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7화 내가 젖소
호탕하게 웃던 박정명이 이윽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흠흠, 그래그래. 이번에 신갈행 고속도로가 완공되었다는 소식 들었나.”
“예. 들었습니다. 6개월 만에 고속도로를 뚫다니 대단하더군요.”
“모두가 각하의 은덕 탓이 아니겠습니까?”
“거기 내 공이 어디 있겠나? 다 서독에 파견된 광부들, 간호사들의 피땀을 담보로 만들어진 것인데 그들이야말로 애국자들이지 그래.”
“하지만 각하의 결단이 아니었다면 이 일이 빨리 추진되었겠습니까? 야당에서 반대도 많았던 걸로 아는데 말이죠.”
“좋게 봐 줘서 고맙군. 사실 내 마음이 급해서 무리를 하긴 했지. 서독 뤼브케 대통령의 초청으로 갔을 때 아우토반을 봤거든. 그게 얼마나 부럽던지. 도로가 생겼으니 이제 우유 유통을 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셈일세.”
군용 막사로 들어간 박정명은 책상에 펼쳐진 지도를 보여 주었다. 국립종축원이 위치한 충남 천안, 한독낙농시범목장이 있는 안성지역. 한뉴시범목장이 위치한 경기 평택까지.
삼각형으로 엮여 있는 지역에 앞으로의 계획이 세세히 적혀 있는 것을 보니 오래 전부터 꽤나 구체적으로 구상했음을 알 수 있었다.
“낙농삼각지라니. 이게 청사진이군요.”
“네네. 최근에 뉴질랜드의 홀리오크 수상과 한뉴 시범목장 설립에 대해 합의했지요. 협정이 발효되면 선진 낙농 경영과 지도훈련이 개시될 겁니다.”
“그거 아주 고무적인 소식이네요.”
“그래서 말인데 강태준 자네가 낙농공사(KDBC)를 인수하면 어떤가?”
뜻밖의 제의에 강태준이 물었다.
“네? 한국낙농가공주식회사는 농어촌개발공사 산하 국영기업 아닙니까? 저희 같은 무지렁이보다는 그쪽에 전문가들이 많을 텐데…….”
“전문가는 무슨. 소 한 마리 키워 본 적 없는 사람이 태반인데, 내가 영 신뢰가 안 가서 말일세. 통조림 사업이 좌초될 뻔한 걸 보니 안심이 안 되더군. 그리고 여기 고 차관의 의견도 나랑 비슷하고 말이야.”
“그래도 저희 말고 유가공조합도 있고, 다른 업체들도 많지 않습니까?”
그 말에 고 차관이 씁쓸한 듯 고개를 저었다.
“근래 유가공조합이 우후죽순 생기고는 있지만, 아직 멀었죠. 기술 보급은 물론, 우유를 가공해 유통할 수 있는 인프라가 갖춰야 하는데 그걸 추진할 만한 능력과 자본력이 없어요. 그렇다고 정부가 예산을 전부 지원해 줄 수 있는 입장도 아니고 말입니다.”
“그래, 강 사장. 백경이 식품 제조기업으로 국내 최정상이지 않나, 유제품처럼 부패하기 쉬운 유제품을 관리할 수 있는 기업은 내 아무리 생각해도 백경식품이 최선이라 생각하네.”
“각하 고평가는 감사하나 그 부분은 재고해 주실 수 없겠습니까? 저희 백경은 유제품 관리와 관련한 경험이 없습니다.”
“허허 임자같이 패기 넘치는 사람이 뭘 그렇게 자신이 없나. 목장 조성에 필요한 기자재와 기술자는 서독에서 파견해 줄 테니. 인력 부족은 뉴질랜드에 훈련생을 파견해 연수를 받도록 하면 될 것이야.”
“그러게요. 우리 강 사장님만큼 사업수완이 있는 분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실제로 강태준이 베트남에 식품을 독점 공급하기로 합의하면서 통조림 때문에 식중독을 호소하는 병사의 수가 극단적으로 줄어들던 것이다.
하지만 사업자 입장에서 볼 때 담보나 채무 상환 능력이 적은 농민을 대상으로 영업하는 건 위험부담이 큰 만큼 강태준 입장에서는 무리수를 벌이고 싶지 않았다.
“저보다는 다른 사람을 알아보심이 어떻겠습니까? 현재 저희 백경은 벌여 놓은 사업을 재정립하기에도 벅찬 상태라 당분간은 추가 사업을 벌이기는 좀…….”
“어허, 임자. 이게 나 잘되자고 하는 일인가 국민 보건 향상과 장기적인 식생활 개선을 위한 대업의 일환이지. 난 자네한테 기회를 주는 걸세.”
