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화 영도조선공사
강태준이 이어서 말했다.
“거기에 천연가스 판매로 번 돈을 사회보장 정책에 쓰다 보니 근로자들의 임금이 상승하고, 과도한 유동성 증가가 국제경쟁력을 약화되지요”
강태준의 말을 들은 박정명이 약간 언짢은 듯이 말했다.
“그건 자원을 제대로 재활용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겠나.”
“전적으로 맞는 말씀입니다만 사람이 갑자기 돈이 생긴다면 쓰고 싶어지는게 인지상정이라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보면 어떻겠습니까?”
“무슨 소리야 그게?”
“지금이야 국민들에게 허리띠를 졸라매며 열심히 일하라고 해도 강요할 당위성이 있겠지만 석유가 있다면 사람들이 그걸 견뎌 낼 수 있겠습니까? 원래 사람은 누울 자리를 보고 뻗지 않습니까? 믿는 구석이 생긴다면 동기도 약해지기 마련이라는 거지요.”
“흐음…… 그럴 수도 있겠지.”
마지못해 긍정하는 박정명에 강태준이 쐐기를 박았다.
“각하, 천연자원에 의존하는 국가 경제는 경제에 영향을 줍니다. 무엇보다 포항 쪽은 이미 다수의 지질학자가 유전 가능성이 없다고 판정한 곳입니다. 현실적으로 지금 유전개발에 착수한다고 해서 언제 성과가 나올지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박정명은 안색을 찌푸렸다. 머리로는 이해가 가지만 가슴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불편해하는 심기를 눈치챈 강태준이 다급히 말을 이었다.
“사실 유전을 찾는 것보다 더 현실적인 정책이 있습니다.”
“그게 무언가?”
“VLCC와 컨테이너 선에 투자하는 겁니다.”
“VLCC 그게 뭔가?”
“20~30만 톤 이상의 원유를 운반할 수 있는 초대형 유조선입니다. 추후에 발주량이 크게 늘 것으로 예견되는 선박이지요.”
”아니 왜 그렇게 큰 배가 필요해질 거란 말인가?”
“이집트가 수에즈 운하를 봉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수에즈를 지날 수 있는 최대 크기는 약 64m 정도, 무게는 약 20톤급이 한계입니다. 하지만 수에즈운하의 폐쇄로 인해북미와 유럽대륙으로 운송되는 원유가 희망봉을 경유하게 되면 운송 거리의 장거리 화에 따른 수송비 증가를 상쇄하기 위해 대형화는 필연적이게 될 테지요”
“그런 큰 배를 우리가 수주할 수 있다고?”
“선사 규모를 키운다고 늘어나는 수요를 충당하기 어려우니까요. 아마 우리에게도 기회가 있지 않겠습니까?”
거의 모든 나라에서 컨테이너 수송이 가능해질 확률이 높다는 이야기였다.
“흐음…… 일리가 있구먼. 하지만 그러려면 전제조건이 있어야겠지?”
“예. 최소 백만 톤급 정도의 대형선박을 건조할 수 있는 접안시설과 도크가 필요합니다.”
“그건 너무 과한 투자가 아닌가?”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추후에 최신 선박을 건조하여 시장에 투입해도 2, 3년 후에는 더 큰 배가 시장에 진입할 테니 말이지요. 그러니 미리 준비를 해둬야 합니다.”
지금이야 10톤 이하의 조그만 배들이 대세지만 앞으로 단가를 맞추려면 점점 크기가 커질 수밖에 없다. 정부가 도와주지 않으면 이런 대형 프로젝트는 불가능하다고. 박정명이 의문을 제기했다.
“흐음…… 대형 선박을 시장에 마구 쏟아져 들어온다면 멀쩡한 배들은 어떡하고? 그럼 해운 수요에 비해 공급이 과잉될 가능성도 있지 않겠나?”
“반드시 대형선박만 필요한 것만 아니 걱정할 필요없습니다. 용도별로 중소형 선박들도 사용되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마침 올해 전 세계 컨테이너 규격이 통일되었으니 새 형태의 배들이 필요해지겠죠.”
항만에서 트럭과 철도등 여러 교통수단을 이용해 인프라를 발전시키면 수송비를 획기적으로 절감할 수 있다. 그와 동시에 한국의 국가 경쟁력도 강화시킬 수 있다고 박정명은 답답했던 속이 확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허허, 그런 방법이 있다니 강 사장…… 역시 자네는 경제를 보는 눈이 남달라.”
