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화 에어컨
특히 최 교수와 박 교수의 의견은 격하게 대립했다.
“문제의 본질은 통풍이 안 돼서입니다. 광창과 창구를 모두 막아 버리고 전면을 목조 암자로 막아 버렸으니 이걸 풀어야지요.”
“아니 그걸 부수면 해풍이 들어온다니까? 지금 상태로는 내부를 밀폐시키는 방법이 제일 빠릅니다.”
“그러면 석굴 밖에서 유리 안 정면의 본존불만 관람하면 그게 무슨 문화재 복원입니까. 내부 모습이나 안에 새겨진 부조들은 관람할 수 있어야지요.”
“그래도 일단 당장 생기는 습기는 제거하는 게 우선 아닙니까?”
“습기 제거도 중요하지만, 공조기 소음 진동으로 인한 손상은요.”
“그거야 후대들이 할 일이지. 우리가 그거까지 책임져야 하나 지금 할 수 있는 것부터 하자니까요?”
갑론을박을 벌이는 것이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교수들. 기술자들이 한쪽에 서서 계속 시끄럽게 떠드는 통에 귀가 다 아플 지경. 이야기가 길어지자 강태준이 탁탁 탁자를 두드렸다.
“저…… 교수님들 문제점만 논란은 접어 두고, 해결책을 말씀하셔야지 않겠습니까? 원하는 게 뭔지 하나씩 말씀하세요.”
그 말에 모두 합죽이가 된 채로 눈치를 보았다.
양자가 시선을 교환하던 중 총대를 멘 건 박 교수였다.
“저기 사실 밀폐 구조로 하면 임시 봉합하는 거니 처리가 빠릅니다. 다만 개방 구조로 바꾸면 이걸 다 뜯어내어야 하니, 비용이 어마무시해서…….”
“이왕 하는 거 최대한 원형대로 복구하죠. 역사학계의 큰 관심사인데 돈이 얼마가 들어도 제대로 복원해하는 게 옳지요.”
강태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모두의 얼굴이 환해졌다.
실무진의 표정이 달라지더니 빠르게 말이 쏟아져 나왔다.
“저, 90도로 꺾여 있던 전실 입구 쪽 신장상 2개 말입니다. 8부 중상을 일부러 구부린 흔적은 없었어요. 펴기 이전의 모습이 원형이라…….”
“주실의 뒤쪽과 2시 방향 샘도 복원해야 합니다. 이 샘은 10초에 1리터 정도 물이 일 년 내내 쏟아져 나오는 곳이라…….”
흥분한 교수들을 진정시키며 강태준이 손을 저었다.
“자자. 알아들었습니다. 대신 건의를 하려면, 고증된 자료부터 가져오세요. 제 마음 바뀌기 전에 말입니다.”
강태준의 허락이 떨어지자 마음이 급해진 실무진들이 허둥지둥 바빴다.
“그거 자료가 어디 있지?”
“어딨나 그거. 그거!!”
순식간에 이것저것 자료를 한가득 챙겨 온 사람들이 부산을 떨었다. 그러던 중 서류를 살펴보던 담당자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헉…… 설비 설치도면이랑 배관 계측도(P&ID)가 한 장 빠졌습니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아무래도 학교에 놓고 온 거 같은데요. 담당 조교가 깜빡한 모양입니다.”
“칠칠치 못하긴. 제일 중요한 게 빠지면 없이 대체 어쩌라는 건가?”
“그럼, 서울까지 가서 다시 챙겨 오는 것이…….”
“이 양반이 지금 제정신이요? 어느 세월에 그걸 찾아? 분쇄기로 갈아 버렸으면 어쩌려고.”
“지금 당장 전화라도 해 봅시다.”
다시 서류부터 챙겨 와야 한다는 소리를 들은 기술자들의 표정이 썩어들어 갔다.
고작 서류 한 장이었지만 한 장이 있고 없고에 따라서 작업 속도에 차이가 난다.
학교에 전화해 봤지만 아무런 답이 없자 급 침체되는 분위기.
아까부터 한마디도 없던 차대응이 슬쩍 고개를 내밀었다.
“저 그거는 그릴 줄 아는데요.”
“엉? 정말인가? 자네가?”
“예…… 누가 도면 좀 가져와 주시겠습니까?”
도면용 종이와 자를 대령하자 차대응은 작업을 시작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도면 하나가 완성되자, 삼삼오오 모인 기술자들. 좌우 도면과 함께 수치를 꼼꼼히 확인해 본 사람들이 감탄사를 토했다.
“이건 완벽하구먼. 대체 어떻게 한 건가?”
“제가 건축 복수전공이라서. 수치만 기억하면 쉽더라고요.”
