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양재벌 강태준-267화 (267/361)

267화 용기면

‘이제 도레미 백화점 쪽도 상환이 끝났고, 추가로 브라운관 TV를 생산해도 끄떡없겠어.’

오앤비(O&B) 인터내셔널 등 돈 들어가는 사정이 많았던 관계로 유보금이 늘었다는 건 반가운 소식이었다. 새로 도입한 우노 역시 캐시카우 역할을 제대로 해 준 덕일까. 마음이 편해지던 그때 강태준에게 또 하나의 제안이 왔다.

“박재우 사장님으로부터 전언인데 닛카식품에서 연락이 왔다는데요.”

“닛카식품이라고?”

닛카식품은 라면업체로 치면 한국으로 따지면 케롯과 테라 등 요식업계 양대산맥에 해당하는 회사다. 처음 일본에 건너갔을 때 안연복을 통해 기술제휴를 요청했지만 두리뭉실한 대답 덕에 반쯤 포기하고 있었던 찰나였다.

“글쎄요? 그쪽에 사장님이신 모로쿠로 씨가 한번 뵈었으면 한다던데요?”

“모모쿠로 그 양반이 왜? 갑자기 마음이 변하기라도 했다나?”

“글쎄 뭔가 아쉬운 게 있지 않겠습니까? 이번에 치킨누들 쪽 사업을 확장한다고 난리던데 그거와 관련이 있는지도요. 오성 쪽과도 약속이 있더군요.”

“뭐 일단 만나보지 뭐. 그럼 목요일쯤에 일정 비워 놔.”

강태준으로서는 굳이 거리낄 것이 없지 않나.

목요일 저녁. 약속은 부산 해운대지점에서 이루어졌다. 뻑적지근하게 마련된 자리 앞 성마른 외모의 닛카 사장이 살갑게 인사를 건넸다.

“예전부터 만나 뵙고 싶었는데 처음 뵙는군요.”

“일단 좌정하시지요. 이번에 한국에는 어인 행차십니까?“

“오성식품과 한국 내 지인들과 협의할 일이 있어 며칠 머무를 계획이라서요.”

“뭐 그럼 시장하실 텐데, 간단히 식사라도 하실까요?”

“좋습니다. 어디 보자…… 라멘, 라멘이 있군요?”

메뉴판을 본 닛카 사장이 붉은빛이 도는 라면을 보더니 관심을 보였다.

“이건 소스가 특이한데 이게 뭡니까?”

“네, 참깨 라면이라고 신제품입니다. 안 선생이 새로 개발한 요리죠.”

“오…… 일본 라멘이랑은 좀 달라 보이는데, 좀 매워 보이는데요?”

“얼큰한 편입니다. 쇼유나 미소로 간을 하는 일본 라면과는 좀 다르긴 하지만 한번 드셔 보시겠지요?”

“호오, 한번 도전해 보고 싶군요.”

원래가 하루에 한 번은 꼭 라면으로 식사를 때운다고 할 만큼 닛카 사장의 면 사랑은 꽤나 유명한 이야기. 잠시 후 뜨끈한 김을 내뿜는 라면 위에 소고기가 얇게 얹어져 나오자 닛카 사장이 코로 향을 음미하며 말했다.

“오, 육수가 아주 진합니다. 향도 좋고요.”

“이렇게 드셔 보시죠. 라면은 김치랑 아주 궁합이 좋습니다.”

라면 위에 김치를 얹은 것을 유심히 보던 닛카 사장이 같이 먹어 보고는 감탄사를 연발했다.

“이런 조합이 있을 줄이야. 한국인은 라면을 먹을 줄 아는 사람들이군요.”

“우리 안 선생이 요리에는 일가견이 있지요. 밥도 말아먹어 보십쇼.”

라면을 맛있게 비운 두 사람이 만족스럽게 입을 닦았다.

“그래서 이쪽에 오신 이유를 여쭤도 되겠습니까? 갑자기 마음이 바뀌시다니 신기하군요.”

“사실 바뀐 건 아닙니다. 이전부터 한국시장에 대해 관심이 많았습니다만 신제품 개발이 우선이다 보니 좀 뒷전으로 밀렸지요. 이제 좀 슬슬 발동을 걸어 볼려고 하고 있지요.”

“신제품이라면 그 치킨 누들 말이죠? 고명이 아주 실하던데요? 굉장히 잘 만들었더군요.”

“하하. 말씀 감사합니다만. 판매량이 예상보다 신통치 않습니다.”

“그게 의왼데요?”

“평가는 좋았는데 생우동보다 몇 배는 비싸다 보니 시장에 안착할 시간을 놓쳤지 뭡니까. 그사이 다른 회사들도 마이너 카피 제품을 내서 말입니다.“

본진에서 신제품 판매가 부진하자 닛칸에서는 수출 가능성을 타진했지만 영 신통치 않았다.