“예. 강 사장님. 유제품 공급은 국가의 장래와 아이들의 미래를 위한 일입니다.”
“그래 단순한 장사치랑 사업가가 다른 게 뭐겠나. 돈을 벌었으면 무릇 국가 발전에 이바지해야 하는 법 아니겠는가?”
은근한 압박에 강태준도 더는 거절할 수 없었다. 한숨을 쉰 강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저도 어쩔 도리가 없네요.”
“오오. 수락하는 건가? 그럼?”
“네. 뭐 이왕 이렇게 된 거 해 보겠습니다. 근데 목장을 운영하려면 젖소가 필요한데 소는 어디서 구합니까?”
“일단은 캐나다에서 수입할 예정이라네. 세계은행(IBRD)로부터 낙농차관을 도입하기로 했는데 구체적인 부분은 아직 미정이야. 사실 담당팀 지금 막 급조한 상황이지 그래.”
“아니 그럼, 젖소까지 제가 알아서 다 가져오란 말씀이십니까?”
“뭐 뭣도 모르는 정부관료가 훈수 두는 것보다야 자네가 직접 하는 게 낫다고 보는데. 원래부터 교섭은 그쪽이 전문 아닌가?”
강태준은 기가 막혔다. 이건 완전히 맨땅에 헤딩하는 꼴 아닌가.
하지만 잠시 후, 강태준은 마음을 고쳐먹었다.
어차피 맡기로 한 일, 이번 일이 오히려 새로운 돌파구가 될 수도 있다.
“좋습니다. 해 보지요.”
* * *
해가 바뀐 68년의 봄. 목포항.
하늘은 청명하고 해는 이글거리는 하루. 저 멀리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가운데 쾌속선 한 척이 다도해와 내륙을 연결하는 항구에 닻을 내린다.
큼직한 화물선이 도착하자 얼굴이 새까맣게 탄 일행이 하나둘 뭍을 밟았다.
가슴에 낙농협회 명찰을 단 사람들은 육지를 보고 감격한 듯 몸을 떨었다.
“드디어 육지로구먼.”
“허어 욕봤네. 김 서방. 최씨도 잘 지냈나?”
“아이구야. 거의 뒈지는 줄 알았구먼유. 무슨 놈의 날씨가 그리 험한지.”
감격의 가족 상봉을 한 선원들이 서로를 얼싸안으며 해후를 나누었다. 뒤이어 정박을 마친 배 위에서 700마리가 넘는 점박이 소들이 우루루 몰려나왔다.
무우~ 무!!!
뭍으로 올라온 소들은 우렁찬 울음을 내뱉는 소리. 고개를 흔들며 해방감을 만끽하기도 잠시 녀석들은 곧장 마중 나온 트럭에 실렸다. 강태준이 내리는 것을 본 오재갑이 기다렸다는 듯 서류 가방을 들어 주었다.
“고생이 많으셨나 보군요. 예정보다 좀 늦으셨습니다.”
“아, 힘들었네. 캐나다 축산놈들이 아주 양아치더구만.”
“왜요?”
“가격 흥정을 하고 돌아오려는데 인도한 730두 중에 거의 절반이 병든 소였지 뭐야. 나머지 절반도 늙어빠져서는 육우용 소를 가지고 은근슬쩍 떠넘기려는 걸 수의사가 발견해서 한바탕 뒤집어졌지 뭐야.”
“허허, 눈 뜨고 코 베어 갈 놈들이구먼요. 그걸 가만두셨습니까?”
“당연히 계약 파기한다고 깽판 쳤지 그래. 처음에는 오리발을 내밀더니 로이어가 나와 젖소 건강상태를 검증하겠다고 하니 곧장 꼬리를 내리더구만. 젖소를 18개월 미만으로 교체하고 한 두당 단가 산정해서 일일이 확인했는데 무지 피곤하더군.”
“에휴, 그게 끝이 아닙니다. 중간에 엔진이 고장 나는 바람에 적도 부근에서 표류까지 했으니 정말 큰일 날 뻔했어요.”
춘삼이가 학을 떼듯 고개를 젓자 오재갑의 표정이 달라졌다.
“네? 그게 실화입니까?”
“엘리뇨 때문인지. 무역풍이 반대로 불었는데 그래서 항행이 늦어졌거든. 급한 마음에 속도를 내다보니 엔진이 탈이 났지 뭔가. 엔진 고칠 때 하필 냉동창고까지 고장 나 버려 얼마나 막막하던지. 소들은 쪄 죽는다고 난리지 개중 몇 마리는 뭘 잘못 쳐먹었는지 설사까지 지리면서 온갖 지랄병은 다 하더구만. 여기 춘삼이도 배멀미로 실신해 쓰러졌다가 바닷물로 위세척까지 했다니까.”
