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3화 쌀 숙성 가공
그 말에 춘삼이가 바로 답했다.
“예. 주부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습니다. 특히 미군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났는지 요리에 많이 쓰인답니다. 따라 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는지 일각에서는 밥 짓거나 국에 넣어 먹는 경우도 있다는군요.”
“커피 크림을 밥이나 국에? 그거 좀 이상할 거 같은데 ”
“제가 해 봤는데 생각보다 잘 어울리던데요. 곰국에 넣어 먹으면 구수해서 좋고요. 사실 성분만 따지면 딱히 안 어울릴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광필이가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세상에 별별 취향이 다 있구먼.”
“그렇게 편견 가질 일이 아닙니다. 외국 음식 보면 스프에 우유 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데요. 매운맛을 중화시켜 주고 감칠맛을 올려줍니다. 거기에 백경이 MSG업계에서 유명세를 떨친 것이 영향이 있는 모양이고요.”
백경의 풍미가 거의 고유명사나 다름없게 자리 잡은 탓에 밀크드랍이라는 브랜드를 MSG처럼 종합 조미료로 이해한 것이다. 생각해 보니 절대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래? 안 선생 통해서 아예 요리책을 만들어 보는 건 어때? 밀크드랍을 넣어 먹는 요리로 말이야. 해외 음식도 소개하면서 홍보도 하고.”
“호. 그거 괜찮은데요. 하긴 요 근래 용호루 장사가 너무 잘되어서요. 안 선생한테 출연 섭외가 빗발치고 있긴 한다는군요.”
“그래. 생각해 보니 요새 출판 쪽은 통 신경 못 썼군. 일단 백 화백한테 연락해서 깔쌈하게 표지부터 몇 장 뽑아 보라고 하게. 이참에 아예 월간지로 내는 것도 내는 것도 괜찮겠구만.”
“네네. 방 국장에게 일러 두겠습니다.”
대략적인 가이드라인을 잡은 강태준은 바삐 통조림 공장으로 향했다.
강태준이 도착했을 때쯤 막 도착한 커피들이 포대자루째로 지게차에 실려서 운반되고 있었다.
“많이도 왔구만. 어이, 페드로!!”
“미스터 강, 주인공 행차시구만.”
페드로는 커피 사업을 하면서 알게 된 브라질계 바이어로 커피업계에서 큰 손으로 통하는 사람이다. 원수 수입 과정에서 박재우로부터 소개받은 사람이었는데 친화력이 몹시 좋아 벌써 한 가족처럼 지내고 있었던 것이다.
“배송이 이렇게 빠르다니. 대단하구먼. 요새 수에즈 쪽이 말썽이라 쉽지 않았을 텐데.”
“한국인들은 원래 느린 것은 못 참는다지 않나? 그래서 신경 좀 썼지. 뭐 품질이 어떤지 한번 확인해 보겠나?”
두툼한 손으로 한 줌 커피를 꺼낸 페드로에 강태준도 슬쩍 냄새를 맡아 보았다. 옅은 꽃향기가 나는 향이 산뜻해 보였다.
“향긋하구만. 예가체프인가? 근데 이 두 개는 종류가 다른 것 같은데.”
“아. 이번에 브라질과 콜롬비아산도 추가했다네. 내 능력이지.”
“오 그래? 이건 따로 안 시켰는데?”
“품질은 보장이니 한번 써 보라고 주는 거야. 뇌물일세 뇌물…….”
“오 이거 고맙구먼. 사양하지 않지.”
“고마우면. 발주나 더 주게. 그럼 나는 실례.”
페드로가 능글맞게 웃으며 사라지자 광필이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저 친구는 사람은 좋은데 텐션이 너무 높네요. 감당하기가 힘듭니다.”
“그래도 능력 좋은 친구지. 눈치도 빠르고.”
“생두 소비량이 저번 분기 대비 2배가량 늘었으니 그쪽에서는 환장할 법도 하지 않겠습니까.”
“물류 문제는 없나?”
“지게차 덕분에 꽤 좋더군요. 베트남에서 가져온 게 쏠쏠합니다.”
“하나당 얼마에 들였다고 했지?”
“통조림 한 소쿠리로 퉁 쳤죠. 뭐 고쳐 쓰라고 주더이다.”
“이런 멀쩡한 지게차를 헐값에 팔아제끼다니 미국 놈들도 갈 때까지 갔군.”
“존슨 대통령도 슬슬 곤란해진 거죠. 전쟁 승리를 자신했다가 저번 구정 대공세 때 완전히 개박살 났으니까요”
“그러게 구라를 적당히 쳤어야지. 국민이 호구로 보이나.”
