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양재벌 강태준-258화 (258/361)

258화 백경 분유

창밖을 지켜보던 강태준이 오재갑에 물었다.

“아후, 영화관 실적은 어땠나. 개봉도 못 보고 떠났는데 말이야.”

“어우야. 그거 엄청났죠. 그냥 여자들이 클린트 그 양반에 뿅가더군요. 판쵸가 그렇게 멋있는지 처음 알았습니다. 수도극장부터 시작해서 종로 쪽까지 돌렸는데 영화를 보기 위해 10만 명 정도가 모여들었더군요.”

“오 그래? 그 정도면 괜찮은 실적이구먼. 다른 것들은?”

“초반에 대충 찍은 것들도 본전 이상은 뽑았습니다요. 다들 밥값은 했습니다.”

“정천혁 그 양반은 어떻게 되었나? 작품은 제대로 나왔어? 제목도 바뀌었던데.”

“아 겨우 일정 맞췄습니다. 영화가 너무 늦게 나오는 바람에 원래 교차상영용으로 편성되었는데 액션이 찰지게 나왔다고 입소문이 나서요. 상영기간 끝날 때쯤에 갑자기 인원이 폭증해서 역주행을 했습죠.”

“얘들이 홍소복 따라한다고 동네방네 난리랍니다.”

시간이 촉박했던 탓에 영화 자체는 어설픈 점이 무척 많았지만 처음 보는 쿵푸액션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덕분에 상영기간이 연장되면서 컬트적인 인기를 끌기 시작했던 것이다.

“북천야행이 역주행을 한 덕분에 액션배우들 몸값이 갑자기 높아졌어요. 대학로서 좀 무술 좀 한다는 애들 하면 다 쓸어가고 있답니다.”

“이번에 차기작까지 묶어 두길 잘했네. 초기작 성적이 좋아서 다른 감독들도 자극받았겠는걸.”

“이만신 감독도 어깨에 힘이 바싹 들어갔어요. 아무래도 성수기에 배정을 받아서 그런지 부담감이 상당한가 봅니다. 이번에 어린이날 때로 개봉일을 다시 맞췄는데 군부대를 대거 투입해 찍어서 그런지 액션이 엄청 리얼하더라고요.”

“그거야 당연하지. 실탄을 쏴 가면서 촬영했는데…… 그 정도야 뽑아야 하지 않나.”

실제로 아찔한 사고가 있을 만큼 강도 높은 촬영이었지만 큰 사고 없이 끝난 게 다행이었다.

“정부 시사회에서 반응이 좋은 게 꽤 만족한 거 같습니다. 반공교육차원에서 학교에서 학생들 단체관람도 하면 좋겠다며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군요. 근데 영화관 측에서는 졸업도 그때쯤에 걸어 줬으면 해서, 그렇게 되면 상영일자가 겹칠 거 같을 거 같아서 고민입니다.”

“팀킬은 절대로 안 되지. 대관일정이 문제라면 외화 개봉일은 연말로 늦추게.”

“연말로 말입니까? 그건 너무 늦을 거 같은데.”

“뭐 빠르든 늦든 상관없지 않나. 어차피 아시아 판권은 우리가 쥐고 있으니 국내 말고 딴 곳부터 먼저 돌리는 것도 방법이야.”

졸업이야 워낙 작품성이 검증된 작품인 만큼 굳이 한국이 아닌 곳부터 돌려도 흥행 문제는 없다. 다시 평택 목장에 도착하고 난 강태준이 곧바로 풀을 뜯는 젖소들을 보며 꽤나 안심했다.

“생각보다 곧잘 적응하는구먼. 혹여 먹이를 가릴까 골치 아팠는데 말이야.”

“이쪽 인근에 이탈리안 라이글라스를 심었거든요. 가축 기호성이 좋은 풀이랍니다.”

“라이글라스라, 그걸로 되겠어?”

“귀리랑 옥수수 사료도 같이 섞어서 주려구요. 농촌진흥청에서 사일리지를 개발 중에 있거든요. 해외 전문가들이 도우미로 왔으니 사료 개발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꽤 좋은 소식이로군. 배정 농가는 정해졌나?”

“예. 사료개발이 끝나는 대로 입식을 희망하는 농가에 1두당 1정보 정도 초지를 주고 확보하게 해서 우선 입식시킬 예정입니다. 이미 대기조가 많습니다.”

“그래? 어느 정도인데 그래?”

“수원과 평택 주변의 농가는 거의 대부분입니다. 정부에서 지원금을 팍팍 준다는 소문이 나서 축산 하는 사람이라면 죄다 지원했더군요. 한 3000세대 정도쯤 됩니다.”

강태준이 휘파람을 불었다.

