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2화 루나큐브
정체를 확인한 강태준이 김샌 소리를 냈다.
“이건 화투 아닙니까?”
“이번에 압수한 것인데 거 자네 부하들이 좀 큰 판에 끼었나 보더군. 하필 감찰반 단속에 걸렸지 뭔가? 이번에 압수한 금액이 5000불이 넘어. 연루된 부사관만 10명이 넘고.”
“……좀 많군요.”
“그러게. 아랫사람 단도리 좀 하셔야겠어. 외화를 벌러 나간 무역전사들과 파병군인들이 해외서 도박이나 하고 다닌다고 하면 국제적 망신이 아닌가. 더욱이 각하께서도 매우 심기가 불편해하시지 않겠소이까.”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 부분은 제가 단단히 주의를 주도록 하지요.”
“그래. 거래처를 바꾼 뒤로 전투화 조달이 늦어지고 있으니 교차 확인 부탁하오. 듣기로는 미군에서 조만간 대규모 공세를 준비한다는데 서둘러야 할 거 같구먼. 모기약과 상비약도 준비 부탁하네.”
강태준이 몇 번이나 주의를 들은 뒤에야 광필이 일행은 겨우 구치소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며칠 만에 풀려나온 광필이가 감격스럽다는 듯 흙바닥을 킁킁거렸다.
“오오, 프리덤! 이것이 자유의 냄새인가!!”
“아우, 형 창피하니까 아는 척하지 마십쇼. 나오자마자 뭔 짓입니까?”
“아니 우들이 죄지었어? 삥 뜯기고 나온 건데 당당하게 행동해.”
유레카를 외치는 광필이에 시선이 집중되자 동료들이 슬금슬금 거리를 두었다. 털끝만치도 부끄러움이 없어 보이는 강태준이 한심하다는 듯이 핀잔을 주었다.
“이그, 아주 잘하는 짓이다. 애들 데리고 대체 뭐 하는 거냐?”
““아니 형님. 저도 피해잡니다. 다들 한판 끼라고 보채기에 못 이기는 척 들어갔을 뿐인데요.”
“뭬야? 그런 놈이 혼자서 300불을 쓸어갔다? 이런 썩을. 벼룩의 간을 빼먹을 자식 같으니라고.”
“그거야 지들이 알아서 건 거고 애초에 심심하다 판 벌인 건 복만이라고요.”
“오호 니가?”
“아니 형님, 제가 주도했다니, 이런 식으로 말 바꾸기가 어딨습니까? 그거 수수료 떼어먹은 게 얼만데 읍읍!!”
“아니 니가 살림 차리는데 돈 부족하다 꼬셔 놓곤. 나한테 죄다 뒤집어씌워?”
사태가 커질 분위기자 강태준이 말을 막았다.
“그만! 니는 제수씨한테 말해야겠다. 얼마나 되었다고 사고를 쳐. 그리고 광필이 니는 이번 달 감봉이다.”
“형님! 그것만은!!”
싹싹비는 복만이에게 그러자 광필이가 억울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아니 형님 솔직히 수도승도 아니고. 그럼 멍만 때리고 있으라는 겁니까?”
“누가 걸리랬냐. 그러니까 걸리지 말았어야지.”
함께 연루된 최 중사와 핸더슨 역시 볼멘소리했다.
“저도 한 판도 못 하고 50불이나 털렸습니다.”
“그보다 어떤 개자식이 꼰지른 거야 이건.”
“그거야 다 강철완이 그 양반 때문이지 뭐겠습니까?”
갑작스럽게 등짐을 지고 나타난 오재갑의 말에 강태준이 고개를 돌렸다.
“그게 뭔 소리야?”
“그거 이번에 새로 부임한 29연대장이 입안한 계획이랍니다.”
“그놈이 뭐가 아쉬워서?”
“뭐 실적 만들기용이죠. 연대장 부임 후에 파티가 너무 잦아서 위에서 주의조치 몇 번 떨어지지 않았습니까? 사령관한테 불려가서 조인트 좀 까이기도 했고요.”
그러자 복만이가 아는 척을 했다.
“아, 그 양반 주변에 평이 많이 안 좋더만. 사병들은 마실 물도 마땅치 않은데 뜨거운 물을 막 쓰고 막사에서 테니스나 치면서 정치질이나 하니 까일 수밖에.”
“그래서 최근에 군공 만든답시고 무기밀매상으로부터 적성화기를 구매했다가 망신살이 뻗쳤다는군요.”
“허, 그래서 이번 일이 국면 전환용이다?”
“뭐 그런 셈이지요. 뭐 나름 명분은 그럴듯하니 압수한 돈으로 용돈도 챙기고 실적도 쌓고 쏠쏠하지 않겠습니가?”
“하 이런 개자식 보게. 그러니까 내 돈을 그 십장생이 조다 가져갔다 이 말이야?”
“그렇지요. 지금 다른 부대에도 걸린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라는군요.”
“그건 좀 많이 맘에 안 드는군. MP 시켜서 압수하고 지들끼리 해먹는다라. ”
개가 똥을 끊지. 이건 좀 무리한 요구가 아닌가. 강태준 입장에서 볼 때는 아니꼬워 보이는 건 사실이었다.
