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화 인생이 영화다.
트레일러로 간 일행이 본격적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니까 그쪽에서 내 영화 저작권을 독점적으로 관리하고 싶다는 건가?
“옙. 저희 쪽에서 저작권을 관리하게 된다면 무허가 상영이나 불법 송출로 인한 수익도 회수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현재 제작하는 영화에 제작비 지원도 가능합니다.”
철저한 법률서비스 정신으로 무장한 설유하의 말에도 구로사와 감독은 쉽게 넘어오지 않았다. 한참을 경청하던 감독이 귀찮다는 듯 손을 저었다.
“흐음. 좋은 조건이기는 하다만 별로 내키지 않는구먼.”
“어째서죠?”
“어째서긴. 내 작품을 리메이크 따위를 생각은 없으니까 그렇지. 여기 빌어먹을 양놈들이 동양의 감성을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감독님. 그렇게 나쁘게만 생각할 일이 아닙니다. 이미 저희를 통해 리메이크를 타진해 온 업체도 있습니다.”
“맞습니다. 게다가 감독님께서 원하시면 그 부분에 대해서는 별도의 추가적인 부가 요건을 달 수도 있습니다.”
그러자 구로사와가 가당찮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허허 다 만들어 놓고, 나중에 딴소리하면 그때는 어쩌려고?”
“그런 일이 없으리라고 저희가 존재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듣기 싫소. 헛소리를 하려거든 나 말고 다른 놈을 찾아가시던가. 나는 돈만 밝히는 그런 속물이 아닐세. 가자, 지미.”
그에 옆에 수발을 들던 통역사가 미안한 듯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오늘 감독님께서 기분이 안 좋으셔서. 다음에 뵙지요.”
강태준은 그날부터 며칠간 촬영장을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하지만 인간 불신에 빠진 구로사와로서는 쉽게 넘어오지 않았다.
되려 제작자와의 싸움으로 감정이 격양된 구로사와는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영화 방해 말고 썩 꺼지게! 그럴 생각 없으니까!’
촬영도 안 하면서 계속 고집을 부리는 것은 뭔 수작질인가.
답답했던 설유하게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아니 대체 왜 똥고집을 부리는 걸까요? 이 조건이면 본인이 손해될 일이 없는데. 게다가 돈이 되면 좀 좋나요? 자기 영화도 마음대로 찍을 수 있잖아요.”
“원래 예술인들 성향이란 게, 제멋대로지 않습니까. 제가 알아본 바로는 그 양반이 특히 좀 마이웨이긴 합니다.”
사실 예술영화 계에서 구로사와라고 하면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하는 등 실력은 이견이 없는 감독이었지만 평판에 있어서는 바닥을 기는 감독으로 악명이 높았다.
실감 나는 연출을 위해 주연 배우에게 진짜로 화살을 쏜다든지, 촬영지의 민가가 있다는 이유로 사들이고 철거를 강요한다던가. 2,500만 달러가 투입된 초대작 전쟁영화 맡았다가 제작진의 의도와 상충하자 해고당하기 위해 일부러 괴상한 행동을 일삼는 또라이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만큼 자기 주관이 뚜렷한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럼 그냥 다 밝히고 설득하는 편이 어떻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더 화를 낼걸요? 자기를 기만했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시간은 강태준의 편이 아니었다. 광필이로부터 다급히 연락이 온 것이다.
“형님. 정말로 시간이 없습니다. 세르조 측에서 감독님과 만나고 싶어 합니다.”
황야의 무법자 판권 문제로 확답을 얻고 싶어 한다고.
아무래도 차기작 제작에 들어가기 전에 일을 마무리 짓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 말에 설유하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타임 리밋이군요. 어떡해요 이거? 이거 잘못하다간 진짜 심각하게 엮여 들어가는 수가 있어요.”
“괜찮습니다. 저도 아무 생각 없이 일 벌인 것은 아니니까요. 혹시 사정이 여의치 않을 때를 대비해 감독의 마누라인 야구치 요코 측에도 선을 대 두었습니다.”
이미 사정을 설명하고 계약과 관련한 부분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답변을 얻은 상태라는 말에 설유하가 안심한 듯 말했다.
“아니 그럼 말해 주지 그랬어요. 사람 심란하게.”
“아직 확정되지 않아서 그랬죠. 내일쯤 식사에 초대하기로 했으니 잘 설득해서 도장을 찍어 오자고요.”