“그거 꽤나 많구먼. 사육 능력이 있는 낙농가 위주로 선별해 둬. 3~5두 정도 경험이 있었는지 확인해 보고. 축산 경험자들 따로 모아서 교육훈련을 시켜 보도록 하지. 성적 위주로 우선 배분하는 게 좋을 거 같아.”

“인원 선별은 물론 교육훈련까지 하려면 시간이 빠듯한데요.”

“귀한 젖소를 죽일 수야 없지 않겠나. 기본적인 사육 방법은 알고 있다고 해도, 주먹구구식이니 뭘 어떻게 먹여야 하는지 사료 배합률도 모르고 말이야.”

“하긴 그렇겠네요.”

“일단 근처에서 임대할 축사라도 알아보는 게 좋겠군. 들판에서 가르칠 수야 없는 일 아닌가.”

“알겠습니다. 그럼.”

“그리고 다음부터 젖소는 항공기로 나르는 게 좋겠어. 이렇게 옮기다가는 내가 먼저 죽겠어.”

한동안 한가로이 풀 뜯는 모습을 보던 강태준은 다시 유가공 농장으로 향했다. 우유의 냉장수송이 어려웠던 시절인지라 유가공공장도 농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지역에 있었다.

컨베이어벨트에서는 분유통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오는 모습을 구경하는 강태준.

먼저 온 노기철 이사가 그를 반겼다.

“사장님? 오셨습니까?”

“복만이는 아직 안 왔나?”

“신혼여행 가고 아직 안 들어왔지요. 한 보름은 더 머물 생각인가 봅니다.”

“거참, 뭐 그렇게 깨가 쏟아져서는. 허니문 베이비라도 만들려나.”

“허니문 베이비는 무슨, 그놈 성격 모르십니까. 일하기 싫어서 안 돌아오는 거지요.”

골이 난 광필이의 투덜거림에 강태준이 어깨 만졌다.

“남자의 질투는 추해. 임마. 부러우면 너도 빨리 가라. 휴가는 넉넉히 내줄 테니까.”

“있어도 상대가 있어야지 가죠.”

“거 좀 잘 된다 싶더만 응우옌하고는 잘 안됐나?”

“뭘 그런 걸 묻고 그럽니까 가슴 아프게. 일이나 하죠 일!”

“관심 좀 줬더니, 저건 왜 또 성질이야. 분노조절장애도 아니고.”

“봐주십쇼. 실연이란 아픈 법이죠.”

한동안 뒤를 보던 강태준이 혀를 차며 말했다.

“쯧쯧, 지 할 탓이지. 그래, 분유 판매는 좀 어때?”

“솔직히 판매량이 좀 저조합니다. 판촉을 하긴 하는데 잘 팔리지는 않는군요. 일단 인지도 낮고 가격도 애매해서 선뜻 손이 가지 않나 봅니다. 일단 기다려 봐야 할 거 같습니다.”

“가격을 내렸는데도 그래? 담양우유 놈들은 더 비싸게도 잘만 팔던데.”

“거기는 일단 입소문이 났으니까요. 게다가 시장 점유율이 무려 80프로 아닙니까.”

“그렇게 많아?”

“지지층이 거의 콘크리트더군요. 엄마들한테는 반 신앙 수준이더군요.”

담양은 국내에서 첫 유아용 조제분유를 생산한 후 줄곧 국내 분유시장 1위를 굳건히 유지했다. 선풍기 시장의 선도주자가 성운사였다면 분유시장의 패자는 담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애기들이 한번 담양분유에 맛들리면 주구장창 그거만 먹어서 엄마들도 어쩔 수 없답니다.”

“아니, 무슨 분유에 마약이라도 넣었어?

“글쎄요. 모유랑 많이 비슷해서 그런가. 애기들이 희한하게 좋아한다네요. 심지어 젖 떼는 데 쓸 정도라니까요.”

“흠…… 대단한데. 그럼 우리도 비슷하게 만들어 보지 그래?”

“그게 도통 비율 맞추기가 쉽지 않습니다. 재료가 50가지가 넘게 들어가서 조합이 무지하게 까다롭거든요. 똑같은 원료를 써도 시간과 순서, 온도에 따라서 다릅니다. 직접 시식해 보시겠습니까.”

강태준이 맛을 보니 과연 식감이 미묘하게 다른 것이 확실히 차이점인 듯했다. 첫 번째 제품이 뭔가 끈적끈적한 느낌이었다면 두 번째는 미음처럼 묽었던 것이다.

“이게 뭔 차이야?”

“제조 온도만 약간 달라진 겁니다. 그러니까 변성된 성분이 엉겨 붙어서 이게. 환장할 노릇이죠.”