“그러게요. 저녁이나 휴일에 수십 번씩 똑같은 영화만 틀어 주고, 마땅한 오락거리도 없는데 이거 너무한 거 아닙니까? 이건 장병들 사기 문제입니다.”
“좋아 그렇다면 우리가 건전한 게임을 도입해 보는게 좋겠어.”
“게임이요? 도박만 아니면 된다는 말 아닌가?”
전장터에서 군인들의 레크레이션이라야, 체스나 게임 정도밖에 없다,
마침 강태준의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당장 짐 싸! 가자고.”
“어디로요?”
“화투를 대체할 게임을 찾아야 할 거 아니야?”
* * *
이스라엘. 아라드.
사해에서 25km 떨어진 사막도시에서는 매일같이 늙으수레한 노인이 영업을 하고 있다.
혼자 만든 게임을 파는 하르짜노 씨는 어린 손자와 함께 시장에 나왔다.
“아이구 헤르짜노 씨. 오늘도 영업중이십니까?”
“뭐 그렇지요.”
“손자까지 데리고 열심히 사시네요. 더운 날에 참으로 수고 하십니다. 음료라도 하나 하세요.”
“아이구야 감사합니다.”
머리가 허옇게 센 헤르짜노 씨와 손자는 굽굽이 동전을 놓고 갔다.
그걸 본 음료점 주인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아이고 또 이러고 가네. 공짜는 절대 안 받으려고 한다니까.”
“근데 저 양반 뭘 저러고 돌아다니는데요?”
“자기가 만든 게임을 판다는군. 루나큐브라고 플라스틱으로 만든 건데 신기하게 생겼어.”
“게임을요? 그게 돈이 됩니까?”
“정말 별난 양반이지? 듣자하니 루마니아에서 왔다는군.”
“진짜 먼 곳에서 왔군요.”
하르짜노 씨는 나름 이쪽 일대에서는 꽤나 알려진 모양인 듯 알아보고 인사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가 예정되었던 대로 가게를 방문하자 게임을 확인한 술집 주인이 탐탁잖은 표정으로 말했다.
“뭐 간곡히 부탁해서 한번 봐 주긴 하겠는데, 그래서 이건 어떤 게임이오?”
“간단히 말하면 타일 조합 게임입니다. 숫자 1부터 13까지 4가지 색의 타일 2세트와 조커타일 2개로 이루어져 있는데 타일을 규칙에 맞게 먼저 모두 내려놓는 사람이 게임에서 승리하는 방식이지요.”
플라스틱 타일과 올린 나무 판을 본 가게 주인이 심드렁한 어조로 물었다.
“신기하게 생겼구만. 이게 어떻게 하는 거요?”
“이렇게…… 같은 숫자의 다른 색깔 타일이나 같은 색깔의 연속된 숫자로 3개의 이상의 타일을 내려놓는 겁니다. 숫자인 패를 받으면서 모든 숫자를 없애면 되지요..”
“오호, 러미랑 비슷하구만.”
“네네. 맞습니다. 타일을 내려놓아 등록할 때는 내려놓는 타일의 숫자 합이 30 이상이어야 한다는 점만 숙지하시면 되요. 첫 등록 후는 자유롭게 카드를 놓을수 있으니 별로 어렵지 않게 플레이할 수 있습니다.”
“흠, 말만 들어서는 감이 좀. 어떻게 하는지 보여 줄 수 있소?”
“물론입니다.”
간단한 룰 설명을 마친 하르짜소는 손자와 함께 플레이를 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하르짜노였다. 게임을 관전한 가게 주인이 흥미롭다는 듯 두툼한 턱을 긁적였다. 한참동안 플라스틱 덩어리를 만지작거리던 주인이 망설이듯 물었다.
“흠…… 재미는 있어 보이는구만. 다만 우리 고객들이 얼마나 좋아할지는 미지수라서.”
"아이쿠. 그럼 일단 먼저 해 보세요. 만약 게임이 재밌다고 느끼신다면 그때 가서 비용을 지불하셔도 됩니다. 만약 게임이 재미없다면 게임판만 돌려주시면 되고요.”
헤르짜노는 각 가게를 돌아다니며 그런 식으로 영업을 했다. 소규모 작업장을 열어 수제작한 제품을 인근 가게들을 방문해 발품을 파는 방식인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게임은 좀처럼 잘 팔리지 않았다. 아무래도 유명 회사도 아닌 개인이 만든 게임을 사 줄 사람이 없는 것이다. 그렇게 한참을 부지런히 돌아다니던 중 뒤따라오던 손자가 허벅지에 고통을 호소했다.
“할아버지 다리에 쥐가…….”
“어이쿠야 옛다, 업히거라.”
소년을 등에 업은 하르짜노씨가 쓴웃음을 지었다.
“너무 오래 걸어다녔나. 아무래도 오늘은 돌아가야겠구나.”
“죄송해요. 제가 쓸데없이 따라가겠다 고집을 부려서.”
