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화 트리나트론
모리타 사장은 물량 확대에 대해 몹시 긍정적이었다
공장 견학을 마친 모리타가 사장실로 들어오자 눈치 빠른 비서가 따뜻한 차를 내왔다.
“견학은 어떠셨습니까?”
“인상적이었습니다. 일단 생산 라인 상태나 근무자들의 성실성이 인상 깊었습니다. 전반적으로 만족스럽군요.”
“아직 부족한 점이 많은데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아닙니다. 저야말로 오늘 배울 점이 정말로 많았습니다. 메탈 테이프를 보내 주시면 전용 데크와 카플레이 개발을 서두르도록 노력해 보도록 하지요. 혹 추가로 건의하고 싶은 사안이 있습니까?”
강태준이 잠시 고민하는 척하더니 원하는 대답을 내놓았다.
“그렇다면 혹시 TV를 생산하고 싶은데 라이센스를 빌릴 수 있겠습니까?”
“텔레비전요? 가능하겠습니까. 한국에서는 부품 통관 제한이 심한 걸로 아는데?”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최근 TV 국산화 계획 및 전기제품 수출 대책에 관련한 계획서가 통과되어서 정부에서도 TV과를 신설해 기술도입 계약을 적극 검토하고 있으니까요. 더욱이 VD-191 같은 국산 TV 제품이 등장하기도 했고요.”
당시 TV는 상당한 고가품에 속했지만 처음 나왔을 때 인기는 폭발적이었다. 외제만 나돌던 상황에서 국산 TV를 만들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굉장한 이슈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모리타는 아직 의심스러운 얼굴이었다.
“아직 한국 내 수요가 그리 크지 않을 텐데요?”
“하하. 그러니까 지금 들어가야 한다는 거지요. 조만간 TV 방송이 활성화되면 수요가 상당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TV 생산 라이센스를 허가해 주신다면 기술은 일본, 제조는 한국이 분업하는 형식이 되겠죠. 그렇게 된다면 경쟁사에 비해 원가 경쟁력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 점은 인정합니다만, 한국 내 TV 인프라가 어떨지 가늠이 안 돼서 고민스럽군요.”
“하하. 그것도 문제없습니다. 작년에 NBS TV에서 전국적으로 기지국을 설치하고 방송망을 확충하는 중이니까요. 기지국 설치가 완료되면 조만간 완전히 리미트가 해제될 겁니다.”
곧 정부에서 특관세와 물품세 감면 조치가 내려질 것이라는 말에 모리타도 수긍했다.
“그러면 원가 상승 문제는 걱정할 필요 없겠군요. 그렇다면 흑백 TV부터 생산하실 겁니까?”
“아니요. 저희가 생산하고 싶은 건 컬러 TV입니다.”
“아니, 컬러 TV요?”
“네. 이번에 산니에서 개발하고 있는 트리나트론 제품 말입니다. 거기에 투자하고 싶습니다.”
그러자 이제껏 여유 있는 미소를 짓던 모리타 사장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쳐 지나갔다.
“트리나트론이라니 그건 대외비인데 어디서 들으셨습니까?”
“저도 나름 정보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제품 개발 비화는 몰라도 대충 섀도마스크와 크로마트론의 특성을 결합한 새로운 브라운관이라면서요.”
“하지만 그건 개발이 완료되지 않습니다. 막 개발을 시작한 단계라…….”
“그래서 말씀드리는 거지요. 산니에서 고비용의 리스크를 무릅쓰고 굳이 투자하는 이유가 뭘까 생각을 해 보았거든요. 무엇보다 전 섀도마스크 방식이 곧 기술적 한계에 다다를 것이라고 봅니다.”
얼버무리려던 모리타 사장의 낯에 흥미가 스쳐 지나갔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취미 삼아 수상기 몇 대를 보유하고 있는데, 비교해 보니 크로마트론 TV가 훨씬 화면이 밝고 가시성이 좋더군요.”
“허허. 소비자 관점에서야 그렇게 보일 수 있겠습니다. 허나 섀도마스크 기법도 계속 업그레이드 중이라서 특별히 투자할 당위성은 없지 않겠습니까?”
뭔가 시험하듯 떠보는 듯한 어투에 강태준이 웃었다.
“결정적인 차이가 있지요. 섀도마스크가 3원색으로 된 전자빔을 발광시키는 방식이면 크로마트론은 한 개의 전자총을 렌즈와 프리즘을 사용해 화상을 맺게 하는 방식 아니겠습니까? 후자가 구조가 압도적으로 단순하다는 장점이 있지요. 구조가 단순할수록 에너지 효율도 좋고 생산성을 향상시키기 좋지 않겠습니까? 어디서나 통용되는 법칙이죠.”