“어렵구먼 이거.”

“단백질 성분 비율을 모유와 유사하게 하려고 유청단백질을 강화하려고 하고 있습니다만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분유 소비자 자체가 지극히 안전지향이라 한번 검증된 제품을 이기기가 어렵습니다. 제품 선택기준이 홍보나 판촉이 아닌 주변의 추천과 입소문에 의해 상당 부분 좌우되거든요.”

“아무래도 애가 먹는 것이다 보니 선택에 신중하다는 이야기군.”

“예. 일단 인지도 확보가 급선무인 것 같습니다. 아무리 품질이 좋아도 일단 부모들이 먼저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니까요. 최근 개성우유가 금방 분유 사업을 포기했던 것도 마케팅이 부족해서입니다.”

“하긴 자식을 마루타로 삼을 부모는 없지,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

“제 생각에는 무조건 수요부터 늘려야 합니다. 기존 지분을 뺏어오는 것보다는 시장 자체를 넓히는 게 관건입니다.”

강태준은 고심에 빠졌다. 당시 엄마들이 대부분 모유수유를 했던 것도 분유 시장에 진입장벽이었다. 엄마들이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아기에게 젖을 물릴 정도니 모유수유를 하지 않는 것이 이상했던 것이다. 인식을 바꾸지 않으면 답이 없다. 불현듯 강태준은 문득 어릴 적 TV에서 보았던 우량아가 그려진 캔 광고를 떠올렸다.

“맞다, 일단 우량아 선발대회라도 개최해 보는 게 어떻겠나 그러면?”

“우량아 선발대회요?”

“그래. 분유가 아이 성장에도 도움이 된다고 알려진다면 사람들도 소비에 적극적으로 변하겠지.”

“그게 통할까요?”

“옆집 아기가 분유를 먹는데 자기 애만 안 먹일 수도 없는 노릇 아냐? 자기가 허리띠를 졸라매도 애들 먹이는 데만큼은 뒤처지고 싶지 않겠나?”

“오오, 그거 그럴듯한데요. 독심술 해도 되겠습다요.”

부모들 사이에서 일종의 경쟁심리를 도입하는 소리에 다들 귀가 솔깃한 표정이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오재갑이 신중론을 펼쳤다.

“그거 좋은 생각입니다만 솔직히 우량아 선발대회 같은 건 지역적으로 하고 있지 않습니까. 효과가 없지는 않겠습니다만 딱히 큰 이슈가 될 것 같지는 않은데요.”

“그거야 지역단위로만 그치니 그런거고. 세간의 이목을 끌만큼 성대하게 해야지. 이왕이면 전국 단위로 가면 좋겠어.”

“전국단위라면 어느 규모를 말씀하시는지?”

“시, 도를 거쳐 3개월짜리 어떤가? 이왕이면 각지에서 선발된 아이들을 뽑아 예선을 진행하고 본선부터는 스튜디오에서 전국 생중계로 가는 거야. 국민들도 건강한 아이들이 우량아로 선발되는 걸 보면 나름 대리만족 할 수 있지 않겠나?”

전국대회를 통합하자는 구상이었다.

“호오, 그럴듯하군요. 다만 크게 벌이면 돈이고 인력이 만만찮겠습니다만…….”

“기존에 있던 지역 대회를 적극 활용해야지. 각 단체랑 긴밀히 협조해서 교육부 쪽에서 인력 보조를 받고 장학사업과 연결시키면 꽤 호응이 좋을 거 같은데? 안 그렇겠나?”

“그럼 몇 달만 있으면 어린이날이니 빨리 서둘러야겠군요.”

“그렇지. 나는 의원이나 지역 행사랑 병행할 수 있는지도 알아봐야겠어. 장성량 의원이랑 갑슨 씨에게 따로 연락해 봐야겠군.”

일단 판을 키우려면 스폰서를 포섭하는 게 우선이다. 강태준은 일단 협력사인 천경물산을 방문해 아기옷 광고를 미끼로 설득에 나섰다. 유아복 시장에 관심이 많은 천경물산이 넘어오자 어디서 소식을 들은 것인지 오성의 이재무까지 몸소 강태준을 찾아왔다.

“자네 나한테 앙금이 남았나? 왜 나는 빼놓고 하는 건가?”

“아니, 제가 언제 그랬다고 그러십니까?”

“그러면 나만 왕따시키지 말고. 좀 끼워 주게나.”

마침 실적 문제로 신경이 날카로워졌던 이재무가 우격다짐으로 끼어들자, 오성과 관계된 협력업체들도 하나둘 손을 보탰다.

그렇게 세 개의 회사가 메인 스폰서로 나선 가운데, 우량아 선발대회의 막이 올랐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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