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양재벌 강태준-249화 (249/361)

249화 액션 배우

그 결과가 바로 35미리 이상 촬영기와 건평 1000평이 넘는 세트장이었다.

수천 명의 현역 해병에 실제 전차 대대. 전문 스턴트맨, 내로라하는 영화배우들까지.

제작자인 이만신 감독 역시 [휴가]와 [돌아오지 않는 용병] 등 당해 기념비적인 실적을 남긴 굵직굵직한 영화를 제작하면서 이름을 알린 명감독이었지만, 이 정도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영화를 찍어 본 것은 처음이었던 것이다.

“다 이 감독님께서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아 오신 덕이죠.”

“아유. 저야말로 정말 행운입니다. 검열 문제도 해결해 주신데다 국방부 지원까지 알선해 주시다니, 제가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허허. 멀쩡한 영화를 두고 빨갱이니 뭐니 모함하는 놈들이야말로 뇌가 이상한 것들 아니겠습니까. 정작 욕을 처먹어야 할 자들은 그런 잡것들인데 말이지요.”

“허허,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보다 개봉일은 말씀하신 대로 내년 2월 14일로 예정된 겁니까?”

“예. 좀 빠듯하긴 하지만 가능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아직 여유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일정 맞추려 너무 서두르지 마십시오. 안전이 우선 아니겠습니까. 서두르다 혹여 부상자나 사망자가 나오면 안 되니까요.”

2.14일은 다름 아닌 짜반동 전투가 벌어졌던 날인 만큼 날짜를 맞추어 개봉하는 것이 좋지 않냐는 것이 강태준의 생각이었다. 사전 제작 단계를 확인한 강태준은 로케이션 문제와 장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화를 마친 강태준이 차에 오르자 춘삼이가 따끈한 도시락을 내밀었다.

“어, 갑자기 뭐야?”

“먹고 하십쇼. 요근래 식사가 부실한 거 같다고. 안 선생님이 싸 주셨습니다.”

“오 고맙구먼. 그보다 드디어 하나 끝났네. 이제 어딜 봐야 하지?”

“아, 김진동 감독님이랑 최대행 감독님. 태창원 감독님 작품까지 총 8개입니다.”

미스박이 타자로 정리한 일정표를 건네주었다. 정성스럽게 싼 김밥을 우물거리던 강태준이 빡빡해 보이는 일정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하오, 이거 많기도 하구만. 이걸 내가 꼭 가 봐야 하나.”

“안 가셔도 되지만 배우나 감독님들끼리도 은근히 경쟁심이 강해서요. 홀대한다는 소문이 나면 제작에도 차질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허허. 무슨 선보는 것도 아니고.”

“하하. 무슨 말씀을. 다들 사장님 간택 받으려고 혈안인데 말입니다.”

사실 이번에 투자한 영화만 무려 10편에 그중 5편은 자체 제작이니만큼 제작자들끼리 투자경쟁에 불꽃이 튀길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외화 수입 쿼터를 충족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제작 작품들이 있어야 했던 것이다.

그렇게 여러 곳을 돌던 강태준의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인천의 곡물창고를 개조한 스튜디오였다.

들어가기 무섭게 후끈한 땀 냄새가 나는 공간.

근육질의 떡대들이 모여 있는 공간이 훈련장을 방불케 했다.

격투씬을 지도하던 무술감독은 강태준과 동행한 제작자 이만신과 태창원 감독을 보자마자 깍듯하게 인사를 올렸다.

“아, 오셨습니까? 사장님!”

“하이구야. 파이팅이 넘치시는 분이네.”

“이렇게 뵙게 돼서 무지하게 영광입니다. 팽호상 사장님께 말씀 전해 들었습니다.”

“여기 무술감독이신 정 감독님, 여긴 제작자 이만신, 태창원 감독님입니다.”

“네, 워낙 거장들이라 직접 뵙기는 첨인데. 아이구야. 이거 닭이라도 한 마리 잡아 올릴걸.”

“다 큰 장정들이 한 마리로 되겠습니까?”

“아 그렇나요. 하하. 전 또……”

듬직하게 벌어진 어깨가 호탕하게 웃었다. 긴장이 풀어진 정 감독이 흥분한 기색으로 말을 튀겼다.

“솔직히 깜짝 놀랐습니다. 액션 영화에 거액의 제작비를 투자하신다고 해서 솔직히 잘못 들은 줄 알았거든요. 게다가 개런티가 50만이라니 솔직히 볼까지 꼬집어 봤다니까요?”

