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6화 석굴암 보수
하지만 강태준은 흔들리지 않았다.
“포지션이 중요합니다. 가격 경쟁력이 부족하다면 다른 쪽에서 어필해야지요. 저희는 퀄리티랑 외관으로 승부해야 합니다. 규격도 통일하지요.”
“규격을요?”
“일단 제일 많이 팔리는 게 14인치형으로 가정용 규격은 일원화합시다. 그리고 높이는 1m 이하로 규격을 맞추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가성비를 맞추기 위해서는 생산 라인을 통합해 최대한 단가를 맞추는 것이 좋지 않다. 어차피 높낮이 기능이 있으니 소비자들도 크게 불편해하지는 않을 것이다.
선풍기 사업이 순조롭게 풀리자 강태준은 한결 부담감을 덜었다. 하지만 여전히 산니 측에서는 원하는 답변이 오지 않았다
“근데 산니 쪽에서는 아직도 답이 없나?”
“아직 감감무소식입니다.”
“너무 꾸물대는군.”
“아무래도 상품 하나로는 좀 부족하단 이야기 아닐까요?”
“까다롭구만. 그럼 뭐 에어컨이라도 팔아야 하나?”
“에어컨이라니. 한국에서 수요가 있을까요? 청와대에도 없는 물건인데.”
“가정용 말고 산업용으로 쓴다고 하면 되지. 원래 인쇄소에서 냉방 및 제습용으로 시작한 게 에어컨 아닌가. 애초에 면도기 공장에서 설치했던 것도 아직 정리 못 한 상황인데 그거 뜯어서 재활용해 보지. 에어컨이란 이름이 영 거시기하면 공조 설비로 바꿔 팔면 되고.”
“흠. 괜찮은 생각인데요?”
그때 일정을 확인한 춘삼이가 호들갑을 떨었다.
“아, 예. 앗, 그러고 보니 깜빡했는데. 어제 최웅서 교수님께 시간 되시면 경주로 함 와 달라 연락이 왔습니다.”
“경주로? 갑자기 무슨 일?”
“아무래도 정부 프로젝트 때문인 거 같아요. 공사 관련해서 난관이 있어서 도움을 주셨으면 한다고.”
“정부 프로젝트?”
* * *
경주, 토함산 중턱.
햇볕이 내리쬐는 그때. 화강암으로 깎은 주실 안. 석굴의 고요한 분위기에 더하여 신비로워 보이는 본존 불상이 보였다.
“아니. 석굴암에 오라니…… 내가 불교 신자도 아니고?”
“그래도 여기 있으니까 뭔가 경건해지네요.”
“경건은 개뿔. 뭔가 좀 축축하고 많이 더운데 여기.”
짜증스러운 광필이가 텁텁하다는 얼굴로 연신 부채질을 했다. 과연 말 그대로 찐득한 것이 가만히 서 있어도 기분이 나빠지는 느낌이었다.
“그러게요. 여기는 뿌연 게 습기가 엄청나네요.”
“그러게 좀 많이 그런데. 이거 영 퀴퀴한 게 상태 멀쩡한 거 맞나?”
고작 몇 분만 있었는데도 굉장히 덥고 찝찝하달까. 뜨거운 공기와 함께 주위를 휘감는 습기에 다들 불쾌 지수가 올라가는 사이, 동굴에서 나타난 최웅서 교수가 헐레벌떡 모습을 드러냈다.
“아니 헉, 헉. 강 사장님 벌써 오셨습니까?”
“아, 최 교수님! 여기 계셨군요.”
“아이구. 오시는지 모르고 그만 깜빡했지 뭡니까. 여기 있으면 시간 가는 줄도 몰라서.”
함께 온 조교도 등 뒤가 축축해진 것을 보니 꽤 급하게 달려온 듯하다.
몸 둘 바를 모르는 최 교수의 행동에 괜스레 미안해진 강태준이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별로 오래 안 기다렸습니다. 그보다 여기 동굴은 상태가 영 그런데 보수 중입니까?”
“예. 어쩌다 보니. 이제 막 시작이죠.”
“석굴암 보수 공사를 맡으시다니, 책임감이 크시겠습니다.”
“그게 사실 억지로 떠맡은 겁니다. 사실 맡으려고 한 게 아닌데 친구가 도와 달래서 그만.”
투덜거리며 한바탕 신세 한탄을 하는 최 교수가 마구 욕을 했다. 그렇게 뒷담화를 까던 중 호리호리한 안경잡이 하나가 나타나더니 가쁜 숨을 몰아쉬며 벽을 짚었다.
“아니 또 무슨 모함인가. 자네도 기꺼이 동의했으면서. 헉헉.”
