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4화 현지 특송
수원의 발해식품공장.
미군의 원조를 받아 만들어진 과즙 생산공장 안.
널찍하게 펼쳐진 공장 밖으로 유실수들이 널려 있다.
잠시 후, 밖까지 이억수의 기괴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하하. 강태준 그 자식 지금 속이 문드러지겠지요. 그간 통조림 사업에 대대적으로 투자했는데 그게 완전히 어그러져 버렸으니.”
“하하. 이거 다 그쪽에서 설계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콩고물만 떨어질 줄 기다리고 있었을 텐데. 얼마나 속이 쓰릴지. 안 봐도 훤합니다.
“세상에는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기 마련이죠. 평소 그렇게 나다더니, 언젠가 큰 코 다칠 줄 알았습니다.”
앞머리가 듬성한 강철완이 훤해진 이마를 쓸었다. 오성의 이재철이 실각하면서 후원자를 잃어버린 강철완으로서는 그간 강태준에게 유감이 적지 않았다.
덕분에 이번 일이 앓던 이가 빠지는 기분이었던 것이다.
“그보다 오성을 설득하다니. 강태준 그놈이 어지간히 미움을 샀나 보군요.”
“원래 거래란 냉정한 법 아니겠습니까. 이번에 주제파악을 하고 나면 좀 잠잠해지겠지요. 그보다 통조림 품질은 괜찮겠지요?”
“염려 마십시오. 한국농대 농화학과 발효 미생물 연구팀이 전부 투입되었습니다. 국내 최고의 브레인들이 들어와서 힘을 모았으니 문제는 없을 겁니다.”
“생산에 차질은 없을 거라 믿어도 되겠습니까?”
“염려 마십시오. 본 생산은 인천에 있는 원예협동조합에서 맡을 예정이고 거제 부평공장서 최신예 설비도 추가로 들여오도록 했습니다. 안 되면 인력을 갈아서라도 어떻게든 만들어 낼 테니 염려 마시지요.”
“뭐 노파심에서 하는 말이지만 이 부분은 대통령께서도 특히 주의를 기울이고 있을 만큼 국가적인 관심사항입니다. 혹시라도 문제가 불거지면 곤란합니다.”
“걱정 마시라니까요. 문제없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강철완은 돌아가기 전에 거듭 당부했다. 강철완이 사라지자마자 훈훈했던 분위기는 일순간 돌변했다.
“퉤, 대머리 자식이 젠체하긴. 돈은?”
“트렁크에 실어 두었습니다. 거 돈 엄청 밝히는 게 절대 사양하는 법이 없군요.”
“크게 될 놈이야. 애초에 저런 인간이 빨리 승진하는 법이지.”
아직 장군도 되지 못한 풋내기한테 숙이는 것이 못내 자존심 상할 법하지만, 옥관열로부터 당부의 말을 들은 만큼 꽤나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보다 형님, 정말 괜찮겠습니까. 통조림 개발 그거 말입니다. 최소한 3개월은 보존되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맞지.”
“근데 지금으로서는 1달도 안 되어 부풀어 오르던데. 수출시한 내에는 도저히 개선이 불가한데 말입니다.”
그러자 이억수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답했다.
“왜? 보존이 정 안 되면 방부제라도 털어 넣으면 되잖아.”
“그게 식약처에서 가열살균 방식으로 바꾸라고 지침이 내려왔거든요. 섭씨 30도 고온에서 한 달가량 신선도를 유지해야 한다고…….”
“아. 개 귀찮은 시키들. 그럼 일단 대충 만들어서 납품해. 문제 있으면 나중에 개선하면 되니까.”
“예? 그런 무슨 말씀입니까? 그러면 정부 위생기준 지침이랑은 반대인데.”
“어디 건방진 것들이 병사 놈들이 군에서 반찬 투정을 하나. 주는 대로 처먹으면 될 것이지. 우리 때는 주먹밥이랑 미숫가루만 먹고 싸웠는데 말이야.”
군대는커녕 총 한번 안 들어 본 사람이 할 소린가. 형이 하는 말이었지만, 황당하기 그지없는 이억기였다.
“형님, 먹는 걸로 장난치면 큰일 납니다. 등에 칼 맞아요.”
“이런 병신이 겁대가리는 많아 가지고는. 내가 만들었나. 지들이 어쩔 건데?”
“강철완이 동생은 어쩝니까?”
“그냥 어디 암데나 쳐박아둬. 월급만 처먹는 새끼가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꼬라지는 못 보니까.”
“근데 강태준이 그 인간이 제대로 물류 배송을 할까요? 분명히 빈정이 상했을 텐데.”
“그러면 더 좋지 않나.