“한번 보고 이걸 그렸다? 대단하구먼 자네!”
“기억력이 조금 좋은 것뿐입니다.”
“허허, 그러니까 내 제자 아니겠나?”
사람들의 눈빛이 달라지자 옆에 있던 박 교수의 콧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최 교수가 매우 아니꼽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기술자들의 관심은 이미 차대응에게 쏠렸다.
“그럼 나도 좀 도와줄 수 있겠나. 이 부분 내 어찌할지 기억이 잘 안 나서 그래.”
“하하. 근데 제가 일을 했더니 머리가 아파서…… 생각이 잘 안 나네요.”
“아 그래?”
“그게 요 앞에 좋은 술집이 있는 거 같은데…… 요새 제가 원기가 좀 허해서요.”
“하하. 밥부터 먹으러 감세. 뭣들 하나, 자자 가자고.”
한 번 두각을 나타낸 차대응은 제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대충 설비가 어떻게 적용될지, 어떤 식으로 공간에서 공기를 유입시키고 배출해야 하는지 훤히 꿰고 있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만 듣고도 마치 머릿속에 설계도가 있는 사람처럼 순식간에 아웃풋을 뽑아내는 녀석을 보니 당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무섭구먼. 대학교 조교라는 게 저렇게 대단한 거였나? 인간 복사기 수준인데 그래.”
“그러게 한국대 조교 아무나 하는 거 아니네요.”
어디서 튀어나온 괴물인지 모르지만 실력만큼은 진짜다. 토목과 기계 쪽에 멀티테스킹이 가능한 인재라니. 강태준으로서도 은근히 탐이 났다.
“차 조교가 박사과정이라지? 졸업이 언제라나?”
“그게 모르겠습니다. 벌써 5년 차라는데, 논문 통과가 안 되어서 아직 기약 없답니다.”“저 능력으로? 교수 싸다구는 세 번 칠 거 같은데?”
그에 눈치를 보던 광필이가 주위를 둘러보다 말고 작게 속삭였다.
“이건 심증이지만 박 교수가 머리를 쓰는 게 아닌가 싶네요. 저 정도 숙련된 조교를 구하기는 하늘에 별 따기니 일부러 학위도 질질 끄는 거 같아요.”
춘삼이가 깜짝 놀란 듯 되물었다.
“설마 그럴 리가요. 그럴 분으론 안 보이는데?”
“임마. 순진하긴. 세상 사람은 생긴 거랑 달라. 글구 밥줄 걸린 문제에 양심이 어딨냐. 임마.”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 잠시 고민하던 강태준이 결단을 내렸다.
“좋아! 그럼 저 녀석은 내가 스카웃해 보지.”
“어떻게요?”
“슬슬 꼬셔 봐야지. 술 좋아하는 거 같으니 일단 자리부터 주선해 보시게.”
공사가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인 만큼 핑곗거리는 많다. 경주시 동쪽의 명활산 옛 성터 아래, 전통주점으로 찾아온 차대응은 잘 차려진 한 상 차림에 즐거워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만 따로 이렇게 와도 되겠습니까?”
“무슨 소릴, 아무래도 우리가 차 박사한테 도움을 많이 받지 않았습니까. 요새 너무 열심히 하길래 몸보신이라도 하라고 불렀어요. 그보다 자, 한잔해야죠?”
강태준이 술을 따라 주려 하자 차대응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아 이 술은 좀…….”
“아니 왜요 좋아하지 않습니까?”
“내일도 작업이 있어서. 한 잔 두 잔 얻어먹다 보니 근래 폭음을 하고, 교수님께서도 자제하라고 하셔서요.”
“어허, 이 사람 보게. 그렇다고 사람 차별하나. 사장님, 무안하게 이러깁니까?”
“아. 그게 아니라…….”
광필이가 언성을 높이자 강태준이 은근슬쩍 잔을 따랐다.
“자자. 그러지 말고. 뭐 하루쯤 쉬는 날도 있어야지 않습니까. 박 교수한텐 제가 말해 놓을 테니 걱정 마시고. 자자 한잔 쭉 들이키십쇼.”
“아. 그럼 딱, 딱 한 잔만 하지요.”
그러나 한 잔이 두 잔이 되고 세잔이 되는 것은 순서였다. 사발 가득 쏟은 동동주에 차대응이 말했다.
“이걸 다? 이런 안 되는데…….”
“도수 낮아서 괜찮아 그래. 차 박사 쭉쭉 들이켜요. 옳지. 그래 옳지!”
말은 난처하다 하면서도 받는 족족 받아 마시는 녀석.
자꾸자꾸 술을 들이붓자 취기가 오른 차대응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눈이 풀린 녀석의 상태를 확인한 강태준이 슬쩍 말을 놓았다.