침을 튀기며 흥분하는 것이 어린아이같이 순수해 보였지만, 쉽게 볼 사람이 아니었다. 이 사람이야말로 혈혈단신으로 홍콩에 진출해 첫 작품으로 해외 수출을 일궈냈고, 아시아 영화사상 처음 미국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한 명감독 정천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 홍콩 영화가 부흥하기 전까지 한국에서 액션영화의 인식은 무척이나 처참했다 문예나 멜로물이 판치는 시대정황으로 볼 때 비용이 많이 드는 액션 영화는 투자자에게 기피 대상이었고, 눈 뜨고 봐 주기 힘든 무술 실력과 허접한 연출로 욕을 바가지로 처먹고 있었다.

그렇게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열악하기 그지없던 제작환경에서 구세주로 나타난 것이 바로 강태준이었던 것이다.

“홍콩 영화를 보니 앞으로 문예나 멜로 영화보다 앞으로는 액션이 대세가 될 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보십쇼. 이번에 독비도가 얼마나 흥행했나요?”

“맞습니다. 정말 대단했지요. 그런 영화를 찍다니……대중성과 예술성을 동시에 갖춘 영화 아니겠습니까. 여러모로 자극이 되더이다.”

“그러게. 원래 액션이란 건 남자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뭔가가 있는 법이죠. 링 위에서 벌어지는 스포츠에 열광하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치고받고 하는 주먹질에서 대리만족하는 쾌감이 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단순한 칭찬이 아닌 강태준의 실제 본심이기도 했다. 몇 달 전 황야의 무법자가 북미에서만 1500만 달러라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거기에 영화 “졸업” 개봉이 얼마 남지 않은 만큼 한국에서 개봉작을 땡겨 오기 위해서는 배급쿼터를 충족시켜야 했던 것이다.

“그보다 지금 촬영하신 게 뭡니까?”

“아 부둣가 액션입니다. 부둣가에서 벌어지는 1대 15의 액션씬인데 극중 하이라이트죠.“

간결하고 깔끔한 동작을 보니 얼마나 연습했는지 알 수 있을 법하다. 고글과 손목장갑을 착용했지만, 훈련이 진행되는 과정은 위험해 보였다. 비록 칼날에 테이프를 붙였지만, 관객 입장에서는 조마조마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옆에서 그걸 본 춘삼이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니, 이거 장난 아닌데요?”

“하하 걱정하지 마세요. 연습 때만 이러는 거니. 예기가 있는 도구를 쓰면 아무래도 실감도 나고 연기가 자연스러워집니다. 칼이 들어오면 본능적으로 몸이 반응한달까요. 그러면서 상대는 어찌 반응할지 대충 감이 오죠.

몸과 칼이 부딪치는 충돌음과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긴박했다. 흥미 있게 지켜보는 투자자에 감독이 재빨리 박수를 치며 배우들을 소집했다.

“마침 우리 강 사장님도 오셨으니. 저번에 했던 액션씬부터 시연해 봅시다. 다들 몸은 풀었죠?”

“옙!!”

“그럼 스탠바이 갑니다.”

스태프들이 자리에 잡자 감독이 큐 사인을 때렸다.

“레디~ 액션!”

싸인이 들어가자 정권 자세를 취한 주인공이 손을 까닥한다.

무릎을 굽혔다 펴며 허벅지로 들어가는 킥. 강력한 타격음과 함께 짝 소리가 나자 강태준이 바로 액션을 알아보았다.

“오, 그럴듯한데요? 무에타이입니까?”

“어, 알아보시는군요.”

“하하. 저도 나름 영화에 조예가 깊은 사람입니다. 어설픈 으악새랑은 확실히 다르네요.”

“꽤 괜찮은데요. 화려하기도 하고.”

훈련을 너무 열심히 해서인가. 열의는 있지만 동작이 딱딱했다. 다만 맞기도 전에 쓰러지는 등 가짜라는 티를 팍팍 내던 어설픈 쌈박질과는 달리 확실히 몰입감은 있었다.

홍콩발 무술 영화에 익숙해진 강태준의 눈높이에서도 꽤나 괜찮은 수준이었던 것이다. 그에 강태준이 슬쩍 주문을 했다.

“이거 머리에 카메라를 씌워서 보여 주면 액션이 더 세밀하게 보일 거 같지 않습니까.”

“아, 해드캠으로 말입니까?”

