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양재벌 강태준-244화 (244/361)

244화 여름의 신제품

이미 볼 장 다 본 사이에 너무 깐깐하다는 생각이었지만 사람 마음이 어떻게 그렇게 쉬운가.

“어차피 헤어지긴 글렀는데, 그냥 인정하면 편할 텐데 말이죠.”

“그러믄. 나 같으면 그냥 둘이 살림을 차리라고 할 텐데. 말이야. 아님 그냥 애나 만들어 버리지 그게 설득보다 빠르지 않겠나?”

“아이구야. 그러면 아주 뒤집어질 걸요.”

황철득의 과감한 말에 강태준이 쓴웃음을 지었다.

“일단 어떻게든 되겠지요. 그보다 소시지 개발은 어떻습니까?”

“한번 보고 확인하는 게 좋을 거 같네. 자자, 들어오시라고.”

자신감 넘치는 표정이 뭔가 성과가 있는 모양이다. 황철득이 안내한 곳은 제품 개발실이라고 쓰인 방 안. 수북하게 쌓인 소시지 껍질 옆으로 직원들이 시식하는 모습이 보였다.

직원들의 인사를 받던 강태준은 며칠 새 후덕해져 버린 노기철에 놀랐다.

“아니. 자네 무슨 요요라도 왔나? 근래 운동한다더니?”

“글쎄요. 소시지만 주구장창 먹다 보니 계속 중독이 돼서요. 그게 우리 안 선생이 너무 맛있게 만들었지 뭡니까?”

머리를 긁적이는 노기철 뒤로 보름달처럼 살이 오른 방첩 대원들이 보인다.

마치 스모선수처럼 배가 불룩한 모습에 강태준은 할 말을 잃었다.

“다들 시식을 열심히 했나 보군요. 이렇게까지 열심히 할 필요는 없는데…….”

“아니, 노 이사님께서 배불러서 못 먹겠다는 데도 계속 주시지 뭡니까. 못 달아나게 붙잡아 놓고는 자꾸 먹어 보라지 뭡니까? 이건 신종 고문도 아니고.”

“이건 시식이 아니라 사육입니다요.”

억울한 듯 항변하는 꼴이 그간 쌓인 게 많은 모양. 그러나 노기철은 몹시도 당당했다.

“아니, 먹기 싫음 첨부터 먹지 말든지. 주는 대로 쑤셔 넣어 놓고 이제 와서? 자네들 너무한 거 아닌가?”

“그것도 적당히 해야지. 아예 문까지 잠가 놓고 하루 세끼 소시지만 주셨잖아요.”

“거참 사람이 고마운 줄 모르고 말이야. 임마 밖에 나가서 봐라. 밖에 굶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아아, 고만하십시오. 그 말도 골백번 들으니 귀에 딱지가 얹겠습니다.”

“허 이 사람들이 참…….”

“그만들 싸우게. 거 어린애도 아니고. 암튼 고생해서 만든 거니 드셔 보시게나 여기.”

두 명을 중재한 황철득이 강태준에게 소시지 하나를 내밀었다. 껍질을 까자 향긋한 향과 함께 노란 속살이 모습을 드러냈다.

육즙이 배어 나오는 것이 고소한 치즈의 감칠맛과 육고기의 맛이 잘 어우러져 있었다.

“오오, 확실히 저번보다 훨씬 맛있는데요. 일단 식감이 훨씬 좋습니다.”

“어때 춘삼이는?”

“맛있네요. 맥주랑 한 따까리 하면 캬!!! 엄청 잘 어울리겠네요.”

연이은 호평에 기분이 들떴는지 노기철의 목소리가 커졌다.

“글치요? 돼지고기랑 치즈 비율이 중요하지 뭡니까. 비린내가 최대한 나지 않도록 섞었는데, 사실 우리 황철득 반장님께서 고생하셨지요. 밤늦게까지 연제품 가공법을 찾아본다고 실험을 몇 번 했는지 모릅니다.”

“호오, 그게 정말입니까?”

“뭐, 나도 손 보태긴 했다네. 예전 어묵 장사를 하던 노하우가 있어서 말이야. 암튼 강 사장이 보기엔 어때? 내가 볼 때는 이 정도면 괜찮을 듯싶은데…….”

시선이 한곳으로 모이자 모두 침을 꿀꺽 삼켰다. 방첩 대원들의 간절한 눈빛에 강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좋군요. 이 정도면 바로 상품화해도 되겠습니다.”

“그럼 이제 통과인가요? 정말?”

“다들 수고하셨어요. 이제 퇴근하셔도 됩니다. 아, 이건 시식 장려금입니다.”

“와우. 보너스라굽쇼!”

강태준이 미리 준비해 온 봉투들을 나눠주자. 대원들의 표정은 급 화색을 띄었다

환호하는 대원들의 모습에 강태준이 한 가지 더 주문을 넣었다.

“아 참. 한 가지만 더, 이건 미군에게도 팔 예정입니다. 미국인들 기준으로는 좀 작은 거 같으니 사이즈를 키운 버전도 만들어 보세요.”