다음날 강태준은 미리 준비한 선물과 함께, 댁으로 향했다.
딩동!
“이상한데? 없을 리가 없는데?”
“무슨 일입니까?”
통역인인 지미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녀석은 평소와 달리 약간 창백한 얼굴이었다.
“아니 지미 씨?”
“주인 내외분은 외출 중이십니다만, 무슨 일입니까?”
“그게 오늘 요코 씨와 식사 약속이 있었는데.”
“아. 그게. 갑자기 일이 생겨서 나가셨습니다. 저에게 집 좀 봐 달라고 나갔습니다.”
“일이요?”
“네. 감독님 부모님께서 급히 편찮으시다고 하시는 바람에 아무래도 오늘은 힘들 것 같습니다.”
천연덕스럽게 말하긴 했지만 눈동자를 굴리는 품이 이상하다.
“아. 그래요? 그럼 나중에 뵙겠다고 전해 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두말없이 물러서는 강태준에 핸더슨이 얼핏 속삭였다.
“뭔가 이상한데요. 보스. 아무래도. 안에 인기척이…….”
“그래. 거짓말이겠지. 때려 부수고 진입한다.”
그간 위험한 일을 겪으며 갈고 닦은 촉이 경고하고 있다. 순간의 눈빛에서 얼핏 불안감과 살기가 스쳐 지나가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신호를 내밀기 무섭게 경호원들이 일제히 전투태세를 취했다.
강태준이 손을 까닥하는 순간, 경호원들이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쾅!!
“calm down!!”
“put your hands up!”
곧바로 실내로 진입한 경호원들이 사방을 엄호하며 안방으로 들어갔다.
칼을 든 지미가 청테이프가 붙여진 채 의자에 묶인 감독 부부 앞에 앉아 있었다.
“Oops!”
“Got damn it! put your hands up.”
“Get back!! get back!!”
칼을 든 지미가 곧장 인질의 목에 칼을 겨누었다. 긴박한 눈으로 고개를 휘젓는 요코의 목에서 붉은 핏줄기가 흘러내리자 감독이 고개를 흔들었다.
긴박한 순간 서로의 시선을 교환하는 경호원들.
뒤에서 철컥 소리가 맞물리는 순간 강태준이 권총이 불을 뿜었다.
탕탕!!!
총소리가 겹치는 순간 억 하고 쓰러지는 강도단.
이어서 지미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내 손!! 내 손!!”
손가락 두 개가 날아가 버린 지미가 손아귀를 붙잡고 울부짖는 사이 스타킹을 뒤집어쓴 복면 하나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샷건을 든 녀석이 총을 쏘려는 순간, 어디선가 하이힐이 날아와 이마 한가운데 꽂혔다.
빡 소리와 함께 대자로 뻗은 모습에 강태준이 설유하를 돌아보았다.
“나이스 어시스트!”
“My hand!! oh,my!”
잘려 나간 손을 얼싸안고 흐느끼던 지미 역시 개머리판으로 한 대 얻어맞고는 잠잠해졌다.
“시끄럽게, 뭐가 잘했다고 처우나?”
“이 양반 앞으로 묵찌빠는 못 하겠군요.”
“오른손이 있으니 뭐 괜찮겠죠. 사람 목숨이란 게 질기지 않습니까. 그보다 인질 상태부터 확인하죠.”
강태준이 돌아보니 총질을 코앞에서 목격한 둘은 반쯤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서둘러 의자에 묶인 구로사와 부부를 풀어 주었다. 다행히 요코 목의 상처는 깊지 않았다. 강태준이 청테이프가 벗기자 구로사와 감독이 숨을 헐떡였다.
“괜찮으십니까.”
“자넨 이게 괜찮아 보이나?”
낯빛이 납처럼 창백하게 변했으면서도 할 말 하는 걸 보니 역시 찐이다.
“말이 제대로 나오시는 걸 보니 아직 살아 있으십니다.”
“그보다 저 자식들은 뭔가?”
“그거야 모르죠. 혹 아는 사람들입니까?”
“이제부터 확인해 봐야지.”
얼굴을 벗기는 순간 각진 서양인의 얼굴이 나타났다. 상대의 정체를 확인한 구로사와가 헙 하고 숨을 들이켰다.
“이 사람 아십니까?”