웨스트모어랜드 사령관은 베트남 전쟁이 끝이 보이는 단계라 단언했지만, 북베트남과 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대공세로 화답했다. 일격을 얻어맞은 미국은 부랴부랴 반격을 가해 주요지를 탈환하는 데 성공했지만 여론은 급 악화되었고 본격적으로 철군이 논의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전쟁의 늪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쉽지 않았다. 물밑에서는 평화협정이 진행되고는 있었지만 여러 가지 이해관계가 겹치고 있었다. 미국의 군수업체들은 베트남전이 쉽게 끝나는 것을 바라지 않았고 존슨 대통령 입장에서도 베트남전에서 군을 빼는 것 자체가 실패를 자인하는 꼴이었기 때문에 폭격 중지를 명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제 슬슬 베트남에서 철수 준비를 하긴 해야겠군.’
언제쯤 손절할 타이밍을 봐야 할까. 아무튼 커피 공장 안으로 들어가자 로스팅이 한창이다.
짙은 커피향이 감도는 공장에 들어가니 복잡한 생각이 사라지고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냄새가 좋네. 선별 과정에서 이물질은 없겠지?”
“걱정 마십시오. 선별기에 네 차례 넣어서 돌립니다. 마지막에 사일로에 넣기 전에 채에 한 번 더 걸러지니까요. 그래도 사람이 할 일은 피할 수 없더군요. 원두 상태에 따라서 로스팅 시간이 미묘하게 달라서 온도조절이 중요해서 말입니다. 조금만 삐끗해도 맛이 확 달라지니 긴장을 늦출 수가 없더군요.”
원두가 익었는지는 향이랑 소리로 구분을 한다고 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 뒤로 팝콘처럼 파파팍 튀기는 소리가 마치 음악처럼 울렸다.
“소리가 맛있네.”
“그거 동감입니다. 좋은 커피는 소리부터가 다르더라고요.
“그런데. 지금 다 된 거 아닌가?”
“예. 예. 맞네요. 자 빨리 빼내게.”
냉각기로 들어간 원두는 교반기에 넣어져 열을 식혔다. 원두의 뜨거운 열을 얼마나 빨리 빼느냐가 향과 맛을 보존하는 관건이었기 때문.
작업이 끝나자 연구원들이 원두가 맞게 배전되었는지 품질을 일일이 확인했다.
“온도 유지가 쉽지 않겠네.”
“그래서 로스팅할 때 쓰는 숯은 용당에서 참나무로 공급해 주기로 했습니다. 뭔가 기시감이 드는 게 신기하지 않습니까. 설마 의료에서 쓰이던 기술을 이렇게 재활용될 줄이야.”
원두에서 엑기스를 뽑아내는 모습이 신통하다. 로스팅된 원두는 곱게 갈려지는데 이 과정에서 물과 원두가 접촉하는 시간을 최소화해야 향과 맛을 보전할 수 있는데 개똥쑥에서 아르테미시닌을 추출할 때 사용한 기술들이 응용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원래 기술의 발전이란 것이 융합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거지. 미국에 유통사하고는 이야기되었어?”
“예. 생각보다 커피믹스 판매량이 호조라서 그런지 분위기가 다르더군요. 마침 미국 노멀푸드 쪽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강태준이 콧방귀를 뀌었다.
“허, 그 자존심 강한 놈들이? 언제는 연간 국민소득이 1000달러도 되지 않는 나라에서 커피가 팔릴 리가 없다더만?”
“거, 앞에서는 존심 내세우고 뒤에서 딴말하는 게 코쟁이 종특 아닙니까. 차 떠나고 나니 아쉬운 거죠. 어쩔까요?”
“봐서. 여지는 남기는 편이 좋으니 일단 협상해 봐. 그보다는 포장재 업체 쪽이랑 이야기하는 게 좋을 거 같아.”
“포장재라면 어떤 거 말입니까?”
“스틱형으로 만들어서 커피와 프림 설탕까지 조절하면 좋지 않을까 해서 말이야. 커피로 아이스크림이랑. 초콜렛도 한번 만들어 봐. 그보다 안 선생은 어디 있나?”
“아. 뒤편에 쌀 상태 확인하러 갔어요.”
통조림 공장 뒤에는 너른 평야는 벼가 익어 가는 중이다.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올 법한 평야에서 황금의 물결이 익어 가는 모습이 실로 마음을 뻥 뚫리게 해주었다.