“아, 알겠습니다.”

그러자 아까부터 세 개째 소시지를 까먹던 핸더슨이 지나가는 중얼거렸다.

“이왕이면 프리미엄용으로 치즈도 좀 더 넣었으면 좋겠습니다. 약간 심심하네요, 그래.”

“아, 그래? 서양인 입맛에는 좀 그런가?”

“옙. 느끼한 건 아닌데…… 약간 스파이시한 것도 있으면 좋을 거 같습니다만…….”

“호오. 우리 소시지가 취향에 안 맞으시다 이 말씀이군요.”

어깨를 짚는 노기철에 심상찮은 분위기를 느낀 핸더슨은 아차 했다.

입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번들거리는 눈빛을 보는 순간,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 나왔던 것이다. 핸더슨의 표정이 떠듬거렸다.

“아, 제 뜻은 그런 게 아니라…….”

“아니긴 뭘 아닙니까. 그러잖아도 외국인용 샘플이 많이 남았는데 잘 되었네요. 좀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하하, 저는 경호 업무로 바빠서.”

“며칠 정도야 상관없잖습니까. 강 사장님. 혹시 우리 핸더슨 대원을 시식자로서 잠시 빌릴 수 있을까요?”

노기철과 둘을 번갈아 보던 강태준이 갈등했다.

단일 제품으로도 맛이 좋긴 하지만 아무래도 선택권이 많은 편이 좋지 않은가.

솔직히 강태준 생각으로도 약간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던 참이다.

“그럼 뭐, 맘대로 하게. 우리 핸더슨 대원이 나름 미식가이니 제품 개발에 큰 도움이 될 거야. 핸더슨 자네도 이참에 잠깐 쉬다 오는 게 좋겠어.”

“네? 사장님! 사장님? 그럼 경호는?”

“아 괜찮네. 최만수 중사도 복귀할 테니 경호는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자 갑시다. 그러잖아도 시제품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 우리 형씨가 시식해 볼 물건이 아주 많아요.”

개발실 옆문을 열자, 종류별로 널린 소시지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모습이 보인다…….

질질 끌려가는 핸더슨이 도움을 청하듯 손을 휘저었지만 다들 묵념하듯 고개를 돌렸다.

그새 새 껍질을 깐 강태준이 치즈가 알알이 박힌 소시지를 오물오물 씹었다.

“음 맛있구먼. 이거.”

* * *

낮에는 폭염 경보, 밤에는 열대야, 뜨겁게 타고 있는 여름.

1967년 8월, 삼복더위를 맞아 공포영화가 상영되고 있었다.

“으히히이익!!”

공동묘지 위, 무덤이 반으로 갈라지며 귀신의 등장하는 모습에 경기를 일으키는 사람들.

염산으로 얼굴이 녹아내린 사람이 비명을 지르는 모습에 숨도 쉬지 못하고 영화에 몰입하는 사람들. 영화가 막을 내리자 관객 중 하나가 말했다.

“어후, 심장 멎을 뻔했네.”

“그래도 재미는 있었지. 시원하게 한 편 잘 때렸지 뭐야?”

“그러게. 공포영화를 봐서 그런가? 여기 으쓱한 거 같아.”

“그보다 기가 허한 거겠지. 어휴, 밖이 이게 뭐냐. 덥구먼.”

“자 삼계탕으로 몸보신이나 하러 가자고.”

뜨겁게 내리쬐는 햇빛을 피해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 마침 종로극장을 나오는 관객들 사이로 멀쑥한 양복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청소를 하던 종로극장 주영호 사장이 강태준을 보더니 넙죽 인사를 올렸다.

“아이구, 강 사장님! 오셨습니까?”

“하하. 간만에 들렀습니다. 요새는 사업은 잘되나요?”

“허허, 다 아시면서. 그냥 밥 한 끼나 근근이 먹고 사는 정도죠 헤헤.”

머리를 긁적이는 행동에 강태준이 미소를 지었다.

“아니, 무슨 겸손한 말씀을 하십니까. 아까도 만석이던데요?”

“선풍기 덕분이죠. 쌩쌩 잘 돌아가는 게 시원해서리. 관객들도 쾌적해 합니다. 이쪽에 피서 오는 양반들도 있을 정도니까 말이죠.”

“그거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정말 효율 높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녁에 창문을 열고 선풍기를 트니, 훨씬 시원하더라고요. 그만큼 관객들도 늘었으면 좋겠는데 말입니다.”

강태준이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도 엄청 많지 않습니까?”

“에이 재작년에 비하면 새 발의 피죠. 작년 요맘때는 아주 바글바글했는디. 그때 봤으면 놀라셨을 겁니다. 요새 방송국도 그렇고. 텔레비 같은 게 나와서 수요가 예년 같지 않아요.”

“그래도 영화는 영화관서 봐야 제맛 아니겠습니까. 앞으로 재밌는 영화가 많이 나오면 또 늘어나겠죠.”

“그럴까요?”

