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5화 폐기물 처리
다만 전쟁으로 돈을 버는 강태준의 입장에서는 좀처럼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다들 순박한 사람들일 텐데. 전쟁이란 게 참…… 사람 못쓰게 만드는군요.”
“그러게요. 그래도 뭐 농사를 지을 수 있어서 기쁘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렇게라도 흙과 가까이할 수 있어서 말입니다. 놀릴 뻔한 땅인데 이렇게 활용해서 좋다고 오히려 저희한테 고마워하시는 분들이 많아요.”
그 말을 대변하듯 농부들의 표정은 모두 환하기 그지없었다. 가슴까지 풍요로워지는 기분을 만끽하던 강태준이 안연복에 물었다.
“아참, 현지 음식 개량은 잘 되고 있습니까?”
“예. 생각보다 한국이랑 베트남이 공통점이 많더군요. 기본 재료가 좀 다르기는 하지만 기본 베이스 자체가 한국 음식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식성이나 입맛이 비슷한가 봅니다.”
“독촉하고 싶진 않지만 서둘러 주십쇼. 개발 종료되는 대로 군부대에 납품 타진할 생각이라서요.”
본디 베트남인들은 김치처럼 맵고 신 음식을 좋아한다. 절임식 채소인 즈어 머이이나 생선으로 만든 느억맘도 한국인의 입맛에 잘 맞는 것이 그 근거.
강태준은 제품 개발이 끝난 즉시 시식용 식재를 장병들에게 돌렸고, 제대로 된 음식 맛을 본 장병들이 부식과 식자재 개선을 요구하며 미군 쪽에 간접적으로 클레임을 넣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얼마 뒤, 주월미군사지원사령부에 파월 한국군에 보급되는 식품이 미군 식품위생 기준 DeCA (Defense Commissary Agency) 기준 이하로서 통조림이 녹이 슬어서 물건이 파손되고 먹기가 어렵다는 불만사항이 보고되었다.
-파월 한국군 보급 장교들이 짜고, 통조림 업체로부터 뒷돈을 받는 정황이 의심되며 한국군 내부에서 부실한 식사를 강요하여 식중독이 빈발하고 있습니다.
소식을 들은 주월미군은 CID를 통한 수사에 착수했고, 스튜어트 중령을 위시한 정보장교들이 올린 실태보고서에 미군에서도 의심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거 한국 정부에서 또 돈이나 떼먹으려고 한 거 아닌가?’
파병군 내 납품되는 품질이 멀쩡한 제조업체가 납품 심사에 탈락하고, 불량식품이 공급되는 정황이 확인되자 그들로서도 꺼림칙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주월미군사지원사령부는 한국정부에 문제의 심각성을 경고했다.
‘미국에서 클레임이라니 음식에 대체 무슨 짓을 한 건가?’
국방부에서는 이 사건을 그대로 넘길 리 만무했고, 그렇게 맨 처음으로 희생양이 된 것은 무려 오성그룹이었다. 통조림 생산에 막 박차를 가하던 이재무는 갑작스런 철퇴에 경악했다.
“주월미군 쪽에서 납품 보류결정을 내렸다니 그게 뭔 소리야.”
“통조림 품질문제가 심각해서 이대로 납품을 허가하기 어려울 거 같답니다. 사령부에서 관계 규정에 따라 미 국방성이 요구한 요구사항을 맞추라고. 통보했습니다.”
“그럼 기준이 상향된다는 소리야?”
“예. 살균상태와 식품의 영양 배합이 식약청 기준치를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더군요.”
현실적으로 지금 단계에서는 물건을 팔 수 없다는 소리와 동의어다. 비서의 보고를 들은 이재무가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니, 국방성이 이딴 것까지 나선다고? 그럴 거 같으면 처음부터 커트치든지. 지들이 먹을 것도 아닌데 시시콜콜하게 간섭질이야?”
“어찌 되었던 미국 전쟁자금으로 지원하는 보급품이니 이제부터 제대로 확인을 해야겠답니다. 하역 시부터 전량 검수할 것이니 불량품이 있으면 폐기하거나 회수조치를 하라더군요.”
그 말에 불편해진 이재무의 눈썹이 꿈틀댔다.
“아니 그게 말이 되나? 원거리 수송하면서 변질되거나 배송이 늦어지면 그것까지 반품을 받으라고 누군 땅 파서 장사하나?”
“아무래도 강태준이 그 자식 때문인 것으로 추론됩니다. 월남 현지에 식품 공장을 만들어서 신선식품을 대놓고 공급하고 있는데 식품에 문제가 생기면 생길 경우 전량 반품한다고 합니다. 덕분에 다른 납품업자들도 곤욕이라는군요.”
“아니, 강태준 그 자식은 대체 뭔가. 식품 수출면장도 못 받았는데 어떻게 월남에서 납품이 가능한 건데?”