“짜슥아. 그럼 더 좋지 뭘 그래?”
“네”
“물류 배송이 지연되면 배송이 지연되면 핑곗거리가 생기는 셈이지. 그쪽에 책임 있다고 전가하면 그만이니까.”
“아! 그렇긴 그렇겠군요.”
“그러니까 쓸데없는 망상하지 말고 수출일정에 맞춰서 그냥 만들기나 해.”
그렇게 급조된 통조림이 배송되기까지는 고작해야 4개월도 걸리지 않았다.
통조림 도착 소식을 들은 주월한국군사령관 역시 김치를 받고 크게 감격했다.
"너희들이 기다리던 김치가 왔다!”
“오오. 김치 만세!!”
장병들은 김치가 도착했다는 소식에 모두 기대감에 차 있었다. 기름진 것도 하루 이틀이지, 다들 속을 느글느글하게 하는 양식에 질려 있었던 찰나였다.
하지만 뚜껑을 개봉하는 순간, 가스와 함께 튀어나온 꾸릿꾸릿한 향기에 모두들 얼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아니 이게 뭐야?”
“이게 이게 녹물이야, 핏물이야? 뭐야?“
“이거 상한 거 아닌가?”
냄새를 맡아 본 누군가가 헛구역질을 했다. 눈앞에 펼쳐진 것은 녹물과 김칫국물이 뒤섞여 시큼한 냄새를 풍기는 무언가였다.
김치의 높은 산도를 계산하지 못한 결과 대만해협을 건너면서 깡통이 부풀어 올랐고 장병들에게 전달되기도 전에 터져 버렸던 것이다.
통조림 상태를 확인한 장병들은 실망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사령관님, 이게 그냥 폐기물이지, 어딜 봐서 김치입니까?”
“아니, 이딴 걸 먹고 뒈지라는 거요? 이건 뭐 우롱하는 것도 아니고? 지금 장난합니까 그래?”
“보급책임자 나와 보라고 하십쇼. 대체 어떤 놈팽이가 이딴 걸 쳐먹으라고 가져오나!”
불만이 쌓이다 못해 격양된 장병들은 그야말로 폭동이라도 일으킬 분위기였다
김치를 확인한 채 대령 역시 기가 막혔다. 애초에 김치를 주문하면서 자못 우려가 없지는 않았지만 설마하니 이따위 엉망으로 만들었는지는 몰랐다.
그렇지만 명령이 떨어진 이상 어떻게든 따르는 것이 군인의 숙명. 채 대령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었다.
“자네들의 불만은 이해하네. 하지만 이것도 연구진들이 불철주야로 노력한 결과물이야.”
“말도 안 되는 소리! 비겁한 변명입니다. 그건.”
“맞아 책임자 나와 보라고 해!!”
장병들이 계속 떠들자 채 대령이 좌우를 진정시켰다.
“자자. 흥분하지 말고. 내 말을 마저 듣게. 우리나라가 깡통 기술이 없어 이렇게밖에 못 만든다고 하더군. 자네들이 먹지 않겠다면 다시 만들라고 재주문할 것이고 그때는 분명 맛있는 김치통조림이 오겠지. 하지만 그건 일본인이 만든 제품일걸세. 자네들은 그걸 원하나?”
“…….”
숙연해진 장병들은 서로 눈치만 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평소 채 대령의 인품과 행실을 생각할 때 그가 거짓말을 할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던 것이다.
침묵이 길어지자 채 대령이 불편한 듯 다시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하겠나. 전량 반품 시키겠나?”
“아닙니다. 먹겠습니다.”
눈을 질끈 감은 장병들이 녹물이 가득한 김치 노려보았다. 차마 눈으로 볼 수 없는 참상을 입으로 욱여넣으려는 순간, 갑자기 바깥에서 끼이익 소리가 들렸다.
식당 안으로 들어온 부관이 벌컥 문을 열더니 흥분한 기색으로 떠들었다.
“사령관님, 신선한 김치가 도착했답니다.”
그 말에 채 대령은 갑자기 어리둥절했다. 갑자기 김치라니.
“김치? 그건 이미 오지 않았나?”
“아니 통조림 말고, 진짜 포기로 담근 배추김치입니다.”
“무슨?”
다음 순간 채 대령은 입을 벌렸다. 정말 도착한 제무시 트럭 뒤로 한가득 배추김치가 실려 있었던 것이다. 물건을 내리는 백경운송 직원들이 싱싱하기 그지없는 배추를 내리자 다들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건가? 이거 배추 맞나?”
“하하, 그럼 가짜겠습니까. 거두절미하고 한번 드셔 보십시오. 아삭한 게 맛있어요.”