“미국이나 서양 사람들이 면에 거부감을 느끼더군요. 아무래도 국물이 든 면요리가 생소하달까. 그러던 중에 바이어랑 만나는 자리에서 우연히 치킨 라멘을 종이컵 안에 넣고 뜨거운 물을 부어먹는 것을 보았습니다. 거기서 영감을 얻어서 조리 과정을 더 단순화하면 어떨까 생각이 들었지요. 대략 3분 안에 면을 끓여서 한번에 취식할 수 있게 말이죠.”

“흠. 거의 즉석 식품이군요? 근데 요건이 까다로울 거 같은데. 고명을 동결건조해서 넣어야 하고, 용기도 가벼워야 하고.”

“예. 한손에 들기 적합하며 가벼우면서 어느 정도 충격을 견딜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더군요. 그래서 거래처를 수소문하던 중 백경쪽에서 마침 폴리스티렌 용기를 만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발포 폴리스티렌으로 용기를 만들면 어떨까 생각해서 말입니다..”

“흐음…… 저희 보고 용기면을 공급해 달라는 말씀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가능하다면 동결 건조 기술과 관련해서도 협조를 부탁드리고 싶고요.”

“제품을 봐야 할 거 같은데?”

“그럴 줄 알고 여기 미리 가져왔습니다.”

엔도 사장이 손짓하자, 직원 하나가 즉석에서 샘플을 가져와 보여 주었다. 바삭하게 생긴 면 위에 홍고추와 실지단, 새우와 버섯, 고기 완자 등 건조한 고명이 얹어 있었다.

“흐음…… 이겁니까? 면이 꽤 얇군요. 이 위에 그냥 조미료를 뿌리는 건가요?”

“에. 튀기지 않고 3분 안에 익게 만든 겁니다. 뭐 고명은 아직 완벽한 건 아닙니다. 어떻게 넣을 건지 아직 단가가 정해지지 않아서 조합을 여러 가지로 시도해 보고 있습니다.”

만들어진 제품은 거의 완성 단계에 가까웠던 만큼 강태준으로서는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온 기분이었다. 사실 용기면 사업은 예전부터 탐을 내는 사업이었던 것.

다만 투자비와 연구에 드는 시간 때문에 보류하고 있었던 찰나, 이렇게 기회가 생긴 것이다. 하지만 강태준은 티를 내지 않았다.

“확실히 품질은 괜찮군요. 그런데 투자는 좀 신중해야겠는데요. 사실 폴리스티렌 가공은 저희도 우유 용기를 만들며 처음 시도했던 부분이라. 발포 폴리스티렌은 좀 다른 영역 아닙니까. 용기를 개발하려면 아무래도 시간이 필요할 거 같습니다.”

“그 부분은 저희가 연구한 데이터를 공유할 수 있습니다.”

“흠. 그 정도로는 좀. 저희 입장에서는 생산라인을 증설해야 하니 이 부분은 신중할 수밖에요. 더욱이 추후 물량이 얼마나 필요할지 모르잖습니까? 투자를 해 놓고 예측대로 되지 않는다면 그만한 낭패도 없지 않겠습니까?”

“그건…… 맞습니다.”

상대의 대답을 거절로 여긴 엔도사장이 눈을 질끈 감았다.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모습에 강태준이 빙그레 웃었다.

“하지만 서로 이해가 맞는다면 저희도 협력할 수 있지요. 다만 저희 쪽에서도 뭔가 어드벤티지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원하는 게 뭡니까?”

“저희 쪽에 동남아 판권과 라이센스 생산을 맡겨 주신다면 합리적인 납품가격에 공급하도록 하겠습니다.”

강태준이 요구한 것은 두 가지였다.

라면 가공기술과 관련한 기술 이전,

그리고 치킨누들에 대한 동남아 판권을 익스클루시브 (Exclusive)로 최소 10년 보장하고 연장할 수 있는 조건.

대신 강태준은 컵라면을 군납으로 판매해 손해를 벌충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다

“군납이요? 단가를 제대로 받을 수 있겠습니까?”

“어차피 제품이 이름을 알리기 전까지는 제대로 팔릴 리가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군부대에서는 즉석식품 수요가 크니 고정적인 수요를 창출할 수 있지요. 추후에 제대해서도 옛날 맛을 찾을 수 있으니 소비자에게 접근하기도 쉽고요.

“저희도 동결 건조 기술이 있으니 바로 생산량을 늘릴 수도 있습니다. 애초에 묘진에서 기술 이전을 해 줬는데 새삼스러울 것은 없지 않습니까?”

엔도 사장은 갈등했다. 자력으로 설비를 도입하는 것도 생각해 봤지만 최소 1년 반 이상 걸리리라고 추산하고 있었던 만큼 이미 선택지는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좋습니다.”