“이야, 이 친구 역시 주량이 보통이 아니네. 잘 먹는구만.”
“제가 시키는 것 하나는 잘합니다…… 히끕!!”
“남자답구만. 잘 먹는구먼. 내 여동생이 있었으면 소개시켜 줬을 텐데 말이야.”
“아이구, 어인 말씀을.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보다 차 박사 자네는 앞으로 학위 따면 뭐 할 건가? 일 순위는 아무래도 학계인가?”
“뭐 그게 희망 사항이기는 합니다만 그게 마음대로 됩니까 자리가 있어야지”
“에이 설마 자네가 없겠나. 그래도 명색이 박 교수 수제자 아닙니까?”
그 말에 앞에 놓인 술잔을 벌컥 들이킨 차대응이 소리 나게 잔을 내려놓았다.
“허! 제자가 아니라 노예 1호죠. 박 교수님은 학위는 안 주고 매번 연구과제랍시고 시도 때도 없이 부려 먹을려고. 계속 돌림빵만 시키는데요.”
“아니. 그게 무슨 소린가?”
눈이 게슴츠레하게 변한 차대응이 시니컬한 어조로 지껄였다.
“사탕수수 농장주도 그따위론 안 부려 먹을 겁니다. 제가 지 시다바리도 아니고. 매번 요구사항은 더럽게 많아가지고는. 감 놔라 배 놔라 숟가락 얹기도 질렸습니다.”
“거, 맺힌 게 많았구먼. 박 교수 그 사람 안 되겠네. 그래.”
“그러게요. 딴 놈들은 다 졸업시켜 주면서 나는 왜. 제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내가 왜!!”
한껏 열을 내던 차대응은 현타가 왔는지 풀이 죽었다.
“후…… 그래두 어쩌겠습니까. 이미 늦었습니다.”
“더러우면 때려치우면 그만 아닌가?”
“거 뭐 갈 곳이 있어야죠. 이 나이에 할 게 뭐 있겠습니까? 게다가 이 업계에서 박 교수님한테 밉보이면 갈 데도 없습니다.”
“왜 갈 곳이 없나. 석굴암 보수 공사 마치면 우리 회사에 오는 건 어때?”
“예?”
술을 홀짝이던 그의 눈이 동그래지자 강태준이 슬쩍 잔을 채워 주었다.
“학문에 뜻이 크게 없다면 기업도 괜찮은 옵션이지. 부장대우로 월봉은 3만 원 정도면 만족하려나?”
“그거 농담이시죠?”
“자네 같은 인재에게 농담이라니? 우리 백경에서 차기 성장 사업으로 가전이나 전기분야에 관심이 많아요. 우리 차 박사 같은 인텔리가 부서장을 맡아 주면 아주 든든할 거 같은데…….”
차대응이 눈동자를 굴렸다. 혹시나 함정인가 뭐가 더 나은지 계산해 보는 모양이었다.
“저…… 그게…… 전 아직 사회 경험도 부족하고…… 아직 학위도.”
“알아요. 알아. 당장 대답하기 곤란한 거. 그럼 찬찬히 고민해 보시게.”
잠시 고민하던 차대응이 다시 술을 마셨다.
그리고…… 필름이 끊겼다.
* * *
“끄으으으 머리야. 대체 뭘 먹은 거지? 헉…….”
대체 얼마나 퍼마신 것인지 머리가 띵하다.
일어서 보니 코앞에 양주가 끝도 없이 늘어서 있었다.
온몸이 풀어 헤쳐진 채 누워 있던 차대응에 숙박집 아줌마가 꿀물 차를 타가지고 들어왔다.
“어이. 차 선상 일어났나?”
“헉! 제가 여긴 어떻게?”
“어떡하긴. 기억 못 하나. 거 백경 직원들이 업고 들어온 거 참. 어째 이 양반을 요렇게 떡이 되게 만들었는교…….”
“그런…….”
“한 잔 쭉 들이키고 정신이나 차리게.”
꿀물 차로 머리를 달래자 정신이 조금 돌아왔다. 그때 작업복을 입은 배춘삼이 쾌활하게 외쳤다.
“좋은 아침입니다. 차 박사님. 정신 차리셨으면 세수부터 하고 얼른 일하러 가야지요?”
“아니. 배 과장님이 여긴 어떻게?”
“아이구, 기억 안 나요? 그러게 작작 좀 드시지…….”
“제가 어떻게 된…… 혹 제가 실수하지 않았습니까?”
“혹시. 실수? 실수 같은 건 뭐 누구나 하는 거지요. 우리 이제 식구 하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형님.”
“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