“흐음. 그렇게 단순하게 퉁칠 수 있는 부분이 아닌데요?”
“제가 조사해 본 바로는 섀도마스크 기술은 아크 문제와 무선 주파수(RF) 노이즈가 발생하더군요. 게다가 전압을 올리면 온도 상승으로 화상의 선명도가 떨어지지요. 반면 크로마트론은 형광막 앞에 반환 격자를 놓아 컬러를 구현하는 방식이니 전력 효율상으로도 유리하겠죠…….”
모리타는 깊은 인상을 받은 모습이었다. 이 정도로 전문적인 말이 나올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어……. 제대로 알고 계시는군요. 조사를 많이 하셨습니다.”
“이 정도는 투자의 기본 아니겠습니까?”
“뭐. 저희 기술을 좋게 평가해 주시는 것은 감사합니다만 그럼 더 잘 아시겠군요. 상당한 하이테크 기술이 요구되는 부분이라 외주를 주기 어렵다는 점도 말입니다…….”
그 말에 강태준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아아, 오해하셨군요. 저희가 모든 부품을 생산하겠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 하자는 말씀이십니까?
“저희가 생산 라인을 갖추고 싶은 것은 어피처 그릴을 제외한 나머지 부품입니다.”
어퍼처 그릴은 얇은 금속 선과 3개(RGB)로 구분된 형광점으로 화상을 만들어 내는 부품으로 기술에 있어 핵심 요소다. 그 말에 경계심이 옅어지는 상대방이었다.
“핵심 부품을 제외하고 말입니까?”
“어차피 전자빔 기술을 제외한 나머지 부품은 기존 수상기와 다를 게 없으니 인건비가 싼 한국에서 생산하는 쪽이 유리하지 않겠습니까? 혹 저희 쪽에서 생산 불량이 나온다면 전부 떠안도록 하지요.”
“흠……. 정말이십니까?”
“만약 저희 제안을 받아들이신다면 최대 500만 달러 정도는 개발비에 보탤 의사가 있습니다.”
모리타 사장의 눈빛이 흔들렸다. 겉으로는 허세를 피우고 있었지만 산니의 사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당시 산니의 경쟁사인 RCA는 월 수만 대를 생산하는 중이었지만 산니는 월 1천 대를 넘은 게 고작이었다.
때문에 산니 경영진은 절대적인 기술 우위를 가지고도 고전을 면치 못했다. 일단 투자비가 너무 많이 들어가는 만큼 RCA의 섀도마스크 방식을 따라갈지 고민할 만큼 경제적인 압박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모리타는 그런 상황에서도 경거망동하지 않았다.
“좋은 제안이기는 합니다만, 솔직히 그 부분은 좀 생각해 봐야겠군요. 사실 당장 답변을 드리기에는 좀 어렵습니다.”
“흠. 저희 제안이 과도한가요?”
“하하. 그게 아닙니다. 아시겠지만 산니는 저 혼자 창업한 것이 아닙니다. 기술 개발 부분은 이부카 씨가 전권을 가지고 있어서요. 내부 기술진 입장에서는 부품 외주화에 부정적인 기류가 높아서. 무엇보다 백경그룹의 실력은 인정하지만, 전자제품 제작에서는 아직 걸음마 단계라는 점이 걸립니다.”
“신뢰하기 어렵다는 뜻입니까. 그건?”
모리타가 조심스럽게 말을 열었다.
“아직은요. 트리나트론은 저희 역시 업계의 명운을 걸고 추진하는 사업입니다. 후발 주자 입장에서 추가 리스크까지 떠안는 건 솔직히 부담되지 않겠습니까. 별도의 문제가 발생할 경우 A/S나 리콜 문제에 대응하기도 쉽지 않고요. 무엇보다 주주들을 설득할 방법도 요원합니다. 백경그룹의 전자제품 판매 실적이 너무 없으니까요.”
“가시적인 성과를 더 낸다면 가능은 하다는 말씀이군요.”
“뭐, 최대한 빠른 기간 내 매출에서 획기적인 개선을 보여 주신다면야 다시 고려할 수 있겠습니다만……. 가능하겠습니까?”
“그거야. 해 보면 될 일 아니겠습니까? 세상에 불가능은 없는 법이죠.”