“과찬이십니다.”
“자네 말을 들어보니 석유만 중요한 게 아니군. 그러니 임자에게 미안하지만 숙제를 주어야겠네. 앞으로 임자가 영도조선공사를 맡는 것이 좋겠어. 항만 도크 건설은 부산시장에게 지원하라고 할 테니 자네가 도움을 주었으면 하네”
갑작스런 일거리 폭탄에 강태준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예? 영도조선공사를요?”
“그래. 원래 이 과업은 미래그룹 정 회장에게 맡기려고 했던 일일세. 하지만 생각해 보니 임자만 한 전문가가 없는데 내가 등잔 밑이 어두웠어 그래.”
강태준으로서는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영도조선공사라면. 사실 만년 적자 공기업 아닌가. 6.25 이후 선박 수요가 저렴한 일본 중고선박의 수입으로 대체되자 수주길이 뚝 끊기며 간간이 소형선박을 만들거나 수리업만 하는 등 적자투성이가 되어 버렸던 것이다. 그야말로 애물단지를 떠맡으라는 말에 다급해진 강태준이 대꾸헀다.
“하지만 각하. 아직 백경이란 회사가 아직 미래그룹 정도 규모의 기업가 아니라서 조선소를 하기에는 좀 시기상조입니다. 게다가 저희 회사는 아직 규모가 작아서.”
“무슨 소리인가. 임자, 설마 이렇게까지 이야기를 해놓고 발 뺄 생각인가?”
성큼 다가온 박정명이 강태준의 어깨에 턱 하니 손을 얹었다.
“내 부탁 들어주겠지. 임자?”
* * *
부산직할시 백경그룹 사장실.
취조실 분위기가 된 백경그룹 사장실은 침통한 분위기였다.
“미치셨습니까? 지금 적자 덩어리인 영도조선공사를 받아오셨다고요?”
“그래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나.”
“혹떼려다 혹을 붙였네. 세상에…… 기적의 능력 아닙니까? 대통령을 뵐 때마다 회사가 하나씩 생기다니. 무슨 요술 방망이인 줄 알겠습니다.”
“놀리지 마라. 임마…… 나라고 받아오려고 받아 온 게 아냐.”
“금광이야 그렇다 쳐도 아 그래서 만년 적자인 기업을 인수하겠다고 확약서에 서명하고 지장까지 찍으셨다고요. 아주 가슴이 웅장해집니다요.”
“너라도 그 상황에서 거절 못해. 임마.”
민영화를 빙자한 떠넘기기였지만 강태준으로서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부탁을 빙자한 강매였지만 거기서 거절을 할 방도가 어디 있겠는가 그 말에 복만이가 투덜거렸다.
“아니 거기 가서 왜 잘난 척을 해서는. 가만있었으면 시추공사만 떠맡고 끝났을 텐데. 혹 떼려다 혹을 더 붙인 셈 아닙니까?”
“나참, 박정명 그 양반이 그렇게 유전에 대해 관심이 많은지 몰랐지. 뭐야.”
강태준으로서도 사실 후회막급이 아닐 수 없었다 설마하니 그 상황에서 사업권을 전부 떠넘길 줄은 전혀 몰랐던 것이다. 그러자 재갑이가 두둔하듯 말했다.
“뭐 그래도 잘하셨습니다. 석유 탐사를 중앙정보부가 맡았으면 나랏돈이나 왕창 낭비하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시추설비 썩히기도 아까운데 이참에 지질탐사나 연습한다고 생각하면 되지요.”
“임마. 그걸 말이라고. 긍정적이라서 좋겠다. 야.”
광필이의 핀잔에 강태준도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석유가 안나온다고 해서 꼭 헛짓거리를 한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아니 생각해 보니 다른 나라는 모르지 않는가.
‘원래 도박에 목숨 거는 놈들도 있으니까.’
어떻게든 잘 포장해서 팔아먹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지는 강태준이었다.
“뭐, 일단은 3년간은 지불유예를 해 주겠다니 어떻게 살려 봐야지. 일단 내려가서 확인부터 해야 하지 않겠나? 어찌 되었든 간에 꼭 손해라고 볼 수는 없지 그래.”
떠넘기기를 한 박정명도 못내 마음이 걸렸는지 조선업 활성화를 위해 선박 건조자금의 90%를 융자해 주는 한편 기자재의 관세를 면제해 주었던 것이다.
“그럼 뭐부터 합니까?”