채 대령이 막 양념이 된 김치를 들어 씹어 보았다. 아삭함과 매콤함이 공존하는 것이 진짜 김치였다. 오랜만에 느껴지는 고향의 맛에 저도 모르게 감탄이 흘러나왔다.
“이거 맛있군.”
“맛있죠? 얼마나 정성스럽게 키웠는데요? 그동안 혹시나 폭격 같은 게 떨어질까 봐 얼마나 노심초사했는데요.”
“현지에서 재배한 건가? 설마?”
“그 설마가 맞습니다요. 우리 강 사장님 진짜 대단하지 않습니까? 배추를 현지 수급할 생각을 하다니 역시 사업가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닌 거 같습니다.”
싱글벙글한 광필이의 대답에 채 대령은 말문을 잇지 못했다.
현지에서 배추를 재배하다니 생각지도 못한 발상 아닌가.
참다못해 우루루 몰려나온 병사이 몰려들자 광필이가 확성기를 들고 소리를 질렀다.
“자자. 여러분, 저희 백경식품에서 직접 재배한 김치입니다. 양은 얼마든지 있으니 가져가십시오! 양념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게 진짜 김치야?”
“정말인가. 이거 꿈 아니제.”
녹물과는 확연히 대비되는 싱싱하기 짝없는 김치의 냄새에 사람들은 급 흥분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뒤에 실린 트럭 몇 대가 들어오더니 산만한 큼직한 돼지통구이들을 등에 인 사람들이 하나씩 통을 내려놓기 시작한 것이다.
“김치에는 족발과 보쌈이 최고 아니겠습니까. 우리 백경에서 호텔 요리사를 섭외해 만들었으니 맛은 보장합니다. 다들 먹고 즐기십시다!”
“우와아아아아!! 최고다!”
“백경 만세!! 만세!!”
우레와 같은 함성과 함께, 장병들의 입에서 환호가 터져 나왔다.
* * *
비슷한 시각, 베트남 달랏 시.
상춘의 도시로 유명한 고원지대. 소나무 숲과 오솔길 사이. 구름처럼 안개가 핀 공간 위로 푸른색의 배춧잎들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스카우트 연맹이라는 표지판이 적힌 표지 뒤로 끝없이 펼쳐진 들판. 우순해가 뿌듯한 얼굴로 말했다.
“배추만 봐도 배가 부르군요, 강 사장님.”
“현지에 제대로 적응할 수 있을지 걱정했는데. 다 우 박사님께서 수고하신 덕입니다.”
“저보다는 땅 때문이죠. 땅이 좋아서 그런지 엄청 잘 자랍니다. 배추를 사계절 내내 재배할 수 있는 땅이라니 이 얼마나 엄청난 일입니까? 아마 이만큼 배추에 친화적인 지역은 전세계에서도 드물 겁니다.”
그 흔한 태풍이나 냉해 같은 자연재해도 없는 달랏은 그야말로 배추 재배에 천혜의 환경이었다.
열대 지역에 위치했음에도 불구하고 1500m 고원에 위치해 기온이 선선한 데다 가장 더운 4월에도 기온이 25℃ 전후밖에 되지 않는다. 게다가 2차대전기에는 인도차이나 연방의 수도이자 프랑스 지배기를 거치며 인프라 시설도 꽤나 잘 정비되어 있었기에 재배는 꽤나 수월했다. 주위를 살피던 우순해가 못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한국에서도 고작 한 철만 생산하지 않고 이렇게 만들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럼 쓸데없이 저장소를 크게 지을 필요도 없을 텐데 말이죠.”
“하하. 세상이란 게 그렇게 공평하지는 않은 법이죠. 한국도 한국 나름대로의 장점이 있지 않습니까. 사계절이 뚜렷하다든지…….”
“하하, 인내심을 시험하는 곳이긴 하지요.”
“그래서 최대 얼마까지 생산 가능합니까?”
“뭐 현재의 재배속도라면 겨울에도 500~600ha정도는 충분히 가능합니다. 땅만 더 있다면 추가로 늘릴 수도 있고요. 사실 현지인들도 아주 적극적이더군요. 일단 농사경험이 많은 농부 위주로 뽑고 있는데 지원자가 아주 미어터지더라고요. 그래서 자기들끼리 패싸움을 하던 경우도 있을 정도였습니다.”
전쟁으로 인해 경제가 위축된 월남에선 자기 땅을 잃고 쫓겨 온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먹고 살길이 요원한 상황이었던 만큼 밥도 주고 안전도 확보되는 이런 일자리는 좀처럼 구하기 어려웠던 만큼 강태준의 배추 농사가 구명줄이 된 것이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