하지 않겠소?”
“연습이 필요한 건 사실이지만 회사가 그만큼 버틸 펀더멘탈이 있는지 그게 문제죠. 제 생각에 이번 신조선 도입은 아직은 시기상조입니다. 무엇보다 지금 미국의 경기가 좋지 않은 것을 고려해야 합니다.”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현재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 너무 많은 비용을 지출했습니다. 지출 과다로 인해 인플레이션이 일어나고 있는 와중인데 통화팽창이 과다해지면 기축통화로서 달러의 위치가 위험해질 겁니다. 그렇게 되면 미국은 재정적자를 감내하기 위해서라도 수입관세를 올릴 것이 자명한데 그렇다면 과연 원양어업이 그 영향에서 자유롭겠습니까?”
그러자 양재문이 코웃음을 쳤다.
“자네의 말은 지나친 비약일세. 그건 확신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미 국방부와 누구보다 밀접한 계약을 맺은 제가 세상 돌아가는 사정도 모르겠습니까. 조금이라도 경제를 아는 사람이라면 지금은 확장보다 유지가 중요하다는 걸 모르시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미국의 경기가 침체되면 그만큼 조업 환경도 열악해질 텐데, 여기서 리스크를 키운다니. 지금 태동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미국이 기침을 하면 한국은 독감을 앓는다. 그렇게 비싼 배를 건조했다 한번 무너지기라도 하면 겉잡을 수 없은 만큼 출항 한 번에 생기는 리스크를 감안하면 재고하자는 말이었지만 양재문은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양재문이 이를 악물었다.
“위기에 봉착하면 역발상으로 사태를 해결해나가는 것이 우리 태동의 정신일세. 그 정도 위기야 충분히 극복할 수 있네.”
“그렇다고 이런 배 한 척에 사운을 걸 생각이십니까? 까딱 잘못하면 회사가 도매금으로 넘어갈지도 모릅니다.”
친 양재문계로 분류되던 강태준이 반대 의사를 분명히 하자 사태는 더없이 악화되었다.
반으로 갈린 이사들은 더욱 길을 잃고 갈팡질팡한 것이다.
회의실이 시끄러워져서 더 이상 토론을 할 수 없는 지경이 되자 한 이사가 휴정을 선언했다.
“자, 잠시 휴정하겠습니다.”
“자네 나 좀 보게.”
강태준을 따로 끌어낸 양재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태준이 자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나?”
“양 사장님. 트롤선은 몰라도 공모선이라니 이 부분은 저도 동의 못합니다. 이건 리스크가 너무 큽니다.”
“자네만 머리가 있는 줄 아나. 사업성을 면밀히 검토한 후에 정한 걸세.”
“정신을 차리셔야 합니다. 언제까지 경기가 호재일 거라 생각합니까? 지금 현실을 보십시오. 내년에 미국에서 대규모 긴축이 있을 텐데. 그때 어쩌시ㅕ고요?”
이사들의 의견이 평행선을 달리자 공모선과 관련된 안건은 결국 흐지부지되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오재갑이 다른 소식을 알려왔던 것이다.
“양 사장님께서 지금 이사진을 포섭하고 있다고 합니다. 차입금 제한을 없애고 정관 변경을 해서라도 무조건 이번 일을 강행하실 생각인가 본데요.”
“이 양반이 진짜? 지금 이거 싸우자는 건가?”
더 충격적인 것은 그다음의 일이었다. 주주총회 직후 강태준에 대해 회사에 대한 충실 의무를 위반했다는 이유로 사외이사 해임결의를 추진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렸던 것이다.
“아놔, 양재문 이 양반 개 빡쳤구만.”
“그리도 이건 선 넘는데요 이거?”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강태준이 결심한 것은 그즈음이었다. 강태준 입장에서는 이대로 발언권이 무력화될 생각 따위는 없었던 것이다.
“양 사장님께서 싸움을 건다면 어쩔 수 없지. 미쓰시오 쪽에 연락하게.”
“아니 어쩌시려고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아니겠나. 일단 붙어 보자고.”
그로부터 며칠 후 오성일보에 대문짝만 하게 기사가 실렸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