“그러믄요. 암튼 저희 선풍기 다른 데도 많이 홍보 좀 해 주십시오.”

덕담을 남긴 강태준은 주변 극장가를 돌며 일일이 설치 상태를 확인했다.

생각 이상으로 좋은 반응에 사원들은 고무된 얼굴이었다.

“진짜…… 선풍기 할부 판매라니. 이런 게 통할 줄은 몰랐네요.”

“어묵 공장에서 송풍기 팬이 남아서 다행이지.”

궁리 끝에 강태준이 도입한 가전제품은 다름 아닌 업소용 선풍기였다. 마침 재고로 쌓인 저전력 모터를 처리할 방법을 찾던 중 어묵을 식히기 위해 설치한 팬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이다.

실제로 당시엔 공공건물, 대학 캠퍼스 등에도 선풍기 없는 곳이 많았다. 심지어 음식점이나 체육관 등 큰 시설에도 냉방시설이 제대로 설치된 곳이 없을 정도.

덕분에 염가로 대형 팬을 설치하는 할부 판매 전략은 멋지게 들어맞았고 덕분에 주문서가 마르지 않을 정도였다. 물밀듯이 몰려드는 의뢰에 백경에서는 행복한 비명을 질렀다.

“그래도 이렇게 수요가 많을지 몰랐습니다.”

“당연한 결과지. 원래 할부로 1~2년간 나누어 내면 여러 대를 한꺼번에 사도 부담이 적을 테니까.”

“역시 대단하십니다. 사장님.”

“아부는. 그보다 철도청 사람들이랑은 만나 봤나?”

“옙. 객실 설치에 긍정적이긴 합니다만 다만 근래 도둑이 많아서 걱정된다네요. 혹시 떼어 가지 않을까 해서요.”

“괜한 걱정이 많구먼. 업소용은 덩치가 커서 훔쳐 가기 어려울 텐데. 그게 걱정되면 아예 용접해 놓지 뭐. 그리고 팬 앞에 이중 철장을 꼭 씌워 놓으라고 해.”

“그건 또 왜요?”

“손가락 좀 넣지 말라는데 꼭 하지 말라는 짓을 하는 놈들이 있더라고. 그보다 광필이 니는 왜 이렇게 실적이 부진해? 홍보가 부족했나?”

저번 분기 실적을 보니 확연히 차이가 난다. 강태준 타박에 광필이가 황급히 변명했다.

“산업용에 비해서 가정용은 잘 안 팔리더라고요. 아무래도 브랜드 인지도 문제도 있고 솔직히 성운사 제품이 너무 잘 나왔습니다.”

“흠. 그래 에이머 쪽에 로얄티를 많이 주고 산 게 문제였나? 유하 씨가 잘 협상한 것으로 생각했는데 단가를 더 낮출 걸 그랬나 보군.”

“그러게요. 디자인으로 보나 성능으로 보나 저희 쪽이 우위인데 말입니다.”

강태준이 만든 제품은 미국 최초의 선풍기 제조사인 에이머 일렉트릭사와 기술 제휴한 물건인 만큼 성능은 확실한 제품이었다. 가벼운 알루미늄 소재에 볼베어링 모터를 장착하여 발열이 적고 공기 순환용으로 역풍 기능까지 더한 물건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에 맞선 성운 그룹의 제품 역시 만만치 않았다. 쇠 날개를 플라스틱으로 바꾸고 각도 조절이 가능한 선풍기 헤드와 풍속 조절, 타이머 이외에 아무것도 넣지 않은 깡스탯으로 저렴한 가격으로 맞선 것이다.

덕분에 새로 나온 백경사 제품은 시장 점유율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기술력으로는 에이머를 압도하긴 어려우니 아예 가성비로 간다는 거겠지.”

“그럼 어떡합니까?”

“성운의 아성을 넘으려면 이대로는 힘들지 않을까? 그쪽도 나름 히타치 기술로 만든 거니까.”

“그럼 전략을 변경해서 몇 개 기능을 과감히 빼고, 가격을 확 낮추는 건 어떻습니까? 단가를 최대한으로 낮추고 기본 기능에만 충실하게 말입니다.”

“흠, 그건 고민해 봐야 할 거 같군. 그렇게 하면 오히려 싸구려 이미지를 줄 수 있어. 어차피 단가 경쟁력으론 성운에 이기기 힘들지 않나. 오히려 우리 쪽 장점을 떨어뜨리는 일이 될 수도 있으니까.”

그렇다고 성운을 넘지 못하면 가정용 선풍기 시장에서 지분을 확보하긴 어려운 만큼 방법이 요원한 만큼 별도의 대책이 필요했다.

그렇게 대책 회의를 거듭하던 중, 춘삼이가 심각한 얼굴로 사무실을 찾았다.

“저, 사장님, 좀 안 좋은 신문 기사가 떴습니다.”

“뭔데 그래?”

앞으로 펼쳐 본 기사란에 대문짝만한 사설이 하나 적혀 있었다.

-다음 화에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