“사실관계만 이야기했을 뿐이지. 술 먹을 때 사기 쳐서 끌고 와 놓고는. 그리고 용역비는 왜 이렇게 짜나. 이런 순 거짓부렁이 같으니라고.”
“이 사람이 언제는. 프로젝트 하나 달라고 징징대더만. 물 빠진 사람 건져 줬더니 이따구로 굴어.”
“시끄럽고, 암튼 인사나 해. 이분이야. 강 사장님. 내 은인이시지.”
그제야 상대가 누군지 알아차린 안경잡이가 몸 둘 바를 몰라 하더니, 젖은 손을 바지에 비빈 그가 서둘러 악수를 청했다.
“앗, 제가 여기 담당 문화재 보수 책임자인 박효경입니다. 한국대 기계공학과 교수를 맡고 있지요.”
“아, 교수님이셨군요. 강태준입니다. 반갑네요.”
“저도 영광입니다.”
“근데 두 분 예전부터 친한 사이신가 봅니다.”
“불알친구긴 한데 뭐 그닥 친한 사이는 아니죠. 친구보다는 원수지간이랄까?”
눈썹을 치켜뜬 박효경이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이런 좀생이 보게. 그간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최웅서 저 인간을 구원해 주신 분이라면서요. 저 인간 실적도 없어서 잘리기 직전이었는데 대신 감사드립니다.”
“뭬야? 이 잔나비 같은 양반이. 내 실적 편승해서 프로젝트 떼먹은 게 누군데?”
“내가 떼먹기는. 자네도 내 덕에 목돈 만지지 않았나. 계측 장비 들여오면서 자네 아는 회사에 넘겼잖나. 마진 떼먹은 게 얼만데.”
“뭐야. 내가 그럼 뭐 비리라도 저질렀다는 건가?”
“그거야 나야 모르지. 이렇게 발끈하는 걸 보니 뜨끔한가?”
“뭬야?”
비꼬듯이 말하는 어투에 뿔난 최웅서 교수가 눈에 불을 켜고 덤볐다.
다시 한판 붙으려는 두 명의 행동에 강태준이 서둘러 주제를 돌렸다.
“하하. 싸우지들 마시고. 근데 왜 여기는 이렇게 습합니까. 이건 정상이 아닌 거 같은데?”
“아, 지금 같은 여름에는 굴 내부의 상대온도와 상대습도가 차이가 크거든요.”
“그래도 이건 좀 너무한 거 같은데요. 습도가 좀 심한 듯합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잠시만 있어도 땀이 주룩주룩 나네요.”
얼마나 습한지 잠깐 사이 안경에 이슬이 맺힐 정도. 내벽에는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안경을 닦은 박 교수가 혀를 차며 말했다.
“그게 결로 현상 때문입니다.”
“결로 현상요?”
“실내외 온도 차가 크면 실내 온도에 비해 내벽 온도가 낮아 내벽에 습기가 차거든요. 그러면 물방울 같은 게 맺히죠. 특히 여름이라 특히 좀 심합니다. 석굴암을 해체 복원하는 과정에서 콘크리트로 환기구를 막아 버리는 바람에 사태가 악화되어 버렸죠.”
나름 공사장 짬빱을 먹어 본 춘삼이가 아연한 얼굴이 되었다.
“아니, 시멘트로 통풍구를 땜질하다니? 시멘트는 화강암과 상극 아닙니까?”
“이걸 중수한 놈들이 총독부였거든요. 당시로서는 나름 최신 공법을 적용하여 석굴암이 중수한 건데, 당시로서는 시멘트의 성질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시대라 제대로 수리한 게 아니라 그냥 무식하게 시멘트를 때려 박아 버리는 바람에 동굴 내 공기 순환 구조가 완전히 망가져 버렸습니다.”
그러자 최 교수가 혀를 차며 말했다.
“원래부터 그럴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참. 원래 본존불은 지하수 샘물이 솟아나는 암반 위에 있어서 습도를 조절했는데 여기 흐르는 샘물을 아연 관으로 빼 버리니 습도가 미친 듯이 널뛰기를 하게 된 거지요.”
구조에 대한 이해 없이 공사를 강행한 결과는 미칠 듯한 습기로 나타났다.
심지어 벽과 불상 표면에 수분이 차면서 이끼가 생겨나기까지 하자 뒤늦게 문제를 깨달은 일본 기술자들이 아연 배수로의 방향을 바꾸는 보수 공사를 실시했으나 습기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
“그간 쌓인 곰팡이랑 이끼를 제거하느라 증기 청소만 몇 번을 했는지 모르죠. 해방 후에도 정부에서 3년간에 걸쳐 석굴암 복원 작업을 했는데, 결국 총독부에서 망쳐 놓은 부분을 해결하지 못했거든요. 한심한 게 나름 유네스코에서 사람 불러서 조언까지 받아 정부에서 보수하다 망쳐 놓고 나서 지금 와서 해결해 달라니 분통이 터져서 어휴…….”