강태준과 모리타는 사업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배웅을 마치고 훈훈하게 헤어진 둘이었지만 춘삼이는 내심 아쉬움을 금치 못했다.
“아, 진짜, 쉽게 안 넘어오는군요. 500만 불을 거절하다니, 그냥 넙죽 받아먹을 줄 알았는데.”
“짬이 얼만데 그냥 받아먹겠나. 저 양반도 그만큼 신중한 거지.”
“그럼 어쩝니까?”
“아예. 꽝은 아니지 않나. 아마 저쪽도 생각이 많을 거야. 개발비 압박을 받고 있을 테니 말이다.”
에두른 거절을 하긴 했지만 소정의 성과는 있었다. 가능성 정도는 열어 두었으니 말이다.
“그럼 어쩌실 겁니까?”
“가전 쪽으로 아이템이 있나 생각해 봐야지. 일단 쓸데없는 생각 말고 일단 어묵 공장부터 들리자구. 출출한데 요기라도 하고.”
“옙.”
점심도 먹지 않고 달려온 터라, 시장하기 이를 데 없다.
밥숟가락이라도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강태준은 부산의 어묵 공장으로 향했다.
공장 안으로 들어가니 스팀과 함께 어묵 삶는 종업원들이 작업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기름에 튀겨지는 어묵 냄새에 핸더슨이 코를 벌름거리며 감탄했다.
“오, 스멜.”
“이야, 냄새 좋네요.”
“그러게. 식욕 돋우는데?”
주문이 밀렸는지 꽤 바빠 보이는 모습에 강태준도 자리를 피해 빙 돌았다.
어묵을 만드는 과정이 무척 재미있긴 했는데 긴 틀에 어묵 반죽을 만들어 놓으면 기름 솥 옆 틀에 반죽을 사각으로 잘라 적당히 덜어 밀어 낸다.
자글자글 끓은 어묵이 기름 위로 떠오르면 뜰채로 건져 내 선풍기로 식힌다.
작업을 구경하다 보니 시장기가 밀려오는 것도 당연하달까.
강태준은 옆구리가 찢어진 어묵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
“이거 맛있네. 하나씩 들지?”
“아니, 팔 건데 괜찮나요?”
“여기 가장자리에 있는 건 상품성이 없는 거라 괜찮아.”
함께 온 일행들 역시 후후 뜨거운 어묵을 불며 입에 넣었다. 눈치 없이 김이 나오는 어묵을 입에 넣은 핸더슨이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헙, 아뜨뜨!!~~”
“어이구야. 물!! 물!”
입천장이 델 뻔한 녀석이 호들갑을 떠는 사이. 서둘러 물을 가져다주는 손이 있었다.
“땡큐, 땡큐!!”
“허허, 식은 것부터 먹어야지. 은근히 뜨겁다고 그래.”
“아이구. 황 사장님!”
핀잔을 주며 나타난 사람은 황철득이었다. 앞치마에 흰 고무장갑을 끼고, 위생복을 입은 것이 영락없이 식품회사 사장님이랄까. 강태준을 본 황철득이 몹시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잖아도 외삼촌이 자네를 찾던데 이제야 왔구먼.”
“네. 외삼촌이요?”
“그려. 그 양반이 표정이 엄청 안 좋아 보이더구먼. 반쯤 얼굴이 잔뜩 찌푸려져서는 복만이 그 자식 다리 몽둥이를 분질러 놓겠다고 잔뜩 뿔이 나셨지 뭔가. 코쟁이 며느리라니 말이 되나. 강씨 집안에 도깨비 피가 섞이면 되겠나 하시는데 듣고 있기 영 불편하더구만.”
강태준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동안 피해 다녔더니 이젠 쫓아오기까지.
‘이거 동네방네 소문을 다 퍼트리고 다니시는군. 오히려 이러면 역효과일 텐데.’
원래 사랑이란 장애물 앞에서 더 불타오르는 법. 지금 세기의 커플 흉내를 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애초에 그 정도 되면 답이 없지 않나.
“그래서 뭐라카셨습니까?”
“뭐라카긴. 어르신이 신세 한탄하시는데 시끄러우니 그냥 가라 할 수 있나? 커피 한잔 사 드리고 넋두리나 들어 드렸지.”
“거참 삼촌도 요란하시긴. 암튼 고생하셨습니다.”
“근데 언제까지 그렇게 피하기만 할 건가. 보아하니 그 양반도 고집이 보통이 아니던데. 아무래도 한번 마주는 쳐야 하지 않나? 이게 무슨 숨바꼭질도 아니고.”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