“그게 우리 회사 스태프일세. 꽤 사이가 좋았던 양반인데. 내 통수 갈길 준비를 하다니?”
무슨 원수라도 진 줄 알았던 범인들은 다름 아닌 영화 스탭들이었다.
사정을 알아본 결과 그 이유도 매우 어처구니없었다.
“그러니까. 저작권 이야기를 운운하는 걸 보고, 강도질을 계획했다고요?”
“백만 달러 운운하는 말에 아무래도 욕심이 생긴 모양이로군. 사람 말을 끝까지 들어 봐야지.”
배신감에 부들부들 떠는 구로사와를 뒤로 하고, 취조실로 간 사람들은 이유를 실토했다. 오래 까다로운 감독 밑에서 온갖 허드렛일에 인격 모독을 당하며 스트레스를 받던 차, 순간적으로 혹했다고. 위임장을 받고 난 다음 그걸로 사기를 치고 다닐 생각을 했다고 했다.
“아니 내가 언제 그렇게까지 괴롭혔다고? 카메라 하나 제대로 못 드는 걸 훈계했다고 그러는가. 고마운 것도 모르고!”
‘이 양반이 대체 뭔 짓을 하고 다녔길래 이렇게 어그로를 끌었나?’
괘씸해 하는 구로사와와는 별개로 강태준은 욱했다.
아니 감히 내가 침 바른 사업에 손을 대려 하다니.
“이런 개아들놈의 시키들을 봤나? 이 자식들이 일해서 돈 벌 생각은 안 하고.”
“아, 선생님들!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울컥한 강태준이 손찌검을 날리자 이단옆차기를 날리는 구로사와였다.
당황한 경찰관이 나서 뜯어말렸지만, 참고인 조사는 그걸로 흐지부지되어 버렸다.
취조실에서 나와 보니 간단한 진찰을 받고 나온 요코는 목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강태준을 본 그녀가 몹시 고마워했다.
“고마워요. 강 사장. 덕분에 살았어요.”
“아닙니다.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이죠. 뭐 상한 데는 없으십니까?”
“그보다 당신 뭐 해요? 감사하다고 하지 않고.”
마누라의 성화에 마지못해 나온 구로사와 감독이 떠듬거리며 감사를 표했다.
“쩝……. 아무튼 미스터 강 덕분에 살았네. 고마우이.”
원래부터 부끄럼을 타는 성격이라서일까. 말을 하면서도 약간 홍조까지 띠고 있었다.
자못 쑥스러워하는 모습에 강태준이 엷게 웃었다.
“그럼 우리 다음 이야기를 진행할까요?”
위임 계약은 순식간에 체결되었다. 아까 취조실에서 호감 스탯을 적립한 덕이랄까. 구로사와 감독도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만년필로 멋들어지게 사인을 끝낸 강태준에 설유하도 자기 일마냥 뿌듯해했다.
“이야. 이게 불행 중 다행이라는 건가. 설마 이렇게 쉽게 설득될 줄은 몰랐네요.”
“그르게. 우리 유하 씨도 이걸로 경력 한 줄에 플러스군요. 이거 이거 내가 우리 유하 씨한테 되려 수수료를 받아야 할 거 같은데.”
“어머 그렇게 되나요? 난 반대인데?”
일을 마친 설유하와 강태준과 마주 보다 씨익 웃었다.
약간 아쉬움이 섞인 어투로 설유하가 물었다.
“그럼 이제 돌아갈 건가요?”
“당장은 아니고, 아마 하루, 이틀 머물다 귀국해야 할 것 같네요. 아무래도 국내에 들어가 보지 못한 지 오래돼서, 해결할 문제도 있고 말이죠.”
“벌써요? 헤어지는 거 너무 아쉬운데.”
“저도 아쉽지만 어떡합니까. 국내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적해서요. 사업가의 숙명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뭔가 하나씩 이루어지는 걸 보니 내심 뿌듯합니다.”
영화사업을 시작했으니 배급 건도 해결해야 하고, 항만 하역 문제도 손을 봐야 한다.
거기에 복만이 결혼 문제까지. 산책을 계속하던 그때 이대로 헤어지기 아쉬운 듯 설유하가 슬쩍 옷깃을 잡았다.
살짝 눈치를 보는 것이 부끄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면…… 우리 라면 먹고 갈래요?”
-다음 화에 계속-