그러자 듣고 있던 최 교수가 딴지를 걸고 나왔다.
“전실은 좀 아니지, 그건 솔직히 해풍 방지용이 아닌가. 염분과 토사가 땜시 삭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 설치한 건데 말이야.”
“자네는 누구 편인가. 대체.”
“지금 내편 네편 따질 땐가 유치하게?”
투닥거리는 두 명의 행동에 쓴웃음을 지은 강태준은 위로의 말을 건넸다.
“여러모로 고생 많으십니다. 헌데 일단 복구하려면 원안이 필요할 텐데 참고 자료는 없나요?”
“몇 장 있기는 하지만 미흡한 게 많아 큰 도움이 안 됩니다. 중수 전 찍어 놓은 사진이나 기록이 없어서 어떻게 복원해야 할지 좀 골치를 앓고 있지요.”
“아쉽군요. 대충 사정은 알겠습니다. 그래서 제게 도움이 필요하신 게 뭡니까?”
“그게 습도를 잡으려면 공조 설비 공사를 해야 하는데 저희가 설치 경험이 없습니다. 솔직히 저희 말고 경북지역에도 몇몇 업체가 있지 않습니까?”
“그게 여러 군데 공사를 타진하고 읍소도 해 봤지만 대부분 어렵다는 소리만 하더라고요. 아무래도 문화재 보수 예산이 한정된 데다가, 국민적 관심이 클 수 있는 문제라 부담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비용도 비용이지만 사업이 잘못되었을 때의 리스크 견적이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심각하게 고민하는 모습에 긴장한 듯 침을 삼키는 김 교수.
하지만 심각한 표정과 달리 사실 강태준은 웬 떡이냐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건 완전 하늘이 주신 기회 아닌가? 잘하면 홍보비도 굳고.’
강태준이 에어컨 사업을 시작하지 못하는 것은 에어컨을 사치재로 규제하는 정부 규제 탓이 크다. 하지만 이런 국책사업에 손을 얹는 방식으로 시작한다면 자연스럽게 확장할 수 있지 않은가.
특히 습도 조절 기능을 실질적으로 시험할 수 있는 기회. 돈을 주고도 못 살 데이터를 다수 확보할 기회. 계산을 끝낸 강태준이 입을 열었다.
“문화재를 보존하는 일인데 한 손 보태는 게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저, 정말이십니까?”
화색을 띠는 교수들에 강태준에 전제조건을 걸었다.
“단 에어컨 설치에 관련해서는 설계 경험이 부족해서요. 저희가 공사 경험은 있지만, 열역학적인 메커니즘은 모르니 기본 설계를 어찌해야 하는지 모르니까요. 이 부분은 도와줄 수 있겠습니까?”
“물론이지요. 여기 우리 조교가 도와줄 겁니다. 기계과 박사과정인데 아주 유능한 녀석이지요. 어이. 잘 할 수 있겠지? 차대응이.”
“…….”
언제 도착했는지 존재감 없던 녀석을 보며 되묻는 박 교수. 그러나 교수가 소개하는 말에도 석굴암에 정신이 팔린 녀석에 기다리다 못한 박 교수가 녀석을 툭 쳤다.
“어이, 차대응이? 뭔 생각하나?”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차대응이 얼른 고개를 숙였다.
“예. 열심히 하겠슴다.”
“또 정신이 어따 팔려가지고는. 하하 외골수라 한 번 꽃이면 딴 곳에 신경 쓰는 게 단점이긴 하지만 꽤 유능한 친굽니다.”
교수는 자신 있게 소개한 것과 달리 왜소해 보이는 조교는 행동이 꽤 굼떴다. 열심히 맡은 일을 하다가도 갑자기 멈춰선 채로 자기만의 생각에 빠져들기 일쑤. 생각과 행동이 따로 노는 모습이 영 속이 터져 보였는지 광필이는 영 못 미더워했다.
“거 공학박사라고 했나. 비리비리한 게 한 대 툭 치면 쓰러지게 생겼네.”
“그래도 한국대 박사과정이면 나름 능력자 아니겠습니까.”
“박사라고 다 박산가. 무늬만 그럴듯한 놈이 한둘이 아니라서.”
“그건 실전에 투입해보면 알 일이지. 암튼 일단 향후 공사를 어찌할 건지 대충 방향부터 알아야 하지 않겠나.”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모인 일행은 기초 조사 평면도를 앞에 두고 공조 기설지와 비용 산정을 위한 토론을 나누었다. 하지만 서로 색이 다른 전문가들의 대화는 처음부터 삐걱거렸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