“외삼촌!”
“어, 왔느냐?”
“우순해 박사님도 있으시군요”
“정부에서 통조림 쌀을 만들라고 성화니 어쩔 수 없지 않나? 안 선생 덕에 이것저것 여러 품종을 시도하고 있지. 이번에 이태리에서 전문가도 섭외해 왔잖은가?”
“전문가요?”
“쌀과 관개 전문가 말일세. 복만이 통해서 전한 걸로 아는데 보고가 늦었나? 그럼 직접 소개시켜 주지 뭐. 어이! 조!”
그때 가슴털이 텁수룩한 이태리 남자가 논을 헤치며 등장했다. 나이가 지긋한 것이 40줄은 넘어 보이는 남자는 푸른 눈이 인상적이었다.
갑작스러운 외국인에 놀란 사람들이 멈추어 서자 상대도 같이 놀랐는지 엉거주춤하며 외삼촌을 바라보았다.
“여기 사장님이야. 조반니 인사하게.”
“아, 조반니 론도레입니다.”
모자를 벗으며 황송하다는 듯 주섬주섬 고개를 숙이는 남자.
강태준은 생각보다 좋은 발음에 놀랐다.
“6.25 참전용사지. 이래 봬도 은인일세.”
“아, 그래서…… 한국어가 유창하시다 싶어 의아했습니다.”
“참전까지는 아니고, 뭐 후방에만 있다 와서 좀 부끄럽구만요.”
“그럼 농업은 언제부터?”
“원래 집안 자체가 대대로 농부였습니다. 참전에 지원한 계기는 가업을 물려받고 싶지 않아서였거든요. 전쟁터에 나가 보니 농사가 적성에 맞더군요.”
“그럼 여긴 또 어쩐 일로.”
그러자 조반니가 겸연쩍은 표정으로 머리를 긁었다.
“사람일이란 게 원하는 대로 안 되지 뭡니까. 무리하게 확장을 하다가 병충해를 맞는 바람에. 빚 갚느라 땅 정리하고 보니 딱히 할 일이 없더군요. 그렇다고 사촌들한테 손 벌리기는 뭣하고, 그 와중에 이태리서 한국에 파견할 자문위원을 뽑는다더군요. 그래서 무턱대고 지원했지요. 저도 뭔가 쓸모가 있을 거 같아서요.”
어차피 결혼도 안 해서 자식도 없는 마당이니 딱히 미련 같은 것은 없었다는 말에 강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같은 신생국에는 무슨 분야든 전문가가 많이 필요하지요. 정말 잘 오셨습니다.”
“조반니가 알고 보면 굉장한 능력자더군요. 숙성쌀 연구를 했다는데 아르보리오나 카르나올리 같은 품종을 키우는 데도 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아이구, 무슨 말씀을? 밥벌레만 안 하면 다행이지요.”
“하하. 빈말이 아닙니다. 조반니 이 친구가 겸손해서 자꾸 쑥쓰러워하는데 제가 본 농부 중에서 최곱니다.”
“아 정말입니까?”
“쌀 맛을 보시면 과장이 아니라는 걸 알 겁니다. 마침 새참 먹을 시간인데 같이 가시겠습니까?”
“좋습니다. 궁금하군요.”
강태준은 내심 흥미가 있었기에 곧장 따라나섰다. 논밭을 지나 가건물로 된 식당 안으로 들어가니 막 밥을 지었는지 가마솥에서 구수한 향기가 뿜어져 나왔다.
강태준이 들어오는 걸 확인한 안연복이 요리를 하다 말고 깜짝 놀랐다.
“아이구, 사장님도 같이 오셨습니까?”
“냄새가 좋네요. 안 선생이 여기 있었다니 엄청 찾아다녔지 뭡니까?”
“오늘 밥은 뭡니까?”
“흰쌀밥에 고등어조림입니다.”
그 말에 조반니의 표정이 급 굳어졌다.
“으…… 고등어 말입니까? 전 고등어는 좀…… 예전에 군에서 하도 먹어서.”
“걱정 마요. 조반니 취향에 맞게 파에야도 준비했으니까요.”
“오, 그래요?”
“예. 자자 다들 앉아요. 맛있을 겁니다.”
급 화색이 된 조반니가 착석하자 곧장 식사가 준비되었다. 잘 익은 고등어 조림이 눈에 보기에도 확연히 다른 것이 쌀알이 매끄럽고 탱글탱글하기까지 했다.
씹을수록 느껴지는 은은한 단맛에 강태준도 깜짝 놀랐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