“위탁생산 방식으로 제조한 물품을 벤 캠프사가 판매원 협약을 맺어 미군에 납품하고 있답니다. 통조림은 아예 원가보다 낮은 가격에 공급하고 있다는군요.”
“아니 정말인가?”
“그게 되나? 깡통 한 개의 원가가 15원인데. 강태준이 미군 부대를 통해서 공급하는 통조림 가격은 고작해야 10원에 불과한 수준이랍니다.”
“무슨 짓이야 그건. 그건 손해를 봐도 그냥 팔겠다는 심보 아닌가?”
“그뿐만이 아닙니다. 백경에서 군납하는 식품 종류가 어마어마합니다. 저희가 현지 미군 매장에서 식품품목을 확인해 봤는데. 김치랑 꽁치통조림에 3분 레토르트 카레, 어묵 파스타, 라면까지 없는 게 없습니다.”
통조림 수출과 관련한 상황보고를 받은 이재무는 망연자실했다.
깡통 원가에 보관비, 수송비, 부대비용을 포함하면 추정한 1식의 원가는 1백40원. 남은 원재료를 사료로 전용한다고 해도 단가를 맞추기 불가능한 금액이었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최근 깡통 원재료값이 죄다 상승해서. 무주석 강판, 알루미늄까지 주석 코일, 도료랑 접착제까지 단가가 계속 오르고 있어요. 백경에서 수입되는 원자재를 족족 죄다 사들이는 바람에 지금 국내시장에 물량이 풀리지 않고 있습니다.”
“강태준이 그 자식이. 설마 같이 죽자는 건가.”
마음이 급해진 이재무가 곧장 월남으로 향했다. 퀴농과 달랏 일대를 이 잡듯 뒤진 후에야 겨우 강태준과 접견한 이재무는 보는 즉시 언성을 높였다.
“강 사장! 나랑 이야기 좀 하게! 나한테 대체 왜 이러나?”
“뭘 말입니까?”
“통조림 말이야 통조림, 지금 그쪽 심사 떨어졌다고 우리한테 화풀이하는 거 아닌가?”
“아 그거? 하와이 수출품목 일부가 흘러 들어간 것뿐이지 애초에 의도한 건 아니잖습니까?”
“지금 나하고 농담 따먹기 하나? 자네가 이따위로 하면 우리 입장이 뭐가 돼?”
“아니, 부사장님 우리도 먹고는 살아야지 않습니까. 설비 투자 해 놓고 수출길이 막혔는데 그럼 어떡합니까. 손해를 벌충하는 측면에서라도 만들어 놓은 건 팔아야지 않겠습니까?”
강태준이 그렇게 나오자 성질이 난 이재무가 버럭 성을 냈다.
“강 사장! 당신 지금 큰 실수하는 거야. 이렇게 편법이나 쓸 거 같으면 정부는 왜 필요한가? 이런 식이면 곤란하지. 나랑 해 보자는 건가?”
팔을 걷어붙이며 열을 내는 이재무에 강태준이 인상을 쓰며 서류를 내려놓았다.
“그럼 그러시던지요.”
“뭐야?”
“우리가 손해를 보면서까지 이러는 이유가 뭔지 아실 거 같은데요? 그쪽도 같은 상황이면 어떻게 할 거 같습니까?”
“강 사장 자네 정말?”
“어중간하게 머리 굴리지 말고 입장을 분명히 하십쇼. 대신 식품업을 선택하신다면 전자산업 쪽도 완전히 끝입니다.”
통보와 같은 언사에 이재무가 이를 갈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쯤에서 발을 빼는 건 본인에 좋을 것이 없었다. 불쑥불쑥 나오려는 화를 참으며 이재무가 물었다.
“그래서 원하는 게 뭔가?”
“오성 소속 계열사랑 자회사를 합치면 열 개도 넘지 않습니까? 이번에 허가받은 회사만 5개네요. 오성식품, 오성통조림, 오성제당, 오성푸드, 오성사이다까지. 그럼 저희한테 하나쯤은 양보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지금 나 보고 회사를 내놓으라고?”
“아니면 사생결단으로 가시던지요. 저희는 여기서 더 잃을 것도 없으니.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끝까지 싸울 것인가 아니면 이쯤에서 타협할 것인가. 강태준의 통보에 한동안 고심하던 이재무. 자존심과 실리 사이에서 갈등하던 이재무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좋아, 대신 가격은 제대로 쳐 주는 거겠지? 나도 거기까지는 양보 못 해.”
“물론, 저도 그 정도 양심은 있습니다.”
* * *
며칠 후, 강철완은 동생으로부터 급박한 연락을 받았다.
“아니 뭐라고? 오성이 벌써 배신을 때렸다고?”