“아이구, 아파서 골골댄 게 뭐 잘한 일이라고. 민망합니다요.”
“아니요. 우리 춘삼이 고생 많았네. 한국인 수의사 모집하랴, 선원들 성질 받아 주랴 중간에 끼어서 고생했지. 다음부터는 돈이 더 들더라도 항공편으로 나르는 게 낫겠어.”
“그러게 말입니다. 그래도 폐사한 소가 몇 마리 없어서 다행입니다.”
20일이 넘도록 계속된 적도 항해에 반쯤 파김치가 되었으니 기적에 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강태준으로서도 뿌듯한 일이었다.
“그러게. 떼로 죽어 나갔으면 얼마나 실망했겠나. 큰일 날 뻔했어.”
“아주, 귀한 젖소들이구먼요. 그래서 총 몇 마린가요?”
“어디 보자, 얼마나 되나 738마리?”
머리수를 어림해 보던 오재갑이 숫자를 다시 셈에 보았다.
“어, 원래는 730마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8마리는 재협상과정에서 입막음조로 받았고 몇 마리는 오는 중에 출산했지. 임신한지도 몰랐다는데 글쎄 오는 중에 배가 불러오지 뭐겠나. 한 놈은 역산에 미숙아로 태어났는데 그런데도 멀쩡히 잘 큰 거 보면 명줄이 아주 질겨.”
“오, 그거 보통 녀석이 아니군요. 어디 있습니까?”
“아, 바로 저 녀석일세 그래.”
마침 수의사와 함께 내린 새끼 하나가 쭐레쭐레 따라왔다. 목에 앙증맞은 종을 단 녀석이 어미소에 착 붙은 채 나타나자 사람들은 모두들 미소를 지었다.
“귀엽네요. 이쁘게 생겼는걸.”
“오, 미숙아라지 않습니까. 근데 제법 덩치가 큰데요. 살집도 있어 보이고.”
“저래 봬도 생후 이 주밖에 안 된 녀석이라네. 이쪽에서 우르프라고 이름도 붙여 줬다네.”
“암소 같은데……아주 귀엽게 생겼네요.”
신기한 듯 송아지에게 다가선 일행이 녀석을 유심히 살폈다.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없는 듯 송아지는 순하기 이를 데 없었다. 혀를 낼름거리는 소가 분홍색 코를 핥는 모습에 광필이가 머리를 쓰다듬으려 하자 어디선가 폴짝 나타난 고양이가 손을 할퀴었다.
캬야!~
“어이쿠야!! 뭐…… 뭐야?”
횡액을 당할 뻔한 광필이가 풀쩍 물러섰지만, 고양이는 여전히 그르렁거렸다.
뻣뻣하게 털을 곧추세운 녀석이 경계심을 보였다.
“아니, 이 괭이새끼가 어딜!!”
“자자. 성질 내지 말게. 이 녀석이 처음 출산징후를 알아챈 녀석이거든. 그때부터 뭔 정이 들었는지 저렇게 보호자 행세를 하는군.”
초롱초롱한 눈망울의 송아지가 고양이를 핥았다. 자꾸 핱아 대는 송아지가 귀찮을 법도 하지만 고양이는 별로 싫은 내색이 없다.
자꾸 젖어드는 털이 못 봐줄 만큼 축축해지기 전에 강태준이 고양이를 번쩍 안아 들었다. 반쯤 털이 젖은 고양이가 심술궂은 표정으로 광필이를 노려보았다.
“아니, 지 밥 준 놈도 못 알아봅니까. 서운하게.”
“요놈은 호야가 아니라 호야 손주야. 임마. 이놈은 처음 본 놈일걸.”
“어 진짜요? 똑같이 생겼는데?”
“붕어빵이지? 그래서 이름은 호돌이라고 지었지. 이봐 인사해. 호돌아.”
“냐옹!!”
광필이가 다가가자마자, 앞발을 흔들어대며 버둥거리는 녀석.
쏜살같이 도망간 녀석이 춘삼이 뒤에 숨더니 고개만 빠꼼이 내밀고 이쪽을 보았다.
“아무래도 니랑 친하게 지내기 싫은가 보다.”
“칫, 지만 취향 있나. 나도 너 같은 놈 싫다.”
“쓸데없이 기싸움 하지 말고. 일단 사진부터 찍자 그래.”
젖소 하역작업을 마친 일행은 전용 수송선에 올라 주한 미대사관 농무관과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김삼현과 김신제를 비롯해, 미리 불러 두었던 기자단이 인터뷰를 진행했다.
홍보차 진담과 과장이 섞인 대담이 끝나자, 강태준은 곧장 목장행에 올랐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