“네네. 부족한 부분은 편집으로 커버하면 더 좋은 씬이 나올 거 같은데 가능하겠습니까?”

“오.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확실히 그렇게 하면 좀 현장감이 살겠네요.”

감독들이 머리를 굴리는 사이 강태준이 슬쩍 의견을 얹었다.

“굳이 크게 바꿀 필요는 없고, 각도만 바꿔서 촬영해도 괜찮을 거 같습니다. 타격점을 슬로우 모션으로 편집하는 게 좋을 거 같은데?”

“흠, 슬로우 모션이라 그거 괜찮네요. 임팩트도 살고.”

“이참에 여러 쪽에서 동시 촬영을 해서 송출하는 게 어떤가요?.”

쑥덕거리는 감독들이 서로 의견을 주고받았다. 모여지는 시선에 자기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는 배우들. 그러던 중 사단이 났다.

엇!

주의력이 떨어지는 순간 퍽 소리와 함께 각목에 안면을 얻어맞은 배우가 팔레트 더미 위로 쓰러졌던 것.

영 좋지 않은 곳을 맞고 고통에 몸부림치는 배우의 모습에 파랗게 질린 감독이 서둘러 달려갔다.

“이런, 괜찮나!”

“저… 피가…….”

“당황하지 마십쇼. 일단 지혈부터 하지요. 붕대, 붕대 가져오게!”

팔레트에 튀어나온 못에 하필 허벅지가 찔린 것이다.

흥건하게 번지는 피에 놀란 스탭들이 숨을 들이키자 곧바로 응급조치를 하는 강태준.

촬영을 중단시킨 강태준은 배우를 차에 태우고 응급실로 직행했다.

수술이 끝난 후 의사가 밖으로 나오자 정 감독이 다급히 물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설마…… 생명에 지장은?”

“그 정도는 아닙니다. 지혈제를 쓰고 상처를 봉합했으니 생명에 지장은 없습니다.”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에 가슴을 쓸어내리는 사람들. 정 감독의 표정은 다급했다.

“그럼 영화는? 추가 촬영은 가능합니까?”

“글쎄요. 일단 쓰러지면서 발을 접질리는 바람에 인대가 파열되었거든요. 경우에 따라 다르지만 일상생활에 복귀하는 데도 최소 4개월은 소요될 겁니다.”

“헉 그럴 수가…….”

정 감독은 망연자실한 듯 주저앉았다.

운동에 훈련까지. 몇 개월이나 준비한 성과가 물거품이 되어 버리다니.

절망한 듯 쪼그린 채 얼굴을 감싸 안는 감독을 위로하는 강태준이었다.

“시간이 참 여의치 않네요. 배우에게는 미안하지만 대역을 찾을 수밖에 없겠군요.”

“죄송합니다. 사장님. 정말. 이런 일이 생기다니.”

“누구 잘못도 아니고 천재지변이지 않습니까? 배우에겐 미안한 이야기지만 필름을 추가로 낭비하지 않아서 다행이네요. 그보다 대역을 맡을 사람이 있습니까?”

“지금부터 알아봐야 하지만. 모르겠습니다. 일단 외모도 되어야 하지만 기본적으로 액션을 소화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럴 만한 배우가 남아 있을지……”

사실 액션작품은 주연 배우 섭외부터 쉽지 않았다. 당시 한국 영화계는 연이은 히트로 엄청난 리즈 시절을 경신하고 있는 와중이라 좀 얼굴이 알려진 배우들의 몸값은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었다.

출연할 영화가 널린 마당에 위험한 액션물에 출연할 이유가 없는 만큼, 조금만 이름이 있는 배우라면 모두 기피하는 추세였던 것이다.

한참 고민하던 강태준이 새로운 제안을 내놓았다.

“스케줄상 곤란하다면 한국 말고 딴 데서 구하면 되죠.”

“외국인을요?”

“아까 어차피 대사도 적으니 외국인이라도 딱히 상관없지 않습니까? 마침 쇼브라더스 쪽에서 로케이션 촬영을 하고 있으니 그쪽에 별도로 액션 배우가 있는지 타진해보죠.”

홍콩영화계는 당시 무술 영화가 뜨면서 한국 로케이션 촬영을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래서 문화적으로 꽤나 교류가 있었다.

유명 배우들이 무명 시절 스턴트맨 겸 단역으로 활동을 하는 경우가 잦았던 만큼 누구라도 건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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