“그래서 지금 난리가 났습니다. 지들만 해먹을려고 작정을 했는지 아주 뒤통수를 때렸다니까요. 거기에 원자재값이 무지하게 뛰어서 여기 완전 비상이에요.”
“비상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철자재 값이 두 배 이상 올랐는데 상사 놈들이 물량을 안 내놓습니다. 창고에 쟁여 놓은 게 확실한데 안 주니 미치고 환장합니다. 이억기 그놈아도 저한테 해결하라고 눈치를 얼마나 주는지.”
“니한테? 감히? 아니 이런 그지 같은 것들을 봤나?”
“부탁드려요, 형님. 저도 눈치 보입니다. 하루죙일 징징대는 꼬라지가 아주 피가 말려요. 이게 살겠습니까?”
“알겠다. 어떻게든 내가 해결해 보도록 하지.”
‘이런 이억수 썩을 놈 자식이…… 그냥!’
강철완은 속으로 괘씸하면서도 골이 지끈거렸다. 가타부타 호언장담은 했지만, 월남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제한적인 수준. 무엇보다 백경에서 오성 계열사를 인수해 버렸으니 수출길을 막아 강태준을 엿먹인 보람이 전혀 없지 않은가.
‘젠장할, 어디 빨대라도 쑤셔 봐야 하나?’
아무리 생각해도 뾰족한 수가 보이지 않자 강철완은 답답해졌다. 환기도 할 겸 창고에 들른 그가 담배를 꺼냈다. 그때 문득 물품 창고 한 켠이 허전해진 것을 확인한 그의 표정이 급변했다.
“이봐 보급관! 여기 있던 김치통조림들 이거 다 어디 갔어?”
“아 그거 말입니까. 백경운송에서 불량품 폐기하겠다고 전부 회수해 갔는데요?”
“뭣이라… 회수? 누구 맘대로?”
“그 그게…… 이미 허가했다고..”
“이 새끼가 장난하나. 내 허가 없이 보급품을 옮겨? 죽고 싶어 환장했나? 어디야?”
“예?”
“어디다 버렸냐고?”
성난 강철완이 녀석을 닦달하니 땀을 뻘뻘 흘리던 보급관이 떠듬거리며 폐기장소를 알려 주었다. 서둘러 지프를 타고 목적지로 가 보니 아니나 다를까, 크레인으로 커다란 구덩이를 판 곳에 통조림을 일일이 따서 내용물을 버리는 놈들이 보였다. 열받은 강철완이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강 사장! 이게 뭐하는 짓인가?”
“아니 보면 모르십니까? 음식물 쓰레기 갈아엎고 있지요. 어후 냄새!”
그러자 맞장구를 치듯 옆에 있던 최 중사가 큰 소리로 떠들었다.
“그러게요. 어째 이딴 걸 사람을 먹이나. 사료로도 못 쓸 개밥을…… 아니 개도 이런 건 안 먹겠네.”
“뭐야? 이 짜식이?”
“아니 장병들이 불쌍해서 말입니다요. 이역만리에서 이런 불량품이나 까드시고 계셨다니 아주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요.”
“아니, 그렇다고 자네가 뭔데, 허락도 없이 먹을 걸 버려?”
꼬치꼬치 따지는 강철완에 이번엔 광필이가 이죽거렸다.
“아니 이게 어딜 봐서 먹을 만한 식품입니까, 강 참모장님, 눈 있으면 보세요. 냄새도 맡아 보시고. 완전 납덩이더구만. 이런 걸 장병들에 먹였다간 속병 날거이 뻔한데. 중금속 중독이라도 돼서 몸 망가지면, 그땐 그쪽에서 책임질 겁니까?”
“군이란 건 상명하복으로 움직이는 곳이야. 군대에 규율이 왜 있나? 난 이거 용납 못 해. 남은 물건. 다시 제자리로 갖다 놔. 폐기한 물량은 정식으로 교환 요청하겠네.”
“아, 그건 곤란합니다. 저흰 이미 주월한국군수사령부에서 보낸 공문대로 처리 중이라서요. 따지려면 군수사령부에게 가서 따지십쇼. 일하는 데 방해하지 마시고.”
“뭬야? 이 자식이 감히!”
“참모장님…… 죄송하지만 그건 어렵겠네요. 그냥 버렸다간 베트콩 놈들이 부비트랩으로 쓸지도 모르잖습니까. 이렇게 폐기하는 게 여러모로 좋을 거 같은데 아, 전투 안 나가 보셨죠. 모르실 거 같아서 드리는 말씀이니 오해 마시고…….”
“이 망할 자식이!! 감히!”
조롱에 눈에 불이 붙은 강철완이 권총을 겨누는 순간, 움직이는 핸더슨.
경호를 맡은 핸더슨이 강철완에 총을 겨누자 분위기는 얼음장보다 싸늘해졌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