“아니다. 마침 식사 시간도 되었으니 퇴근할 때지. 애미가 기다릴 거 같구나.”
게임 6개를 들고와 판매한 제품은 고작 한 개뿐. 그것도 외상판매였지만 그래도 긍정적인 반응을 받은 것을 위안으로 삼은 하르짜노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갔다.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조용히 등에 업힌 채로 돌아가는 길에 손자가 푸념했다.
“영업이라는 게 참……어려워요. 이렇게 재밌는 게임이 왜 이렇게 안 팔릴까요?”
“하하. 세상에 진가를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기는 원래가 쉽지 않단다. 특히 어디선가 검증되지 않은 경우에는 말이야.”
“그래도 이렇게 재미있는데 말입니다. 시도도 안 해 보는 건 너무해.”
“아직 소문이 안 나서 그렇지. 할아비도 언젠가는 반드시 뜰 거라 확신한단다.”
묵묵히 길을 걷던 하르짜노는 생각했다. 이 게임을 개발한 지도 벌써 20년째.
플라스틱으로 개발한 이 게임은 개발부터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 루마니아에서도 흔하지 않은 재질로 만든 제품인 만큼 비행기 콕핏의 플라스틱 덮개를 재료로 재활용해 겨우 만들어낸 것이다.
전쟁 이후 풍운의 꿈을 안고 이스라엘에 도착해 새로 보금자리를 꾸몄지만 현실은 냉엄했다. 언젠가 히트한다는 확신으로 인생을 몰빵한 헤르짜노였지만 나이가 들수록 아쉬워지는 것은 현실이었다.
‘제대로 된 투자자가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어딘가 통큰 독지가라도 한 명 나타나지 않으려나.
그렇게 기원하던 헤르짜노의 앞에서 생소해 보이는 패거리가 나타났다.
‘동양인들?’
얼굴에 먼지를 뒤집어쓴 녀석 하나가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옷을 털었다.
“아니, 형님아. 여기까지 왜 옵니까?”
“니가 쓸 만한 게임부터 찾으라고 하지 않았나?”
“아니 그렇다고 이런 곳까지 와서는 여긴 전쟁 끝난 지도 얼마 안 되지 않았습니까?
“월남보다 안전하니 걱정하지 말어. 근데 여긴 주소를 대체 어떻게 찾으라는 건가?”
뭐라 지껄이는지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누군가를 찾고 있는 것은 확실한 모양. 집주위를 어슬렁 거리는 것이 심상치 않은 모습에 헤르짜노는 입을 깨물었다.
전쟁의 참상을 몸소 겪은 헤르짜노로서는 전장의 향기가 본능적으로 느껴졌던 것이다.
경각심을 느낀 하르짜노 씨는 손자를 반사적으로 뒤로 보내자 불안한 듯 옷깃을 붙잡았다.
“할아부지. 어떡해요? ”
“여기서 기다리거라. 이 할애비가 어떻게 해 보마.”
헤르짜노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래 어차피 자기야 잃을 것도 없는 노인네 아닌가.
용기를 내어 앞으로 다가간 헤르짜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거기 신사분, 저희 집 앞에서 무슨 볼일이십니까?”
“혹시 이쪽 사는 사람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아. 그쪽이 에브라임 헤르짜노(Ephraim Hertzano)씨?”
강태준이 유창한 영어로 말하자 하르짜노가 깜짝 놀랐다. 설마 자기한테 아는 척을 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절 아십니까?”
“며칠 전에 텔렉스로 서신 하나를 보냈는데 혹시 확인 못 하셨습니까? 사업상 논의하고 싶은게 있다고 말한 걸로 아는데.”
설마 지구 반대편에서 왔다는 편지 말인가. 장난으로 보낸 것으로 착각해서 잊어먹었던 내용이 사실이라고?
“예? 그거요? 설마 진짜?”
“예. 루나큐브. 저희가 판권을 사고 싶습니다. 그래서 월남에서 여기까지 날아왔어요.”
“월남이요?”
실내에서 자초지종을 들은 헤르짜노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그래서 그 먼 곳에서 여기까지 오셨다는 말씀입니까?”
“예. 헤르짜노 씨가 개발한 게임을 수소문해서 찾아냈습니다.”
“저희 게임을 높이 평가해 주시는 건 감사하지만 당장에 뭔가 논의를 하기에는 적절치 않은 듯한데.”
헤르짜노는 어리둥절했다. 갑자기 게임성 하나만 보고 지구 반대편에서 날아온 낯선 동양인이라니,
솔직히 헤르짜노 입장에서는 사기꾼인가 의심스럽게도 보일 만했던 것이다.
“하하. 그러시겠지요. 진심이란 건 말보다 행동 아니겠습니다. 그래서 준비해 봤습니다.”
강태준이 눈짓하자 핸더슨이 조용히 가방을 열었다.
딸깍 소리와 함께 한 가득 쌓인 지폐뭉치를 보는 순간, 헤르짜노는 입을 딱 벌렸다.
“10만 달러입니다. 게임 판권 계약금으로 뭐 이 정도면 되겠습니까?”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