“일단 내려가서 사태부터 확인해 보자고. 그래야 뭐라도 방도가 생길 테니 말이야.”
강태준 일행이 영도로 내려가자 공장 앞에는 사람들이 몰려나와 있었다.
소식을 들은 공장장이 마중을 나온 것이다.
-축! 강태준 사장 부임 환영!!
강태준이 어안이 벙벙했다. 부임 결정이 난지 대체 얼마나 되었다고.
그러자 갑자기 나타난 여직원들이 강태준을 보더니 꽃다발을 안겨 주었다.
“환영합니다! 사장님.”
“환영은 무슨, 뭐 고맙습니다. 뭐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군대처럼 도열한 직원들의 모습에 어색해하자, 눈치빠른 탁훈재 공장장이 쪼르르 걸어 나왔다.
앞머리가 훤히 벗겨진 공장장이 손을 비비며 말했다.
“새 사장님이 오신다고 해서…… 예우 차원에서 약소하게 준비를…… 하하.”
“뭐 고맙긴 한데, 뭐 시간이 없어서 일단 시설현황 파악하고 기업개선 계획부터 봅시다.”
강태준이 둘러본 공자은 부지 약 8,000여 평을 조금 넘는 규모. 대부분 노후한 시설과 열악한 수공구들이었지만 드물게 선반 등 신형 기계들도 널려 있었다.
“흠. 관리는 잘 되어 있군요.”
“객차 등의 철도 차량을 만들거든요. 일제 때부터 만들던 거라서 품질은 의외로 꽤 쓸 만합니다.”
“오 그래요? 모빌독(MOBILE DOCK) 정도는 만들 수 있을 거 같군요. 그러면 건조 능력이 얼마나 되지요?”
“최대 13,000톤급, 연간 67,000톤의 선박을 건조할 수 있습니다. 풀로 최대 2만 4천 톤급에 연간 25여 척의 선박수리가 가능합니다.”
강태준은 도크를 살펴보면서 상황을 면밀히 파악했다.
마침 항구에 두 대의 배가 나란히 놓여 있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온다. 제법 큼직한 크기에 관심이 가는 강태준이었다.
“이건 뭡니까?”
“이게 이번에 진수한 배인데 아직 인도가 되지 않았습니다. 1,600톤급 화물선인 ‘최양호’와 ‘덕명호’지요. 미국선급협회(ABS)의 인증을 받은 배입니다.”
“오, 그렇군요. 별도로 수주해서 진행 중인 게 있습니까??”
“이번에 대만 정부로부터 250톤급 어선도 20척을 수주 받아서 진행 중입니다.”
수주물량이 있다고 하니 생각만큼 나쁘지는 않다. 생각보다 상황이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안도감은 잠시뿐이었다. 도크 뒤편으로 가자 진짜 문제가 모습을 드러냈다.
묘박한 폐선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던 것이다.
“아니, 이건 다 뭡니까?”
“수산개발공사에서 화부채로 압류된 선박인데 발주가 안 돼서. 계속 묘박 중입니다.”
“허어. 이게 전부 말입니까?”
얼마 후, 선박 상태를 일일이 살피고 온 오재갑이 고개를 저었다.
“어때 살릴 수 있겠어?”
“이건 못씁니다. 애초에 설계 결함이네요. 전체적으로 밸런스가 맞지 않습니다.”
경제성을 도외시한 채 설계된 어선인 탓에 구조상 문제가 많았다. 상업 차관으로 들여온 선박이지만 기관실이 텅텅 비어 있었던 것이다. 대략적인 조선소 현황을 살핀 강태준의 시설개선과 재무구조 개선 문제와 관련해 회의를 열었다.
“아무래도 인도할 물량을 제외하고 기존에 있던 배는 차라리 불용 처리하는 게 경제적일 거 같군.”
“30척을 모두 폐기한다고요?”
깜짝 놀란 오재갑의 물음에 강태준이 어깨를 으쓱했다.
“연비도 나쁘고 수리하는 데 돈이 많이 들잖나. 20년이 채 안 된 멀쩡한 배까지 폐선 시장에 쏟아져. 나오고 있는 마당인데 말이야.”
“차라리 근해에서 운용하는 건 어떻습니까?”
“운용할수록 손해만 볼 테니 차라리 고철값이라도 받는 게 낫지 않겠나? 체선료만 한 대에 2,000~3,000달러씩 들어가는 마당인데 차라리 신규건조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아.”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