용기납품 건과 건조기술협력 계약을 끝낸 백경에서는 곧바로 설비도입에 착수했다. 폴리스틸렌 용기를 찍어 내서 대량 생산을 시작하기로 했다.

강태준은 실사를 나가 진행을 확인했다.

“발포 폴리스티렌 제작은?”

“숙성이 잘 돼서 일정하게 잘 나오더군요. 이거 용기면에만 쓰기는 좀 아까운 거 같아서 여러 군데 납품처를 늘리는 중입니다.”.

발포 폴리스티렌은 단열성과 범용성이 높은 소재다. 세균이나 곰팡이가 번식할 수 없고 아이스박스 등 신선 식품을 포장하기 좋고, 건축자재로도 많이 사용되기 때문.

“잘했구먼. 혹 유해물질이 녹아 나오진 않나?”

“에이. 그럴 리가요. 나오더라도 인체에 영향이 없는 수준입니다. 그보다 라면 넣는 방식이 문제죠.”

“왜?”

“그게 면발을 위에서 아래로 떨어뜨려서 넣는데 용기가 깨지거나 면이 튕겨나가는 경우가 많아서…… 진짜 난리도 아닙니다.”

“보울 폭을 넓게 하거나 아니면 설비 높이를 낮추면 되지 않나?”

“그게 이미 규격화된 설비를 바꾸는 게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라서요. 그러면 설치를 다시 해야 합니다.”

“그럼 반대로 생각하면 될 게 아닌가. 면을 그릇에 넣는게 아니라 거꾸로 그릇으로 면을 덮으면 되지.”

“아, 그렇네. 바로 시도해 보겠습니다.”

흥분한 노기철이 부산을 떨자 강태준이 피식 웃었다.

“노 이사는 쉬운 걸 너무 어렵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구먼.”

“기술자들이 항상 그렇죠.”

강태준의 예상대로 모든 순서를 바꾸자 문제는 어렵잖게 해결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개발된 컵라면은 박스 째로 도레미 백화점에서 출시되었다.

“3분 요리. 한끼 뚝딱 해결하세요!”

“언제 어디서든 뜨거운 물만 있으면 간편하게 먹을 수 있어요.”

때에 맞추어 할인 행사를 연 인형탈을 쓰고 나온 사람들이 전단지를 나누어 주었다.

“아니 라면을 냄비에 끓여먹으면 되지, 컵라면이라니. 이게 뭐꼬?”

“언제 저희가 실망시켜 드린 일이 있습니까? 함 가져가 보십쇼.”

강태준은 풍미와 통조림 세트와 함께 끼워팔기로 했다. 처음부터 비싼 가격을 설정하면 거부감이 느껴질 수도 있는 만큼 할인가로 출범했다. 판촉행사를 벌이는 백화점을 둘러본 강태준이 물었다.

“판매가 좀 어때?”

“사람들이 관심은 있는 거 같은데 지켜봐야 할 거 같습니다. 맛에 대해서는 대부분 호평인데 손이 선뜻 가지 않는다는군요. 이걸 돈 주고 사먹기는 좀 뭣하다는 반응이랄까.”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아무래도 취향이 좀 한국인의 입맛에 비교하면 느끼하다고 느끼는 거 같아요.”

“그것도 그렇고. 조리되어 나오는 봉지 라면에 비해 비싸서. 아무래도 가격 부분이 허들인 거 같습니다.”

“원래 신시장 개척이란 게 쉽지 않지. 긴자 쪽은 어떻데?”

“거기는 여기 비할 바가 못 됩니다. 완전 파리만 날린다는군요. 아무래도 일본인들이 좀 많이 보수적이지 않습니까?”

당시는 길거리나 식당 이외의 장소에서 음식을 먹는 것조차 사회통념상 꺼림칙하게 여겨지는 시절이었기에 유통 업체들도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초기예측치보다 현저히 떨어지는 판매량에 강태준이 빠르게 결단을 내렸다.

“그러면 고명을 반으로 줄여야겠구먼.”

“예? 그럼 그러면 1끼 식사라는 홍보가 무색해지는데…….”

“단가를 줄일려면 어쩔 수 없지. 일단 고춧가루 팍팍 넣고 얼큰하게 만들어 봐. 초도 물량은 악성 재고로 남기 전에 야간작업이 많은 공장에 뿌리자고.”

닛칸과 긴급으로 협의를 마친 강태준은 라이트한 버전의 신제품을 발매하기로 했다. 닛칸에서도 이번 제품에 사활을 걸고 있었던 만큼 일본 전역에 온수가 나오는 자판기를 2만 여대 설치하고, 판촉 행사를 여는 등 사업에 총력을 다하기로 한 것이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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